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모(모영임, 416해외연대 인디애나폴리스 회원)

 

▲ 조선대학에서 초대한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지난 11월 7일부터 14일까지 참여했다. 도쿄 조교의 고등부 수업 모습. [자료사진 - 린다 모]

일본을 여행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우연히 알게 된 ‘우리학교’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었고 지난달에 기회가 생겼다. 도쿄 조선대학교에서 기획한 역사탐방은 지난 11월 8일부터 13일까지 6일 동안 재일조선인들의 우리학교와 일제 강제 징용자들이 죽어간 아시오 동산, 히따지 탄광, 국평사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침 8시 전에 아침식사를 끝내고 곧장 일정이 시작되는 무척 빡빡하고 바쁜 일정이었지만 그렇게 바쁘게 다녔어도 재일동포들의 역사의 발자취는 한걸음도 제대로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도쿄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지역에 자리잡은 조선대학교가 처음 세워질 때만 해도 아무도 살지 않았던 오지의 땅이었지만, 조선인 학교로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초기에는 공장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이며, 기차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기자기한 건물과 좁은 길목의 양방향 차선에서 서로 양보하며 비껴가는 작은 자동차들을 보고 난 소인국에 온 느낌을 받았다.

우리 일행은 각각 학생 기숙사의 방을 배정받았다. 방에는 일본 특유의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옷장엔 예쁜 이불과 요가 쌓여 있었는데, 똑같은 이부자리를 이바라기 조선학교에서도, 온천을 낀 호텔에서도 볼 수 있어서 참 신기했다.

조선대학교의 식당에서는 조리원의 도움을 받아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모든 식사를 준비하는데 미리 나눠받은 식권을 주고 아침으로 스파게티를 한 접시 받았다. 역시 전문가의 솜씨가 아닌 투박한 맛이었지만 깔끔하고 구수한 스파게티였다.

새벽부터 운동부 학생들이 연습을 끝내고 들어왔는데 그들도 스파게티 한접시를 받고서 낯선 방문자인 우리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너무나 여리고 부끄러워하는 여학생들에 비해서 시꺼멓게 그을린 남학생들은 장난끼가 철철 넘쳐난다.

도착하면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학생 기숙사에는 방마다 빨래가 걸려있고, 남학생들과 교직원이 직접 지었다는 학생 목욕탕 이야기며, 학교건물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중에 큰 대자보 밑에 학과별로 학생들의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 방문한 조선학교마다 전시되어 있는 고교무상화에 대한 일본 정부의 주장을 학생들이 조모조목 합리적으로 반박한 게시물. [자료사진 - 린다 모]

교내에서 조선어로 말하기, 친절하기, 인사하기 등으로 점수를 올려주는 점수판이다. 조선어를 일상으로 쓰도록 끌어내기 위한 묘안을 만들었나본데 지나가는 학생들도 선생님도 일본말만 한다. 그러나 수업시간과 우리 일행과 대화할 때는 우리말에 일본식의 억양이 들어간 우리말을 한다. 낯선 조선말이었지만 금방 친근감이 더해지며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이 지금까지 조선말을 지켜온 것은 가장 큰 공로가 아닌가 싶다. 2차대전 이후에 세계 각지로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들 중에서 3,4세가 조선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곳은 재일조선인들이 유일하지 않을까!

조선대학교 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고구려 벽화가 실물 크기로 꾸며져 있고, 수 년 전에 용산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적이 있는 고구려 벽화와 전시물이 즐비하다. 분단된 한반도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며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한반도 지도에는 우리나라 모든 산과 도시의 이름은 물론이고 해발 높이와 해저 깊이까지 섬세하게 표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북쪽의 지하자원이라고 전시된 각양각색의 광석들은 한반도가 통일되면 우리 민족이 함께 쓰려고 발굴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나의 귀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박물관을 나서기를 바라는 안내자를 따라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전시물을 사진에 모두 담지 못하고 나온 것이 아직도 아쉽다.

▲ 학생들의 자연과학 학습을 위해 북조국에서 보내 온 지하 광석들이 전시된 조선대학교의 박물관. [자료사진 - 린다 모]

<조선의 아이>로 설명되는 우리학교와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에 대한 역사 기록물은 나의 무관심과 무지함을 일깨우고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조선인들을 탄압했는지, 현재 고교 무상화에서 우리학교 만을 제외하여 탄압하는 그들의 본심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교 무상화에 대한 차별에 대한 소송 중에 한국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과 한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일본 문무성의 편을 들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방문 일정의 시작으로 도쿄조선초중고급학교를 가자고 조선대학교 교문을 나선 후에 좁은 산책로를 따라서 걸어 나와 지하철역으로 갔다. 도쿄조선초중고급학교를 줄여서 도쿄조교라고 하는데(재일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학교를 통칭하여 조선학교, 우리학교라고 한다), 이곳까지는 20여분의 거리밖에 안되지만 지하철을 네 번 갈아탔다.

복잡한 일본 지하철로 이런 통학거리는 보통이여서 어린 초등학생들도 친구들끼리 다닌다고한다. 하지만 도쿄조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학교는 기숙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1945년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재일조선인이 조선어를 배우고 잊지 않으려고 ‘국어강습소’를 시작한 것이 1946년 재일조선인연맹의 학교로 발전되었다고 하고 도쿄조교는 그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작년 2016년까지 70년 동안 3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도쿄조교에 들어서니 오래된 교문 옆의 건물은 지난 2011년 지진 이후에 위험해지기도 하고 학생수의 감소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본관에 들어서니 촘촘히 만들어진 신발장에 학생들의 신발이 나란히 있고, 마침 교실을 옮겨가는 학생들이 부끄러운 듯이 우리를 반기면서 서로는 재밌다는 듯이 웃음소리가 맑게 퍼진다.

교장 선생님께 간단한 소개를 받고 직접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가 수업참관을 하였다. 20여명의 남녀학생들이 수업 중에도 우리에게 밝은 웃음을 주는 학생도 있고 V자로 손인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준다. 학생들보다 당황해 보이는 분은 선생님이시다. 여선생님도 여학생도 한복을 입었고, 수업은 조선말로 하고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보다는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된 학생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학생들의 맑은 눈동자와 자신감 있는 표정에서 난 새로운 에너지를 받는 듯했다.

음악실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즉석에서 환영곡을 불러주었는데 가슴에 벅차오르는 미안함과 뿌듯함으로 우리 일행은 끝내 울고 말았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미인이라고 자부하는 여학생을 만난 건 여학생 화장실, 점심 식사 후에 양치질을 하는 여학생들은 연신 웃어댔는데 그 곳에서 머리 고데기로 앞머리를 만지는 여학생의 이름을 물었더니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라며 잊지 말란다. 옆의 친구들도 그녀의 장난에 맞장구를 치면서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와락 모여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에게도 스스럼이 없다. 2020년 세계 미인대회에서는 도쿄조교에서 월드 미스가 나올 것 같다.

복도 곳곳에는 2010년부터 소송 중인 고교무상화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와 일본 문무성의 처우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반박한 대자보가 빽빽하다.

운동장에 나오니 교실을 옮겨가는 학생들과 운동장을 청소하는 사이에서 세월호 리본을 전해주니 너무나 반가워하며 고맙다고 사진까지 찍어준다. 함께 사진을 찍은 후에 페이스북 친구를 하자며 청하였더니 덥썩 자신들의 페북에서 나를 찾아서 친구신청을 해준다. 덕분에 요즘은 이 친구들의 친구까지 나의 페이스북 친구가 돼 친구수가 급증했다.

각 교실은 마치 내 어린 시절에 다니던 학교의 교실처럼 ‘이 주의 목표’, ‘우리학교의 자랑’ 등이 표제되어 걸려있고, 수업시간표가 반마다 특색있게 만들어져 있다. 조선어를 쓰자는 표어는 복도마다 크게 붙었고, 자신들의 행사와 운동회, 여행사진으로 온 벽을 빼곡하게 장식했다.

도쿄조교를 나와 도쿄에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은 상점을 열고 있다는 번화가로 나왔다. 이전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서 상점이나 식당, 빠찡코를 운영하였는데 눈에 띄는 건물 중에도 조선상공회에 소속된 주인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학교에 자녀들을 보낸다는 학부형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도쿄제일초중급학교( 도쿄초교)를 방문해 보자고 제안을 받고 택시로 늦은밤에 학교에 갔다. 밤 9시가 넘었지만 선생님은 선생님들대로, 학부모님들은 학부모님들대로 내일을 위한 준비로 바쁘다.

도쿄초교는 구건물 위에 신축을 해서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유아, 유치부까지 마련되었단다. 아주 아주 작은 아기용 수세식 변기와 세면대가 장난감처럼 꾸며져 있고 잠자는 방이며 마치 동화 속의 아기집 같은 유치원이지만 학교인 만큼 시간표며 학급의 특성을 학생들의 솜씨로 꾸며놓은 표어와 교과의 목표 등이 알록달록 붙여있다. 대회에서 우승한 트로피랑 상장이 구석구석 가득하다.

어머니들 또한 무슨 대회를 준비한다고 모여서 장구를 맞추는 솜씨들이 수준 이상이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를 인도한 조선대학의 선생님들이 그들의 선배였고, 현재 자녀들이 그들의 제자란다. 우리학교의 선후배가 현재의 학부모이고, 선생님이다. 그들은 서로가 가족과 같은 역사를 나누고 같은 시절을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들의 우리학교를 지켜온 산 증인들인 것이다.

이제 도쿄초교의 자녀들은 조선인 4세로서 조선인 3세가 학부모이고, 조선인 2세가 지도층 교사이며 조선인 1세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징용으로, 공출된 노동자로 끌려간 우리 민족의 가장 서럽고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낸 나의 조모세대들인 것이다.

▲ 비록 몸은 일본에 끌려왔지만 정신만은 살아지키고자 자녀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해방직후 동포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국어 강습소 교재.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소장 자료이다. [자료사진 - 린다 모]

탐방 3일째에 우리 일행은 도쿄를 떠나 자동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이바라기현을 방문했다.

이전 이바라기 학군에는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 토치기조선초중급학교, 군마조선초중급학교, 니이가타조선초중급학교, 후쿠시마조선초중급학교, 도후쿠조선초중급학교 이렇게 6개의 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이바라기 우리학교)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한 학년에 한 학급 밖에 없기도 하고 한 학급의 학생수가 1명인 채로 6년을 끌어온 학년도 있을 만큼으로 학생수가 급감했다고 한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새별학원’은 이바라기 주변 현에 남아있는 우리학교가 이바라기 우리학교에 한번씩 모여서 종합 우리학교를 연다. 먼 거리 탓에 인터넷으로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만 하던 친구들이 2박 3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조선인으로서, 우리학교 학생으로서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확인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인 말과 문화를 잃지 않으려는 재일조선인 후세들의 끈질긴 노력은 3,4,5세들의 손짓과 몸짓에 배어있고, 학교 구석구석은 통일된 조국에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미래의 자유를 위해서 꽉꽉 채워놓았다.

백두.한라 동산, 빈터에 작은 돌멩이들로 만들어진 한반도와 제주도, 독도까지... 무엇보다 해방이후 그들이 우리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지나온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한 학교내 전시관을 소개하는 학생에게서 받은 그들의 자긍심은 정말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다행히 방문 일정에 맞게 열린 이바라기 우리학교의 예술발표회에서 유아부부터 고급부까지의 학생들이 보여준 춤과 노래는 정말 놀라운 재능이었다. 소수의 학생들을 각 선생님이 코 앞에서 끼고 가르친 결과이니 정말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영상물을 제작하여 자신들의 뿌리가 누구이며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는 통일된 조국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위해서 부모들의 유언을 지키고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그 유언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우리학교의 학부모들을 만나면서 난 결단코 그들이 미래의 주인이 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현재 우리학교를 제외한 어느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통일을 대비한 일꾼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가? 우리나라 교육에 통일된 시대의 일꾼을 교육시키는 교과가 있는가? 단지 현재의 삶에서 안정된 삶만을 준비하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꿈이 없는데 어떻게 이룰 것인가, 대비하지 않는데 어찌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학부모와의 간담회에서 만난 일본학교에서 선생님이면서 우리학교에 자녀들 보내는 이시카와 사토코 선생님은 같은 학비에 왜 한국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일본학교에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모든 학생이 자율적으로 학교생활을 이끌어 가는 학생생활과 선생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챙겨서 가르치는 우리학교에 자신의 자녀를 보내게 되었고, 자신의 자녀가 자신감있게 성장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는지 모른다는 말에 우리 일행 모두는 너무나 쉽게 우리학교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자신도 이민생활 속에서 자식들을 미국학교에서 졸업시켰지만 그들 자신이 학교생활에서 받은 인종적인 차별과 선생님의 무관심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탐방 4일째에 수천명의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했던 아시오 탄광과 히티치 탄광의 견학을 위해서 우린 유일한 생존자 고 정운모님의 증언이 담긴 <과거를 잊지말자>라는 영상과 역사실습자료라는 책자를 받았다. 지금은 폐광이 되어 자연림이 되어버린 아시오 동산을 가기 전에 학생들은 한 달이 넘는 역사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한자성어를 그들은 자신과 후손들에게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일광이라는 지역에 있는 아시오 동산은 일본이 1610년에 발견된 구리 광산이지만 1877년부터 본격적인 구리 채굴을 시작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 막바지에는 조선인 강제 노동자를 대거 투입하여 1973년 폐광될 때까지의 갱도의 길이가 1,200km에 달하는 엄청난 구리 광산이었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광산의 조선인 숙소는 도망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증언처럼 숙식은 비참했고, 노동시간은 12시간에, 임금은 각종 명목으로 뜯어갔다. 맞아죽고, 굶어죽고, 폭파작업에 죽고, 병들어 죽고, 도망치다 잡혀 죽어나갔다.

패전 후 백인포로와 중국인들은 그들의 요구대로 밀린 임금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은 승전국의 포로로 취급받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민으로 간주돼 노동학대, 인종적 차별과 전후처리 문제에서 제외되었다.

▲ 남,북한 어느 나라도 돌보지 않은  징용, 강제 노동자들의 영혼을 추모한 조선학교 학생들이 세운 추모비. 지금은 폐광된 도쿄인근 아시오 동광 인근에 있다. [자료사진 - 린다 모]

현재까지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추모비는 중.일외교 때에 일광현의 관민 주도아래 반듯하게 세워졌지만 조선인 추모비는 그나마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손수 세운 외로운 추모비가 남의 땅에 있을 뿐이다. 조선 강제 노동자의 고향이 대부분 우리나라 삼도에 속하는 남한 사람들이나 해방 후에 우리 정부는 남의 나라에 묻혀있는 한맺힌 유골에 관심이 없었고,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때에 받은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피값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유재산으로 흘러들어갔다.

현재 국회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국민재산 환수법’으로 이를 반드시 찾아와 징용자 추모비라도 반듯하게 세우고 추모관과 역사관을 만들어 절대로 일제 식민시대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에 가르쳐야한다.

히따지 광산은 폐광 후에 자란 산림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흔적은 아시오 탄광처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곳 역시 조선인 숙소는 철망 없는 감옥이었으며, 폐광후 70년이 지났어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산 입구와 제련소에서 올라오는 제련연기로 가득찬 곳에 있었다는 조선인의 숙소지역이라고 짐작되는 돌계단에는 오늘도 영양실조와 구타로 갱도의 열기로 달라붙은 옷자락을 끌고 쿨럭거리면서 소식을 알 수 없는 가족과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며 울며 다녔을 조선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 비참함을 안겨준다.

모또야마 평화공원, 그나마 <미래를 잊지 않는 사람들>을 제작한 이들 조선인 3세들이 조국의 산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또야마 평화공원에 추모비를 세우고 수거된 유골함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모비는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공유지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으니 가는 곳마다 조국이 버린 백성이 죽어서나 살아서나 타국에서 차별받고 모욕당하는 것에 관여치 않는 한국 정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 남,북한이 아닌 통일된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기다리는 일제 강제 징용, 공출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석을 모시고 있는 국평사. 비석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 윤벽암 주지스님. [자료사진 - 린다 모]

도쿄에 돌아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바라는 절이라는 이름의 ‘국평사’(國平寺). 그 곳엔 식민지로 전략하기 전에 자신들이 끌려왔을지라도 남북으로 분단되기 이전의 한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영혼들이 모셔져 있었다. 비록 경상도가 고향일지라고 남한이 국적이 아닌 그들이 죽었을 당시의 국호인 조선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조선인들과 그들의 자녀가 배우는 우리학교, 죽어서도 하나된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통일을 기다리는 영혼들, 그들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은 나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워줬다.

조선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마치면서 우리학교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우리는 그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걱정하였으나 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자신들에게 달린 문제니 걱정말란다. 무엇보다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식민지에 끌려와 해방된 이후에도 똑같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살아온 자신들의 정체성을 해외 동포들이 이해하고, 해외에서 한반도의 통일과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에 함께 해주기를 강조했다.

그들이 우리학교 교육을 통해서 지키고자 했던 민족적인 주체성과 역사는 그들에게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내가 여행기를 쓰고자 하는 마음도 이 때문이었고, 이바리기 학교의 예술발표회에서 만난 ‘우리학교를 돕는 일본인 단체’와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들의 절실한 상황 때문이었다.

일찍 도착한 나리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우리를 배웅하며 망부석처럼 서서 손을 흔들던 김철수, 이영실 선생님, 떠나는 차를 양팔을 흔들며 달려나오던 학생들, 보자기에 싸여서 조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유골들, 차별과 억압 속에서 조선인의 긍지를 지킨 사람들을 잊지말자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짐을 잘 챙겨들었다.

(대체, 5일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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