도쿄=조원호 통신원(‘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기획위원장)


4년 전 일본사람에 의해 알게 된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의 처지를 접한 후 한국의 시민사회진영에 실상을 알리고 연대의 손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이었다.

우리학교시민모임은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도쿄 문부과학성 건물 앞에서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 적용을 위한 금요행동’에 고국의 동포들도 함께 연대하기 위해 참가단을 구성해 집회와 재판에 참가해 벌써 10회 차가 되었다.

2018.6.15. 첫째날

이번 10차 방문은 참으로 새롭다. 4.27판문점선언과 북미정상회담이 있은 후라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를 위해 마련된 ‘문부과학성 요청’이라는 담당 공무원 면담이 참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일본 국회의원이 4명이나 참석하여 조선학교에 대한 교육비 지원 배제는 차별이므로 즉각 시정해야 한다고 일본 공무원에게 지적 하는 등 높은 관심과 연대로 동포들과 아이들에게 조금의 위로는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문부과학성 요청’ 면담이 일본 국회의원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참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문부과학성 요청을 마치고 나서 근처에 있는 금요행동 장소로 이동했다. 문부과학성 건물을 바라보며 조선학교 고급부, 조선대학교 학생, 학부모, 동포, 일본인들로 구성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연락회 회원, 한국참가단 등 100여명이 모여 집회를 했다.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 적용하라’, ‘아베 아우뜨’ 참가자들이 부슬비를 맞으며 연대를 이룬다. 모두가 한 목소리다.

▲ 문부과학성을 바라보며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 적용을 위한 금요행동’을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저녁에는 학부모들과 교류회가 있었다. 문과성 앞에 계셨던 분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노래자랑도 하고, 남쪽의 전통 해금과 북쪽의 개량 해금으로 합연 공연도 있었다.

한국 참가자와 금강산가극단 출신 동포. 몇 해 전 음악교류를 통해 인연을 맺어 오늘 다시 만나 즉석 공연을 했다. 홀로아리랑 그리고 고향의 봄. 서로의 눈으로 분노와 서글픔과 위로와 연대와 고마움을 전한다.

▲ 전통 해금과 개량 해금의 합주.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2018.6.16. 둘째날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사이타마현의 사이타마 초중급학교 방문 및 수업참관, 학생간담회를 진행했다. 유아반, 초중급반 모두 150여명으로 20년전 보다 학생수가 2/3 가량 줄었다고 한다.

일본사회에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은 수 만 가지 일터이지만 원칙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맑고 개구지고, 선생님들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며. 학부모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시간과 돈과 마음을 모아 함께 학교를 지키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초급반 1학년. 우리말 시간. 문장 맞추기를 하고 있다.
저요, 저요, 저요....
손은 가슴까지 든다. 번쩍 드는 것이 아니라.
낱말 맞추기를 한다. 띄어쓰기를 포함한 문장 맞추기를 한다.
“어머니, 이거 오이나요?”
“아니 무야.”

아이들의 앙증맞은 대답과 무모한 자신감으로 교단에 올라 문장을 맞추는 모습에 참관단 모두가 쓰러진다.

▲ 우리말 시간 문장 맞추기.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학교에서 준비해준 닭개장 점심을 마치고 학부모회 어머니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학부모회 회장님은 사이타마 초중고, 조선대를 나왔다고 소개한다. 진해가 고향이라며 많이 방문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아이와 같이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고 조선학교에 대해 제대로 알려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다음은 도쿄공원에 세워진 관동대진진 조선인대학살추모비는 공공공원인 요코아미쵸 공원에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고 한다.

아라카와당 학살지는 강변에 위치에 있는데 거주지에 큰 불이 나서 많은 이들이 강으로 피난을 왔는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

▲ 참가단이 관동대지진 학살지 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듣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처음에는 민간인인 자경단에 의해, 계엄후에는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강 옆에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학살지를 발굴했으나 아무리 뒤져도 유골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학살 며칠 수 일본인들이 매장된 시신을 급히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근처에는 일본인 단체에서 사비로 세운 추모비와 자료관이 있었고 그 앞에서 김희영 선생의 해금 연주에 맞추어 장순향 교수가 살풀이춤으로 희생된 조선인을 넋을 위로하였다.

▲ 추모비 앞에서 진행된 살풀이 춤과 해금 연주.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저녁에는 6.15일본지역본부의 6.15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아 함께 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축하하며 서울에서, 평양에서 다시 보자며 덕담을 건넸다.

숙소로 돌아와 가진 참가단 공식 뒷풀이, 파도타기를 이용한 마시고 춤추고 빈잔머리 3종 세트 묘기를 전원 선보이며 지연, 혈연, 학연으로 서로를 엮으며 밤을 지새웠다.

2018.6.17. 세째날

도쿄 조선중고급학교문화제 ‘안녕하세요 2018’에 초대를 받았다. 우리로 치면 학예발표회 쯤 되겠다. 입구에 들어서자 온통 4.27판문점선언 이야기로 치장되어 있어 동포들과 우리아이들의 바람이 구석구석 그대로 묻어난다.

중고등학생들이 동아리활동으로 닦은 실력을 선보인다. 관현악, 합창, 민족춤, 현대무용, 태권도 시범 등 보통 솜씨가 아니다.

참가단 일행도 무대에 올라 합창을 하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아침이슬을 동포들과 함께 부른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참가단이 무대에서 합창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교실에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반도 곳곳을 정성을 쏟아 옮겨 두었다. 건물 입구에서 통일여권을 받아야만 출입이 허용된다. 백두산, 평양, 개성, 판문점, 서울, 경상도, 제주도까지 금새 다녀왔다.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하루방과 백두산 그리고 판문점까지.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들리는 방에서는 아이들이 만든 정성으로 구운 핫케잌에는 조국 한반도가 수놓아 있었다.

▲ 건물 입구에서 통일여권을 받아야만 출입이 허용된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 아이들이 만든 정성으로 구운 핫케잌에는 조국 한반도가 수놓아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먹거리 장터도 있다. 잡채, 냉국수, 떡볶이, 김치볶음밥, 찌짐, 닭꼬치 등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먹거리가 넘쳐난다. 그중 최고의 맛은 직화 닭꼬치!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강한 젓갈 향이 나는 전라도식 김치는 기무치가 아니라 한국에서 먹는 김치 그대로였다.

오후는 자유시간, 회원이 부탁한 물건을 구입하고 숙소 근처 운치 있는 골목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손도손 모여서 큰 곳과 경쟁하지 않고 착하게 줄지어 있는 가게들. 너 댓 테이블이 고작인 작은 술집이 정겹게 늘어선 골목이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숙소로 돌아온 주당들이 하나둘 모인다고 단체방에서 유혹을 하고 있다.

▲ 작은 가게가 늘어선 골목.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2018.6.18. 넷째날

상큼하게 흐리고 선선한 나흘간의 날씨와 집단행동에 익숙해진 24명의 참가단이 충분한 알콜 섭취로 형 아우, 언니 동생하며 농을 걸며 호텔을 떠나 마지막 아오야마 묘지에 도착했다.

1948년 4월 24일. 한신지역에서 조선학교 탄압에 맞서다 죽임을 당한 16세 소년 김태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특히 민족적 차별에 맞서 싸우다 옥사, 병사한 100여기의 신위도 봉안되어있는 재일동포들의 열사묘역으로 해마다 4월 24일에 추도식을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묘소 참배는 언제나 숙연하다. 그 많던 웃음도, 농담도 숨을 죽이고 춤과 음악으로 영혼을 위로했고 다음세대들이 꽃을 올리며 잊지 않겠다고 함께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 아오야마 묘지에서 부모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묘역에 대해 설명해주신 오 선생님은 조선학교를 다니던 10살에 한신교육투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구속된 선생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 앞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던 중에 손주가 안스럽던 할머니가 주먹밥을 건네주며 먹으면서 싸우라고 했단다. 배가 너무 고팠으나 일본 경찰앞에서 몰래 먹는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물 한모금 없이 한나절을 버텼다고 한다. 앉아버티기를 할 때는 노숙농성을 하며 물도 마시지 않고 버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오 선생님은 “분단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지금이 10:55인데 10:50에 사람 다니던 길 중간에 선을 그어 놓고 못 지나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분단이고 73년의 세월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갈라져 죽을 때까지 못 만난 것이 바로 분단이었고 민족의 현실이었고, 재일동포의 현실이다”라는 울림이 큰 말씀으로 설명을 마무리하였다.

▲ 김태일 소년 추모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월화수목 김수목, 알콜중앙, 어혈중앙 등.... 숱한 유행어를 남기며 4일간 함께했던 24명의 도쿄 금요행동 10차 참가단 모두 수고했다고 격려를 하였고 이제는 논에서 밭에서 신문사에서 공연장에서 회사에서 단체에서 조선학교과 아이들을 지키는데 한 손 더 잡아서 함께 할 것을 다짐하며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조선학교는 북한에서 세운학교가 아니라 해방 후 귀국을 준비하던 동포들이 아이들은 우리말이라도 알고 귀국해야 한다며 2세 교육을 위해 국어강습소를 세웠는데 일본 전역 5-600여곳에 설립되었다.

1948년 미군정의 묵인하에 일본정부의 무차별 탄압으로 어린학생이 죽고 수많은 학교가 폐쇄되었다. 존립위기에 빠졌을때 1957년 북한에서 거액의 교육금을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학교에서는 북한은 조국이고 남한은 고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일본동포의 95%가 남쪽이 고향이고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을 꼭 가보고 싶다고 한다.>

 

(수정, 25일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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