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출발

2010년 9월 11일 차가 막혀서 예정시간보다 늦게 10시 20분에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우리는 출발했다. 김동섭 동지, 장윤규 동지, 송세영 동지와 나, 차를 몰고 온 정부영, 카메라를 멘 김영진. 여섯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눈은 차창 밖으로만 향했다. 가을인데 웬 놈의 비가 장마철처럼 날마다 오는 것인지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다가 가는 비로 바뀌었다. 수원을 지나고부터는 비에 가렸던 먼 산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비가 갰네.”
 
연일 비가 와서 계획을 변경할까 하다가 강행한 터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논산에 사는 손경수 동지를 모시고 식당에 갔다. 구수한 청국장에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하면서 나는 손 동지에게 두 젊은이를 소개했고, 송세영 동지는 손경수 동지를 소개했다.
 
“손경수 동지는 일제 때 지주였는데 삼촌들이 반일운동을 하셨고, 해방 후에 삼촌과 형님들이 전선에 나와서 싸우다가 돌아가셨어요. 토지도 소작인들에게 다 나눠주고요, 아버님이 한학자였습니다.”
 
“감옥에 계실 때 순한문으로 부자간에 편지가 오갔고 서로가 쓴 한시를 평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강경경찰서 습격. 300여명의 동지들을 석방시키다 

▲ 충남 빨치산 고 손경수 선생.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곧 강경으로 떠났다. 강경경찰서 앞에 차를 세웠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우산을 받쳐 들고 손경수 동지와 송세영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1950년 11월 9일이네요. 백두산부대(곽해봉부대라고도 함)가 2개조로 나누어, 주력이 강경경찰서를 기습했습니다. 경찰의 저항으로 담을 넘지 못하고 경찰서 옆에 동지들을 가두어 둔 창고를 점령하여 300여 명의 동지들을 석방했어요. 고문과 굶주림으로 걸음도 잘 못 걷데요. 부대를 따라와서 입산한 분들은 2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한 조는 강경역사를 소각하고 호남선을 폭파하여 철도교통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날 밤에 의약품과 신발 공작을 꽤 했답니다. 강경은 들 가운데 있잖아요.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나 있고요, 머뭇거릴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그날 이한용 동지가 총지휘를 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급습을 했고 신속하게 빠졌습니다. 우리 희생은 없었답니다.”
 
그날이 떠오르는 듯 손경수 동지의 말 속에 힘이 묻어나왔다. 차는 강경을 뒤로 하고 떠났다.
 
얼마를 달렸을까. 큰 산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송세영 동지가 차를 세웠다. 지난날의 구자곡면 소재지였다.

구자곡면 해방작전
 
“1950년 11월 7일이 소련혁명 기념일입니다. 백두산부대와 논산군 유격대와 호남부대가 합동으로 급습해서, 보루대와 지서를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우리 희생은 없었답니다. 경찰 수십 명을 생포하고 유치장에 갇혀있던 동지들 10여 명을 구출하고는, 지서를 소각했습니다.”
 
지서가 있던 옛터에 콩이 무성할 뿐 집은 없고 작은 부락으로 줄어들었단다. 송 동지는 고향마을, 어려서 다녔던 소학교를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김영진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카메라를 조준했고 또 주위를 카메라에 담았다. 차가 출발했다. 구자곡면 소룡리 앞에 멈췄다.

민주부락 소룡리 인민들
 
“이 마을은 동지들의 칭찬이 자자했던 민주부락이었습니다. 구자곡면 지서를 해방시킨 부대가 소룡리에 집결했는데 마을 어른들이 돼지와 닭을 잡고 환영했습니다. 부대들이 소룡리에서 하루를 쉬고 1950년 11월 9일 강경을 쳤네요. 70호 남짓한 마을에서 보도연맹으로 5명이 학살되고 9.28후퇴 후에 경찰에게 여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의용군으로 나갔던 3,4명이 북으로 가고 30여 명이 입산했습니다. 두 집중에 한 집이 우리 유가족입니다.”
 
살아남은 분들은 뿔뿔이 헤어져서 지금은 없단다. 생채기를 건드린 듯 아픔을 안으로 새기며 떠났다. 차가 구불구불 감돌아 오르는데 김영진이 차를 세웠다. 비를 맞으며 빗속의 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는 길에 전북 완주군 화산면 범어리에 잠깐 들렀다.
 
“이곳은 충남 남부블록과 논산군당과 산하기관과 호남부대가 있었고 전북 익산군당과 익산유격대, 익산시당, 옥구군당이 1950년 후퇴 후부터 1951년 1월까지 있었던 곳입니다. 전북 572부대도 잠깐 와 있었구요.”
 
송세영 동지의 설명이었다. 장윤규 동지가 입을 열었다.
 
“남진하던 인민군대와 중국 지원군을 마중하기 위해서 저 앞산에 우리가 한동안 와있었습니다. 산상에서 보면 강경평야가 한눈에 보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남으로 내려가는데 끝이 없었어요. 그때 참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떠났다.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에 갔다.

미군 연대기를 노획한 완창리 매복작전 
 

▲ 미군 연대기를 노획한 완창리 매복작전을 설명하고 있는 고 송세영 선생. [사진제공-임방규]

“완창리는 전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에서 논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입니다. 1950년 10월 2일이네요. 완창리를 통과하던 미군연대 지휘부를 우리 매복부대가 기습해서 연대기가 꽂혀 있던 지프차를 비롯하여 여러 대의 차량과 무기를 노획했고 연대기를 빼앗았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연대 병력과 지휘부가 별도로 이동했던 것 같습니다. 미군 병력은 없었고 지휘부만 녹아났답니다. 연대기가 낡아서 너덜너덜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연대가 아닌가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획한 연대기를 충남에서 가지고 다녔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부대가 잠복했던 곳이 여긴가 저긴가 당시의 전투정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역사적인 곳, 완창리를 떠났다. 운주면 용계원에서 차를 세웠다. 송세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이곳은 1950년 12월 10일경부터 1951년 1월 17일까지 충남도당 도사령부와 도 기관들이 거점으로 사용했던 부락입니다. 일제시대에 한지를 생산한 고장이었고 산간부락이면서도 부촌이었습니다. 1951년 1월 14일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충남도당 주최 하에 개최되었어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참모부 일꾼들의 경각성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고지에 부대배치를 늦게 했어요. 그 짬에 경찰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용케도 신속하게 반격했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습니다. 도당위원장 박우연 동지는 있지도 않은 여러 부대를 호칭하면서 동서로 포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겁먹은 경찰들이 퇴각함으로써 희생 없이 무사했지만 외곽방어선인 운주면 영평부락에 있던 압록강부대가 같은 시간에 기습을 받아 약간의 피해를 입고 철수했습니다.”

배팃재. 임진왜란 당시에 황진 장군 휘하의 의병들이 왜적 수백 명을 사살한 곳
 
송세영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들은 차에 올랐다. 산골이라 굽이굽이 감돌아 배팃재 정상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당시에 대승을 거둔 전승비가 있었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 주력부대가 곡창지대인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서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는 것을 황진 장군 지휘하의 의병들이 결사전을 전개하여 왜적 수백 명을 사살한 곳이다. 왜적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수많은 병력을 잃고 기가 꺾인 왜적은 결국 호남진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남해바다에서 이순신 장군 지휘하의 수군이 왜적을 막아냄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냈다. 왜적이 전 국토를 유린했지만 군량미를 현지에서 조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임진왜란에서 패하고 말았다. 조국을 침범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한 몸을 바친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님들께 깊이 경의를 표했다. 조국을 목숨으로 지켜낸 선열들, 그 불같은 애국의 얼을 면면히 이어가는 우리 민족은 일부 분자들이 외세와 결탁할지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을 지켜낼 것이다.
 
비가 오는데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배팃재를 떠났다. 논산군 벌곡면 수락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몸이 불편한 손경수 동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온이 뚝 떨어져서 한기가 들었다. 아직 때가 이르지만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송세영 동지가 입을 열었다.

미군과 여러 날을 싸운 수락리
 
“1950년 말에 충남도당이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곳 수락리로 들어왔습니다. 마을 앞 아름드리 정자나무는 60년 전과 같네요. 충남부대가 유일하게 이곳에서 미군과 여러 날을 싸웠습니다. 빼앗긴 연대기를 되찾기 위해서인 것 같았어요. 잠자리 비행기로 정찰도 하고 기관총을 쏘아댔을 뿐 아니라 주변 고지에 올라오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충남 빨치산은 미군과 접전을 했고 저들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수제비 한 그릇을 비우고 수락리를 떠났다. 날이 어두어서야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느팃골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냇가 여기저기에 집들이 보였다. 차 안에서 송세영 동지가 설명하였다.

충남 빨치산 근거지 노팃골 
 

▲ 빨치산 충남 근거지 느팃골에서 빨치산 전우들과 함께. (왼쪽부터 고 송세영, 김동석, 장윤규, 임방규)[사진제공-임방규]

“이 골짜기가 6키로 정도 되는데 충남도당이 1951년 1월 7일 용계원에서 기습을 당한 후 인근의 삼거리, 피맥이, 고당을 전전하다가 1951년 1월 말경에 이곳 느팃골로 들어왔습니다. 양쪽 고지에 도치카와 기관포 진지를 구축하고 한금산 부대의 호위 하에 도당, 도사령부, 참모부, 정치부, 정찰중대, 공병부대, 통신대, 도당학교, 후방병원, 한지공장, 출판부, 맨 끝으로 진안군 부기면으로 연결된 고지에는 청천강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600고지에는 전북의 호랑병단이 있었습니다. 1951년 8월 20일경에 경찰의 대공세로 일주일 정도 느팃골이 경찰의 수중에 있었습니다만 야지에 나가있던 백두산부대가 운주면 영평에 있던 경찰지휘부를 들이치자 경찰병력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그 후 1951년 8월 말경에 충남도당이 대둔산으로 옮겼습니다. 충남 빨치산 근거지, 이 느팃골은 잊을 수 없는 고장입니다.”
 
차가 어느 집 앞에 섰다. 방 하나를 6만 원에 빌려서 들어갔다. 모두 짐을 풀고 양치질을 하고 발을 씻고는 두루두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부영이 잡담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던 것인지 송세영 동지에게 충남빨치산 약사를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시라고 했다. 모두가 조용했다.

충남 빨치산 초기 조직 구성과 약사  
 

▲ 충남 빨치산 고 송세영 선생. [사진제공-임방규]

“1950년 9.28 직후에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영 동지와 지도간부 20여 명이 빨치산 투쟁을 하기 위해서 호위무력과 함께 대둔산 아래 논산군 벌곡면 수락리로 이동했습니다. 나머지 당 행정기관 사회단체 일꾼들은 도당 부위원장 유영기 동지의 인솔 하에 북으로 후퇴했고요, 충남북부 지역의 대전시당, 대덕군당, 천안군당, 연기군당 일꾼들은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북상했습니다. 논산군당은 일부 일꾼들이 개별적으로 북으로 갔지만, 군당 이하 전체기관이 그대로 빨치산 투쟁을 위해서 입산했습니다. (금강을 기준으로 했다) 충남 서부지역의 군들은 통신과 교통시설이 파괴된 조건하에서 후퇴사업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일부일꾼들만 서해안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인민군대와 함께 북상하고요, 대부분은 우왕좌왕하다가 군경에게 체포되어 사살되거나 비참하게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계룡산에 모였던 동지들도 미군과 군경의 포위공격으로 전멸했답니다. 계룡산이 홀산이지요. 유격전을 하기에는 불리한 곳입니다. 그래서 충남도 인민위원장 윤가현 동지를 파견했는데, 윤가현 동지마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서산군에 있는 가야산은 크지도 않고 동쪽과 연결이 안 된 독립산입니다. 후퇴를 못한 서산군당, 홍성군당, 여타 군당 일꾼들이 가야산에 모였는데,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 일꾼들이 유격지도부를 구성하고 몇 개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기습전, 매복전을 통해서 무력을 획득, 강화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답니다. 군경이 1950년 11월경부터 가야산 인근의 산에 나무를, 부락민을 동원하여 다 베어버리고 그 나무를 가야산 주위에 싸놓고 불을 질렀답니다. 안에 있던 동지들이 여러 날을 불 속에서 불에 타죽고, 총 맞아 죽고, 손들고 나간 사람들도 모조리 사살했답니다. 가야산에서 수천 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어요. 충남 빨치산 지도부 명단을 말씀드리면, 도당 위원장 박우현 동지(가명 남충열), 도당 부위원장 겸 충남빨치산 총사령관 박천평 동지, 부사령관 리희영 동지, 리한용 동지, 도 인민위원장 윤가현 동지, 2대 도 인민위원장 곽해봉 동지, 도당 선전부장 겸 노동신문 주필 세민 동지(가명), 도당학교 교장 후에 도 선전부장 하수선 동지, 도당 조직부장 권민 동지, 기요과장 라실(가명), 도 정치보위부장과 도 민청위원장은 모르고 도 여맹위원장 임정희 참모장, 황모 2대 참모장, 리욱 충남 무장부대는 호위부대(한둔산 부대), 백두산부대(곽해봉 부대), 압록강부대(윤가현 부대), 가야산부대, 붉은별부대가 있었고 초기에 호남부대가 있다가 해체되었습니다. 각 부대인원은 후방부원까지 합해서 100-130명 정도였고 정찰중대가 40명, 통신중대가 30여 명, 공병부대가 10여 명 있었습니다. 당시 각 군당실정은 유일하게 논산군당만 당기구와 산하 외곽단체가 있었고 각 면당이 있었어요. 부여군당은 후퇴할 때 살아남은 중간간부들이 부여군당을 조직했으며 1951년 봄에 느팃골에 있던 도당과 선을 연결했습니다. 대덕군당이 7-8명, 공주군당이 5-6명, 청양군당이 5-6명이 있었고, 충남도당 산하의 전체 인원은 1,000여 명으로 추산이 됩니다.
 
다음은 충남유격대의 무장활동에 대해서 제한적입니다만,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충남유격대를 결성한 직후에 이미 언급한 완창리에서 미군 연대지휘부를 섬멸했습니다. 그것이 첫 전투였어요. 다음으로 1950년 10월 초에 야간 기습으로 연산 지서와 연산역 사무소를 완전히 소각하고 철로를 뜯어내어 호남선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습니다. 그리고 10월 2일 전투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미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하면서 매일같이 잠자리 비행기를 날려 보내며 수락리까지 장거리 포사격을 해오다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수락리를 공격해서 충남도당은 대둔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수락리에서 대둔산으로 가는 입구에 다리성이라는 나지막한 고지가 있는데 충남 빨치산 일개 중대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국방군이 미군의 포 엄호를 받으며 공격해 왔고 동무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거의 다 전사했습니다. 빼앗긴 다리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백두산 부대 부대장 리곤하 동지가 돌격대를 지휘하여 기습했는데 부대장은 적의 수류탄에 전사하고 동무들은 다리성을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다리성을 포위하고 포사격에 비행기로 폭탄을 떨어뜨리며 공격해 왔습니다. 동지들은 여러 날 동안 결사적으로 항전했는데 식량과 탈환이 떨어지고 돌과 바위를 굴려서 국방군의 진격을 막아내다가 전원이 전사했답니다. 다리성을 점령한 미군과 국방군은 대둔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백두산부대가 은밀하게 빠져나가서 미군거점을 급습했으나 실패하고 잠자리 비행기만 파괴했답니다. 대둔산에서 연일 밀고 밀리고 치열한 전투에서 쌍방 간에 수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충남 빨치산은 1950년 12월 10일경에 대둔산을 포기하고 피와 눈물과 원한을 남긴 채 완주군 운주면 용계원 부락으로 이동했습니다. 1951년 1월 10일경 압록강부대가 충북 옥천군당과 합동으로 경부선에 폭탄을 매설하고 멍석을 물에 적셔서 철로에 깔아 놓고 30여 차량을 달고 가던 군용열차를 폭파시켰답니다. 경부선이 근 일주일 동안 마비되었대요. 차내에 있던 탄약이 산발적으로 폭발해서 사람이 접근하지 못했답니다. 경부선 열차 기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압록강부대(윤가현 부대)가 눈이 쏟아지는 2월의 어느 날 백포를 두르고 대둔산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가서 보초를 생포했답니다. 보초로부터 입수한 암호를 이용하여 총 한발 쏘지 않고 경찰 전원을 생포했으며 산에 있던 무기와 탄약 비품, 식량 등을 노획하고 대둔산을 탈환했습니다. 대둔산에는 논산군당과 여러 당부가 있었고 도당 조직부장 권민 동지가 대둔산 책임자로 파견되었습니다. 압록강부대와 붉은별부대가 대둔산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논산군 일대를 수시로 공격했습니다. 완주군 화산면에는 초기에 논산군당과 각 면기관이 있었고, 익산군당과 이리시당, 옥구군당이 있었습니다. 무력은 논산군 유격대인 호남부대와 익산군 유격대가 있었고 전북의 572연대도 잠깐 와 있었습니다. 전주 논산 대전 간 도로 주변에 수시로 매복하여 저들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익산군 유대가 고산 근방까지 나가서 쌀을 가득 실은 트럭을 노획하여 화산면까지 끌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1년 1월 하순경에 국방군 11사단, 이른바 화랑부대의 공격을 받고 동지들 여러 명이 전사했으며 화산면에서 철수했습니다. 충남도당이 용계원에서 느티골로 이동한 지 얼마 후입니다. 국방군 11사단의 공격을 받았어요. 충남도당은 여러 곳으로 분산했습니다. 도당과 도 사령부는 운장산 밑에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요, 1951년 음력 1월 15일로 기억됩니다. 새벽에 기습을 당했답니다. 그때 도 인민위원장 곽해봉 동지가 생포되고 많은 동무들이 전사했습니다. 참모부 일꾼들의 잘못에 기인한 희생이었습니다. 국방군보다 늦게 무장부대를 마을 뒷산에 올려 보냈는데요, 고지에서 국방군에게 당하고 마을에서 튀다가 총 맞아 죽고 잡혔습니다. 그 후에 참모부와 정치부 일꾼들이 전부 바뀌었습니다. 이욱 동지가 충남빨치산 총 참모장이 되었어요. 1951년 2월 말경에 전북북부지구 위원장 조병하 동지가 느티골에 와서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연 동지와 지역문제 등을 의제로 회의를 가졌어요. 봄이 되면서 압록강 부대는 계룡산 지구로 진출하여 매복 또는 기습전으로 저들에게 타격을 주었습니다. 백두산부대는 서대산으로 이동하며 금산과 충북 옥천 일대를 종횡으로 누비며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1951년 5월 중순경에 경찰들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서 느티골로 쳐들어왔습니다. 후방부와 병원에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만 우리 부대의 반격으로 경찰들은 달아났습니다. 1951년 6월경에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연 동지는 몇몇 간부와 호위 인원을 대동하고 덕유산 송치골 6개 도당회의에 참가하셨습니다. 적들의 공격으로 이동하면서 회의를 하는 바람에 지리산 산내면까지 가서 회의를 마치고 1951년 9월 하순경에서야 남이면 거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1951년 7월 5일 우리 동무들은 가오리 변전소와 산내면 지서를 폭파했습니다. 1951년 8월 말경에 경찰 대부대가 공세를 취했습니다. 우리 부대들이 녹음기를 이용하여 지방 기동작전에 나가고 느티골 거점에는 소수의 방어무력만 있다는 것을 알고 침입해 온 것이지요. 경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느티골에서 철수했습니다. 거점을 대둔산으로 옮겼어요. 1951년 음력 추석입니다. 서대산에서 6지대와 접선을 했고, 함께 충남으로 왔습니다. 완무 200여 명은 충남 빨치산이 활기를 찾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6개 도당위원장회의 결정에 의해서 사단편성이 이루어졌는데, 충남 빨치산은 남부군 68사단으로 사단장에 대덕군당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후퇴 후에 남부군 교육참모로 내려온 마태식이고 충남의 68사단과 전북 북부의 45사단이 남부군 1관구가 되고 1관구 사령관에는 전북의 김명곤 동지, 1관구 정치위원에는 충남의 리영희 동지가 되었습니다. 도당위원장이 돌아오시기 직전에 충남빨치산은 대둔산에서 철수했습니다. 논산훈련소가 생기면서 적의 많은 무력이 대둔산을 포위하고 공격해왔습니다. 연일 치열하게 싸우다가 식량문제 때문에 대둔산을 포기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연합무력으로 대둔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답니다. 우리 부대는 화산면에 진출하여 제2훈련소 건설장을 습격했고, 전북 익산군 금마면까지 진출하여 미적산에 거점을 두고 매복작전 기습전으로 군용차량을 파괴했습니다. 금산과 진산에 진출하여 교란작전을 수행했구요, 6지대 68사단 45사단의 연합무력은 1951년 10월 중순경부터 화산면 지서 운주면 지서를 치고 도로를 마비시켰습니다. 6지대가 덕유산으로 이동하고 68사단과 45사단은 월동준비를 하다가 1951년 12월 말에 국방군의 대공세를 맞게 되며, 전 병력이 운장산에 집결하여 진안 대덕산을 거쳐서 임실 성수산에 갔어요. 성수산에서 전투가 치열했습니다. 밀고 밀리고 여러 날 동안의 전투에서 적아 간에 희생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동무들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이욱동지가 생포되었어요. 살아남은 동지들이 성수산에서 빠져나와 장안산과 백운산 계곡으로 이동했는데 아침에 날이 샐 땝니다. 양 능선에 있던 국방군의 집중 사격으로 제대로 저항도 못한 채 거의가 총 맞아 죽고 생포되었습니다. 나도 거기서 잡혔습니다. 동무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충남도당은 1952년 봄에 덕유산으로 이동했고 1952년 여름에 94호 결정에 의해서 지구당으로 편성이 되었답니다. 충남북이 3지구당이 되고 지구당위원장에 박우연 동지, 부위원장에 여운철 동지, 조직부장에 청주시당 위원장이었던 신장식 동지가 되었답니다. 3지구를 지역별로 1소지구, 2소지구, 3소지구로 나눴는데 1소지구는 지구당위원장 박우연 동지가 직접 지도하셨고, 2소지구당 위원장은 박정평 동지, 3소지구당 위원장은 충북의 송명헌 동지가 되었고, 2소지구당 위원장 박정평 동지는 1952년 초겨울 덕유산 60령재 부근의 비트에서 변절자가 끌고 온 경찰의 기습으로 전사하시고 3지구당 위원장 박우연 동지는 1954년 2월 28일 충북 청원군 가덕면 내암리 참새골 비트에서 전사하고, 그곳에서 탈출한 김종하 동지와 송영길 동지가 1955년 봄에 천안군에서 생포됨으로써 충남도당은 막을 내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동지들,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들이 떠오르는 듯 입을 닫은 송세영 동지의 주름진 얼굴에 아픔이 스쳐갔다.
 
밤이 깊었다. 우리들은 불을 끄고 잠들었다. 한잠 자고 눈을 떴다. 시계바늘이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가 느티골, 충남 빨치산 각 기관들이 내 양편으로 곳곳에 박혀 있고 잠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 가만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숲속을 비추고 있는 전등불에 무수한 빗방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동무들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당시에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없지만 회문산 골짜기, 가마골 골짜기 동네가 여기인 듯, 여기저기에 트가 있고, 보초가 서 있고……. 아! 동무들. 방에 들어가서 누웠지만 잠은 안 오고 날이 밝아왔다.
 
우리는 일찍 떠났다. 김영진 사진기사가 차를 세우고 비가 오는데 느티골 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700의총 금산에 가서 아침을 먹고 700의총으로 갔다. 임진왜란 당시에 금산을 점령한 왜적을 공격하다가 전원이 전사한 우리 할아버지들 700여 명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와 권율 장군이 기습할 날짜와 시간을 정했는데, 후에 권율 장군이 수많은 왜적이 금산에 집결했기 때문에 뒤로 미루자는 서찰을 인편으로 보냈다고 한다. 서찰을 못 받은 조헌, 영규 의병장들은 정한 시각에 금산을 들이치다가 격전 끝에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 찜찜한 마음을 씻을 수가 없었다. 왜 군장비가 좋은 관군은 빠지고 의병만 금산을 공격한 것인가. 물론 전황이 달라질 수 있고 판단이 바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소부대를 파견하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테니까 직접 가야지, 그도 아니면 결정대로 전투에 참가하여 희생이 적도록 전투를 지휘해야 옳지 않은가. 관군과 의병 사이에 공을 다투거나 당파싸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영 좋지 않았다. 외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조국이 위태로울 때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 몸을 오롯이 바친 할아버지들의 묘 앞에서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열들, 당신들의 그 얼은 민족의 붉은 심장으로 영원히 계승될 것입니다.”
 
해설자에 의하면 당시에 희생된 700분 가운데 200분만 후손이 밝혀지고 500분은 후손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500분이야 말로 노예거나 천대받고 살았던 하층민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 박정희시대에 묘역을 새로 꾸렸다는데 터가 넓고 건물도 좋았다. 유물이 빈약했다. 친일파 박정희가 이 공사를 설계할 때 진심이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우리를 실은 차는 약간 헤매다가 이현상 동지의 고향으로 갔다. 옛집은 있는데 개축을 했고, 대문과 헛간의 흙벽만 남아 있었다. 문은 잠겨 있고 흙벽은 한 쪽이 헐렸을 뿐 아니라 지붕도 약간 기울어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이현상 동지가 이 집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뛰놀던 곳이다. 이현상 동지는 지주 집안에서 일제치하의 엄혹한 시기에 태어났다. 반일투쟁 과정에서 감옥살이도 하고 일제 말 1948년 이후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사령관으로 적과 싸우다 전사하셨다. 애국자의 집인데 원형을 보존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났다.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연 동지가 최후를 마친 참새골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연 동지가 최후를 마친 곳이 충북 청원군 가덕면 내암리 참새골이란다. 차는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비포장도로라 땅에 박힌 돌에 채여서 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참을 들어가는데 연일 내린 비로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목을 차는 물론 맨몸으로도 건널 수가 없었다. 송세영 동지는,
 
“저기 보이는 산기슭입니다. 비트에 계시다가 1954년 2월 28일에 사고가 났답니다. 이른 아침에 지방 사람이 방금 있던 사람이 없어졌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제보를 받은 경찰이 이중삼중으로 포위하여 공격했는데 함께 있던 김종하, 송영길 동지는 탈출했고, 박우연 동지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이 있고, 들것에 실려 가다가 소변을 본다고 바위 밑에서 순간에 머리로 바위를 박고 절명하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현지에 못가고 멀리서 박우연 동지의 최후를 그려보며 동지의 명복을 빌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충북 음성군 청천면에 살고 있는 김창묵 동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김창묵 동지와 통화가 되었다. 차창 밖에 사과나무가 많이 보였다.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사과밭이 보기에 좋았다. 논에 벼가 누렇게 익었는데 태풍으로 쓰러진 곳이 군데군데 보였다.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벗들은 추수와 농민문제 등 화제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윤규 동지는 53년 만에 만난 김창묵 동지를 끌어안고
 

▲ 광주형무소 이가사에서 사형을 받은 빨치산 200여명이 총살당하고, 살아남은 생존자 7명중 3명 동지가 오랜만에 만남을 가지다. (임방규, 김창묵, 장윤규)[사진제공-임방규]

어느덧 청천면이란다. 김창묵 동지를 길에서 만난 우리는 끌어안고 좋아했다. 특히 53년 만에 만난 장윤규 동지는 양팔을 잡고,
 
“몇 년 만이야? 그래도 옛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어. 이가사에서 먹으면 토하고 다 죽어가던 창묵 동지가 기억에 남아 있어.”

“그때 죽는 줄 알았어요. 양발이 마비되고 아랫배까지 굳어졌거든요. 쥐 두 마리를 잡아먹고 살아났습니다. 굳어가던 몸이 풀렸습니다.”
 
김창묵 동지는 광주형무소 이가사에 있을 때 사형을 받고 함께 살았던 동지다. 200여 명의 사형 받은 동지들이 거의 다 총살당하고 마지막에 7명이 무기로 확정되었는데 담양의 최인교 동지는 출소 후 고향에서 돌아가시고 완주의 김인수 동지, 평북 정주의 방명록 동지, 정읍 태인의 김남규 동지는 생사를 모르고 있다. 아마도 돌아가신 것 같다. 살아남은 김창묵 동지, 장윤규 동지, 나 이렇게 세 동지가 만난 것이다.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식당에 가서도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갈 길이 먼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하려는데 창묵 동지가 집에 가서 호박 두 덩이와, 곶감 여섯 줄을 가지고 나왔다.
 
선물을 차에 싣고 떠났다. 장호원 김동섭 동지의 집에 들러서 차 한 잔씩 나누고 떠났다. 초가을 석양빛에 물든 경기평야를 뚫고 달렸다. 어두워서야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 일정을 잡고 헤어졌다. 충남 일대를 돌고 온 나는 정부영이 아니었으면 이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준 여러분의 정과 노고에 거듭 고마워하며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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