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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전적지 답사(2)

기사승인 2018.05.26  09: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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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9)

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의령에서 부산 일행을 만나다

 2011년 5월 27일 밤 9시 30분이 넘어서 김교영 동지, 나,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은 봉고차로 용산철도 웨딩홀을 떠났다. 대전 톨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던 허찬형 동지를 태우고 가다가 산청에 어느 모텔을 찾았다. 새벽 1시가 지난 시각이라 우리는 곧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음날 28일 8시에 모텔을 떠났다. 의령에서 부산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연락하면서 달렸다. 현희는 차를 몰고 약속 장소에 갔는데 박순자 동지가 안 왔다고 곽재우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고목 밑에 차를 세워놓고 공원 경내에 들어갔다. 곽재우 장군이 백마를 타고 비상하는 조각상이 있었다. 임진조국전쟁 당시에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분연히 궐기한 장군은 사방에 격문을 날렸으며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의 전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왜적의 전라도 침입기도를 좌절시켰으며 적의 보급로를 교란 또는 차단시킴으로써 왜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우리 또한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총을 거머쥐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400여 년의 시대적 간격이 있지만 조국을 침범한 외세와 목숨을 걸고 싸운 애국애족의 얼은 혈맥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지울 수가 없다. 의병을 상징한 조형물을 보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현희였다. 지금 가고 있다고 시장할 텐데 의령에 이름난 곰탕집을 찾아가라고 알려왔다. 물어서 장터 옆 곰탕집을 찾았다. 시장한데다가 이름값 하는 곰탕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는데 한창우 동지, 박순자 동지와 현희가 들어왔다. 서둘렀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현희 차는 의령에 두고 모두 봉고차에 타고 떠났다. 

 화정면 유수 고개

   
▲ 의령해방투쟁에 직접 동원됐던 박순자 동지.[사진제공-임방규]

 의령투쟁에 참가했던 한창우 동지와 박순자 동지는 방향만 알 뿐 길을 모르고 몇 년 전에 와 본 김교영 동지가 차를 안내했다. 김교영 동지 또한 이 골짜기인지 저 골짜기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두 번 물어서 유수 고개에 갔다. 차를 고개 위에 세워놓고 한창우 동지가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1953년 우리가 지리산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당시에 경남 빨치산 무장 대오는 4개 소부대로 60여 명이 살아 있었고 이영회 동지가 사령관으로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2개 소부대는 지리산에 남겨두고 이영회 사령관, 이춘봉 참모장, 양기출 의무과장, 박소부대, 안소부대 합해서 30여 명이 쌀 두 되에 3일분 밥을 해서 짊어지고 전에 노획한 국방군 모자에 계급장이 달린 군복에 공병삽을 꽂은 배낭 항고와 물통을 차고 워커를 신고 M1을 멘, 보기에 영락없는 국방군으로 변장한 동무들이 밤으로 음밀성을 보장하면서 걷고 낮에는 숲속에서 자고 3일 만에 이곳에 왔지요. 신입대원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4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백 번 치러낸 범 같은 동무들이 저 언덕, 요 아래 움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5-6명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나왔어요. 아래에서 올라오는 트럭을 세웠습니다. 총을 멘 군인들이 손을 드는데 안 설 수가 없지요. 마침 그 날이 의령 장날이라 장군들이 트럭 위에 타고 있데요. 모두 내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람들이 짐을 지고 내리는데 차 한 대가 또 올라오더군요. 군 트럭이었습니다. 운전수 옆 자리에 헌병 한 명이 타고 있었어요. 군 트럭도 세웠습니다. 동무들은 신속하게 트럭 두 대에 갈아타고 떠났습니다. 헌병 옆에 이영회 동지가 앉아 있는 군 트럭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지서 앞을 지날 때 보초가 경례를 부치데요. 검문소에서 서지도 않고 거침없이 통과했습니다. 장마당에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차가 천천히 이동했어요.”
 
박순자 동지는, “내 나이 스물네 살에 위생병 차림으로 동무들과 함께 이곳에 왔네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젊은 날의 자신이 떠오르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봉고차에 타고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의령읍 초입에 이르자 한 동지가 차를 천천히 몰라고 했다. 

 “이 부근에 지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찰서를 좀 지나서 차에서 내렸다. 

 의령 해방

 한창우 동지는, “이영회 사령관은 하차하라는 명령을 하면서 차에서 내렸고 동무들도 동시에 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연락병 동무가 정문 보초 총을 낚아챘는데 옆에 있던 상이군인 몇 명이 덩달아서 보초를 쥐어 팼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의외의 사태에 당황한 신병이 그만 총을 쏘았습니다. 그 총성을 신호로 동무들이 경찰서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영문을 몰랐던 것인지 경찰들의 저항이 없었습니다. 서장 이하 경찰 전원을 생포했어요. 망대에 있던 경찰도 끌어내리고요, 사이렌이 길게 울려 퍼졌습니다. 의령경찰서를 점령한 동무들은 일부가 남아서 노획한 무기와 총탄과 식량을 트럭에 싣고 2개 삼인조는 은행과 약국에 가서 맡겨진 과업을 집행했습니다. 그 외 동무들은 학생, 읍민, 그리고 장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어요. 군중대회를 가졌습니다. 누가 사회를 봤는지 정치연설을 누가 했는지 기억에 없습니다만 꽤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고 일대 시위를 했습니다.”

   
▲ 한창우 동지가 1953년 가을에 있었던 의령해방투쟁의 전모와 이영회 사령관이 전사한 곳에서 최후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박순자 동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의무과장 동지와 몇 개 약국에 가서 환자 치료용 의약품을 한 짐 공작했습니다. 배가 몹시 고프데요. 돈이 있겠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어요. 의령읍을 해방시킨 3시간 후 우리는 어둠이 짙어갈 때 전리품을 만재한 트럭 위에 타고 의령을 출발했습니다.”

 1953년 11월이면 정전협정이 발효된 지 4개월 후가 아닌가. 우리의 희생은 없고 경찰 전원을 대낮에 생포한 의령투쟁은 남반부 유격전에서 전형이 아닌가싶다. 의령투쟁을 학교 운동장에서 군중대회로 결속했기 때문에 의령투쟁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군사적 성과보다 정치적 성과가 큰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어려운 시기에 의령투쟁을 계획한 경남도당 일꾼들, 현지에서 부대를 지휘한 이영회 동지, 군인으로 변장한 동무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듯 한창우 동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여러 장면이 눈앞에 스쳐갔다. 가신님들. 자랑스러운 동지들이여! 

 생비량 전투 

 우리는 의령을 떠났다. 산청군 생비량에 갔다. 허찬형 동지가 설명을 했다.

 “남부군이 지리산에 도착한 후에 경남 부대는 57사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전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51년 8월 16일로 기억됩니다만, 첫 투쟁(8.15기념투쟁)으로 화계지서를 택했습니다. 2일간의 포위 작전으로 지서를 점령했습니다. 승리한 57사단은 거점에 돌아와서 3-4일 휴식을 취하고 기동투쟁에 나가게 됩니다. 57사단은 1,3,5,7,9,11 6개 연대로 그 중 1,3,5,7 4개 연대와 직속정찰대, 여성근위대, 청년근위대, 소년근위대, 중화기연대, 후방예비대 등 1,000여 명이 장정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거점인 장판을 출발하여 원리, 백운, 단성으로 해서 생비량 이곳에 왔습니다. 대부대가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들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거침새가 없었어요. 1951년 9월 12일 저녁에 생비량 지서를 포위했습니다. 2개 연대가 주공을 맡고 2개 연대는 적의 지원부대를 때리기 위해서 매복을 했습니다. 다음날 13일 아침 7시에 60mm 박격포 2발을 지서에 명중시키자 일부는 도망가고 항복했습니다. 싱겁게 전투가 끝났어요. 무기 50여 정에 많은 탄약과 군용품을 노획했습니다. 우리 희생은 없었구요. 경남 경찰국 발행 ‘경찰연역사’ 1958년 6월호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적이 지학 단성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현상부대 남부군 57사단 이영회부대는 박격포, 미식, 소련식 경기, M1 따발총 등 우수한 장비로 무장, 13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지서주임 구회조 외 한청원 100여 명이 24시간 사투 끝에 실탄 부족은 물론 응원부대 미 도착 적에게 점령당함.’이라고 쓰여 있고 ‘경남경찰국 발행 연역사’에서도 ‘공비 대부대들이 응석봉에서 출발하여 신안면 일대의 구역으로부터 문태리 침공 후 1951년 9월 13일 아침 관하 생비량 지서를 완전 포위 일제 공격함에 제하여 당 지서 주임 경사 구회조 외 직원과 한청원 100여  명은 24시간에 선하여 필사 맹렬한 공격을 가했으나 실탄 결핍 중과부적은 물론 응원 부대 미도착 적에게 점령당함. 피해 경사 구회조 외 특공대 4명이 전사하고 총기 20여 정과 탄약, 기타 군 장비를 탈취 당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후 네 시까지 정치사업과 전리품 처리를 끝내고 전 부대가 ‘삼가’로 출발했습니다.”

 이영회 동지가 최후를 마친 연산 마을

 허찬형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떠났다. 삼가로 가는 도중에 이영회 동지가 전사한 신죽면 간곡리 연산 마을에 갔다. 마을 입구에 수백 년 되어 보이는 정자나무 옆에 차를 세웠다. 한창우 동지가 설명을 했다.

 “요 앞에서 이영회 동지가 전사했습니다. 그날 밤 달이 참 밝았어요. 의령을 해방시킨 우리는 차로 좌골산 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밤에 전리품을 비장하고 한잠 잤는데 국방군이 진격해 왔어요. 정전협정이 발효된 후에 국방군 전방부대가 빨치산 토벌을 위해서 각 유격지구에 내려왔습니다. 그 중 합천에 와 있던 대부대가 공격해 왔습니다. 동무들은 아침밥도 못 먹고 산으로, 들로 뛰었어요. 후퇴하면서도 큰 길가 전봇대를 톱으로 썰어서 넘어뜨리고 갔어요. 원래 계획은 의령을 해방시키고 이어서 합천을 해방시키기로 되어 있었는데 계획을 변경시켜서 지리산 쪽으로 빠졌습니다. 안소부대가 선두로 앞산에 올라가는데 적들도 반대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어요. 포사격 거리는 가깝고 수류탄 투척거리는 먼 지점에서 놈들이 착류탄을 어찌나 퍼붓던지 동무들은 눈을 못 뜰 정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급경사라 엎드려 있어도 거의 서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어요. 뜸할 때 연발총으로 갈기고 큰 돌을 굴리고 두어 시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결국 놈들이 물러났어요. 우리가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세시 반 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영회 동지가 따르라고 해서 연락병과 셋이 다음 고지에 갔는데 너머에 군인들이 누렇게 깔려 있데요. 자동총으로 갈겨댔습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다섯 시쯤 어두워지데요. 부대를 빼다가 부상당한 동무들을 음폐시켜 놓고 산을 넘었는데 마을이 있더군요. 마을을 끼고 돌아가다가 저녁밥을 짊어지고 부대로 가던 국군 병사를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밥을 접수하고 부대 위치와 군호를 알아냈습니다. 불도 안 때고 밥이 생겼어요. 재를 오르는데 “누구야?” 하지 않아요? 이영회 사령관이 군호를 대고 위험지구를 유유히 통과했습니다. 고개를 내려가자 지서가 나오데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불을 질렀는데 실수였습니다. 큰 길을 가다가 부락이 나와서 마지막 보급투쟁을 했어요. 음력으로 19일입니다. 적들이 마을 뒷산에서 사격을 하데요. 우리는 금호강 강둑을 타고 나갔습니다. 두 내가 합쳐지는 위쪽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곳에 척후 7,8명이 막 당도했을 때 건너편 20-30미터 앞에서 국방군이 일렬로 오고 있지 않겠어요. 엄호조가 불을 뿜고 동무들 전원이 무사히 빠져 나왔습니다. 나는 옆 능선에 올라가서 지형을 살피다가 적탄에 어깨 부상을 당했습니다. 금호강 저쪽으로 손에 손을 잡을 듯 횃불이 연결되어 있데요. 지방 인민들을 동원해서 우리가 지리산으로 못 들어가도록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서에 불을 지르고 왔던 그 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트럭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꼬리를 물고 들어오데요. 우리는 뛰었습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밤 10시가 넘으면 찬바람이 산에서 아래로 부는 것인데 바람 속에 훈기가 느껴지데요. 직감적으로 위쪽에 민가나 군인들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영회 사령관은 위험할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를 뒤로 돌리고 앞서 나갔습니다. 달빛을 안고 가는 우리는 “그늘진 산기슭이 안보여요?” 고도로 경각성을 높이고 나가는데 “바로 저기네요. 가깝지 않습니까?” “누구야?” 하데요. 사령관 동지는 초저녁 군호를 댔습니다. 적의 보초가 당황한 것인지 몇 초간 틈이 있었는데 낌새를 챈 이영회 사령관이 손을 뒤로 빼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때 “누구야?” 고함 소리와 동시에 ‘팡’ 총성이 들렸으며 우리 사령관 이영회 동지가 쓰러졌습니다.”

 한창우 동지의 목이 메었다. 부대를 살리고 전사한 동지여! 경남 최고의 군사간부로 지용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덕장으로 동무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이영회 사령관을 떠올리며 우리 일행은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그 때는 내에 지금처럼 돌 축대가 없었어요. 이 고목도 산기슭에 있었구요. 우리는 내 저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적의 매복에 걸린 우리는 이영회 사령관의 지시로 적의 사격 2,3초 전에 행동 개시를 했기 때문에 무사히 이 내를 타고 튀었습니다. 아마 삼사십 분 달렸을 것입니다. 밋밋한 야산을 오르다가 움푹 패인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능선으로 오고 가는 적들이 보이데요. 하루 낮을 죽은 듯이 보냈습니다. 이영회 사령관이 전사하자 참모장 이춘봉 동지가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는데 참모장 동지가 회의를 가졌습니다. 토의를 통해서 참모장 이춘봉 동지의 인솔 하에 안소부대가 의령투쟁의 성과물을 가지고 지리산에 들어가고 우리 박소부대는 남아서 교란작전을 하도록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 날 밤에 2개 소부대는 헤어졌어요.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서로가 굳게 포옹하고 안소부대가 떠났습니다. 우리 박소부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다니며 적을 급습하고 매복하여 적을 치고 빠지면서 때로는 하룻밤에 백 리도 더 걸었습니다. 치열하게 싸웠지요. 적이 몇 개 연대나 퍼부어 놓았는지 적군이 우글거리는 곳을 한 달 동안 헤집고 다니다가 8명이 살아서 지리산에 갔습니다. 이춘봉 참모장과 안소부대는 어느 대밭에서 전원이 총격전 끝에 전사했다는 비보를 지방선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지리산에 남아 있던 2개 소부대도 거의 마사졌데요. 내가 1954년 2월에 체포되었는데 그 무렵이 경남 유격대의 마지막이 됩니다. 덕유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영호 부대도 몇 개월 후에 깨졌다고 들었습니다. 유일하게 정순덕 동지의 3인 소조가 63년 말까지 지리산에 있었대요.”

 설명을 마친 한창우 동지는 이영회 사령관이 전사한 곳을 응시했다. 정전 조인 무렵에 무전을 통해서 서해안으로 배를 보낼 테니 올라오라는 당의 요구가 있었는데 방준표 동지는 수많은 동지들이 전사한 곳 남조선 인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최후를 마치겠다는 답변을 올려 보냈다고 감옥에서 전해 들었다. 그렇다! 전사한 전체 동지들은 인민을 위해서 조국통일을 위해서 한 몸을 온전히 바친 것이다. 의령투쟁으로 남조선 빨치산 투쟁의 최후를 빛나게 장식한 이영회 사령관이 전사한 곳을 우리는 아픈 마음을 안고 떠나갔다.

 삼가 해방 작전

 1951년 가을 경남 57사단이 기동투쟁에서 두 번째로 해방시킨 삼가로 갔다. 차는 시내에 들어갔다가 지서 앞을 지나 교외에서 멈췄다. 우리는 허찬형 동지를 따라 언덕 위 시내가 보이고 진입로가 보이는 노송 그늘 밑에 자리를 잡았다. 

 “서남쪽으로 들 끝에 흰 집이 있고 능선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너머가 생비량입니다. 생비량을 떠날 때 이영회 사령관은 “5연대와 7연대가 생비량을 해방시켰으니까 삼가는 1연대와 3연대가 담당하고 1연대는 진주에서 오는 방향, 3연대는 거창에서 들어가는 방향에서 공격하라.”는 전투 과업을 주셨습니다. 우리 3연대는 네 시 경에 저 흰 집이 있는 그곳으로 넘어왔어요. 3연대 작전참모였던 나는 적의 매복이 예상되기 때문에 일렬종대로 가지 말고 횡대로 진격하도록 각 중대에 지시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이곳에 매복하고 있었어요. 논이고 밭이고 온 들을 덮고 진격하는 빨치산을 본 적들은 겁을 먹었던 것인지, 총 한 발을 안 쏘고 지서로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전투 없이 이곳까지 왔지요. 7시에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먼저 요 뒤 보루대를 공격했어요. 얼마 동안 저항하던 놈들은 모두 도망가고 동무들은 보루대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분대장이 전사하고 경찰 한 명을 잡았습니다. 분노한 이승호 중대장이 포로에게 칼빈총을 들이대고 사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데요. 나는 총을 옆으로 밀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적공과장에게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야간전투는 혼란과 희생을 낼 수 있고, 또 우리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휴식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트럭 두 대가 진주로 나가는 산모퉁이까지 여러 번 갔다가 와요. 갈 때는 불을 끄고, 올 때는 라이트를 켜고 왔습니다. 마치 지원 부대가 계속 들어오는 것처럼 위장 전술을 쓴 것이지요. 우리 정찰병으로부터 그 사실을 보고받고 모두가 적의 잔꾀에 웃었습니다. 당시에 적의 병력은 경찰관, 의용경찰, 한청원, 합천에서 차출한 경찰을 합해서 170여 명이 있었으며 합천 경찰서장이 직접 지휘했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아오자 7시에 전투 개시를 했어요. 우리는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담을 넘고 고샅을 지나서 지서에 육박했습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서 문 옆에 76밀리 직사포가 있었는데 여성근위대 여동무가 은밀하게 접근하여 포에 밧줄을 걸고 나와 동무들이 잡아당기고 안에서도 당기는 별난 전투를 했습니다. 10시 경에 서장이 달아나다가 사살되자 지서 안에 있던 120여 명이 손들고 나왔습니다. 정치부 사단장의 입회하에 적공과장이 심사해서 8명을 우리 부대에 편입시키고 그 외 전원을 두 번 다시 총을 안 든다는 서약서를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총과 탄약 등 노획품을 트럭 두 대에 가득히 싣고 자골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골산 전투

 “삼가 작전 후에 산청 거창 합천 의령 등의 경찰은 물론 206, 207 전투 경찰들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영회 사령관은 이들 경찰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연대, 5연대, 7연대를 이끌고 가회, 대병, 봉산 방면으로 진격해서 오도산으로 가겠다. 3연대 작전 참모는 5연대 1개 중대와 함께 전리품 처리와 비무장 후방부대가 지리산 방면으로 무사히 빠질 수 있도록 놈들의 공격을 견제하다가 오도산 비상거점에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자골산에서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지방 경찰들은 별것이 아닌데 206, 207 전투 경찰대는 강원도 최전방에서 조직되었으며 서북청년 변절자, 친일파로 구성되었고 남부군의 꼬리를 물고 전투하면서 지리산까지 따라온 전투력이 있는 경찰부대입니다. 하지만 나 또한 38경비대 시절에 백선엽, 이범석, 이형근 등과 맞붙어 보았고 낙동강에서 미군과 흑인과도 대판 싸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더욱이 항일유격전술을 모태로 한 현대전법을 교육받은 초급지휘관입니다. 우리 부대는 고지를 장악하고 있고 놈들은 밑에서 기어 올라오지, 지형상의 이점도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놈들이 까맣게 올라오데요. 우리는 고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적들이 가늠하지 못하도록 전투태세를 취한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상봉에 인기척이 없자 마음이 놓인 것인지 서서 올라오데요. 2-30미터 접근했을 때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중기와 경기, 연발총에 소총이 콩 볶듯 볶아댔습니다. 놈들은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들고 뛰데요. 노획한 탄알이 많이 있어서 마음껏 쏘아댔어요. 돌격은 안했습니다. 적이 워낙 많고 일단 돌격을 하면 주력부대가 옆으로 빠져야 하는데 시간을 벌기 위해서 놈들을 붙들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골짜기로 사라져서야 총성이 멎었습니다. 일단 후퇴했던 적들은 대오를 수습하여 또 진격해 왔습니다. 총탄을 엄청나게 퍼붓데요. 포탄도 날아오고요. 탄우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 현상을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총알을 안 맞은 나무가 없었을 겁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나뭇잎이 뿌옇게 떨어졌어요. 우리는 이따금 대응 사격을 했습니다. 7-80미터 접근했을 때 왕머슴 명사수가 총을 조준하면서 나보고 보래요. 탕! 총소리와 거의 동시에 한 명이 나가 떨어졌습니다. 탕! 또 한명이 넘어지고요. 탕! 탕! 방아쇠를 네 번 당겼는데 네 명이 고꾸라졌습니다. 탄복했어요. 그러자 겁에 질린 놈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허공에 총질을 할 뿐 꼼짝을 않데요. 어느 간 큰 놈이 제 몸을 드러내겠어요. 그랬다가는 총알이 뚫을 텐데. 총탄만 위 아래로 오고갈 뿐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응보(인민군 막심 중기 중대장) 동지가 막심 중기를 양손으로 거머쥐고 갈겨댔습니다. 중기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데요. 적을 일시에 제압했습니다. 놈들은 배를 깐 채 비실비실 뒤로 움직이데요. 그 짬에 나는 부대를 뺐습니다. 비상선까지는 큰 길을 두 번 넘어야 하는데 우리는 밤에 산길을 걷고 놈들은 트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먼저 가서 앞을 막고 있을 것 같데요. 안내원과 중대장들을 모아놓고 “지금 정면 돌파는 안 된다. 우측과 후면에 적의 매복부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좌측은 강이다. 강둑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5-6명으로 두 개 조를 편성하여 5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앞서 나가고 전부대원이 뒤를 따른다. 적과 맞붙으면 육박전을 해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작전 설명을 하고 구체적인 과업을 주었습니다. 동무들은 작전에 충실했고 일차 도로 횡단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우리는 밤새 행군했습니다. 밤에 2차도로 횡단을 해치우려고 계획했는데 날이 밝아 버렸습니다. 척후가 달려와서 요 아래 마을에 막 쓰리코타 한 대가 도착했다고 보고하데요. “적의 선발대다. 우리가 아직 여기까지는 못 왔을 것으로 보고 우리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놈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주력부대가 온다는 판단이 가데요. 나는 중대장에게 “3,4명의 따발총수와 경기사수를 인솔하고 바짝 접근해서 때리시오. 중대장 동무의 공격 총성을 신호로 우리는 적의 주력부대를 치겠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중대장은 4,5명을 데리고 달려 나갔습니다. 우리는 적이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게 선두를 막기 위해서 8부 능선을 달렸습니다. 그 때 총소리가 들렸어요. 적의 본대와 거리가 있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일제 사격을 하고 돌격했습니다. 적들이 길을 따라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접전할 인원은 적지 않습니까? 놈들은 죽어라 하고 도망갔습니다. 위에서는 쓰리코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우리는 트럭 두 대에 불을 질렀습니다. 적의 주력을 요절내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만 중대장 동무는 권총 1정에 소총 네 자루를 노획했습니다. 동무들의 희생은 없고 그게 어딘가요. 동무들은 큰 길을 지나서 안전지대로 들어갔습니다. 천천히 오도산 능선에 오르는데 적정이 나타났어요. 위에서 부대가 내려왔습니다. 꼼짝없이 당했데요. 엄폐물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투태세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때 아군 신호를 보내지 않아요. 두 사람만 내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영회 사령관이 우리를 기다리다가 한 개 중대를 마중 보냈어요. 동무들은 서로가 얼싸안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인사

 오도산을 바라보면서 허찬형 동지의 실감나는 설명을 듣고 우리는 떠났다. 가조에 가다가 조금만 들어가면 해인사란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절에 들렀다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차가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로 구불구불 올라갔다. 해인사 경내에 들어가서 멎었다. 요금을 내고 절에 가서 구경하고 나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매표소 위 언덕에 올라갔다. 한창우 동지는 해인사 주위를 가리키면서,

 “절은 거의 다 큰 산을 등지고 있는데 해인사만은 뒤가 트여 있습니다. 그래도 경치가 그만입니다.”

 운해에 가려서 희미한 높고 낮은 봉우리, 좌우 산세도 좋고 아래 노송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허찬형 동지가 설명했다.

 “1951년 가을 1차 기동투쟁 때 날짜는 기억나지 않네요. 이 해인사에 우리 부대가 와서 3일 동안 있다 갔습니다. 그냥 휴식한 것이 아니라 가야산 들머리에 1연대를 배치해 놓고 밤낮으로 싸웠어요. 낮에는 해인사를 적들이 차지하고 밤에는 우리가 차지했습니다. 주지스님은 큰 방에 불을 때서 우리가 따뜻하게 자도록 배려했습니다. 정치부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현직 국회의원을 잡았는데 주지스님의 간곡한 말에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마지막 날 전투가 크게 벌어졌어요. 상대는 국방군이고 양쪽 무력이 맞붙었는데 큰 전투치고는 적아 간에 희생이 적었습니다. 다만 군인 두 사람이 내 옆의 바위 뒤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기척이 없어요. 그래서 공포를 쏘고 그곳으로 가자 한 사람이 손들고 나오데요. 어느 동무에게 후방으로 데리고 가라는 지시를 하고 돌아서는데 총소리가 들리데요. 가봤더니 한 사람이 자살했어요. 포로에게 물어보았더니 훈련 받을 때 빨치산에게 잡히면 그냥 죽이지 않는다.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대요. 우리야 군경을 포로하면 무기만 접수하고 다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을 밥 먹듯 거짓으로 일관하는 놈들!

 우리가 떠나려고 하자 차에서 내릴 때 50대 아주머니가 자기 가게에 가서 한잔 하라는 것을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도토리묵이나 전이 먹을 만하다고 막걸리 딱 한잔만 하고 가란다. 우리 일꾼들은 정에 약하지 않은가. 무던하게 보이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도토리묵에 막걸리 두어 잔 씩 걸치고 떠났다. 

 가조 지서 해방 작전

 해가 설핏할 때 가조 지서 옆에 차를 세웠다. 들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조면 소대지는 지금도 가난한 듯 허름한 집들이 붙어 있었다. 허찬형 동지가 설명을 했다.

 “우리 부대는 16일 아침에 민주부락에 도착해서 17일까지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영회 사단장의 작전 지시를 받고 17일 아침 7시경에 출발했네요. 지서가 보이자 동무들은 돌격! 돌격!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습니다. 순식간에 지서를 에워쌌습니다. 전투가 붙었어요. 돌격조는 나가고 이영회 사령관과 나는 지서에서 50여미터 떨어진 후방에 있었는데 오두막 집들이 가려서 전방이 안 보이데요. 3,40분 지났을 것입니다. 이영회 사령관이 빨리 끝내자며 나가려고 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만류해 놓고 내가 대신 나갔습니다. 흙으로 쌓은 보루 총구에서 총탄이 날아오데요. 지서에 바짝 다가갔습니다. 지서 담과 닿아 있는 디딜방앗간 벽을 메로 쳐서 크게 구멍을 뚫었습니다. 중대장 동무에게 솜과 석유를 구해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얼마 후에 가져 온 솜을 장대 끝에 비끄러 메고 석유를 뿌려서 불을 붙였어요. 장대를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서 보루대 지붕에 댔습니다. 볏짚을 엮어서 만든 보루대 지붕이라 불꽃이 닿자마자 활활 타데요. 놈들은 지서 안으로 달아나고 돌격조 동무들이 담을 넘었습니다. 그때 다리를 치데요. 총에 맞았습니다. 나는 동무의 등에 업혀가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눈을 떴어요. 다음날 아침이더군요. 가야산 어느 능선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동무들이 앉아 있데요. 순이가 쫓아와서 “오빠! 정신이 들어? 죽으면 안돼.” 그때의 순이의 시선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허찬형 동지는 순이가 떠오르는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잠깐 숨을 몰아쉬고 이어갔다.

 “의무과장 동지가 출혈이 심해서 위태로운데 순이가 달려와서 혈액이 O형이라고 팔을 내밀데요. 순이의 피를 수혈해서 동지가 살아났습니다. 어제 두 동무가 전사하고 세 동무가 중상을 입어서 철수했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이영회 사령관은 다음 날 지서를 박살내고 불 질러 버렸답니다.”

 허찬형 동지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용암리 매복 작전

 용암리 개금마을까지 차로 갔다. 새로 지은 집들이 있고 크고 반듯한 집이 여러 채 보였다. 돌로 조형물도 만들어놓고 가야산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인지, 여느 산골 마을과는 달라보였다. 어두움이 짙어가고 있었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마을 뒤가 가야산에서 단지봉(수도산)으로 가는 능선이고 이 동네가 마지막 부락입니다. 이 너머에 해인사가 있고 저 산이 매화산입니다. 1953년 6월에 우리 부대가 6.25를 기해서 이곳으로 진출했어요. 가북면에서 국방군 한 개 대대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밭에 잠복하고 있었어요. 척후는 통과시키고 주력이 이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 부대장의 공격 신호와 함께 일제히 사격했습니다. 중경기가 불을 뿜고 놈들이 삼대 쓰러지듯 넘어졌어요. 다 잡아놓고도 돌격을 못했어요. 접근전을 하다가 분산하여 철수했습니다. 나는 저쪽으로 뛰었지요. 그날 놈들의 인적 손실은 엄청났습니다. 밤 9시까지 불을 밝혀놓고 이 아래에 매장을 했으니까요. 나는 적들이 빠진 후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요 앞에 물레방앗간이 있었어요. 송재영 동무와 나는 감자밭에서 감자를 캤습니다. 점심도 못 먹고 배가 고파서 생감자로 배를 채웠어요. 다음 날 동무들을 만났는데 거창군 군여맹위원장 신옥경 동무가 보투에 나갔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서 한 여동무와 함께 희생되었다고 하데요. 신옥경 동무는 오빠가 구 빨치산이고 싸움도 아주 잘한 동문데 애석했습니다. 매복전은 박문학 부대가 했고, 나는 부대 정치위원으로 작전에 참가했어요. 그 무렵 박문학 부대는 가야산 우두령재 잠복투쟁, 덕유산 삼봉투쟁, 단지봉 투쟁 등 규모가 큰 전투를 했습니다.”

 가로등 밑에서 김교영 동지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는 곧 떠났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만 자는 숙소에 들어갔다. 짐을 부려놓자마자 김영진은 카메라 장치를 했다. 허찬형 동지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정부영이,

 “선생님이 태어난 고향과 부모형제, 그리고 살아오신 경력을 간단하게 들려주시지요.”

 허찬형 동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 고향은 평북 삭주군 외남면 수령골입니다. 아버지는 허용주, 어머니는 박찬경. 두 분이 7남 3녀를 낳았는데 그 중 막내로 1929년 4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학력은 별로 없어요. 글방에 1년 다니고 간이학교에 4년 다녔습니다. 1942년 3월에 일제에게 강제로 보국대에 끌려갔다가 7월에 탈출했습니다. 송탄유를 짜내는 작업장에서 소년 노동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고 1946년에 민청에 가입했습니다. 1947년 8월 7일에 군 보안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1949년 5월부터는 38경비대에서 복무했어요. 1949년 10월에서 50년 4월까지 공병 기술 교육을 받고 보위성 9사단 공병대대 1중대 1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1950년 6.25를 최전방에서 맞이했고 6월 27일에 화선 입당했습니다. 낙동강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1950년 9월에 입산했구요. 경남도당 산하 지도사령부에서 일하다가 1951년 8월 57사단이 편성될 때 3연대 작전 참모로 있었고 1952년 1월 2일에 수도산 환자 트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광주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군법정에서 구형 사형에 언도 15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살았습니다. 1965년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1970년에 2차로 투옥되었다가 3년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선생님 살아오시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을 법한데 들려주시지요.”

 정부영이 요구하자 빙긋이 웃으면서,

 “있지. 61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낙동강 전투에서 다리 부상을 당했어요. 거창 야전병원에 있다가 후퇴했지요. 지팡이를 짚고 북상하다가 영동이 막혀서 옥천군 군북면 서대산 밑에 안보광리에 갔습니다. 수바우(별명) 아저씨댁 사랑방에서 2사단 포 참모장 김덕진 동지와 호위병, 나, 임순이 간호원이 함께 먹고 자고 40여 일 동안 순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수바우 아저씨는 일찍 상처를 해서 17세 장남을 장가보냈답니다. 신부는 17세 어린 나이지만 농사일이나 가사에 손색이 없어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감옥 안에 있을 때 문득문득 그 식구들이 떠오르데요.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1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 가본다는 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으로 기억되는데 안보광리에 갔다가 못 보고 왔습니다. 그 후로도 두 번 갔다가 못 보았네요. 2005년 가을에 네 번째로 이창근 동지와 아는 분 차를 타고 갔습니다. 우리가 지냈던 옛집에 찾아가자 30대 여성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전에서 왔는데 마을에 연세 많은 어른을 뵈러 왔다고 하자 저의 시아버님이 80센데 사랑방에 계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이 40여 일 지냈던 그 방입니다. 문 앞에 가서 “계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문을 열면서 뉘시냐고 물었습니다. 손으로 다리를 받치고 있데요. 옆에 있던 손부가 할아버지는 관절염이 심해서 바깥출입을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방 윗목에 곰팡이가 슬어 있고 요강이 놓여 있고, 할아버지는 홑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집은 헐어빠지고 가난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6.25때 이 동네에 사셨어요?”

 “그럼 살고말고.”

 “이 집에 수바우란 별명을 가진 분이 살았지요?”

 “그래 그 분이 내 숙부인데 벌써 죽었어. 그의 아들이 앞집에서 살지.”

 “고맙습니다. 이거 약소합니다만 담배 값이라도 하시지요.”

 만 원짜리 석장을 손에 쥐어드리고 우리는 돌아 나와서 앞집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계십니까?”

 하고 주인을 찾자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70대 노파가 

“어머머머 저 양반.” 

 너무도 뜻밖이라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저 양반 우리 집에 있었던 인민군 양반이 맞아요. 그 때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틀림없어요.”

 옆에 있던 이창근 동지가,

 “아주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인민군 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다니는 사람입니다.”

 “변명은 어쨌든 어서 방으로 들어오세요. 참말로 반갑구만요.”

 우리는 방안에 들어가서 앉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노인에게,

 “여보! 영감. 이분 기억이 납니까?”

 노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기억이 안 나.”

 라고 하자 

 “아이고 나는 첫 눈에 알아보겄던데.”

 창근 동지는 기억나는 추억들을 말해보시라고 했다. 

 “내가 열일곱 살에 시집와서 여섯 달 만에 전쟁이 일어났는데요. 그 해 9월말에 큰 보광리와 작은 보광부락에 인민군대들이 자고 갔습니다. 그 때 우리 집 사랑방에 네 분이 40여 일 동안 있다 가셨습니다. 평복에 권총을 차고 못 걷던 어른이 제일 높은 분이고 이 양반은 인민군 장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스물두 살이라고 하데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절뚝거렸습니다. 따발총을 메고 다니던 분이 이 양반들을 보살펴 주었구요. 두 분을 치료하던 예쁜 순이가 같이 있었습니다.”

 창근 동지가 

 “50년이 더 지났는데 생생하게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머니가 이 양반을 무척 사모했던 모양이네요.”

 농담을 던지자,

 “내가 사모했다면 짝사랑이구요. 40여 일 간 밥상을 들고 들락거려도 내 얼굴 한 번 쳐다보는 것을 못 봤어요.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 양반이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와서 탈곡기에 탈곡하고 도리깨질하고 보리방아 찧던 모습입니다. 어찌나 일을 매끄럽게 하시던지. 군인이 아니라 순 농사꾼이데요. 우리 신랑은 언제 저렇게 일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시아버님이 혀를 차더만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나보다 더 기억하실 걸요. 떠나신 후 몇 해 동안은 ‘어디에 있을까? 죽었는가? 살았는가? 살았으면 한번 쯤 찾아왔을 텐데.’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곤 하셨습니다.”

 어느덧 술상이 들어왔다. 

 “어서 한잔씩 드십시다. 정말 반갑습니다.”

 “네 번째 와서야 뵙네요. 저희들로 인해서 많은 양민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요?”

 “온 부락사람들이 지서에 불려가서 실컷 두들겨 맞았어요. 나도 갈비가 부러져서 고생을 좀 했지요.”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통을 다 당하고도 이렇게 반겨주시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제는 몇 분이나 두셨습니까?”

 “아들 둘에 딸 둘을 낳아서 다 대학 나오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참 반갑습니다.”

 “높은 양반과 순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저런, 높은 양반 훌륭한 분이시던데. 순이도 착하고 예뻤어요.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시대를 잘못 타고 났어요. 빨리 통일이 되어야 그분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메워질 텐데. 자! 잔을 비워요.”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하고 정을 나누다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해 말 민가협 망년회에 두 분을 모시고 갔어요. 여러 단체 일꾼들, 학생, 후원회원들이 세배를 올리고 선물도 덤으로 드렸습니다. 흐뭇하게 여기시데요. 그 후 추석이나 설 명절이 오면 고향의 부모형제를 찾아가듯 적지만 십만원을 쥐고 보광마을을 찾았습니다. 두 분은 형제인 양 반가워하셨고 떠날 때는 아주머니가 정성껏 가꾼 고추나 고구마, 깨, 콩 등을 한아름 안겨주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감동적이었다. 두 분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일생 동안 이어지기를 아니, 이어지리라고 믿는다. 한창우 동지는 살아온 내력을 써가지고 왔다. 시간이 자정을 넘었기 때문에 대담을 생략하고 잤다. 써온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한창우 동지

 한창우 동지의 고향은 경남 하동군 금남면 고포리. 아버지는 한현수, 어머니는 박원순 두 분은 4남 5녀를 두었는데, 그 중 여섯 번째로 1931년 4월 9일에 소작농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엽 1945년 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부산으로 갔다. 해방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 마을에서 아버님을 리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형님과 나는 가사를 돌보며 형님은 민청에, 나는 소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48년 여순사건 후에 아버님과 형님이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 구금되자 나 혼자 농사를 지었다. 1950년 7월 중순에 인민군에 의해서 하동이 해방되자 마을 소년단원 5명과 함께 하동군 내무서에 가서 1차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사천비행장에서 일주일 동안 훈련을 받고 6사 659부대 1대대 2중대 2소대에 배치되어 마산방면 전선에 나갔다가 659부대 후방부 운수부로 옮겨가서 활동하다가 후퇴했다. 1950년 9월 하순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인민군 군관 동무와 헤어졌고 곧 하동군당과 연결이 되어 하동군 유격대에서 활동했다. 1951년 여름에 57사단이 창설될 때 1연대 2중대 1소대장으로 배치되었으며 대공세 후에 52년 3월경 박건실 소부대 1구분대장으로 매 전투에 참가했다. 54년 2월 하순에 체포되어 남원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군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심에서 무기로 확정되었다. 1960년 4.19 이후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전주감옥에서 8년 가까이 살고 박정희 정권 때 비전향 좌익수를 대전으로 집결시킬 당시에 대전 감옥으로 갔다가 68년에 다시 분산시킬 때 대구 감옥으로 이감 갔다. 1974년에 대구감옥에서 만기 출소를 했고 그 해에 권순달과 결혼하여 아들 기태, 딸 영숙과 미영을 낳았다. 

 이창근 동지

 전번에 전적지 답사에 함께 했던 이창근 동지가 시간관계로 대담을 못했는데 이번에 못 오고 허찬형 동지에게 이력을 써서 보냈기에 여기에 옮긴다. 나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만주 간도성 화룡현 면사리란 지방으로 일제와 3년 계약을 맺고 농노(농업노동자)로 이주할 때 따라갔다. 이 지방이 망명지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집단촌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후 3년의 기한이 다 되어 흑룡강성 밀산현 양목강촌 명산으로 또 3년간 계약을 맺고 이사하는 바람에 우급학교 8학년제 3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가족들을 따라갔다. 그 후에 흑룡강성 밀사시로 자유롭게 이사했는데 8.15 해방 덕분이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독립을 위해서 싸운 정치세력이 전면에 나섰다. 이 애국세력은 분단된 조국통일과 새사회건설은 중국혁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조선과 중국은 순치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혁명 완수는 곧 조선혁명이란 신념에서 홍군에 입대하게 된다. 나는 1946년 4월 16일 홍군소속 야전군 산하 조선의용군 독립부대에 입대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제4야전군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돌파한 선봉부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부대다. 중국혁명을 완수한 후 1949년 7월에 조국에 돌아와서 조선인민군 6사 15연대 661부대에 배속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반격명령과 동시에 남진하여 (서해안 쪽은 9사단, 그 다음이 6사, 동해안쪽은 2사가 담당) 서울 해방은 물론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전진하는 데 주력부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하동전투를 승리로 결속하고 함안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중대 소속 라삼룡 특무장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으며 화장실에서 탈출계획을 세웠다. 1951년 7월 5일 밤에 작은 배를 탈취하여 라삼룡 동지가 노를 능숙하게 다뤄서 수월하게 육지에 상륙했다. 밤으로만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북상길을 강행하다가 의령군당 소속 동무들과 선이 닿아 유격투쟁을 시작했다. 2,3개월 후 경남 빨치산 57사단이 기동투쟁할 때 의령군당 관할지역인 자굴산에서 적의 공세에 상선이 끊겼다. 의령군당은 함양군당과 합류하여 지리산에 들어갔다. 경남 도당위원장 남경우 동지로부터 새로운 당사업 지시를 받아 가지고 의령군당 거점으로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대공세 때 체포되었다. 1951년 12월 초로 기억된다. 

 허찬형 동지가 체포된 곳

 우리는 숙소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수도암이 좋다고 가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차는 산 굽이굽이를 감돌아갔다.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인데 포장이 되어 있고 차 왕래가 없어서 거침새가 없었다. 길만 뚫려 있을 뿐 양쪽으로 우거진 숲 푸른 잎사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차창을 열었다. 향긋한 공기, 상쾌한 아침이었다. 어느덧 경 내에 들어갔다. 기와집이 여러 채 보이고 돌층계 위에 대웅전은 전쟁 때 피해를 모면한 듯 기둥과 처마에 오랜 세월이 새겨져 있었다. 옆으로 비바람에 풍화된 돌탑이 예스럽고 뜰 앞에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뒤는 물론 옆에도 산 앞에도 산이다. 산으로 에워싸여 있는 수도사 뜰에 서서 역사와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데 가잔다. 정부영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해서 천천히 내려갔다. 여승들만 있는 절이란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 아름답겠다.’ 잔잔한 정서를 접고 차에 탔다. 아랫마을 수도리에 가서 식당에 들렀다. 밥하는 동안에 허찬형 동지가 설명을 했다. 

 “가조 전투에서 부상당한 나는 가야산에 있다가 이곳 수도산 단지봉 밑에 중환자 트로 옮겨 왔습니다. 10월 말경에 경환자들과 미제의 세균전으로 열병을 앓던 수많은 환자들이 회복되어 부대에 복귀하고 9명만 위아래 트에 남았습니다. 아래 트에 중상을 입은 불꽃사단 정치위원과 불꽃사단 참모장, 부대원 2명이 있었고 위 천막 트에는 나와 김선옥 광주도립병원 간호사, 여성근위대원, 강원도 고성군 고등학생 이철이, 함양 출신 이재기 5명이 있었습니다. 연락이 끊긴 지 20여 일 무로 연명하다가 1952년 1월 5일 아침 8시경에 경북금천 경찰의 기습을 받았어요. 움막에 있던 정치위원과 참모장은 두 동무에게 손들고 나가라고 하고 자살했습니다. 천막 트에서는 이재기 동무가 도망갔다가 뒤에 체포되고 나는 밑으로 뒹굴다가 체포되었으며, 이철이 동무와 여성근위대원은 김선옥 간호사가 지니고 다니던 수류탄으로 함께 자폭했습니다.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가서 합천군유대 정치위원 변용희 동지를 만났습니다. 변 동지에 의하면 강병준과 같이 환자 트에 연락임무를 맡고 덕유산에서 나오다가 변절자 일당에게 체포되었고 강변준 그자가 변절하여 경찰들을 끌고 와서 환자 트를 기습했다고 합니다. 강병준 그놈은 일주일에 한 번씩 환자 트에 왔던 연락원입니다.”

 밥상이 들어왔다. 밥을 먹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찾아왔다. 허찬형 동지가 반가워했다. 

 “내가 이곳에 두 번 왔습니다. 동지들이 최후를 마친 장소를 찾기 위해서 이 할아버지와 함께 골짜기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지요. 아직도 못 찾았습니다.”

 노인은 동지들의 시신을 묻은 이웃마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으로부터 위치를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나뭇잎이 지거든 가을에 한번 오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는데 노인은 어린 손녀 손을 잡고 나왔다. 허찬형 동지가 지폐 몇 장을 아이 손에 쥐어 주었다. 우리는 좋아라하는 아이와 노인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황점 마을

 우리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신동마을에 갔다. 차를 세운 허찬형 동지가 설명했다. 

 “내가 1950년 12월 초순에 이곳에 왔어요.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당한 동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남해 여단 여단장 동지는 전북으로 가고 연대장 이춘봉 동지는 여기에 남았지요. 105연대도 왔다가 신원 쪽으로 가고요. 그 해 동짓날입니다. 전북 동지들이 적의 대공세에 밀려서 이곳에 왔어요. 덕유산 상봉을 넘다가 일곱 동무가 얼어 죽었답니다. 일주일 동안 못 먹고 걸었어요. 1951년 1월 5일에 당과 행정기관이 지리산에서 합류할 때 나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바지게에 풀을 한 짐 지고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옆에 지게를 받쳐 놓았다. 김교영 동지가 부근의 마을 이름을 묻고 나이가 몇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전쟁 때 이곳에 있었는지, 이것저것을 묻고 있는데 현희가 와서 혹시 박자 판자 수자 어른을 아시느냐고 묻자,

 “무어라고?”

 대뜸 되물었다. 

 “박판수 어른을 아세요?” 

 “암! 알제. 대단한 어른이셨어. 빨치산 대장이제. 말 잘하고 인품도 좋으셨지.”

 “박판수 어른을 직접 보셨어요?”

 “그럼. 우리 마을에도 더러 오셨으니까.”

 현희가 감격한 듯. 60년이 지났는데 인민이 아버지 이름까지 잊지 않고 있으니 감격하지 않을 것인가. 그 당시의 상황을 더 물었으나 오래 되어서 다 잊었단다. 우리는 황점 마을에 갔다. 허찬형 동지는,

 “이 마을에 이춘봉 연대장과 군의관(소좌) 호위병과 나, 순이도 함께 있었습니다. 하루는 연대장 동지의 지시에 의해서 포탄 셋을 묶어서 폭발시켰는데 그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이춘봉 동지는 칭찬하면서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며칠 후에 포탄 묶음을 걸머지고 고개를 넘어서 60령재에 갔네요. 길이 15여 미터의 작은 다리를 폭파하여 끊어놓았습니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 신원면 양민학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사진제공-임방규]

 “앞에 보이는 큰 산이 남덕유산이고 그 밑에 60령재가 있습니다. 1953년 1월에 경남도 인민위원장이자 북부지구당위원장 박참봉 동지가 마을 뒷산 너머에서 전사했어요. 5지구당 때 유격지도부장으로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시루봉이고 시루봉 너머가 송치골입니다. 6개 도당회의를 가졌던 곳이지요. 입산 초기에 블록책인 박판수 동지는 월성에 있으면서 이 마을에 자주 왔습니다. 도당 선전부장 이인모 동지와 뛰어다니며 유격부대를 조직했지요. 여기에 노영호부대도 있었어요. 노영호 동지는 부대장 겸 북부지구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책임이 과중하다고 하여 부대원들을 박문학 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우리는 일렬로 서서 묵념을 올렸다. 현희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신원면 양민 학살

 우리는 거창읍을 거쳐서 신원면 양민을 집단 학살한 곳에 갔다. 재를 넘어서 첫 번째 마을 두 곳에 위령비와 위패를 모신 건물이며 묘를 돌아보고 묵념을 올렸다. 감옥살이를 할 때 신원면이 고향인 김윤해 동지로부터 거창 양민학살에 대한 전모를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잔혹한 학살지 신원면을 가봐야 할 텐데. 젖 먹는 아기나 노인을 가리지 않고 700여 명의 지역 인민을 학살하고 그 위에 휘발유를 붓고 태운 놈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의 잔인한 학살에 치를 떨었던 곳. 처참하게 살해된 분들을 현지에 가서 추모해야 할 텐데 못 가서 죄스럽게 여기던 곳이다. 추모공원에는 조형물도 만들어 놓고 시신이 없는 빈 묘 앞 묘비에 나이와 이름, 가족관계가 새겨져 있었다. 두 살, 세 살,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칠십대 노인이 있고, 당시의 처참했던 광경이 어려왔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했다. 

 “거창학살 일주일 후에 도당에서 조사 임무를 맡고 거창군당, 신원면당 일꾼들과 함께 이곳에 왔어요. 그 때까지도 휘발유 냄새, 사람 타는 냄새, 사람 썪는 역겨운 냄새가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학살한 시체에 불을 질러놓고 흙으로 얇게 덮어놓았데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군 11사단, 소위 화랑사단에서 자행했는데 2월 초에 여기서 산청으로 가는 도중에 생초면이 나오고 지리산 쪽이 금서면인데 금서에서 590여 명을 학살하고 놈들이 신원면으로 넘어와서 마을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다 학교에 모이라고 했답니다. 환자와 극노인을 제외하고는 아기들은 업고 제 발로 걸어서 학교에 갔답니다. 군인, 경찰, 우익 가족들을 가려내고 모두 기관총을 쏘아서 살해했대요. 꿈틀거리는 사람을 총으로 쏘구요.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신원면이 산중 아닌가요. 상대현, 중대현, 하대현 등 골짜기에 있는 집들을 불질렀대요. 내가 와서 확인했습니다. 노인들과 환자는 방에서 타 죽고요. 빠트린 게 있네요. 집이 비니까 집집마다 귀중품을 가지고 나왔대요. 놈들은 학살하기 전에 가져온 물품을 다 내놓으라고 했고, 그것을 바지게에 짊어지고 생초면에 가서 장날 팔았답니다. 지휘관 놈들이 차지했겠지요. 또 하나 거창학살 사건이 내외에 유엔에까지 알려지자 거창 출신 현직 국회의원이 발의하여 특별조사단이 꾸려졌다고 합니다. 신원면에 국회조사단이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김종원은 국방군을 빨치산으로 위장시켜서 매복했다가 차 행렬이 다가오자 기습했답니다. 국회의원들은 달아나구요. 국회의원이 죽으면 큰 일 나겠지요. 그 점을 우려한 김종원은 먼 거리에서 공포 사격만 하도록 지시했답니다. 김종원의 그 잔꾀를 누가 모르겠어요. 결국은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거창으로 가는 고갯마룬데 오늘은 시간이 없고 다음 기행 때 가보도록 하지요.”

 김교영 동지가 실감나게 설명을 해서 60년 전의 현장에 온 듯 가슴이 저려왔다. 우리는 묵념을 올리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떠나갔다. 먼저 가버린 동지요, 벗인 김윤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인이 받았다. 10분 후에 간다고 알렸다. 거동이 어려운 70대 노인이 동네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큰 아들 결혼할 때 주례를 섰던 윤해 친구라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가시자고 앞장섰다. 작은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윤해가 지내던 방이라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윤해가 있었으면 끌어안고 좋아할 텐데. 나보다 나이가 적은 것을. 작풍이 좋고 감옥에서 한 방에 있을 때의 윤해가 떠올랐다. 애석한 정이 스쳐갔다. 마루에 걸터앉아서 나의 벗 윤해 동지의 추억담을 들려주고 떠났다. 윤해의 셋째 아들이 거창읍에 산단다. 보고 싶어서 통화를 했다. 큰 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듯 군청 앞에서 만났는데 우리를 확인하고 집에 금세 다녀오마고 몇 마디 남기고는 달려갔다. 2,3분이 지났을까? 오토바이를 타고 온 청년은 우리말은 들은 체도 않고 따라오란다. 어느 식당 앞에 멎었다. 안에 들어가자 노동지들께 큰 절을 올렸다. 지금 젊은이는 아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청년이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고 감옥살이를 하셨다는 사실을 몇 살 때 알았느냐고 물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님이 조금 들려주어서 알게 되었단다. 

 “전교조 선생님으로부터 진보적인 영향을 받았고 태백산맥을 읽은 뒤라서 큰 충격을 안 받았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고 감옥살이를 하셨다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시국문제에 분노하시고 한마디씩 내뱉는 것으로 보아 여느 아버지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두서너 차례 아버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작가 한  분이 아버지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별로 도움을 못 주고 있네요.”

 걸게 차린 밥상이 들어왔다. 식사하면서도 처지가 같은 현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창을 떠날 때 자기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빵 가게를 차리고 있었다. 아내가 나와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빵을 한 아름 차 안에 밀어 넣었다. 가다가 자시란다. 현희는 내려가서 별도로 빵 한 보따리를 사들고 왔다. 은정이에게 넘겨주면서 들고 가실 수 있도록 빵을 따로따로 담으라고 했다. 식대와 빵 값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액수의 적고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인가 아닌가에 있다. 우리 후예들의 배려와 따뜻한 정에 흐뭇했다. 의령에 가서 한창우 동지, 박순자 동지, 박현희와 다음 답사를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기동투쟁과 의령투쟁을 수행한 동지들, 이영회 동지, 윤해 동무의 셋째, 박현희가 떠올랐다. 사상과 육체의 혈맥은 영원히 이어가는 것이다. 허찬형 동지를 대전에 내려놓고 여덟시가 넘어서 서울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같이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세 젊은 친구가 애썼다. 

 

임방규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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