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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기사승인 2018.04.14  10: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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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13)

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바닷가 통나무집

2010년 12월 13일 오후 8시 30분에 김해섭 동지, 안신옥 동지, 한재룡 동지, 나,  송계채 동지 그리고 변산 빨치산 출신 한명,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9명이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용산에서 출발했다.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변산에 도착했다. 부안 역사에 정통한 정대철 역사 선생이 저녁 음식을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서로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별식인 홍합죽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정대철 선생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특히 부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동지들과 일꾼들도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빨치산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는데 이번에 변산 고창, 정읍, 일원을 답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자 역사 선생답게,
 
“참 잘하시는 일입니다. 자칫 묻혀버릴 수 있는데 역사적인 사실을 많이 발굴해 주세요.”라며 격려했다.
 
“좌든 우든 역사적인 진실을 밝혀서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정리해야 하는데 좌익 쪽 자료가 너무도 부족합니다. 부안에 좌익계의 거두 김철수 선생을 비롯하여 김태종 선생, 허영철 선생, 신인영 선생, 정진석 선생 등 여러분이 계셨는데 다 돌아가시고 찾아뵙고 물어볼 만한 분이 부안에는 안 계십니다. 부안은 여느 지역 못지않게 역사 속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갑오농민전쟁 때도 그렇고 야사도 많습니다.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옛날에 제주도 도민과 교역이 활발했던 모양입니다. 제주마을이 있었어요. 왜구들의 침입도 많이 받구요. 변산에 가면 도적바위가 있습니다. 이조 중엽에 토호나 관청을 쳐서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의적의 근거집니다. 도적 또는 의적이란 말이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갑오농민군이나 의병을 당시의 지배층은 역적 또는 비적으로 빨치산 또한 공비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있었으면 모르는 내용을 더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어서 숙소로 갔다. 주인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차 대접을 받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역사 선생은 내일 피치 못할 일로 선생님들과 전적지 답사를 함께 못해서 여간 아쉽지 않다고 섭섭한 정을 남겨놓고 떠났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고 하늘이 보이는 큰 방 둘을 내주어서 편하게 잤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떠났다.

내소사
 
내소사에 갔다. 신라 정상배들이 당나라 군대를 끌어다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 소정방이가 왔다고 해서 래소사라고 절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치욕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역사가 깊고 특이한 전설적인 목조 건물이 있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경치가 좋았다. 하늘로 쭉쭉 곧게 뻗은 아름드리 삼나무가 길 양쪽에 늘어서 있고 모래를 깐 길 오백여 메타는 신성하다고 할까 특별한 정서를 자아냈다.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못 하나 쓰지 않은 순 목조건물인데 개축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색이 찬연했다.
 
“내가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내소사로 왔는데 그때 들은 전설에 의하면 건물을 다 짓고 단청을 유명한 명인과 며칠까지 완성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마감 날짜가 다 되어 가는데 술만 마시고 있어서 애가 타던 대목은 독촉을 했고 그때마다 계약일 안에 일을 끝내면 되지 않느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합니다. 마감 삼일을 남겨 놓고 안에서 일을 할 테니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놓았답니다. 못 보게 하면 더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 아닌가요. 궁금증이 나서 누군가가 마지막 날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답니다. 입에 붓을 물고 바쁘게 그림을 그리던 학이 그만 날아가 버렸대요.”
 
전설을 들려주던 스님이 대웅전 문을 따고 안에 들어가서 저기만 그림이 빠졌다고 손으로 가리켰다. 나무토막 하나가 나무색 그대로였다. 지금도 있는가 하고 문고리를 당겼는데 잠겨 있었다. 내소사는 크지 않은 절인데 수백 년 묵은 고목도 있고 뒤 바위산과 어울려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작은 항구 곰소
 
곰소로 갔다.
 
“1950년 10월로 기억됩니다. 카츄샤 병단하고 변산 빨치산이 합동으로 여기 지서를 해방시켰습니다. 경찰들이 배로 달아나서 못 잡았네요.”
 
송계채 동지가 설명했다. 계채 동지는 카츄샤 병단과 함께 변산에 왔다가 곰소 작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저기 섬이 있잖아요? 1950년 10월인가, 12월인가에 변산 빨치산이 중선 두 척을 나포하고 섬에 가서 재정사업을 했습니다. 총격전 끝에 중선을 나포했기 때문에 변산 빨치산이 해상작전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부안 동지가 설명을 했다. 우리는 곰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밥값은 서울이나 같은데 어촌이라 해산물이 밥상에 푸짐했다. 곰소는 작은 항구로 줄포항이 수심이 낮아져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 커질 법도 한데 예나 별로 다른 것이 없어보였다. 다만 젓갈이 전국적으로 알려져서 젓갈전문점이 여러 군데 있었다. 젊은 일꾼들이 선생들의 몫까지 갈치속젓 여러 통을 사들고 왔다. 우리는 곰소를 떠났다.

유형원 선생의 공적비
 
우동리에서 실학파의 시조 반계 유형원 선생의 공적비를 둘러보았다. 유형원 선생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막아서 개간한 후 소금을 굽고 뽕나무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널리 보급시켰으며 인민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헌신하셨다고 한다. 경건하게 경의를 표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민중의 편에서 민중과 더불어 살아온 불멸의 일꾼들이 있었다. 설령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지라도 애민애족의 정신은 영원토록 계승될 것이다. 유형원 선생의 공적비 주위가 너절해서 덜 좋았다. 우리는 내변산으로 방향을 잡고 떠났다.

결혼 삼일 전에 호식당한 처녀
 
1948년인가 9년에 처녀가 호식을 당한 우동리 윗부락을 지나면서 당시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결혼식을 삼일 앞둔 처녀가 해질 무렵에 울타리 밖 우물로 물을 길러 나갔는데 물동이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에 놀란 가족들이 사립문 밖으로 뛰어나가자 물동이는 박살이 나 있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은 호랑이가 채간 것이라고 횃불을 들고 밤새 주변 산을 오르고 내리며 찾았지만 못 찾고 다음날 그 다음날에 찾았단다. 살은 다 뜯어먹고 뼈와 머리카락과 옷가지만 흩어져 있어서 유골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상여 뒤에 상주로 총각이 따라갔다는 기사를 읽고 애석하게 여겼다.
 
나는 어려서 변산호랑이 이야기를 들었다. 호랑이는 불을 무서워해서 횃불을 들고 가면 범접을 못했고 산 위에서 앞발을 사람손처럼 쓰는 호랑이가 밑으로 지나가는 나무꾼들에게 흙을 집어 던졌다는 이야기며, 변산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던 아낙들이 호랑이 새끼를 고양이 새끼인 줄 알고 귀여워서 쓰다듬고 있는데 어미호랑이가 어흥 하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치다가 고무신 한 짝을 떨어뜨리고 왔는데 그날 밤 호랑이가 고무신을 집에 갖다 놓았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내변산으로 직소폭포를 거쳐서 내소사에 간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길 양편에 나무가 꽉 들어차서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인적미답의 어느 골짜기에서 키만한 댓닢이 바다로 흘러나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변산에 호랑이가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변산 안으로 큰 길이 뚫리고 포장이 되어 있어서 차량 왕래가 빈번했다. 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도적바위라는 푯말이 있었다. 우람한 바위다. 밑에 굴이 있다. 전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의적 근거지인데 출구가 일곱 군데에 있고 안에 굴이 거미줄처럼 뚫려 있어서 관군이 와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가까이 보기만 했다.

덕성봉 아래 매복작전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꽤나 꼬불꼬불하다. 재 위에 차를 세웠다. 화창한 날에는 도적굴 위에 산도 좋고 내변산 일원이 장관인데 가는 비가 와서 아쉽게도 비디오카메라에 담아내지 못했다. 재를 넘어가자 오른쪽에 골짜기를 막아놓은 둑이 보였다. 옛날에는 없었고 골짜기가 꽤 깊었다고 한다. 입산 초기에 동진면당, 주산면당, 상서면당, 하서면당이 있었던 곳이란다. 두 분 숙부님과 당숙, 고향 분들이 있었던 곳이라 가보고 싶었지만 물에 잠겨 있고, 먼발치에서 살펴보았다.

왼쪽에 덕성봉이 우뚝 솟아 있다. 1951년 10월에 왜가리부대의 꼬리를 물고 오던 경찰들을 재를 넘은 일부 동무들이 신속하게 덕성봉을 장악하고 산 밑에 매복했다가 이 골짜기에서 거의 전멸시켰다고 한다. 변산 빨치산 나동혁은 엄청나게 볶아대는 총성은 들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 사살이나 전리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내변산의 절경
 

   
▲ 아버님과 형님이 활동했던 내변산에서 필자.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내변산 깊은 골로 들어갔다. 아! 참 좋다! 아름답다. 처음 와보는 젊은이들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정부영이 차를 천천히 모는 곳에서는 으레 김영진은 차를 세우고 앞뒤로 뛰어다녔다.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에서 고운 모습을 찍기 위해서였다. 가랑비가 오다가 멎다가 안개비가 되기도 하고, 위는 운해가 덮고 도드라진 부분만을 보여주는가 하면 안개가 아래를 가려 놓고 우람한 돌산, 잘생긴 봉우리를 보여주었다. 절경은 맑은 날 보아도 좋고, 비 오는 날 안개비 장막을 통해서 보아도 좋다. 독특한 정감에 젖어들었다.

우리는 사자동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들어갔다. 왼쪽에 청춘봉과 시루봉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변산 빨치산이 자주 오르내렸던 산이란다. 실상사 옛 터에 푯말이 서 있을 뿐 잡초가 무성하고 집 세 채가 빗속에 호젓했다. 우리는 더 걸어 나갔다. 내를 건너는 나무다리 위에서 동무의 설명을 들었다.

내변산 매복 작전

“여기서 변산 빨치산이 매복을 했어요. 선발대를 보내놓고 경찰 80여 명이 들어오는 중간에서 지뢰를 챘는데 불발되었어요. 지뢰 폭발과 동시에 공격하기로 되었는데요. 좀 늦었습니다. 거의 다 보내놓고 기습했습니다. 소총 10여 정에 중기를 노획했답니다. 나는 무장 부대가 아니라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전해 들었습니다. 변산 빨치산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로는 제일 큰 전투였고 전과 또한 많았습니다. 변산 빨치산은 면당 성원까지 합해서 100여 명이었고 자동차 한두 대를 깐다든가 소규모 전투는 여러 번 했습니다. 무장부대는 주로 당을 호위하면서 지방사업을 보장했습니다.”

우리는 매복지점을 돌아보고 나왔다. 아버님과 형님, 형수씨가 활동했던 변산 오지를 걸으면서 당신들이 걸었을 길, 배낭을 멘 빨치산을 그려보면서 혼자 남은 나는? 내 마음을 헤아린 듯 해섭 동지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라는 말에 걸음을 재촉했다.

새만금과 격포 해수욕장

   
▲ 격포해수욕장에서.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차를 타고 내변산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새만금에 가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차는 새만금으로 달렸다. 바다 가운데로 난 차도 중간쯤에서 차를 돌려 세워놓고 비가 오고 바람이 센데도 차 밖으로 나와서 망망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넓은 바다를 막아는 놓았지만 흙으로 메꾸어서 삶의 터전으로 바꿔놓으려면 몇 십 년이 걸릴 것 같다. 국토가 넓어지고 잘 건설해야 할 텐데……. 걱정할 것이 없다. 그때쯤 통일이 안 되겠나? 넓어진 국토에서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곳을 떠났다. 윤구병 선생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공동체에 들르지 못해서 서운했다.

가는 길 초라 격포에 들르기로 했다. 빨치산과는 별로 관계가 없지만 변산에 처음 온 정부영이 보라고 해수욕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억 년 동안 바닷물에 깎여서 들고 난 바위벽에 반들반들한 바위바닥이 바다와 어울려서 그림 같다. 부안군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이다. 김영진은 바닥바위에 대고 바위벽을 찍고 바다와 입체적으로 절묘한 곳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부산했다. 갈 길이 먼 우리는 곧 격포를 떠났다.

줄포 해방작전
 
줄포 미처 못가서 왼쪽에 김영수 동지가 묻혀 있는 소나무 밭을 옆으로 지나면서 못 들러보고 또 좌로는 40골(경찰이 40명을 학살한 곳)이라 부르는 곳도 멀리 바라보면서 지나갔다. 줄포에 갔다. 한재룡 동지가 설명을 했다.
 
“1950년 10월 초예요. 고창유격대 1중대, 2중대가 줄포를 쳤습니다. 줄포 초입에서 집중 사격을 하고 진격했는데 총성을 듣자마자 경찰들은 저항도 않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줄포를 해방시켰습니다. 며칠 후에 2차로 줄포를 기습했는데 장태안 동무를 잃고 철수했습니다. 1차, 2차 모두 김용태 동무가 지휘했는데요, 용태 동무는 참 용감했습니다.”

선운산 유격근거지
 
우리는 흥덕에서 점심을 먹고 선운사로 직행했다. 마침 주차료만 받고 차를 들여보내서 도솔암까지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걸었다. 한재룡 동지가 설명을 했다.

“도솔암은 여승들만 있는 절인데 입산 초기에는 우리 여 동무들이 이 절에서 잤어요. 여승들은 아래 절에 있었구요.”

왼쪽으로 올라가자 우람한 바위에 엄청나게 큰 불상이 음각되어 있었다.

“여기서도 동무들이 많이 잤지요. 비 오는 날은 저 바위 밑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고목이 가득 찬 오솔길로 들어섰다. 돌길 양편으로 기묘한 돌바위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용문골 또한 용이 차고 나가면서 빚어놓은 석문이란 전설의 돌문인데 마음을 빼앗겼다. 작은 굴, 큰 굴을 두루 돌아보고 위로 올라갔다. 능선에 오른 우리는 한재룡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남쪽 세 봉우리 위에 보초를 세워 놓으면 적이 어느 쪽으로 몇 명 정도가 오고 있는지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안전지대에 있던 우리 동지들은 보초의 신호를 보고 이리저리 빠져 나갔습니다. 적들이 골짜기로 들어왔다가는 어김없이 우리 매복에 걸려들어서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래서 적들은 대개의 경우 한두 봉우리 올라와서 총을 쏘고 가버렸어요. 소부대 근거지로는 이만한 곳도 흔치 않습니다. 저들이 이곳을 완전히 포위하기 위해서는 대병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1951년 12월 대공세 때에도 이 지역은 안전했답니다. 1955년까지 고창유격대가 살아남았던 것은 지방조직도 튼튼했지만 지형적인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함께 싸웠던 동무들이 떠오르는 듯 한재룡 동지의 얼굴에 어두움이 스쳐갔다. 나무 그늘 탓일까? 우리는 떠났다. 골짜기에 어두움이 내려앉고 있었다. 차를 타고 참당사에 갔다. 산중에 어둠이 덮어버린 호젓한 절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에 한때 군당부가 있었단다. 한재룡 동지의 설명을 듣고 곧 떠났다.

내장으로 해서 쌍치로 고개를 넘어가는데 밤안개가 길을 꽉 덮어버렸다. 2,3미터 앞이 안 보였다. 옆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늠이 안가는 밤길을 헤드라이트가 비춰주는 차 앞에 중앙선만을 따라서 구불구불 재를 넘었다. 운전대를 잡은 정부영이 진땀을 뺐다. 고개를 넘자 한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쌍치에 가서 한우고기를 굽고 복분자 술을 곁들여서 저녁을 잘 먹었다. 오은미 님의 소개로 피로리 신축 건물에서 자고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떠났다.
 
승리의 밤 문화행사를 가졌던 금산골
 
밤재를 넘었다. 금산골(지금은 금상리로 바뀌었다)로 갔다.
 
“이 능선 너머가 대시멀인데 407연대가 1차 기차 습격을 하고 대시멀에 와서 늘어지게 자고는 오후 늦게 고개를 넘어서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때는 달구지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울퉁불퉁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대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 지역 기관 동무들과 투쟁 인민들이 길 여러 곳에 나와 있었어요.  두 개의 총을 어깨에 메고 중기탄을 X자로 가슴에 두르고 총탄과 포탄을 한 짐씩 진 승리의 부대. 뒤에는 200여 명의 포로와 농민들이 탄알을 무겁게 지고 오는 놀라운 광경에 인민들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함께 구호를 외치며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이 길을 걸었네요. 대열의 끝이 안보였습니다.”
 
차가 금산골에 갔다. 동청 앞에 차를 세워놓고 우리는 승리의 밤 행사를 가졌던 장소로 이동했다. 지금은 밭이지만 그때는 논이었다.
 
“우리 부대가 여기 와서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밑에 내가 있지 않아요? 냇가에서 후방부원들이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있데요. 냄비고 바가지고 그릇을 있는 대로 꺼내서 밥을 푸고 국을 떠서 먼저 농민들과 포로들이 자시도록 했습니다. 그릇이 비는 대로 동무들과 인민들이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둘러앉아서 일꾼들이 정치사업을 했어요. 현 정세와 전쟁의 성격, 의미, 적 후방에서 싸우는 빨치산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때 군인 한 분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산에 빨치산이 6,000명 정도 남아있다고 하던데 여기에 모인 빨치산만 해도 6,000명은 되겠네요.’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밤이 깊었으니 자고 내일 가시라고 하자 모두 집에서 기다리니까 가겠다고 했습니다. 농민은 물론 장교고 사병이고 군복을 입은 그대로 전원을 돌려보냈습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수고하시라고 인사를 하데요. 동무들이 임실 순창간 국도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금산골에 와 있던 분들을 모두 이곳에 집합시켜놓고 간략하게 보고대회를 갖고 오락회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남녀 빨치산과 인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논배미를 오르내리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환희에 찼던 승리의 밤 행사가 떠오릅니다.”

무장한 소년빨치산

젊은 일꾼들이 이곳을 기억해두라고 이르고는 그날 밤 무겁게 짐을 지고 빨치산과 인민들이 걸었던 길로 들어섰다. 여분산 쪽으로 1km 이상 걸은 것 같다. 전에 없었던 보가 나왔다. 날이 가물어서 댐 바닥이 보였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둑 밑으로 내려가서 앉았다. 해섭 동지는 골짜기를 가리키며 저곳에 지방으로 진출할 일꾼들을 양성하던 정치학교가 있었다고 설명을 했다.

   
▲ 김해섭 선생이 정치학교가 있었던 골짜기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계채 동지는,

“앞 능선 밑에 전북도당 남부지도부가 있었고 소년단이 당을 보위했습니다. 열세 살에서 열일곱 살 난 소년들이 무장을 하고 보초를 서고 때로는 전투를 했습니다. 두 명 씩 보초를 섰는데 어떤 사람이 와도 어떤 소개장을 가지고 와도 임의로는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 사령부에 가서 허락을 받아가지고 와서야 들여보냈습니다. 원칙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제가 그때 소년단 정치부 부대장으로 있었는데요, 407연대가 1951년 11월 말에 상운암 해방작전을 하기 위해서 전원이 여분산을 떠났을 때 소년단원들이 여분산과 벌동산을 지켰습니다. 우리 주력이 여분산에 없는 것을 알게 된 경찰들이 비행기 폭격을 하면서 진격해 왔습니다. 소년단 동무들은 말소리는 안내고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407 연대가 상운암을 해방시키고 거점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틀 동안 적들에게 타격을 주면서 거점을 사수했습니다.”
 
당시의 소년단과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단숨에 설명했다. 나도 거들었다.
 
“운암을 해방시키고 돌아와서 벌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소년단 한 개 소대가 있더군요. 소대장이 경례를 부치고 적정 보고를 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우리가 왔으니까 내려가라고 하자, ‘안됩니다. 상부 지시가 있어야 철수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연락병을 중대 본부로 보내데요. 참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어린 소대장이 상운암을 해방시킨 전투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매달려서 벌동산 바위 위에 소년단원들과 둘러앉아 전투과정을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데요. 얼마 후에 연락병이 와서 철수하라는 중대장의 지시를 전하자 소대장은 소대원을 정렬시켜놓고 일제히 ‘경례’를 하고 대열을 지어서 떠나갔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나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어요. 대견했습니다. 그리고 벌동산으로 뻗은 능선 가운데가 평평합니다. 그 너머에 407연대 본부와 각 대대와 중대가 있었습니다. 기차를 습격해서 노획한 총탄을 전남, 경상남북도, 충남에 보내주었는데 전남 예술단원들이 밤으로 걸어서 동무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 능선에서 공연을 했지요. 전남북 동무들이 어우러져서 노래하고 춤추고 휘파람에 하모니카 연주도 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든 금방 친해지지 않습니까? 한때를 즐겁게 보냈습니다.”
 
김영진은 우리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고정시킨 카메라 옆에 쪼그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벌동산 여분산 능선과 골짜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도당학교와 노령학원(군사간부학교)

   
▲ 당학교 및 군사간부학교의 옛터에서.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차를 타고 가마골로 달려갔다. 가마골 초입에서 오른쪽으로 아스팔트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갔다. 경사가 심한 곳에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러 곳에 급커브가 있어서 정부영은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산이 첩첩 눈높이에 추월산이 보이고 담양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김영진은 촬영을 했다. 재를 넘어가자 ‘문화유적 용연리 기와 가마’라는 푯말이 있었다.

우리는 길옆에 차를 세워 놓고 기와굴에 들어가 보았다. 원형이 잘 보존된 가마굴이었다. 눈비에 훼손되지 않도록 굴 위에 하늘을 가리는 건축물을 지어놓았다. 저 밑에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작은 절이 있지만 옛날에 스님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절을 지을 때 절에서 소요되는 기와를 이 가마에서 구워냈다고 한다. 가마골이란 이름이 이 가마굴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었다.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굽어 들어가면 집 서너 채가 보인다.
 
“여기에 전북 도당학교가 있었습니다. 내 건너 대밭 속에 군사간부학교 노령학원이 있었구요. 내가 팔을 부상당해서 치료받고 있을 때입니다. 조철호 참모장에게 다른 일은 못하고 시간이 있을 때 공부하고 싶다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추천장을 써주면서 도당학교에 가라고 하데요. 그날로 오른손은 묶어서 목에 걸고 쌀 몇 되를 배낭에 지고 산에서 찬이라야 소금밖에 더 있어요? 소금주머니를 차고 부대를 떠나서 이곳 도당학교에 왔습니다. 대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이엉을 두른 교실 겸 침실로 들어가자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추천서를 드렸더니 읽어보시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데요. 당학교 교장선생님인데 흰 종이에 이름과 생년월일이며 고향을 물어서 적고 입당연월일을 묻잖아요. 어리둥절했습니다. 당원이 아닌데 입당연월일이 있겠어요? ‘아직 당에 입당 못했습니다.’ ‘그래요’ 음성을 낮추었지요. 나를 보면서 웃는 듯 마는 듯 ‘여기는 당원만 다니는 학교입니다.’ 자격미달이라 돌아가라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게도 몰랐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거절하면서 나이어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던 선생님의 말과 자세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있네요. 어깨가 축 늘어진 나는 부대에 돌아갔습니다. 참모장 동지에게 경위를 말씀드리자 웃으면서 ‘아니, 당원이 아니었나? 곧 입당 수속을 밟으라고 했습니다. 입학기라서 때를 놓치면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 군사간부학교라도 가겠다고 하자 잠시 생각하다가 추천장을 써주었습니다. 실은 군사간부학교 입학 자격이 안 되었어요. 각 부대에서 분대장급이 추천을 받아서 학교에 가고 학교를 마치고 오면 소대장으로 배치되었어요. 나는 지대장이라 당연히 입학 자격이 없는 거지요. 그러나 부상당해서 쉬고 있고 또 배우려는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통과되었습니다. 그날로 이곳에 왔어요. 저 대밭에 학교가 있었어요. 사십여 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했습니다. 학생들을 1개 중대, 3개 소대로 편성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지요. 아침에 체조를 하고 소대단위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낮에 배우고 밤에는 복습을 했습니다. 전원이 무장부대에서 온 전투원이라 군사훈련은 별도로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과목은 해방 후 조선 정치경제학, 철학, 소련당사, 유격전술을 배웠습니다. 당학교 선생들이 가르쳤고 유격전술은 사령부 참모장 조철호 동지가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속전속결, 성동격서, 적진아퇴, 피실격허, 신출귀몰 등의 유격전법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부대간부들은 지리에 밝아야 하고 특히 산악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참모가 되어 대대, 연대, 사단 단위로 공세를 취할 때 어느 곳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어느 능선을 타고 들어와서 어디서 총공격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그에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적을 치고 빠질 것인가, 그리고 적이 어느 골짜기로 빠져나갈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어디에 매복하고 있다가 섬멸전을 수행할 것인가 한 수 앞을 내다보면서 작전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습전, 매복전, 조우전, 도시해방작전, 정찰교란전, 신경전, 소모전, 위장전술 등 다양한 전법을 경험과 곁들여가며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적의 지휘관이나 참모의 경력, 수준, 성격과 장단점을 알아내는 것은 작전을 세울 때 참고하기 때문에 군사 분야에서는 중요한 정보가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강의할 때마다 군사부대이며 정치부대인 빨치산은 인민성과 정치성을 망각하지 말라. 치고 빠지는 것이 유격전의 기본이기 때문에 언제나 퇴로를 보장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과목은 거의 잊었는데 유격전술만은 재미있게 들어서 그런 것인지 부대에 돌아가서 유격전술을 강의해서 그런 것인지 지금까지도 머리에 꽤 남아 있습니다. 나는 노령학원을 졸업할 때 교수회의에서 군사간부보다는 정치간부로 키우는 것이 좋겠다는 총평이 있었고 졸업하고 얼마 후에 기포병단 407연대 2대대 정치부 부대대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좀 길게 설명을 했다. 대밭이라 죽순을 뽑아다가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서 국을 끓여 먹던 일, 다 잊고 몇 사람이 떠오르지만 함께 공부했던 동무들, 점심을 먹고 돌다리를 건너 의무과에 가서 상처를 치료받던 일이며 배옥순 동무가 떠올랐다. 이곳에 올 때마다 옛 정서에 푹 빠져들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날도 우리는 곧 차를 타고 오던 길로 되돌아나갔다.

후방부가 기습당한 내장산

   
▲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된 내장산에서.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내장산으로 가다가 잠깐 외양실에 들렀다. 입산 직후에 동무들이 많이 있었던 곳이란다. 김해섭 동지가 설명을 했다.
 
“1950년 12월부터 51년 2월까지 외양실에 있었습니다. 후방부대인 지리산부대(부대장 리장범, 부부대장 김정욱) 3중대 분대원으로 일했습니다. 산외면, 산내면에서 수매한 곡식을 날마다 이곳으로 날라다가 비장했습니다. 나중에 군당 후방부가 있는 내장산으로 옮겼구요.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던지 입산할 때 입고 온 양복을 속에 입고 다녔는데 그게 다 삭아버렸어요.  2월 10일 입당. 나는 1951년 2월까지 등짐을 져 나르다가 부대 개편으로 51지대 1소대 문화부 소대장으로 배속되었구요. 1951년 6월부터 연대 문화부 선전선동 지도원으로 전속. 10월경부터 정치학교에서 두어 달(15일간인데, 공세로) 교육받았습니다. 1951년 12월 군당에 복귀. 2중대(무장 비무장 정치공작대)에 초급정치지도원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내장산으로 떠났다. 날이 몹시 추웠다. 다행히 주차비만 받고 차를 들여보내서 대웅전 앞까지 달렸다. 세찬 바람을 받으며 송계채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1951년 봄으로 기억되는데요. 무장부대가 사업차 내장산에서 나간 틈에 경찰들이 새벽 5시에 들어와서 후방부를 기습했습니다. 들어온 코스도 그렇거니와 그들이 어떻게 후방부 트를 알아서 은밀하게 포위공격을 했겠습니까? 대내 첩자로부터 후방부의 위치와 초소, 노출되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루트를 제공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날 수많은 동무들이 죽고 생포되었답니다. 경찰들은 내장사에 불을 지르고요, 지금의 대웅전이나 주변의 집들은 다 전쟁 후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그 외에도 의문이 가는 적의 매복에 몇 동지가 죽고요, 틀림없이 대내에 첩자가 박혀 있다고 경각성을 고도로 높이고 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히더라고 첩자들이 경찰과 내통하는 것을 잡아냈답니다. 놈들을 없앤 후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정읍경찰서 습격

우리는 서둘러서 떠났다. 정읍 시내를 바라보면서 김해섭 동지가 입을 열었다.

“1951년 초여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정읍 기관들이 쌍치면 북실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상부로부터 점심을 단단히 먹고 대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모이라고 하데요. 4개 지대 200여 명, 군사부장과 각 참모들이 열을 지어서 정렬했습니다. 어느 참모인지 기억이 없습니다만 오늘밤 전투에서 매개 동무들은 일당백의 기세로 적을 무찌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고 전원이 팔에 흰 띠를 감고 흰 수건을 허리에 차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두 시경에 출발했어요. 합법지구이지만 거리 보장을 하고 행군했습니다. 대열이 꽤나 길데요. 서너 시간 걸어서 칠보산에 다다랐습니다. 쉬면서 어느 참모가 오늘밤 전투 목표는 정읍경찰서, 목적은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무들을 석방하는 것이며 공격로와 진격방법, 군호, 작전 개시 신호, 퇴각 신호, 집합장소 등등을 알려주었습니다. 산 너머가 적구라 우리는 산을 기다시피 넘었습니다. 산그늘에 몸을 숨기고 행군했지요. 날이 어두워진 후에 제 1 관문인 전주 정읍 간 기동로를 은밀성을 보장하며 신속하게 넘었습니다. 정읍농고 뒷산에 가서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46사단과 합동작전을 했어요. 사단병력은 우수한 화기로 경찰서 정면을 치고 정읍부대는 측면과 후면을 치고 들어가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무들을 구출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전투 개시 시간은 밤 10시로 알고 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고도의 경각성과 긴장 속에 농고 뒷 고개를 넘었습니다. 가정집 불도 켜지고 군데군데 가로등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동무들은 고샅길을 숨을 죽이며 속보로 걸었습니다. 막 여중고 서문에 도착했을 때 오발인 듯 총성이 울리고 이어서 콩 튀듯이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명탄이 오르고 누군가가 조발된 모양이라고 투덜댔습니다. 지체 없이 지대장은 ‘1소대, 2소대, 3소대 돌격! 돌격! 돌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중 담장 밑으로 참호 세 개가 있고 뒤켠에 도치카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여중 참호를 점령하고 보루대 총구를 제압했습니다. 그 사이에 세 동무가 경찰서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경찰서 서쪽 교문으로 총탄이 비 오듯 날아왔습니다. 경찰서 옥상에서 중기를 갈겨댔어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퇴각 신호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두 동무의 시신을 적구에 남겨두고 적의 중화무기가 잠깐씩 멈출 때 위험지구를 빠져 나왔습니다. 경찰서에 들어갔던 세 동무 중에서 두 동무는 담을 넘다가 총을 맞아 전사하고 한 동무는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집결장소에 온 동무들은 분을 삭이며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정읍 해방지대와 강철지대 등은 시내에 산재해 있는 도치카와 참호, 소방서 등을 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다음날 지대별로 총화를 지었습니다. 맹호 지대에서 1소대장 3소대장을 잃었으며 두 동무의 부상자를 냈을 뿐 아니라 사단 연대장도 잃었습니다. 실패 원인은 첫째로 합동작전은 손발이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둘째로 사단 측에서 포로 정면을 치고 들어가기로 했는데 지휘관의 전사로 포기했고 후퇴신호가 있기 전에 퇴각했으며, 셋째로 전투개시 신호 전에 조발되어 기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정읍을 쳤는데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김해섭 동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다 왔단다.

행군하다가 트럭을 까고 총탄 수만 발을 노획하다

정읍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룡마을 앞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해섭 동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딱 60년이 되었네요. 1951년 봄 어느 날인데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100여 명이 저기 보이는 칠보산에 와서 산그늘에 은신하고 있다가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내려왔습니다. 마을 뒤 능선에 짤르막이 보이지 않아요? 그곳으로 넘어왔습니다. 후비를 담당한 우리가 마을 옆으로 논을 지나서 이 길을 막 넘는데 북면 쪽에서 차가 온다는 전달이 왔습니다. 그날 김정규 지대장이 부대를 지휘했는데 행군을 중지시키고 신속하게 무장 부대를 길 양쪽에 배치했습니다. 20여 미터 북면 쪽에 있는 고개를 차가 불을 켜고 넘어왔습니다. 무척 긴장이 되데요.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차가 우리 앞을 지나 하수로가 통하고 있는 낮은 곳에서 머뭇거릴 때 돌격 총성이 울렸습니다. 동무들은 일제 사격을 퍼붓고 돌격을 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운전수는 달아나고 트럭 위로 몇 동무가 올라갔습니다. 아! 이게 어찌된 횡재입니까? 거적 섬 세 가마니에 총탄이 가득하고 수류탄이 한 가마, M1, 다연발총, 칼빈 총 한 다발이 있었습니다. 총이다! 신탄이다! 차 위의 동무들이 외쳤습니다. 지대장은 정읍 쪽, 두 동무는 북면 쪽으로 100미터쯤 가서 위협사격을 하고 두 동무는 수롱목, 두 동무는 우두암  산판 길에 가서 귀로를 보장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비무장 전원에게 노획물을 지워 보낼 때 10여 명마다 무장한 동무 한 명씩 붙여서 엄호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동무들은 신속하게 움직였지요. 몇 동무가 더 차에 올라가서 내미는 배낭마다 총탄을 담아주고 배낭을 받아 쥔 동무들은 대열을 지어서 연달아 떠났습니다. 후비를 담당한 동무들이 차에 불을 질렀습니다. 흩어진 총탄이 콩 튀듯 하데요. 참 아깝데요. 부상자 한 명 없이 빨치산에게 생명과도 같은 총탄 수만 발이 생겼으니 안 좋겠어요? 온통 내 세상 같았습니다. 안전지대에 가서는 무거운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데 거점에 있던 동무들이 중간까지 마중 나왔더군요. 서로 얼싸안고 좋아했습니다. 그 동무들이 배낭을 넘겨받아서 지고 자동차 깐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지대장 동지가 연락병을 통해서 지도부에 승전 보고를 먼저 했답니다. 거점 앞까지 당 간부들, 군사 간부들이 나와서 끌어안고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한잠 자고 다음날 오락회를 가졌습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전투 총화를 가졌는데요. 호되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만일에 무장병이라도 차에 타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겁했다. 벼락같이 돌격했어야지.’

‘예, 비겁했습니다. 좀 두렵고 당황해서 주춤거렸습니다.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라고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탄과 수류탄을 외봉쳤기 때문에 가슴이 뛰었지만 내놓으라고만 했지 곱게 보아주었습니다. 총잡이는 무기 욕심이 있어야 한다면서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라고 하던가? 하여간 공세를 미연에 막고 우리 무력을 강화했으니 이중성과를 거둔 것이지요.”

해섭 동지가 말을 마치자

“그건 거저 주운 것이지요.”

“손 안 대고 코 풀었네요.”

한마디씩 하고 모두 좋아서 웃었다.

죽음 직전 동지와의 대화

   
▲ 돌아가시기 직전의 윤성남 선생.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태인에 가서 점심을 먹고 익산으로 갔다. 윤성남 동지가 암으로 입원하고 있는 노인요양병원에 가서 병실을 찾았다. 윤성남 동지가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병실에는 부인과 유영쇠 동지가 있었다. 자기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윤성남 동지는 동지들의 부축을 받아서 일어나 앉았다. 동지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내가 젊은 일꾼들을 소개하자 찾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 더 이상 불가항력이야. 웃으면서 가겠어.”

“그래. 산에서 함께 싸웠던 수많은 동지들이 시집 장가도 못 가보고 안 갔는가? 그 점을 생각하면 성남 동지는 오늘날까지 열심히 활동을 했고 장가 가서 아들, 딸 낳고 자식들이 삐뚤어지지 않고 잘 살고 있지 않나? 통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마음 편하게 있다가 가. 남기고 싶은 말은 정신이 맑을 때 유영쇠 동지에게 전하거나 녹음이라도 해 놓고.”

동지와 마지막인가? 울컥 목이 메었다. 성남 동지의 눈에 물기가 번져 왔다.

“누구 못지않게 살았는데 산에 있을 때 죽음 앞에서 어떻게 죽어야 하나. 가끔 생각 나. 공세 때 해제는 안 되고 뚫고 나아가야 하겠는데 길은 없지, 삼일 동안 굶고 나왔더니 해가 중천에 떠 있더구만. 굳은 결심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가족이 있지 않아? 돈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돈의 노예가 되어 죽는 거야. 열심히 한 결과가 뭐 있어?”

“동지들과 후손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

정부영이 윤성남 동지의 손을 부여잡고 호소하듯 입을 열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해. 동지에 대한 애정 없이는 절대 사업할 수 없어. 동지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사람은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면 아니야. 많이 느꼈어. 선후배님들이 해온 것 보면 모범적으로 아주 좋은, 기적적인 것도 있고 총살장에 들어갔을 때 끝까지 고난을 헤쳐 나갔을 때 이 세상 절세 애국자들을 누가 알 것인가? 남 다 잘 때……. 자부심을 갖고 이 고비를 넘기면 반드시 승리가 와. 님에게 못 다한 것이 죄스럽네. 동지들 외에는 내 주변에 내 편에서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 반드시 웃으면서 갈라네.”

말이 토막토막 끊어지고 가다가 연결이 안 되었지만 저번에 왔을 때보다 의식은 나은데 몸은 철골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같다. 동지의 손을 두 번 세 번 만져보고 병실을 나왔다. 집에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비쩍 마른 윤성남 동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스러지고 또 떠올랐다. 글 쓰는 지금 성남 동지는 땅 속에 묻혀 있다. 명복을 빈다.

 

 

임방규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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