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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4.24 투쟁’이 도래하고 있다”

기사승인 2018.04.21  19: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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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당연필, '4.24교육투쟁 70년' 배영애 선생 특별초청 강연회 열어

   
▲ 1948년부터 2년여에 걸쳐 진행된 '4.24교육투쟁' 당시, 소학교 학생으로 학교 지키기에 뛰어든 배영애 전 재일 조선학교 교사가 21일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분단된 조국에 돌아올 수 없던 재일동포들은 자녀교육에 힘썼다. 1948년 일본 전역에 556개의 조선학교가 들어섰다. 하지만 연합국총사령부(GHQ)와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폐쇄령이 내려졌고, 이에 재일동포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4.24 교육투쟁’의 시작이었다.

‘4.24 교육투쟁’ 당시 한 장의 사진. 자그마한 소학교 여학생이 일본 경찰에 의해 교실 밖으로 내던져지는 장면이다. 사진 속 인물인 배영애 전 재일 조선학교 교사는 “우리학교를 빼앗길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4.24 교육투쟁’ 70년을 맞아 ‘몽당연필’(대표 권해효)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청년문화JU에서 재일 조선학교에서 31년 간 교편을 잡은 배영애 선생 특별초청 강연을 열었다.

“성은 배가요, 이름은 영애”라고 자신을 소개한 배영애 씨는 1929년 일본으로 건너온 부모의 다섯째 딸로 1943년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났다. 1948년 아이치현 모리야마 소재 ‘조련 모리야마 초등학원’(모리야마 조선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8살인 1950년 12월 20일, 조선학교폐쇄령으로 학교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해 교실에서 쫓겨났다.

배 씨는 “3학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 경찰이 조선학교를 부수고 탄압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우리가 식민지로부터 해방됐는데, 우리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배우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마음을 품었다. 일본놈 나쁘다, 미국놈 나쁘다고 생각했다”고 어려서 느꼈던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어머니가 매일 학교에 가셨다. 경찰들이 선생을 잡아간다고 해서 교대로 선생을 지켰다. (1950년 12월 20일) 아침에 일어나니 작은 언니하고 가운데 언니가 없었다. 이유는 같았다. 그래서 나는 뭔가 있다고 생각해서 학교로 달려갔다. 다른 동포 어머니가 김효순 언니네 집에 있으라고 해서 숨어서 당시 상황을 지켜봤다.”

8살 배영애의 눈에 들어온 당시 상황은 상당히 급박했다. 새까만 헬멧과 권총을 차고 곤봉을 든 일본 경찰들이 3대의 트럭에 나눠타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초등학원 중급부 언니.오빠들이 “경찰이 갔다”라고 외치자 영애는 집에서 나와 학교로 달려갔다.

   
▲ 1950년 12월 20일 모리야마 조선소학교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이 학생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장면. 붉은 원 속 아이가 배영애 씨이다. [사진출처-몽당연필]

전날까지만 해도 공부하던 학교의 모습은 처참했다. “입구는 뾰족뾰족한 철선으로 둘둘 감겨있고, 창문은 두꺼운 나무로 못질을 해놨다. 온몸이 떨렸다. 소름이 끼쳤다.”

중급부 언니.오빠들이 펜치로 철선을 끊고 나무판을 떼어냈다. 다른 곳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교실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칠판 등을 바깥으로 옮기는 언니.오빠들을 도왔다. 그 순간, 30여 명이 일본 경찰이 다시 들이닥쳤다.

“경찰이 앞으로 옆으로 뒷문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언니, 오빠들을 때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언니, 오빠들이 저항하니까 곤봉으로 때렸다. 언니, 오빠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트럭에 실었다. 나는 어쩔 바를 몰랐다. ‘언니, 오빠를 데려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경찰이 나를 안아서 운동장으로 내던졌다. 운동장 조회대에 머리를 찧고 온몸이 아팠다.”

당시 아이치현 조선학교 3곳은 폐쇄됐고 일본학교의 분교형태로 남았다. 배영애가 다닌 모리야마 조선소학교는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가 함께 일하는 자주학교가 됐다. 그날의 기억은 배영애 삶의 토양이 됐다.

배 씨는 “총련 활동을 하다가 급사한 둘째 언니는 ‘너는 커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 내 가슴에는 언제나 언니의 말이 남아있다”며 “돈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전철 탈 때 나는 자전거를 타고 1시간을 걸려 조고에 다녔다. 교원양성소에서 배우고 일하면서 조선대학교 통신학부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나고야 시립 보쿠노 소학교 분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그의 일화. 어느 날 1학년 학생들 손을 잡고 1시간을 걸어서 뇌염 예방접종을 하러 본교로 갔다. 학교에 도착하니까 본교 학생들이 조선인 아이들에게 오물을 퍼부었다. 화가 난 배 씨는 교장에게 찾아가 항의하고, 학생의 사과를 받아냈다.

6학년을 맡던 어느 날.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수업을 거부했다. 일본인 교사가 식민지로 조선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 배 씨는 교사와 학부모를 불러 긴급모임을 소집했다. 그리고 일본학교의 분교를 조선인의 자주학교로 만들어냈다.

배 선생은 이후에도 자주학교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후쿠오카 초중급학교, 기타큐슈 초증급학교의 교육환경을 바꿔내고, 고쿠라 조선유치원 원장을 맡으면서 조선학교 발전에 힘을 보탰다.

   
▲ ‘4.24 교육투쟁’ 70년을 맞아 ‘몽당연필’(대표 권해효)은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청년문화JU에서 배영애 선생 특별초청 강연을 열었다. 50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31년간의 교원 생활을 마친 배 씨의 ‘4.24 교육투쟁’ 70년째 진행 중이다. 일본 아베 정권 이후 부쩍 늘어난 조선학교 차별에 맞서고 있다.

그는 “‘제2의 4.24 투쟁’이 도래하고 있다”며 “지금 일본에는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헤이트스피치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치마저고리를 입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했다.

특히, 조선학교 학생들의 치마저고리에 대한 폭력에, “그 옛날 해방 전 그때가 아니다. 해방을 맞이한 독립국가 해외공민이다. 치마저고리가 칼질을 당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분개했다.

재일 조선인 차별은 북.일관계 악화 때마다 더 심해진다던 배 씨는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에 기대가 컸다. “이제 꽁꽁 언 얼음이 녹을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 마지막 한국의 끈, 북조선의 끈, 모든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룩하자.”

그리고 70년 전 모리야마 조선소학교 입학해 처음 배운 노래를 불렀다.

“백두산은 조선의 산, 조선의 제일 높은 산, 잊지 말고 지키자 우리나라 산, 다시 찾은 백두산 우리나라 산, 잊지 말고 지키자 우리나라 산.”

이날 특별초청 강연에는 권해효 몽당연필 대표, 김명준 감독 등 50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조정훈 기자 whoony@tongilnews.com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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