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29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입구에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들어섰다. '6.25전쟁'과 달리 전후 문제도 다루고 있어 반북선전장이라는 논란이 예상된다. [사진출처-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지난 11월 29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입구에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들어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시작된 사업이 문재인 정부에서 마무리됐다.

정부에 의해 납북자로 인정받은 총 4천 777명을 위해 마련된 기념관에는 총 181억 원이 투입됐으며, 1만1천155㎡의 부지이다. △납북의 배경과 원인, △납북의 전개 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귀환의 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아픔,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등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1천1백여 점의 기증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통일부는 “전시 납북자 및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납북 기록을 보존.전시하며 그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기념관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 납북자’를 “남한에 거주하던 대한민국 국민으로 6.25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에 의하여 강제로 납치되어, 북한이 지배하는 영역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6.25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북쪽으로 간 이들을 모두 납북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 그러나 기념관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납북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과연 납북자 규정은 물론, 모두 납북자로 통칭해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6.25전쟁 납북자 규정 적절한가

이신철 성균관대 교수는 월북과 납북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 행위의 자발성과 강제성 여부로 두고 있는데, 많은 경우 강제성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남북분단의 상황이 발생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남 출신의 민간인이 북측 당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사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거주지를 북으로 옮기게 된 것”으로 납북자를 규정했다.

하지만 현재 납북자들이 이러한 조건에 충족된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확인된 경우에 한해서만 호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즉, 정황증거와 물적 증거가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납북의 의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정부는 정황증거와 물적 증거를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획납북자와 동원납북자로 구분해 가족들의 주장에만 근거해 납북자로 규정했으며, 김규식, 안재홍 등을 대표적인 납북자로 내세우고 있다.

▲ 기념관은 김규식, 안재홍 선생 등을 대표적인 6.25전쟁 당시 납북자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내고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섰던 김규식 선생의 경우, 1950년 9월 16일 서울 자택에서 조소앙 의원의 비서인 김흥곤과 청년 2명에 의해 차에 태워졌다. 당시 이승엽 서울시 인민위원장과의 회의 명분이었다. 이를 두고 김규식 선생의 비서 송남헌 선생은 ‘납북’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규식 선생이 타의에 의해서 북으로 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송남헌 선생의 시각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규식 선생은 그해 12월 10일 사망했으며, 현재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안재홍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외교단 총무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안 선생도 1950년 북으로 올라갔다. 민족주의자였던 안 선생은 1965년 3월 1일 사망할 때까지 북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고, 현재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묻혀있다.

그러나 기념관은 이들의 묘역에 대해 명시하지 않고 있다. ‘납북직후 서거했다’, ‘평양에서 별세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정인보 선생이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어 있음에도, ‘한 지인이 그의 묘가 평양에 있음을 확인함’이라고 적었다.

이뿐 아니라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엄항섭, 조소앙, 조완구, 최동오 선생과 재북인사묘역에 묻힌 명제세 선생 등도 정부의 입장에서 ‘납치’된 인물들이지만 ‘납북자’로 분류되지 않았다.

물론, 가족들이 납북자 신고를 했다는 점에서, 납북자로 분류되지 못한 이들은 가족들이 신고하지 않았거나, 신고했더라도 정부가 납북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수 있다.

정부가 인정한 4천 777명 모두가 월북과 납북이 모호하다고 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납치돼 북으로 강제로 끌려간 인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 등 제3자의 시각에서 납북으로 비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시각도 필요하다.

이신철 교수는 조소앙, 안재홍 선생 등이 북으로 갔지만, 일각에서 제기하는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만 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재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활동은 독자적이었고 오히려 북한의 통일정책 수립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납북자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해석이다. “중도파 정치인이나 민족주의 정치인의 일부는 남과 북을 모두 같은 조국으로 여기거나, 동족상잔의 비극에 좌절하면서 스스로 피난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이 교수의 해석에서, 기념관이 내세우는 김규식, 안재홍, 정인보 선생 등을 납북으로만 분류하기 어려워 보인다.

반론도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북한이 요인 모시기로 해서 데리고 갔다. 납북이 맞다”며 “북한에서 어떤 활동을 했든 6.25전쟁 당시 북한이 모셔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납북이다. 이 분들이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활동이 폄훼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 기념관 전시물. 납북자들이 북으로 간 상황을 글과 지도로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6.25전쟁납북자기념관’, 건립 목적에 맞나

한국 사회에서 월북과 납북의 경계를 구분 짓기 쉽지 않다는 점을 차치하고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6.25전쟁 이후 사건도 나열하고 있어, '6.25전쟁'만 다룬다는 원래 건립 목적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기념관은 ‘전시 납북자 및 가족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목적으로 납북과 관련된 사료를 제시하고 있지만, 전시실 중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부분은 6.25전쟁과 다른 내용이 많기 때문.

‘계속되는 납북’이라는 주제의 안내판에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은 어선, 비행기,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3,319명은 남한으로 돌아왔으나 아직도 516명의 전후 납북자가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고 전후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여기에 여전히 논란인 1987년 대한항공 858기 사건을 언급, “폭파범인 김현희는 일본에서 납치한 타구치 야에꼬(田口 八重子)에게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고, 중국인 납치 피해자인 공령앵(孔令罌)에게서 중국인화 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 '6.25전쟁'만을 다루는 취지와 달리 전후 문제도 기념관은 소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일본과 중국에서의 납치사례 지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와 함께, 국내 주요 전후 납북사건과 1977년 요코다 메구미, 1978년 오쿠도 유키코, 1980년 하라 타다아키 등 일본인 납치문제, 1978년 아노차 판초이, 2004년 데이비드 스네든 등 중국에서의 납치문제, 1979년 고상문, 1987년 이재환 등을 주제에 포함시켰다.

그러면서 “6.25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납북은 반인도적 범죄이자 중대한 인권침해”라며 ‘전쟁범죄’에 해당되고, “북한이 여전히 납북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우리부터라도 국가적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상처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라며 ‘6.25전쟁’ 당시와 전후 문제를 혼용하고 있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6.25전쟁’ 당시뿐 아니라 여타 문제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반북 선전장으로 활용된다는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통일부 관계자는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납북자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사회 통합을 위한 공간”이라며 “전후 납북자의 경우는 북한 인권에 포함된 문제이기 때문에, 전시실에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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