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이미 우리는 통일이었다

1992년 12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와 관련한 국제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그 회의에 호주에 살고 계시던 네덜란드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피해자들과 남북의 피해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날 공청회장은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면서 토해내는 고통과 분노의 울부짖음으로 채워졌고, 피해자들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에 참가자 모두가 함께 절규하였다.

남북 피해자들의 발언 차례가 되었다. 먼저 북녘의 김영실 할머니가 단상에 올라 중국지역의 일본군위안소로 끌려가 ‘아이코’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리며 일본군들에게 강간당한 피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때 남녘 참가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나도 아이코였어” 외치며 강순애, 황금주, 이옥분 할머니와 함께 단상으로 올라갔고, 그 곳에서 남북 피해자들은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단절되었던 남북의 모습이 그 단상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고, 상처투성이인 한반도의 역사가 그 피해여성들이 껴안고 통곡하는 모습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엔이 주최하는 세계인권회의가 열렸다. 남녘에서도 국가보안법문제 등 인권문제를 안고 단체들이 참여하였고, 김복동 할머니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함께하였다. 북녘에서는 장수월 할머니와 함께 당시 종태위(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현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함께하였다.

그 곳에서 남북의 두 할머니는 일본군성노예로서의 뼈아픈 경험을 증언했다.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킨 남북 피해자의 연대에는 이미 분단의 장벽이 제거되어 있었다. 아직도 두 분이 회의장 복도 바닥에 앉아 위안소에서부터 피기 시작했다는 담배를 피며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누던 정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4년 5월, 서울에서 일본의 과거사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 북에서 홍선옥 종태위 위원장과 리상옥 할머니 등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북녘 대표단이 회의장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남녘의 길원옥 할머니께서 리상옥 할머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 만난 두 분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사이처럼 손을 잡고 한동안 서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 속에서 역시 분단은 제거되어 있었고, 이미 통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9년,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었다. 단절되었던 시간에 북녘의 김영실 할머니도, 리상옥 할머니도, 장수월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임신한 ‘위안부’의 역사사진의 주인공인 박영심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북녘에 생존해 계신 피해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남녘 할머니들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이코야” 하며 김영실 할머니를 부둥켜안았던 김학순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강순애, 황금주, 이옥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김복동 할머니는 마지막 생애까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거리에서의 싸움을 계속하고 계시고, 암투병중이시다.

열세 살에 평양에서 끌려가며 집을 떠난 후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신 길원옥 할머니는 어제 일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남북의 피해자들이 부둥켜안고 통곡했던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아베 일 총리는 자기 입으로는 털끝만큼도 사죄할 생각이 없다는 일본 국회에서의 발언에서 1mm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 다시 남북 연대를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연대는 1991년 5월 31일,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남북 여성의 교류활동에서 시작되었다. 남북 여성들은 46년간의 분단의 벽을 넘어 만났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차 심포지엄에서는 ‘일본 정부가 부인하고 있는 조선인 여성에 대한 종군위안부 문제는 민족차별, 성차별에 전쟁의 폭력이 겹친 무서운 국가범죄’라고 규정하고, 일본정부에게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배상을 실행할 것’을 성명에 담았다. 1991년 11월 25~30일 서울에서 제2차 토론회가 열렸고, 다시 1992년 9월 1-6일까지 평양에서 제3차 토론회로 이어져 갔다. 특히 평양토론회에서 남북 일본여성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남과 북, 일본 여성들이 함께 연대하며 실천해 나갈 것을 공식적으로 합의하였다.

1993년 4월 24-29일, 다시 일본에서 개최된 제4차 토론회에는 남녘에서 김복동 할머니와 북녘의 정문복 할머니가 함께 참석하여 증언을 하며 피해자와 남북 일본여성들의 연대가 본격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발표되면서 이 모임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남의 정대협과 북의 종태위의 연대는 계속되었다. 서울 혹은 평양 등 직접 우리 땅에서 만나기도 했고, 때로는 독일 등 유럽에서, 유엔활동 및 아시아연대 활동 속에서 공동성명을 채택, 발표하는 등 한 목소리로 일본정부에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범죄인정과 사죄, 배상 등 법적 책임 이행을 요구했다.

2000년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때에는 남북공동기소팀을 구성하여 하나의 코리아로 목소리를 냈다. 그 연대 속에서 남북의 피해자들은 함께 만났고, 만나면 늘 분단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늘 만나오던 이웃집 사람들이 함께 만난 것처럼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격려하며, 북녘의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남녘의 할머니가 그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손을 잡고 왔다.

그렇게 연대를 하며 확인한 사실은 해방 후 남녘에서 살아왔지만 고향이 북쪽이신 분들, 북쪽에 살고 계시지만 고향이 남쪽이신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설마 분단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도착한 땅에서 여비라도 마련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착한 곳에 그대로 묶여버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성노예제로 인한 상처뿐 아니라 이산의 아픔까지 안은 채 살아오고 있었다.

길원옥 할머니는 분단이 된 후에도 집으로 가는 길이 금방 열릴 줄 알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때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든지 부모형제지간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돈 버는 일에만 집중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귀하게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하나도 못 갚아 드리고...” 길원옥 할머니가 언제쯤이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기 전 살았던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가슴에 맺혀있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할 수 있을까?

봄이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 그 겨울이 지나고 한반도에 봄이 왔다. 지난 겨울이 추웠던 만큼 지금 맞이하는 봄이 너무나 귀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일본의 아베 총리는 여전히 봄이 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부정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만들었던 2015한일합의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버티고 있다.

일본이 봄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난 73년 동안 피해자들을 괴롭혔던 역사 부정과 은폐, 책임 회피에서 벗어나 일본군성노예 문제에 대한 범죄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자료공개와 진상규명,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책임자처벌 등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회복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이것은 북일 수교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실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유엔이 정하고 있는 인권침해 피해자에 대한 완전한 원상회복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길원옥 할머니와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갖고 산 피해자들에게 일본군성노예제 범죄의 해결, 원상회복조치는 바로 피해 이전의 상태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어떤 그 무엇을 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할머니들도 절규한다. “일본이 사죄한다고, 일본이 배상금으로 일본의 땅덩어리를 다 준다한들 내 청춘이 돌아오겠어?”

이제 남은 과제 바로 통일이고 한반도의 평화이다. 피해자들이 자기의지로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분단의 장벽을 걷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해방이고, 우리가 함께 누려야 할 봄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