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방북기를 다시 연재하며
     
7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북미간의 첨예한 대립전은 ICBM 발사 성공을 향해 치달을수록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시민권자의 신분으로 북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변으로부터 많은 눈총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나의 말과 글로 인해 여러 문제가 유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평양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수없이 되뇌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민족이 처한 문제와 해답의 중요성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서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여기 왔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우리 조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북의 인민들은 진정 행복한가?”,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고 있는 이북을 서방세계에 올바로 알릴 방법은 없을까?”,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등에 대한 타는 목마름의 화두를 여기 평양서나마 한 모금 축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남과 북, 북과 남은 지리적으로 볼 때 수천 년 동안 위 아래로 같이 붙어 하나로 살아오다가 70년 전부터는 가장 먼 나라처럼 각각 따로 살고 있다. 같은 역사, 같은 혈통,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칡넝쿨처럼 깊이 얽히고설켜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통탄할 이 현실을 지금도 나는 강력히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한 몸뚱이인데 반 토막씩 잘라져 두 개의 토막이 동강난 채로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북을 방문한다는 의미는 한쪽의 절규와 처절한 몸부림을 뒤로하고 나머지 한 토막을 부둥켜안고 같이 아파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다시 합쳐야 한다. 설령 통일이 된 후에 남과 북이 두 손 꼭 잡은 채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사대주의 험산준령을 언제까지 정처 없이 헤매며 방황할 것인가? 

필자가 어떤 목적에서 북을 방문했으며 어떻게 북을 이해하며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일거수일투족, 언행심사는 이념적으로 상당한 오해와 논쟁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단된 땅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이민 목회자로서 이념적 위치와 서술방향보다 더 중요하게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천 년 전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살아왔던 치열한 삶과 가르침에 의한 인간의 존엄과 권리 그리고 자주와 평등을 계속해서 이 시대에도 실현하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남측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들의 북을 향한 매도는 해가 갈수록 극에 달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필자는 가능하면 저들의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자 “우리는 과연 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까?”를 염두에 두고 비교적 솔직하고 객관성 있게 글과 말로서 증언해왔다. 특히 남쪽 사회에 만연한 반북논리나 친북논리 같은 양극단에 치우친 편파적인 논리가 아니라 민족의 앵글로 자연스럽게 남북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며 북을 따듯하고도 냉철하게 해석하며 이해하고자 했다. 

종국에는 남과 북이 고귀한 하나의 민족성원으로 완전한 회귀를 하는데 일조하기 위해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범위 안에서 북의 인민들과 함께 웃고 울고, 밀고 당기며, 소통하며 공감하여 그 소식을 널리 알릴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 문제를 남과 북과 해외동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 통일 지향적으로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분단시대를 마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일 해법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주력’과 ‘주권’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준삼아 글을 쓸 것이다. 자주와 주권 운운하면 북의 일방적 주장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매도하지 말라.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을 누가 가르쳐야 알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남측의 위정자들과 통일전략가들은 주로 ‘대세론’, ‘국익론’ 등을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바로 외세를 배격하고 활용하여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당위성이고 절대가치이다. 이것 말고 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의 시각에서 해석된 ‘현실론’만을 따르거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흐름에 따른 ‘대세론’, ‘국익론’을 따르면 우리 미래에 더 이상 통일은 없다. 대세가 불리하고, 현실이 어려워도, 국익을 해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주적인 통일이 절대 우선시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보잘 것 없는 나의 글들이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의 방향을 고민하는 작은 증언이 되기를 원하며 필자가 어느 이념적 입장을 취하든지 독자들이 함께 고민하는 심정으로 끝까지 읽어봐 주시길 바란다. 나의 이념은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남과 북과 미국, 이 세 나라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의 경계선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던 짬뽕에 불과하다. 

생애 첫 방문이든 수십 차례의 방문이든 이북 땅을 밟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을 매번 제공해줌과 동시에 우리들의 돌덩이 같은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경험도 하게 될 것이다. 남측 동포들이 북을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름 북을 가고 싶을 때마다 제때 드나드는 재미동포의 특혜보다는 그에 따른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의 무게가 몇 갑절로 어깨를 억누른다. 

오늘부터 다시금 북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방북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루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만수대 언덕을 몇 차례 오르며 그곳에 건축되거나 조성된 갖가지 건축물들과 조형물 등을 참관하고 시민들을 만나본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것이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다음 주부터 만수대의사당, 만수대 대기념비, 조선혁명박물관 참관기를 순서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 필자 주

 

만수대의사당을 가다

만수대의사당은 행정적으로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이며 만수대 언덕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동강 오른쪽 연안에 위치한 이 의사당에서 바라본 만수대 언덕은 해발 60미터의 도심 속 야산으로 모란봉의 남쪽 능선과 연결되어 솟아있는 형국인데 언덕의 가장 높은 지대는 80미터 정도라는데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의사당 본관은 언덕 능선에서도 대로변과 가장 인접한 가장 낮은 지대에 안정적인 형태로 들어서 있었다. 중구역 북쪽 방향으로는 모란봉, 창광산 등의 언덕들이 있는데 과거 창광산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육군병원이 있었고 이곳 만수대 언덕에는 일제 충혼비가 있었다는데 이런 흉물들을 모두 걷어내고 사회주의 언덕을 건설한 것이다.

필자가 만수대의사당 본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받은 느낌은 그야말로 웅장하면서도 품위 있는 건축 예술품 그 자체라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만큼 격조 있어 보였다. 아직도 석조 궁전이 많이 남아 있는 유럽국가들 중에는 궁전들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종종 봐왔지만 평양처럼 아시아 지역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수도의 공공건물을 이토록 유럽풍으로 멋지게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만수대의사당 구역은 크게 의사당 ‘본관’과 본관 뒤편에 있는 ‘청사’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청사 안에는 최고인민회의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관들이 입주해 있고 그와 더불어 의사당 시설물을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평양시내를 오가다 보면 본관 뒤편에 있는 청사 건물은 잘 안보이고 본관만 눈에 잘 띈다.

의례책임부서(의사당 의전국)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후 의사당 본관 외부와 내부를 둘러보았다. 본관은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의 매우 실용적으로 설계된 총 5층 규모이며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울리는 석조건축양식이었으며 건물에 흐르는 기운이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어 보였다.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84년 10월에 개관되었으며 건물 면적은 이미 알려진 대로 연건평 4만 5천㎡ 규모의 큰 공간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새롭게 건설되는 의사당의 경우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 평양 만수대의사당도 아마 그런 양식을 참고한 듯했다.

우선 본관 외벽을 둘러보니 건물 전체는 천연석을 다듬어 붙이는 공법으로 우아하게 마감했으며 정중앙 지붕위의 국기 게양대에는 공화국 국기(홍람오각별기, 紅藍五角星旗)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외벽 각 면에는 돌조각 장식과 다양한 문양들을 새겼으며 건물의 밑단도 천연석으로 마무리해 유럽풍의 석조 궁전을 연상케 했으며 전체적으로 인민들의 주권의 전당이라는 분위기를 마음껏 발산하도록 설계한 듯했다.

▲ 의사당 본관 우측 입구에서 바라본 공화국 국기 게양대. [사진제공 - 최재영]
▲ 만수대 거리에서 바라본 만수대의사당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구글 인공위성 지도에 나타난 만수대의사당과 부속 청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만수대 거리 차량 안에서 바라본 만수대의사당 본관 뒷부분(우측)과 부속청사 건물(좌측). 부속청사는 3층 규모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필자를 안내한 북측 관계자와 함께 기념사진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조선옷(한복)을 입고 의사당 출입구에서 국내외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봉사원과 행사를 취재하는 북측 관계자들. [사진제공 - 최재영]

간결하며 화려한 건축미를 갖춘 의사당 내부

건물 내부에 입장해 둘러보니 바닥은 온통 옥돌처럼 보이는 천연 보석류의 진기하고도 화려한 석재들로 장식이 되었고 벽면과 기둥들도 천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 기품과 우아함은 외부와 마찬가지로 아주 화려하지 않은 궁전 내부를 연상케 했다. 1층 현관에 들어서니 정면 벽면에 대형 그림이 걸려 있고 내부의 각 홀과 연결되는 복도가 길게 좌우로 늘어서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웅장하고 광활했다. 건물 내부 여기저기에는 대리석 석재 외에도 각종 고급 목재와 석고, 금속, 돌조각품등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1층에는 의사당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구별되는 최고인민회의 대회의장 외에도 여러 개의 커다란 방들과 다양한 행사를 치루는 고급스런 방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대리석 기둥들 사이에도 여러 개의 군상들이 설치되어 마치 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도 들게 했다. 워낙 규모가 넓다보니 방들이 서로 여기저기 연결되는 통로를 보면 마치 미로에 접어든 것 같았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2층에는 고급스런 회담장과 중소형 규모의 각종 회의실과 접견실 등을 여러 개 갖추고 있다.

또한 2-4층 공간에는 의사당에서 가장 높은 직급과 권위를 지니고 있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양형섭 부위원장, 그리고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의 집무실을 비롯해 이들 핵심 지도자들만 사용하는 전용 접견실과 회의실 등이 별도로 갖춰져 있다. 또한 11인으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들의 사무실과 회의실이 있었으며, 특히 최고인민회의 모든 업무를 총괄해서 보는 최고인민회의 서기장실에는 홍선옥 서기장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또한 한편에서는 누구나 쉴 수 있는 휴식실과 응접실이 최신 시설로 갖춰져 있다.

특이한 것은 각 방마다 공통적으로 대형 풍경화들이 걸려 있었고 고급스런 커튼과 휘장들로 실내장식을 했으며 고급 가구들을 비치하였다. 또한 각 방마다 공화국을 상징하는 국장 마크가 금동판이나 청동판으로 제작되어 정중앙에 높이 부착되어 있어 국가의 최고의결기관이라는 공간의 품위와 위용을 더 높여주는 듯했고, 어떤 행사장 방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커다란 컬러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기도 했다.

이처럼 각 방들과 복도, 회의장 등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건축미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특히 북을 대표하는 국가수반급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외국의 정상들이나 국가수반급 인사들을 맞이하는 전용 접견실과 의전실이 별도로 구비되어 있었으며 출입자들에 대한 경호도 삼엄했다. 김영남 위원장은 주로 국가수반의 역할을 했고, 양형섭 부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와 관련된 업무들을 주로 맡은 듯하여 두 인물이 역할 분담이 된 듯했다.

상임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근무하는 구역에는 세련된 모습의 비서들과 통역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사당 내부에는 주요 외국어를 동시통역하는 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준급의 번역위원들과 통역위원들도 상시 근무하며 외국대표단과의 회담 또는 접견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여러 나라들과 조인과 협정을 맺는 조인실, 면담실, 중대형급 회의실을 돌아보던 중에 해외동포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커다란 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조국통일상’이나 ‘명예평양시민증’, ‘김일성상’ 등을 수여하는 방이었다. 최고인민회의 명의로 각종 표창이나 훈장, 메달을 수여하는 방인데 매우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정면 상단에는 금판으로 제작된 공화국 국장이 걸려 있었고, 좌우에는 공화국 국기(홍람오각별기) 깃발이 고급스런 받침대에 세워져 있었으며 양 깃발 사이에는 강단이 놓여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최고인민회의를 대표해서 주로 최고인민회의 홍선옥 서기장이 나와서 수여를 한다고 한다.

▲ 만수대의사당 현관에서 바라본 내부 복도 모습. 길다란 회랑식 구조와 비슷해 보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최고인민회의 명의의 상장과 메달 등을 수여하는 방에서 셀카를 찍은 필자. 훈장과 메달, 외교직급의 제정, 명예칭호 등을 수여하는 장소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상장과 메달 등을 수여하는 방의 강단 정면에는 금판으로 제작된 공화국 국장이 높이 걸려있고, 좌우에는 공화국 국기(홍람오각별기) 깃발이 세워져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전용 접견실 내부. 사진은 재일 총련계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결성 70돌 대표단을 접견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이 해외동포 대표단들을 접견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중형급 회의실에서 라오스와의 협력 조인식이 체결되고 있는 모습. 상단 국장이 동판으로 제작 되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주권의 전당'

필자는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의 해외동포간담회 접견을 비롯해 그동안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런저런 일로 서너 차례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하거나 참관한 적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 D.C의 의회의사당이나 남측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해본 적도 몇 차례 있었으나 이곳 만수대의사당은 서방세계의 의사당들과는 달리 기능과 용도 면에서 매우 특별해 보였다. 북 정치 체제는 다당제가 허용되지만 국가와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조선노동당 중심의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의 의사당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외형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사회주의식 주권기관에 걸맞게 설계된 듯했다.

그동안 필자는 남측의 보수 언론들과 일부 보수학자들 중에 최고인민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않고 무조건 편견을 갖고 매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왔다. 최고인민회의는 ‘집단 거수기에 불과한 꼭두각시’라고 혹평하는 것을 자주 들어왔던 터라 나는 최고인민회의라는 기능과 역할에 대해 평소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인 연구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비난과 혹평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북의 정치 시스템과 최고인민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자료가 전무하거나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만수대의사당이 그동안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주권의 전당’으로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왔다고 판단된다.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주권의 전당’이라는 표현은 필자의 말이 아니다. 6.15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김대중 대통령은 이곳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해 다소 장문의 글을 방명록으로 남겼다. 반면 10.4 정상회담 기간에 이곳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짧고도 간결한 문장의 방명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주권의 전당’이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노 대통령은 평양인근의 서해갑문을 방문해 ‘인민은 위대하다’란 문장도 방명록에 남겼는데 그 바람에 당시 남측의 보수 언론과 보수 세력들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노 대통령의 방명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남측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가장 정확하게 북 체제와 최고인민회의 기능에 대해 이해하고 간파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노 대통령의 이런 긍정적인 대북관과 북 체제를 이해하는 척도를 확인하며 그가 통일의 파트너인 북을 매우 올바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필자는 평소에도 ‘인민(人民)’이라는 용어가 ‘국민(國民)’이라는 용어보다 민주주의에 더 부합되는 명칭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무튼 주권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국민이든 인민이든 그들의 행복은 자신들 스스로의 주권에서 나와야 한다. 2500만 명의 북 인민들을 대표해 그 주권을 행사하는 687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를 알아보았다. 김정은 위원장 시대가 개막된 후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선거권과 소환권은 물론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명예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에 대한 선거권과 소환권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북에서 가장 최고의 권력을 지닌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선출하는 선거권은 물론 소환권까지 지니고 있다고 한다(2016년 이후 현재까지 국방위원회는 국무위원회로 대치됨). 이처럼 최고인민회의는 인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 스스로의 주권을 행사하며 전체주의적 행복권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전당이 바로 이곳 만수대의사당이다. 국가를 위해, 자신들의 행복권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들이 선택한 최고지도자를 ‘최고 존엄’으로 여기며 철저하게 받들고 따르는 인민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주권을 책임과 의무로서 행사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안내로 만수대의사당 대회의장을 참관중인 노무현 대통령. [사진제공 - 최재영]
▲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수대의사당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노무현 대통령. [사진제공 - 최재영]
▲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만수대의사당 방명록 페이지. 글 내용 때문에 보수세력들의 비난과 질타가 이어졌다. [사진제공 - 최재영]

‘금수산의사당’과 ‘만수대의사당’의 상관 관계

나는 평소 ‘금수산의사당(錦繡山議事堂)’과 ‘만수대의사당(萬壽臺議事堂)’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흔히 ‘의사당’이라고 하면 그 나라의 입법부가 있는 건물을 의미하거나 의회건물을 말하는데 이곳 평양에서는 한때 의사당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소 이해가 안됐기 때문이다. 워낙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금수산의사당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회 건물도 아닌데 왜 의사당이라는 명칭을 넣었으며 만수대의사당과 금수산의사당의 관계가 무엇인지 의문이었다.

물론 필자는 금수산의사당이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과 숙소의 기능을 겸하는 공식 관저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왜 굳이 의사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사뭇 궁금했던 것이다. 금수산의사당은 평양시 대성구역 미암동의 드넓은 대지위에 건립됐다. 1973년 3월에 건물 공사를 시작해서 77년 4월 15일, 당시 김일성 주석의 65회 탄생일에 맞춰 준공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수산의사당이라는 명칭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 체류기간중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틈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알아보았다. 해방 후 김일성은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이 되었고 연이어 1948년 8월에는 그의 주도로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었으며 그해 9월 초대 내각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무려 24년 동안 내각 수상을 지냈으며 그 후 헌법 개정에 의해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 서거하기까지 22년 동안 국가주석 직을 수행했다.

국가주석이라는 직책은 1972년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신설되었는데 김일성 수상이 주석 직에 추대되어 선출된 것이다. 그때부터 국가주석 직은 최고인민회의의 권한으로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식적인 국가원수 직으로 추인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석 직은 최고인민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직이자 국가원수로 간주되면서 수상 관저가 아닌 주석이 집무하거나 거주할 공간이 새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석이 머무는 관저를 개관하면서 그 명칭을 의사당이라고 호칭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최고인민회의 주석의 관저로서 혹은 국가원수 관저로서의 의미로 ‘의사당’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주석 제도가 시행되던 시기에는 금수산의사당 안에서 모든 국사를 해결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의 수장으로서 모든 업무를 금수산의사당 관저에서 직접 챙긴 것이다. 그래서 지난 1990년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남측의 강영훈 총리와 대표단 일행이 김일성 주석을 면담한 곳도 바로 금수산의사당이었다.

이처럼 김일성 주석 생존 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최고인민회의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 국가수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김영남 상임위원장 같은 역할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김 주석 서거 후 오늘날에는 이원적으로 보이지만 실질적 국가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며 명목상 대외적인 국가수반은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맡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

아무튼 금수산의사당이라는 호칭은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면서 서서히 그 명칭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1주기를 앞둔 1995년 6월부터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8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해 김 주석이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면서 금수산의사당이라는 용어는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수대의사당 관리와 운영은 총장과 부총장이 맡다

사회주의 체제인 북에서는 의회 기능과 역할, 운영 방식에 있어서 자본주의 의회와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필자가 알아보니 평양 만수대의사당을 책임지고 관리 운영하는 실무 기관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기관의 총책임자들을 ‘총장(總長)’, ‘부총장(副總長)’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총장’이라는 용어는 남과 북이 공통적으로 대학교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용어 아닌가? 그런데 만수대의사당은 대학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총장·부총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다.

남측 의사당을 예로 든다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관리 운영하는 업무를 ‘국회사무처(國會事務處)가 맡고 있듯 만수대의사당의 총장과 부총장도 여의도 국회사무처의 처장과 부처장과 동일한 직책으로 보면 된다. 이처럼 만수대의사당 관리 운영에 대한 실무 조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산하 조직으로서 최고인민회의를 대신해 상임위원회가 이들을 직접 임명한다고 한다.

의사당 본관 뒤편에는 이들이 근무하는 3층짜리 청사가 별도로 있다. 본관 뒤편 청사 안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산하 상임위원장, 내각 등 국가의 고위직 간부들과 관료들이 사무를 보고 있으며 이곳에 함께 만수대의사당 총장, 부총장, 의례책임자 등 핵심 관리들도 근무한다. 의사당 총장이면 그 책임과 권한이 막강하다고 볼 수 있다. 총장이나 부총장이 되려면 아래와 같이 철저한 사상검증과 실력이 뒷받침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만수대의사당 총장은 이상진에 이어 차철마가 임명되다

의사당 총장 제도는 만수대의사당이 1984년에 건축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고 한다. 필자 생각에는 아마 총장이나 부총장이 되려면 철저한 사상검증과 실력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권력의 뒷받침 인민들을 대표하는 대의원들의 신임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건축 개관과 동시에 첫 부총장은 여성 외교관 출신의 이상진 여사가 임명됐는데 그녀는 6.15 정상회담 시 김대중 대통령이 만수대의사당을 찾았을 때 의사당 건물을 직접 안내하고 해설을 맡았으며 당시 그의 직책은 만수대의사당 부총장이었으며 훗날 총장이 되었다.

또한 이상진의 부친은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李鉉相)이라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 전설적인 활약을 했던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고전하며 전투를 지휘할 때 1남 3녀 중 막내딸이던 이상진은 모친 최문기와 함께 월북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월북한 모녀를 극진히 보살폈으며 혁명학원 입학과 학업, 생활지원 등에 대해 특별 배려를 해주었으며 이상진과 김일성종합대학교 동기동창이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특별한 관심과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주로 대외 부문에서 외교관으로 종사했으며 외무성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해외공관에서 잔뼈가 굵은 외교통이 된 것이다. 이런 이상진을 최고인민회의 측에서는 만수대의사당이 개관하면서 외교 감각과 실력을 겸비한 이상진을 부총장에 기용했다고 한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해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하는 날 의사당 안내는 총장이 직접 하지 않고 김용걸이라는 의사당 의례책임자가 총장을 대신해 맡을 정도로 총장과 부총장 직책은 항상 분주하고 해외출장도 빈번하다. 또한 노 대통령의 의사당 안내는 의례책임자 외에도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직접 동행하여 의전의 격식을 높여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이상진 총장의 뒤를 이어 새로운 총장이 교체 되었는데 필자가 방문할 당시 만수대의사당 총장은 차철마였다. 차 총장은 한 동안 만수대의사당에서 무역 분야와 후방업무 분야를 전담하는 부총장직을 맡아 수행해왔는데 실력과 충성도를 인정받아 훗날 총장 자리에 임명된 것이다. 외무성 출신인 차철마 총장은 부총장에 임명되기 전에는 평소 중국을 중심으로 경제 분야 협력에 주력해 왔으며 총장이 된 이후에는 의사당 책임 일꾼들과 함께 최고인민회의와 의사당 발전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차 총장은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중앙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리제강의 사위라고 한다. 리제강은 2010년 6월 교통사고로 운명했는데 장인이 타계한 후로도 계속 총장직을 수행하며 건재하게 된 이유는 남다른 충성심과 열정 그리고 실력을 바탕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 만수대의사당 부총장 시절의 이상진 모습. 전설적인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의 막내딸이다. [사진출처: 노동신문]
▲ 방북 중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만수대의사당 내부를 안내하는 부총장 시절의 이상진 모습. 후에 총장에 임명되었다. [사진출처: 청와대사진기자단]
▲ 차철마 총장의 모습. 만수대의사당에서 무역과 후방분야 전담 부총장직을 수행하던 차철마는 그 후 총장에 임명되었다. [사진제공: 조선중앙텔레비전 화면 캡처]

변화를 거듭한 주석단의 대리석 입상과 채색 조각상

필자는 의사당 여러 곳을 돌아본 후에 마지막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최고인민회의 전체회의가 개최되는 대회의장을 참관하였다. 대회의장은 의사당 본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단층으로 된 대회의장은 초록색 계열의 고급 카펫 위에 2천석 규모의 좌석과 테이블을 갖추고 있었고 벽면은 고급 나무자재로 마감해 매우 아늑하고 우아했다. 대의원 전용석은 단순한 좌석만 갖춘 것이 아니라 좌석 배열마다 8명 혹은 11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을 갖췄고 위에는 대의원 누구나 앉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마이크가 두 세 개씩 올려져 있었다. 대회의장 중앙 홀의 천정에는 격조 있는 조명들이 설치돼있었고 가장 한복판에는 엄청난 크기의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회의장에 정면 중앙에는 백색 대리석으로 조각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입상이 위엄 있게 세워져 있었으며 은은한 조명이 한껏 엄숙한 분위기를 더 해 주었다. 그 후 대리석 입상은 ‘색 조각상’으로 교체되었다. 채색입상의 크기는 이전의 대리석 입상 보다 크기가 훨씬 컸으며 입상이 서 있는 계단식 제단도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제단의 계단은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한 붉은색 카펫으로 덮여있었으며 그 위에 서있는 두 지도자의 채색입상은 환하게 웃는 표정이다. 생존 시와 거의 흡사해서 마치 살아서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 입체감으로 조각되었다. 조각 예술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기술과 예술적 재능을 지닌 만수대 창작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입상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1984년 만수대의사당이 처음 개관될 당시는 김일성 주석의 대리석 입상 하나만 세워져 있었는데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거한 이듬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입상이 하나 더 우측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다가 두 지도자의 대리석 입상을 모두 철거하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기법으로 새롭고 특별한 채색 입상을 공식적으로 완성하여 2016년 4월 30일, 입상에 대한 헌화식 행사를 했다.

한편 주석단과 대의원석 배치를 살펴보니 일반적인 의사당들은 본회의장 자리 배치를 연단과 의장석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방사상의 반원형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인데 이곳 대회의장 좌석배치는 사회주의 국가의 의사당답게 근대 극장형 스타일처럼 단상위의 주석단과 대의원석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영연방 국가들의 의사당 좌석 배치는 주로 여야 의석이 정면에서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가 되어있으나 최고인민회의는 여야 개념의 정치 시스템이 아니다 보니 그런 형태의 배치는 불필요했던 것이다.

필자가 알아보니 이 주석단에는 조선노동당 소속 대의원만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노동당을 비롯해 조선사회민주당, 조선천도교청우당,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무소속 등 다양한 정당들이 모인 단원제를 추구하는 의회 시스템이기 때문에 어느 당 소속이든 주석단에 않을 수 있다. 서방세계 신문, 방송들이 쉽게 착각하는 오류 중에 하나가 최고인민회의 장면과 조선노동당 회의 장면을 혼동하는 것이었다. 최고인민회의는 노동당 대회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석단은 노동당 지도부만을 위한 전용석이 아니다.

현재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포함해 김영남, 박봉주를 비롯한 최고위급 대의원도 앉을 수 있지만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책의 김영대 대의원을 비롯한 노동당 소속이 아닌 대의원들도 주석단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측 언론들은 아직도 최고인민회의 장면과 조선노동당 대회 장면을 혼동하여 방송 자료 화면을 송출할 때가 많다. 북 정치체제는 다당제가 아닌 단원제 시스템이지만 엄연히 해방 후 조선노동당이 생긴 직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개의 정당들이 조선노동당과 공존하며 협력 내지 우당(友黨)의 역할과 기능을 해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 만수대의사당 개관 당시 의사당 대회의장과 입상 모습. 초창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대리석 입상만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의사당 단상 중앙에는 약 5년 동안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리석 입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나 2016년 4월말 이후 거대한 크기의 채색입상으로 교체되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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