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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박종철, 31년만에 경관 자필기록 확인

기사승인 2018.01.30  19: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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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 소영환 교도관, 강진규 경사 옥중 최초기록 보관

아! 박종철!, 아! 1987년!

   
▲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그곳 509조사실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역사적인 87년 6월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만큼, 당시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사건으로는 드물게 널리 알려졌지만, 그날의 전모를 밝혀 진실과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에서 1,290명의 대학생을 대량 구속시킨 전두환 세력은 이듬해인 1987년 초반까지 당시 안기부와 보안사, 치안본부 등으로 초법적인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핵심 수배자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재집권에 최대 장애가 되었던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허문데 이어 핵심지도부를 파괴하려던 전두환 세력의 계획은 필사적이었고 그만큼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그동안 당연시하던 고문도 더욱 가혹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 고문치사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악랄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축소·은폐·조작했다.

1월 14일 저녁 시신을 비밀리에 화장 처리하기로 하고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발표를 계획하면서, 그들은 박종철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조작하려고 시도했으나 고문치사를 직감한 검사의 부검 강행 등 양심적인 인사들의 노력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1월 15일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건 직후 박종철을 검안한 전문의가 물고문에 의한 사망가능성을 시사하는 증언을 했지만, 안기부 주도의 관계기관 대책회의 결정에 따라 검찰은 17일 오후 수사권을 포기하고 경찰에 자체 조사를 맡겼다.

고문치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경찰은 19일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인한 불상사’ 의견으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을 고문경관으로 구속 송치해 마무리를 시도했다.

고문경관 숫자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한 것은 경찰이 일상적이고 조직적으로 고문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업무과욕으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라고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끝내 역사로 살아나는 ‘진실’

   
▲ 옛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다. [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그해 1월 20일~23일까지 진행된 1차 수사뿐만 아니라 이후 재수사, 재재수사, 이듬해 1월에는 재재재수사까지 4차례에 걸쳐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번번이 사건의 진실을 외면했다. 매번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면 재수사가 결정되었고, 그때마다 그동안 진행된 수사는 졸속, 짜맞추기, 축소, 은폐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근 영화 <1987>이 개봉되고 영화를 관람한 수백만 관객이 30년전 박종철과 6월항쟁에 대해 다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그날의 ‘진실’이 오늘로 불려 나오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성명은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에 골몰하던 전두환 세력을 궁지에 몰아넣고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해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성명은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이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3명 더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바깥으로 ‘비둘기’(비밀서신)를 내 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2월 23일 한재동·전병용 교도관을 통해 이 소식을 외부에 전했으며, 비둘기는 4월 7일까지 3차례에 더 교도소 담장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부영은 훗날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 진상폭로는 내가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쓴 특종’이라고 회고하면서 ‘민주교도관들의 용기있는 협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31년 만에 드러난 역사의 한 조각, 더 늦출 이유 없다

   
▲ 1987년 1월 20일 당시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담당 교도관이었던 소영환씨가 31년간 보관하고 있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특별사동에는 고문경관으로 구속 수감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실을 밖으로 내보낸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 등이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통일뉴스>는 박종철을 고문해 치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 최초 2명의 고문경관 중 한 명인 강진규 경사(당시 30살)가 1987년 1월말께 편지지 10쪽 분량으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 원본이 있다는 제보를 오래 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영화 <1987>로 드디어 이 문건이 세상에 드러날 멍석이 깔린 셈이다.

제보자는 당시 강진규가 수감되어 있던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본무 담당으로 근무한 소영환 전 교도관(당시 30살).

1990년 교도관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법률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소영환 씨는 1987년 1월 말께 자신이 강진규를 설득해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그 후 31년간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본을 보관해 왔으며, 그 내용을 당시 처음으로 이부영에게 구두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부영의 '특종'을 가능케 한 최초 제보자가 뒤늦게 나타난 셈이다. 소 씨는 "처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부영씨는 충격으로 밤새 잠도 못자고 서성이며 생각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안유 계장에게 확인을 하고 다시 나에게 와서는 고문 가담 경관의 이름이 틀리다는 등 몇 가지 추가 확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16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소 씨가 근무하는 서울 서초구 한 법률사무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문과 당시의 복잡한 심경 등을 기록한 소 씨의 일기장 등 자료를 확인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원문의 언론 공개는 처음이고, 강진규를 취재해온 <SBS>가 합석했다.

1981년 12월 5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정직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일해 온 소 씨는 1987년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5학년에 다니던 중 휴가를 내고 협력대학인 서울대학교에서 시험을 본 후 1월 19~20일께 업무에 복귀했다.

그때 “한 사람은 자살 가능성이 있으니 특별히 관리하라는 업무지시를 받고 근무에 돌입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은 원래 여사로 사용되던 곳인데, 이부영은 1986년 5.3인천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그해 10월 잡혀와 수감 중이었고 이듬해 1월 20일 조한경 경위(당시 42살)와 강진규가 같은 사동에 수감되었다.

박종철에 대한 고문치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경찰 지휘부가 ‘일부 경관의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발생한 불상사’라는 자체 발표와 함께 1987년 1월 19일 조한경과 강진규를 2명의 고문경관으로 지목해 구속 수감했으나 당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영등포교도소로 온 것이다.

살해 위협을 느낀다며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불안해했던, 특별관리가 필요한 ‘한 사람’이 바로 강진규였다.

고문 가해 당사자가 쓴 최초의 현장 기록

   
▲ 소영환씨는 1987년 2월 27일 ‘眞實’(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일기로 남겼다. 그는 일기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시간과 세월 그리고 역사 속에 묻어야 할 일들도 많이 있다”며, “나는 오늘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물론 내 자신이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강진규는 1957년생으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인데다 법학도였던 소 씨에게 자신은 고문에 가담한 바 없으며 여기 와 있을 이유도 없다는 하소연을 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아내와 변변한 외식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도 오명을 남기게 된 데 대해 미안해하면서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스스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가법 적용을 받아 10년 중형이 점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불안해했다.

소 씨는 당시 심각한 불안과 심경변화를 겪고 있던 강진규에게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면 사실대로 진술을 하는 게 좋겠다. 담당검사에게 다시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할 테니 조사에 응하라”고 조언했고, 강진규는 구속수감 일주일 쯤 후인 1월 말께 사흘에 걸쳐 10쪽 분량의 자필 진술서를 작성했다. 제출 목적으로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바로는 2월 초순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경관들은 가족과의 면담에서 고문에 가담한 3명이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설했고, 이후 경찰 상급자와의 면회에서도 “억울하다, 사실을 이야기하겠다”며 갈등을 빚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회유와 압박이 가해졌고 그 와중에 2월 23일 이부영의 비둘기가 바깥으로 전해진 것이다.

강진규의 자필 진술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직후 작성한 최초의 기록이며, 자기변호를 위해 쓰인 동기를 감안하더라도 축소·은폐·조작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현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 현장을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강진규는 진술서에서 자신은 대공분실 수사 4반 소속으로 여건주 반장과 1월 13일 저녁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에 따라 민식(가명)의 자취방에 잠복근무를 하러 갔다가 자물쇠로 잠겨있어 남영동으로 철수, 당시 영하 14도의 추운 날씨에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여러 병 마셨다고 기록했다.

이튿날 아침 8시 55분께 남영동 사무실(공안분실)로 출근하여 10시 20분께 1반 반장인 조한경 경위와 황정웅, 반금곤 등으로부터 5층 8호실에 박종철이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관련 수배자인 박OO 수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이후 두 번이나 조사실을 옮겨가면서 고문을 가해 치사에 이르게 된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강진규 경사가 1987년 1월말께 영등포교도소에서 자필로 작성한 사건 경위 진술서(요약)

1월 13일 5시-대공3부 5과 2계 사무실에서 박윤택 계장으로부터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를 받았다. 민식(가명) 자취방 잠복근무하며, 중요수배자인 최OO(서울대 81)의 첩보에 따라 여자친구인 OOO(OO대 대학원) 소재파악 검거할 것.

1월 13일 6시-4반장인 여건주와 함께 학생운동 선전책 민식 자취방 갔으나 자물쇠로 잠겨있어 철수. 남영동 사랑방다방 옆 포장마차에서 술 마심. 영하 14도의 날씨. 중국집에서 고량주 5병 마심.

1월 14일 08:55-사무실 출근, 10:00-1반장 조한경, 황정웅 등 사무실에서 (수배자인)박종O에 대해 이야기 함, 10:20-5층 심문실에서 1반 조한경, 황정웅, 반금곤이 학생 1명 데리고 있고, 하종O(서울대학원 인류 1년) 연행, 1반에서 공작첩보 제출해 박종O에 대해 같이 수사하자고 함.

반금곤과 같이 8호실에 가보니 이정호가 있고, 박종철이 있었음.

□ 경찰 : 아버지도 공무원(부산시청 수도과)인데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도 좀 해야 되지 않겠나

■ 박종철 : 나는 지금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

□ 박종O은 어떻게 알고 있나

■ 선배를 통해 알고 있다

□ 여기에 자세히 써라

본인(강진규)은 14호실에 있다가 8호실로 왔는데 6과 1계 김부O 경장이 어떤 피의자를 데리고 와서 좀 비켜 달라고 하였다. 14호실에 있던 조한경한테 가서 김 경장이 8호실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자 조한경이 ‘아무 곳이나 옮기지 뭐’ 라고 하여 옆방 9호실을 보니 아무도 없어서 옮겼다. (당시 9호실에는 이정호만 있었음)

박종철이 86년 11월 말에 강OO(서울대 OO학과)이 박종철 하숙방에 와서 자고 가고, 87년 1월 8일 와서 돈 10,000원을 준 사실이 있다고 진술.

14호실에 있던 조한경과 반금곤이 9호실로 왔고, 조한경이 9호실서 신문, 고함소리.

□ 조한경(높은 언성으로 심문하면서) 이놈 혼좀 나봐야 되겠느냐, 이놈 혼좀 내라고 고함.

□ 강진규 : 너 입고 있는 옷 다 벗어

■ 박종철 : (순순히 옷벗으면서)전부 다 벗어야 하느냐

□ 강 : 그래

■ 박 : (옷 전부 다 벗음)

□ 강 : (조한경 반장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네 수사 총책임자이니 사실대로 말씀 드리라

□ 강 :(이때 반금곤은 욕조에 물 채우고 있었음)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계속 대답)

□ 조 : (화가 나서) 이 자식 혼 좀내라 (큰소리치면서) 사람 더 오라.

이때 이정호가 14호실에 있던 황종웅을 불러옴. 반금곤은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을 뒤로 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고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감. 물을 먹어보라고 하자 박종철이 욕탕 안으로 머리를 숙여 머리 전부를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뒤 일으켜 세움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요즘 독서실에서 기거하는데 독서실 티켓은 본 사실이 있다

□ 조 : 그 독서실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

□ 조 : 너 혼 좀 나야 말하겠느냐

■ 박 : (계속) 모른다

-이때 반금곤이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음.

조한경은 “혼 좀 내라”며 나감

욕조 앞의 박종철 왼쪽에 황정웅이, 오른쪽엔 반금곤이 박종철의 팔과 몸 사이로 각각 손을 넣어 양 어깨를 누르고 다른 한 팔은 박종철의 머리를 잡음. 이정호는 박종철의 양 다리를 들고 욕조 안으로 넣음. 본인(강진규)은 이때 바지를 벗고 팬티 차림으로 욕조 안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물이 차가워서(영하 16도) 욕조위에 올라서 있었음.

-반금곤이 약 1분 30초가량 뒤에 박종철의 머리를 들어 “어디 있느냐”고 하자 박종철이 다시 “모른다”고 하여 다시 위의 자세로 욕조 안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조한경이 들어와 의자에 앉았음(약 20~30초)

-끌어내라고 하여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잡은 곳을 놓자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조한경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밖으로 끌어내어 바닥에 눕히자(이때 11:20경) 조한경이 갑자기 침대위에 눕히라고 함.

-여건주 4반장이 조한경에게 뭐라 말하고(물기를 닦으라?) 나가면서 같이 눕히는데 박종철이 힘없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음

-조한경이 빨리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하자 황정웅과 이정호가 나감. 조한경은 박종철의 입에 인공호흡을 하고 본인(강진규)은 인공호흡 하는 것에 맞춰 박종철의 가슴을 누르고 반은 전신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4반 김기호 경장이 왔음.

-본인(강진규)과 김기호 교대한 후 계장인 박원택과 과장 유정방 등 오고 조금 있다 의사가(중앙대 용산병원 오연상) 도착(11:40)

-조한경이 나가있으라고 하여 5층 14호실에 가 있었음

1월 14일 오후 1시 30분-박종철 사망, 지금 경찰병원으로 옮기고 있다고 함.

1월 14일 오후 3시-황정웅 보고서 작성, 주심문자는 조한경, 부심문관은 강진규라고 기재(계장과 과장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최대한 잘될 것이라고 안심시킴). 박원택 과장이 보고함.

1월 17일(토)-단장, 경무관, 권석진이 조한경과 본인(강진규)를 불러 나감, 강민창 본부장 전화 옴(언론보도가 나와서 형식적으로라도 감찰조사는 해야 한다. 장소를 호텔로 하자. 조사대상은 보고서대로 조한경, 강진규, 계장으로 하자, 보고서 내용도 쇼크사로 하자. 조사관은 감찰담당관, 경무관 조용우외 2명 정도로 간단히 할 것-그러나 토요일에 호텔이 없다고 해서 치안본부 2대(신길동 소재)로 정하고 1518(사무실차) 타고 계장 박원택과 조한경, 본인 강진규이 특수 2대에 도착함)

오후 9시-갑자기 장소 바꾸고 특수대 직원으로 교체, 정신없이 구속

1월 19일-구속영장 발부.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잠

1월 20일-영등포교도소로 바로 이관. 부장검사 진창언으로부터 검찰조사 받음, 검사관 상무 검사 박상옥

1월 22일- 다시 검찰 조사

*이 내용은 지난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열람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내용을 메모해 작성되었다.

기록이 기억으로, 기억은 행동과 역사로 이어진다

   
▲ 소 씨가 남긴 또 하나의 기록. 당시 공소장에 기록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의 그림과 조직도 등이 그려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의 진술서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자체 인쇄한 편지지에 쓰였다.

편지지 5장의 앞·뒷면 10쪽에 빼곡히 작성되었으며, 여기에 소 씨와 강진규가 사실 확인과 보완을 위해 주고받은 문답 및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스케치 등을 적은 두 쪽 분량의 메모도 덧붙어 있다. 볼펜으로 양면을 다 쓴 자필 진술서와 달리 메모는 연필로 줄친 편지지의 뒷면만 사용했다.

소씨는 지난 16일 기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31년 만에 고문치사 가해 경관의 자필 기록을 공개하게 된 데 대해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당시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할 뿐이며,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조그마한 부분이지만 이번 증언 등을 계기로 당시의 진실이 바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16일과 23일 두 차례 이어진 만남에서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자필 진술서를 작성한 당사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라면서 기록 원본에 대한 촬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기자와 만난 직후 연락이 닿아 지난 17일 31년 만에 처음 만난 강진규가 “편지(진술서)가 공개되면 사돈들에게 면목 없고 아직 자식들의 혼사가 남아있는 동료(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며, “인권법을 전공한 법률가로서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진규는 이날 소 씨에게 “그 일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만날 뿐 은둔생활과 다름없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고 한다.

위에 별도 기사로 소개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고문 가담한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 과연 기대할 수 있나

   
▲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26일 통일뉴스와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하루 빨리 공개되기를 기대했다. 또 경찰을 비롯해 전근대적 고문을 일삼았던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최초로 고문치사에 가담한 당사자의 입으로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핵심적인 진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고문치사 사건 발생 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겪던 가해 당사자가 보름 이내의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제출 목적이 아니라 직접 증언의 성격을 담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6일 오전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강진규도 그 때 구속되어서 자기가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이행한 것에 대해 뉘우친 것 아니겠나. 그래서 고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뉘우친 내용을 담은 것인데,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면서도 “이제 정리하는 시점에서 강진규의 문서가 공개되는 것은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의미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 공안사건을 다룬 가해자들의 경우 그들만의 오래된 조직과 이권 등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소 씨가 강진규를 설득해 자료 공개를 하도록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사람의 자료가 이제 그곳 4층에 있는 박종철기념관으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경찰이 아직도 스스로 책임있는 정리도 없이 남영동을 관리하는 상황에서 이번 자료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넘겨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부영 운영위원장은 1987년 1월 수감자 신분으로 영등포교도소 내에서 바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 소식을 보낸 것과 관련해 최근 제기되는 몇 가지 새로운 주장에 대해서는 “새롭게 검토할 일은 특별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 씨가 특별사동 근무 교도관이었고 그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내용을 들은 바 있다”고 확인했지만 “고문치사 사건의 가담자가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전에 한재동 교도관으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소 씨로부터 전해들은 강진규의 진술은 그가 가해 경관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믿을 수 없어서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다시 확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소 씨가 당시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상대하지 않고 들은 내용도 가급적 잊어버리려고 했다. 한재동 교도관과 안유 보안계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작성한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낸 한재동 전 교도관을 29일 안양 근무지에서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비둘기’를 날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재동 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은 29일 오후 안양 근무지에서 기자와 만나 강진규 자필 기록에 대해 “며칠 전 이부영 의원과 만나서 처음 봤다”며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자세히 기록해 놨더라”고 말했다.

한재동 전 교도관은 “나는 당시 공장담당이었는데 5시에 폐방하면 특사 바로 옆 직원이발소에서 대기하다 6시에 퇴근하게 되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이부영 의원을 만나곤 했다”며 “소영환 교도관이 못 오게 했으면 내가 들락거릴 수가 없었는데, 그때 한쪽으로 피해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역시 “자료는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영환 씨에게 조언했다”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권력층에 찍힐까봐 관련 인터뷰나 보도도 없었는데, 매년 기념일 전후라도 기사가 나가서 젊은 세대가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바람을 전했다.

(추가, 31일 13:32)

이승현/김치관 기자 tongil@tongilnews.com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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