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가 끝났다. 한마디로 보수진영의 몰락이다. 한편에서는 진보의 완벽한 승리라고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해의 스펙트럼 역시 너무 복잡하다. 오히려 민족을 배반한 사이비 보수의 허물어지는 소리와 민족을 방관한 어정쩡한 진보의 경고음이 동시에 요동친 선거로 진단함이 옳을 듯하다. 승자의 환희나 패자의 좌절 이전에, 해방 이후 왜곡된 이념시대의 종언이 멀지않았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보수와 진보의 행태는 권력 다툼 그 이상의 고민은 없었다. 반민족적 보수와 몰민족적 진보의 화석화된 관행이 두 부류의 익숙한 몰골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집단에서 국시(國是)인 양 떠받들던 반공이나 통일도, 체제유지를 위한 반공이요 체제변화를 노린 통일로 일관해 왔을 뿐이다. 보수가 외친 반공이란 화두는 늘 안보와 맞물렸다. 진보가 내세운 통일이란 구호 역시 이념의 굴레 속에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지금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급속하게 연체화(軟體化)되고 있다. 해빙과 화해의 분위기도 그 어느 때 보다도 성숙되는 시기다. 페이드 아웃(fade out)하는 이념의 시대와 페이드 인(fade in)하는 화해의 시대가 오버랩 되는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건 인간이건 해빙기가 더욱 조심스럽다. 보이지 않는 미끄러움에 낙상하기 십상이다. 나른한 봄기운에 오히려 고뿔로 신음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이념의 가치도, 맞물려 변하는 시기에는 늘 무서움을 동반한다.

분명한 것은 이대로 가면 망한다는 보수들의 사고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평화통일이 이루어진 듯 환호작약하는 부류들 역시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망하고 흥하는 그것이 우리의 선택만으로 가능한가. 마찬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나라들 중, 우리의 통일을 바라는 집단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언급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수사(修辭)는, 그들의 이해타산을 숨기고 내뱉는 덕담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분단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듯, 통일 역시 우리의 뜻만으로는 불가하다. 그것이 국제적 역학 관계다.

이에 우리의 냉철한 슬기가 요구된다. 그 슬기의 심지가 민족적 자아각성임을 새길 필요가 있다. 자아각성은 주인의식의 회복이다. 주인은 자신의 불행이나 위험을 도피하지 않는다. 나그네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다. 더욱이 도망가기 급급한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예다. 과거 반민족이나 몰민족 세력에서의 민족은 단지 수단이었다. 매국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었고 허황한 계급평등의 구호 아래 버려진 허울뿐이었다. 그들이 나그넨지 노예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 모두 새 술을 담기 위해 버려야 할 썩은 포대라는 점은 짚어두고자 한다.

현금 문제가 되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도 다를 바 없다. 그것을 철거하고 안 하는 것이 어디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이해의 직접 당사자인 우리의 의견은 끼어들 틈조차 없다. 미국의 배치 강행이나 중국의 배치 반대 자체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실익을 위한 명분이요 논리일 뿐이다. 우리가 설치하자 매달렸다고 미국이 설치했을까. 중국의 극렬한 반대가 과연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전을 위하여 보인 행동이었을까. 그들의 실익 때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헤아릴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칭 진보 정치인들의 사드 문제에 대한 해명은 궁색하지 그지없다. 최고위층으로부터 관련 당사자들까지,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대부분이다. 사드 설치의 해당 지역에서, 이번에 당선된 이○○ 군수 역시 "개인적으로 사드 배치에 반대하지만, 중앙정부가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면 반대할 명분이 마땅히 없다"는 해괴한 공약을 내세웠었다. 반대하지만 찬성한다는 것 아닌가. 말인지 방귀인지 알아듣지 못할 유체이탈 화법이 그들의 사드 논리다.

한편 보수에서는 사드의 추가 배치와 함께 미국과 더욱 긴밀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는다. 이것이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 했다. 강력한 대처만이 진정한 평화를 지킬 수가 있으며, 사드 배치를 부정하고서는 큰 후회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드의 배치가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다.

그럼에도 진정 사드 문제 해결을 위해 시원하게 해명하는 기관이나 정치인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해당 지역 주민들과 시민‧종교단체의 아우성만이 메아리칠 뿐이다. 그들은 수많은 집회를 통해 사드 배치 철회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평화를 외면하고 불법으로 설치된 사드 배치를 철거하라는 항변이다. 6.12 북미정상회담 결과를 환영하면서도 사드 철회의 정당성을 더욱 크게 외쳐댔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으로 사드 철회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드 배치와 평화는 분명 모순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드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무력은 더 큰 무력을 동반할 뿐이다. 평화에 반하는 선택, 철차상의 하자 투성이인 사드 배치를 재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성리의 종교적 의미도 남다르다. 특히 원불교는 이곳이 둘도 없는 종교적 성지가 아닌가. 사드가 배치된 성주군 소성면 초전리는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鼎山宗師, 宋奎, 1900~1962)의 탄생지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임을 일깨우면서, 죽음의 목전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얼굴을 지켰던 인물이 정산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세워진 원불당(圓佛堂)과 대각전(大覺殿)은 단순한 원불교만의 전당(殿堂)이 아니다. 정산종사가 보이고 실천한 각성과 포용의 도량이 이 공간이다.

핵이나 사드의 폭력성을 융회할 가치로 종교적 덕성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일각에서는 종교가 폭력과 결탁하고 또 휘두른 경험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 폭력이 아닌 종교의 정치적 폭력이다. 종교의 본래 기능과는 무관하다. 평화의 속성을 종교만큼 확대‧재생산시킬 수 있는 장치는 유사 이래 없다. 원불교의 사드 각성 운동에 더욱 공감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아쉬운 것은 사드 시국에 대한 대종교(大倧敎)의 무관심이다. 한반도가 핵놀음판이 되고 사드전시장처럼 변해버린 이 상황에, 묵언수행 하듯 방관하는 모습이 더더욱 안타깝다. 어쩌면 사드의 성주 배치에 가장 통탄해야 할 집단이 대종교일지 모른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이후까지 성주군 초전면은 대종교 마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대종교는 1915년 일제에 의해 불법화되면서 만주로 종교적 망명을 단행한 유일한 집단이다. 이후 국내의 대종교는 포교 활동이 금지되고 철저하게 말살되었다. 국내의 거점이 모두 무너져, 1920년대 들어서는 전국에 6곳의 시교당만이 잔존했을 뿐이다. 전남 순천군과 전북 익산군, 그리고 충남 논산군에 각각 1곳씩, 그리고 나머지 3곳이 이곳 경북 성주군에 있었다. 해방 이후인 1947년에는 성주군 초전면에만 13곳의 시교당이 설치되었고, 1954년에는 이 교당들을 총괄하는 성주지사(星州支司)가 역시 이곳 초전면에 자리 잡았다. 초전면 안에만 14곳의 대종교 거점이 조직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나옹(裸翁) 성세영(成世英, 1885-1955)이란 인물이 있었다. 성주군 초전면 명곡리에서 출생한 그는, 일찍이 홍암 나철과 오적주살을 감행하다 옥고를 치른 인물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곧바로 상경하여 대종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평생을 그 정신으로 일관했다. 성주군의 대종교 거점은 성세영의 노력에서 비롯된 성과로, 1922년 성선시교당(星善施敎堂)과 월선시교당(月善施敎堂)을 그곳에 세워 포교를 하며 시작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선과 악의 구도 속에 가장 극렬하게 행동했던 집단이 대종교였다. 그리고 최후까지 저항하며 무너진 집단이 대종교였다. 해방 이후에는 친일잔재와 미군정, 그리고 이념갈등에 의해 붕괴된 조직이 대종교였다. 이곳 초전면에서의 대종교 쇠퇴 역시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일제와 매국세력 그리고 이념갈등에 의해 구축되는 와중에, 1955년 성세영의 죽음을 맞으며 붕괴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종교도들이 꿈꾸던 이상은 조국독립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배달국이상향 건설을 통한 홍익인간의 구현이 그들이 가고자 한 종착점이다. 그러한 꿈의 갈망이 가장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성주군 초전면이다. 이곳에 대립과 갈등, 무력과 파괴의 상징인 사드가 설치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가. 서글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북미회담이 잘 끝났다고 해서, 남북미회담이 성사될 것이라 해서, 사드 문제가 평화롭게 바뀌는 것은 아닐 듯하다. 종교적 성지에 파괴의 상징을 세운 몰가치적 집단들에게 무엇을 크게 기대할 것인가. 무력보다 평화적 기원이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모두 기도하고 염불하자. 종교를 넘어선 염원이다. 어디 눈에 보이는 핵이나 사드만이 무기일 것인가. 자비, 사랑, 어짊[仁]이야말로 홍익인간을 위한 진정한 무기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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