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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부터 나는 두 개의 세계를 살았다. 하나는 전통적인 정치와 경제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12년 대선과 세월호, 촛불시위 등이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뉴스를 듣고 글을 쓰곤 했다. 다른 하나는 과학과 기술의 세계였다. 수학선생으로 일했고 틈틈이 과학기술 관련 책, 다큐를 보며 지냈다.

후자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문명과수학·기생·경이로운 지구 같은 다큐였다. 재밌고 유익했다. 더불어 최신 과학기술적 성과들이 눈에 들어 왔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격파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희한한 질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인간보다 더 지적 수준이 뛰어난 존재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인공지능으로 가는 스위치를 끌 것인가?

크리스퍼를 비롯한 생물학의 발전은 맞춤형 아기, 영생불사와 같은 문제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무엇이 인간인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10개월 후 세상에 나온 어린 개체가 인간인가? 정자와 난자를 세심히 선별한 뒤 특정 유전자를 조합하여 만든 새로운 유형의 아기도 인간일 수 있는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현실은 목전에 있다.

비트코인을 둘러 싼 유시민-정재승의 논쟁은 시사하는 바 크다. 나는 애초 정재승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정재승의 관점이 너무 기술 위주로 사회적 현실을 낭만적으로 보고 있다고 보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인정하고 공감한다.

반면 유시민은 황당했다. 짐작컨대 유시민은 블록체인이나 위에서 언급한 과학기술 자체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유시민은 TV 토론에서 시종 문과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이 놓인 처지를 요약했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는 세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나 어떻게든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과 유사했다.

당대 최고의 논객인 유시민은 지금까지 자신이 잘 아는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실력과 지명도를 높여 왔다. 그의 출중한 실력이 한몫했지만 한국 사회 현실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시기 한국은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라는 지극히 문과적 프레임에 맞춰 국가 정책이 논의되었다.

과학기술은 몰라도 되는 그냥 변방의 지식이었다. 유시민은 자기가 잘 모르는 어떤 세계를 두고 토론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지각 밑에서 꿈틀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지판을 뚫고 지표면을 흔들 것이다. 어느 수준 이상의 과학기술 지식이 없다면 발언할 자격조차 없다. 민주주의를 논하는 데 왕조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토론자로 등장하는 것이 민망한 것과 같다.

블록체인은 2000년대 후반 본격화된 거대한 과학기술 혁명의 하나이다. 이는 농업혁명만큼이나 거대한 변화의 징조이고 변화는 이미 숙성기를 지나 사회와 인간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변화는 거대하고 파괴적이며 위력적이다. 기존의 철학이나 사회과학으로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수학선생으로 일하면서 늘 생각하던 구절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기존 인문학을 시급히 파괴해야 새로운 인문학이 태어날 기반이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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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정재승 논쟁을 포함한 다양한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산업혁명이 맞물리면서 인류는 대비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불행히도 이는 전쟁과 공황, 빈곤과 기아로 얼룩진다.

이를 배경으로 시장과 기술을 인간의 요구에 맞게 길들이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된다. 마르크스주의, 케인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등이 그러하다.

이들 생각은 인간의 도덕과 자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인간 사이의 협조와 합의를 통해 사회를 건전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이야 이해되지만 과연 그런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의 IT 버블은 2000년대 후반 미국 거대 기업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지금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애플·아마존 등 미국의 첨단 기업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출현했다. 그렇다면 IT 버블은 경제 시스템에 본능적으로 내장된 본질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을 착오인가?

우리는 지금 실패를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수한 실패가 없다면 경이적인 성공도 없는 것이다. 욕망과 버블은 혁신과 동전의 양면이다.

유시민을 비롯해 비트코인을 반대하는 논자들은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을 강조한다. 그런데 튤립 버블이 태어난 바로 그곳에서 동인도 회사라는 최초의 주식회사가 태어나지 않았는가?

2000년대 초반 벤처 열풍에 대한 평가도 유사하다. 나는 최근 통계자료를 보며 놀라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벤처 열풍이 사회적 물의와 부작용을 낳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의 벤처 생태계는 나름 발전하고 있었다.

비트코인을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바다 이야기쯤 되는 도박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비트코인에 따른 폐해를 최소화하되 비트코인 과정에서 발생하는 투기와 버블을 용인하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첨단 로봇은 필연적으로 섹스 산업의 번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게 기술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숙명이다. 사회와 경제를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순결무구한 유기체쯤으로 파악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사회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두고 극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에는 도덕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던 어떤 시대의 사회과학이 흐른다. 강남 부동산 정책, 비트코인, 선행학습 금지와 영어 유치원, 최저임금제 등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파열구의 기저에는 시장과 도덕, 욕망과 안정, 정의와 공정이라는 대치선이 형성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념적 성향이 강하고 그릇된 선민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충돌과 파열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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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시장을 둘러 싼 충돌 또한 흥미진진하다.

2000년 후반 50대와 청년층은 고용시장을 두고 충돌했다. 기업과 노조는 구조조정을 자제하고 신규 채용을 줄이는 형태로 타협했다. 이로 인해 정규직 고용은 유지되었고 청년실업은 가중되었다.

2012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두 집단이 반보수의 기치 아래 연합했다.

이 허구적이고 전술적인 연대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장기간 진행되었다. 20~30대는 정작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 하지 않고 50대의 자기 회고담에 가까운 ‘택시운전사’-‘1987’에 빠져 들었다.

30년 전의 역사가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쌓아 올린 민주화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청년들의 이해관계 정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동일한 질문이 남북 단일팀에도 적용된다. 국가적 대사를 위해서는 비인기 종목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희망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나는 학생운동 시절 수도 없이 이런 질문에 부딪쳤다. 배불러서 데모하는 것이고,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런다고. 즉 경제성장이 위대하다면 민주화 정도는 유보하자는 주장이다.

내용과 진술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세계를 인정하라는 체제 수호이다. 내가 영화 1987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민주라는 이름아래 보수적 감수성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40~50대와 20~30대의 균열은 뜻밖에도 자산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돈이다.

40~50대는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보다 안정적인 시장에서 자신의 미래를 구하고 있다. (물론 로또라는 보다 대중적인 시장이 있지만) 그러나 청년층에 부동산과 주식은 너무 진입 장벽이 높았다. 수백만 원이라는 나름 맞춤한 투자 금액에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자산 시장은 다른 무엇보다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진실은 청년 세대가 거짓 광고에 속아 귀중한 돈을 잃어버린 해프닝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부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인구 구성이다. 에코 세대라는 것이 있다. 인구 분포를 보면 1971년생을 정점으로 하강하던 인구 규모는 1991~96년생에서 낙타 봉우리처럼 불쑥 올라가 있다. 이들이 지금 20대 후반이다.

정부는 연일 일자리 정책을 논하고 있지만 해결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건 문재인 정부의 정책 성패를 넘어 서는 문제이다. 비트코인 문제는 규제를 통해 사라질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

잃어버린 세대가 있다. 일본의 경우 1993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장기불황과 이 시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일본의 청년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삶을 갖지 못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은 40~50대와 20~30대가 공고히 연대하여 민주세력이 영구 집권하는 태평성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불로장생하겠다는 진시황의 생각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다. 비트코인이 되었든 청년실업이 되었든 궁지에 몰린 청년세대가 분출하는 욕망과 생존 욕구는 촛불을 통해 40~50대가 이룩한 새로운 체제에 생채기를 낼 것이다.

필요한 것은 양자 사이의 균열과 대치가 불가피하고 매우 정상적인 상황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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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려 보자.

한국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적폐청산, 민주화, 촛불 등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과학기술 변화와 부의 새로운 재편이다.

첫 번째는 거의 마지막 장면으로 치닫고 있다. 마침내 이명박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 국면의 특징은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제로라는 점이다. 이명박이 구속되든 그렇지 않든 현실 정치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그냥 법률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여 적폐청산 국면을 지속하려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시효가 끝나고 있다.

북핵은 이미 2017년 전면에 부상했다. 한국은 이제 외교와 국방, 남북관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비트코인이 보여준 것은 세 번째 문제가 부상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지금까지 주요한 키워드는 낯설음과 난감함, 그리고 이중적인 태도이다.

유시민의 태도는 난감했다. 모든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하던 그는 블록체인 문제에서 만큼은 꼬리를 내렸다. 시종일관 문과생임을 자처하며 본인의 난감한 처지를 변호하려 했다. 유시민은 민주화 세대가 낳은 걸출한 논객이다. 2018년의 유시민은 인문학 위주의 인텔리들에서 과학기술 기반의 인텔리로 넘어가는 과도적 국면을 상징한다.

세상은 촛불에서 외교안보와 과학기술을 주 테마로 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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