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다 (호이징거) 


 일  
 - 요시노 히로시  

 정년으로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잠깐 놀러 왔어
 하며 나의 직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심심해서 말야
 -팔자 좋군 그래
 -그게 글쎄, 혼자 있자니까 엉덩이가 굼실거려서
 예전 동료의 옆 의자에 앉은 그 뺨은 여위고
 머리에 흰 것이 늘었다.

 그가 위로를 받고 돌아간 다음
 한 친구가 말한다.
 놀랍군, 일을 하지 않으면
 저렇게 늙어버리는 건가
 맞은 편 동료가 잘라 말한다
 -인간은 역시, 일을 하게 돼 있는 걸세
 듣고 있던 내 안의
 한 사람은 수긍하고 한 사람은 부정한다.

 그런 그가 다른 날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타났다.
 -일자리를 찾았어
 -조그만 가내공장인데

 이것이 현대의 행복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는
 한때의 그의 여위었던 얼굴이 그리워서
 아직껏 내 마음의 벽에 걸어놓고 있다.

 일자리를 얻어 되젊어진 그
 그건,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그가 아닌가 싶어서.
 진정한 그가 아닌 것만 같아서.


 한 아주머니가 전동차를 타고가다 ‘봉변’을 겪었단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기에 자리에 앉으려하는데 옆에 있던 대학생인 듯한 아가씨가 잽싸게 자리에 앉더란다. 어이가 없어, ‘아니 앞에 사람이 있는데 자리에 앉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자 그녀 왈 ‘아주머니, 이 자리 맡아놓으셨어요?’ 하더란다. 그리고는 킬킬거리며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더란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그녀의 삶의 신조는 이것이 아닐까?  
 ‘쪽팔리는 것은 짧으나 편한 것은 길다.’   

 그녀는 자리에 편하게 앉아 가기 위해 전동차 안의 싸늘한 시선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얌심의 소리,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매슬로가 얘기하는 가장 낮은 단계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매슬로는 이 단계를 충족하고 나면 인간은 다음 단계인 ‘신체적 정서적 안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다음 단계는 ‘사랑의 욕구’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을 알게 되면 인간은 다음 단계인 ‘자아 존중’으로 올라간다. 자신이 소중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해지면 인간은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을 향해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오로지 잘 먹고 살기!’ 이 한 길을 향해 가정교육, 학교교육을 받아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1단계의 욕구만 추구하는 인간으로 길러져 왔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2단계인 ‘신체적 정서적 안전의 욕구’에 목마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그녀를 다그쳤을 것이다. ‘고통은 쓰나 열매는 달다!’ 그녀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파편적인 지식들을 달달 외우게 했을 것이다. 잘 할 때마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편하게 잠자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긴 시간 훈련되어 드디어 지금의 그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3단계인 ‘사랑의 욕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성異性을 포함하여)과 마음을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 마음을 나누지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공허한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녀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평생 ‘생리적인 욕구’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갈지 모른다. 우물 밖에는 무한한 삶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갈지 모른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지상 명령이다. ‘일 잘하고 잘 먹는 인간’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인간은 역시, 일을 하게 돼 있는 걸세/듣고 있던 내 안의/한 사람은 수긍하고 한 사람은 부정한다.’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호이징거는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놀이를 추구한다.’ 것이다. 원시인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춤추고 놀았다. 그러다 농경사회가 되며 일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정의한 것은 200여 년 전의 산업사회부터이다.    

 ‘그런 그가 다른 날/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타났다./-일자리를 찾았어/-조그만 가내공장인데//이것이 현대의 행복일지도 모르겠지만/어쩐지 나는/한때의 그의 여위었던 얼굴이 그리워서/아직껏 내 마음의 벽에 걸어놓고 있다.//일자리를 얻어 되젊어진 그/그건,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그가 아닌가 싶어서./진정한 그가 아닌 것만 같아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그’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에 ‘의식주’가 넘쳐나는데 우리는 왜 일벌레가 되어 한평생 꼬물거리며 살아야 하나?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된다는데, 기계가 일을 다 한다는 데, 우리는 계속 일만하다 죽어야 하나?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며 ‘노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일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그늘에 쉬며 농담을 주고받고 주막에서는 항상 왁자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명절에는 마을 전체가 들썩거렸다.  

 ‘딱딱한 표정의 어른’이 등장한 것은 언젠가부터 외치게 된 구호 ‘잘살아 보세!’ 이후부터인 것 같다.        

 6.13 선거에서는 개혁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이루고 북미회담으로 한반도가 빙하기를 끝내고 있다.  

 우리들의 얼굴 표정에 웃음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흥이 강물처럼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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