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덕 (원불교 교무)


나는 불혹을 넘어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평화와 인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다. 배움의 횟수가 늘어나고 앎이 깊어질수록 매일 희열에 넘쳤다.

"사생(四生) 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요"라는 소태산 대종사님 말씀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시간들이었다.

이러한 공부의 기쁨에 심술궂은 훼방꾼이 있었으니 바로 영어였다. 영어는 내게 장벽이었다. 그 답답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고민끝에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담쟁이처럼 타고 넘으면 된다는 각오였다. 뉴질랜드의 지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오클랜드  MIT대학에서 영어를 익히기로 한 것이다.

40을 넘긴 나이로 생소한 문화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이질감에 나는 잔뜩 긴장했고 자주 당혹감에 빠졌다. 평소 유쾌한 성격이라 자부해왔지만 이즈음은 깊은 동굴 생활을 하는 듯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교정을 가르던 어느 날 여름, 그날도 어김없이 얼떨떨한 하루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통가 출신 '이카니'교수님의 듣기 보충수업에 참여하러 가는 길이었다.

보충수업 후 화장실에서 후련한(?) 시간을 보내고 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질 않았다. 
그 화장실 문은 철문이었다. 평소 거칠게 사용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은 탓에 두텁고 튼튼한 철문을 설치한 것이다. 화장실 문 앞에서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아무리 밀어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당황하기 이전 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보면 세상은 평화였다. [사진제공-정상덕 교무]

모두가 퇴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10여 분이 지나도록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누구 없어요~?'', ''살려 주세요~!''
내 목소리는 읍소에 가까웠다. 두려움이 밀려오며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한참을 지나서였다. 문득 붉어질대로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내가 나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상덕아, 무섭냐?, 두렵구나.’ 
스스로의 질문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공부 법문이 외어졌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당황함)이 없건마는 경계(상황)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당황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서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마음공부 일기를 기재하며 스승님과 수 없이 연습했던 내용이었다.

그 순간, 그토록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다. 기적같이 느껴졌다. 
수 십 분을 좁디좁은 화장실에서 사투(?)하던 내겐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화장실 문이 앞뒤로 여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돌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황하기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보니 세상은 평화였다.
붉어진 얼굴과 당황했던 마음을 다시 보니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암흑 같기만 했던 화장실을 빠져나와 평온한 마음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차창 밖의 오클랜드의 석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때였다. 윗도리 안으로 손을 넣는 순간 내 얼굴은 저녁 노을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집 주인께서 비상시를 대비하여 내가 집을 나설 때 마다 꼭 챙겨주던 작은 핸드폰이었다. 어둑한 저녁, 붉어진 얼굴로 숙소로 돌아오던 그날 밤이 이따금 생각난다.

 

2018년 01월 04일 정 상 덕 합장

 

 

원불교 교무로서 30여년 가깝게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함께해 왔으며, 원불교백년성업회 사무총장으로 원불교 100주년을 뜻 깊게 치러냈다.

사회 교화 활동에 주력하여 평화, 통일, 인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늘 천착하고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