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KAL858 30주기①]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앞두고 10월 18일 서울 마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성국 신부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과 만나면서 그분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저에게 보여줬다... 그것을 내가 눈여겨보면서, 정말 힘이 별로 없지만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사회가 금기시하다시피 한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에 뛰어든 계기는 “순수 인간적인” 것이었지만, 이후 그가 겪은 가시밭길은 상상 이상이었다.

6년 반을 “내가 활동을 좀 못하게끔” 해외로 발령을 받았고, 귀국한 뒤에도 교구 소속 신부임에도 성당 사목에 나서지 못한 채 수도원 파견 신부로 “시골에서 노동도 많이”하는 특별한 생활을 하고 있다.

2001년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가 구성되고 이후 집행위원장으로서 진상규명 활동을 도맡다시피 해 온 신성국(56) 신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이것이 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상적인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헛헛함을 토로했다.

오는 11월 29일, 87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KAL858기 ‘실종’사건도 30주기를 맞는다. 신성국 신부는 10월 18일 서울 마포 소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가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테러리스트’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현희 씨에 대해 ‘탈북자’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 국정원(국가정보원)이 김현희에 대해 아주 강조하는 게 있다. 뭐냐면 항상 “북한 사람이다”고 이야기한다. 이걸 유독 강조한다”며 “그걸 왜 강조하느냐?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김현희가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과 이 사건과 관련있다는 것은 다른 거다”며 “김현희는 어린 시절 북한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나의 조사 결과 이건 거의 99% 확실하다”고도 했다.

그 근거로 “우선 김현희의 수사기록이나 진술서 내용들을 보면 북한 관련 진술들이 다 허위로 드러났다. 숱하게. 그렇다면 북한을 모른다는 거다”고 전제하고 “특히 가장 핵심적인 게 김현희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원 문제가 아무 것도 제시된 것이 없다”며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공민증과 노동당증이 없고, 없다면 번호라도 알아야 되는데 번호도 모른다”고 짚었다.

북한의 공민증은 17세 이상 주민에게 발급되는 신분 증명서로서 공민증 없이는 북한 지역 내에서의 이동조차 불가능하다. 더구나 북한 주민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조선노동당 당원증’의 번호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생년월일을 모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는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원으로서 차출되어서 7년 8개월을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왜 노동당증 번호가 없나?”라고 반문했다. “김현희 스스로가 쉽게 밝힐 수 있는 자신의 신원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아니냐”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은 김현희 여권”이라며 “김현희 여권에 찍혀 있는 모든 직인, 스탬프는 실제다. 그러면 김현희가 일본 나리따를 출국한 기록을 안기부가 평양으로 바꾼 거다”라고 추론하고 “여권을 보면 김현희는 북한과 관계없이 일본에 근거지를, 거점을 갖고 활동했던 그런 사람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김현희씨 왔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신성국 신부는 이미 5년 전에도 김현희 씨를 초대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하치야 마유미(김현희) 일본 여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위조여권이라고 발표했지만 스탬프와 직인 등은 위조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1984년부터 일본을 드나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사진제공 - 서현우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 1986년 출입국 기록에 이어 문제의 1987년 11월 14일 나리따 공항 출국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신성국 신부는 1987년 11월 29일 KAL858 사건 당시 김현희가 평양이 아니라 일본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김현희는 11월 12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탑승해 모스크바로 도착했다고 진술했다. [사진제공 - 서현우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그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11월 29일 오전 10시 반부터 토론회와 추모제가 같이 열리게 된다”며 “그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김현희 씨는 ‘KAL858기 가족회’와 시민대책위의 공개토론 제안을 한 차례도 수용하지 않았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의 재조사를 위한 면담조차 응하지 않았다.

그는 “김현희라는 사람은 사면 단행할 때 사면 이유가 있었다. 뭐라 그랬냐?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위해 사면시키겠다.” 정부가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면 역사의 증인이 되도록 김현희를 가족들이 원한다면, 가족들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도록 주선해주고 공개해야 한다”며 “왜 김현희를 저렇게 꽁꽁 숨기나? 피해자 가족들이 매년 추모제를 하는데 김현희는 왜 오지를 않나? 왜 피하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건 30주기를 맞아 시민대책위는 정부 각 부처에 자료공개를 요청하고 있으며, KAL858기 사건을 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 악용한 ‘무지개 공작’ 전문 공개도 추진하고 있다. 국정원 발전위는 2006년 ‘무지개 공작’이 존재했음을 밝혔지만 그 내용은 절반 이상 감춘 채 공개한 바 있다.

또한 “사고 당시 미리 전화를 받고 KAL858기에 탑승하지 않아 생명을 건진 외교관 한 명을 찾고 있다”며 “이미 신원은 알고 있다. 사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필요하면 명예훼손 소송을 각오하고라도 실명을 공개하고 공개증언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말해 주목된다.

그는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이 있다. 국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치의 진실이라도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집단”이라며 “김현희는 지금 국정원이 관리한다.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고 단정하고 “국정원이 불러오면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통일뉴스>가 진행하고 있는 릴레이 인터뷰의 일환으로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마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진행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신성국 신부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이 있다”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때도 그들은...”

▲ 신성국 신부는 인터뷰 과정에서 국정원에 대한 근원적 불신과 김현희 씨의 신분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지 올해로 30년이다. 먼저, 30주기를 맞는 심경은?

■ 신성국 신부 : 이 사건이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항상 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이것이 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상적인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감이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상식이 통하고, 또 우리 한사람 한사람 인권이 제대로 존중받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와야 한다. KAL858기 진상규명을 하는 나의 진솔한 마음 중의 하나다.

□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 제천 시골에서 노동도 많이 하고, 그리고 30주기를 맞아 이 사건 행사 준비에 많이 바쁜 상태다.

□ 천주교 신부로서 본당 사목활동은 안 하나?

■ 제천 마리스타 공동체에서 노동하면서 조용히 좀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내고 있다.

□ 예전에 김현희 씨는 민주정권에서 탄압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신부님은 보수정권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안다.

■ 나는 사실 민주정권이고 보수정권이고 늘 같은 어려움에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있다. 국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치의 진실이라도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집단이다.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때도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우리와 대화하지 않고, 항상 이것을 감추려는 자세였다. 그래서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오는 어려움, 고통은 똑 같다.

□ 의외다. 일반적으로 민주정권에서는 좀 더 협조적이고 보수정권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상당히 의외다.

■ 사람들은 흔히 그런 이야기한다. ‘이명박 국정원’, ‘박근혜 국정원’이라고 앞에다가 붙이는데 국정원은 앞에 수식어가 필요 없는 데다. 그냥 똑 같은 국정원이다. 그들은 늘 그 실체가 변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그러한 뭐랄까, 국민들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 그리고 늘 권력지향적인, 그러면서 늘 뒤에서 공작을 꾸미는 그런 집단이다. 그들이 뭐 정부기관이다? 그런 거 없다.

□ 이 사건에 뛰어든 계기가 있었나?

■ 계기는 순수 인간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과 만나면서 그분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저에게 보여줬다. 그러니까 내가 그분들의 아픔, 억울함, 큰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봤다. 보상이라는 것은 특히 심리적인 것이다.

그것을 내가 눈여겨보면서, 정말 힘이 별로 없지만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

▲ 신성국 신부의 화두는 '국가정보원'이다. 참여정부 시기인 2004년 9월 21일 국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지만 이후 국외 발령을 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3년 11월 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김현희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신부 115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그 이후 115명의 천주교 신부들이 선언도 하고, 천주교 쪽이 움직이고 도와주지 않았나?

■ 초기에 천주교 신부들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다 공감하고 ‘115인 선언’도 해주고 2차로 162명이 선언도 해줬다. 2002년도, 2003년도에 천주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많은 활동을 했다.

□ 그 이후에 신부님은 천주교 내부에서조차 해외로 밀려나지 않았나?

■ 그 이후에는 내가 활동을 좀 못하게끔 발령도 받았고, 결국 해외로 떠났다.

□ 천주교 내부 흐름이 바뀐 건가, 원래 그런 건가?

■ 본래 그렇다. 천주교는 뭐랄까 좀 이념에 대한 의식수준이 세상하고 똑같다. 더 진취적이거나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 해외에 얼마나 머물렀나?

■ 6년 반이다.

□ 자의가 아닌 상태에서인가?

■ 그렇다.

□ 다시 들어 와서도 본당 신부는 맡지 못한 것으로 안다.

■ 갔다 오고 나서도 그렇다. 또 내가 원하지 않았다. 수도원에 파견 식으로 지금 나가있는 상태다.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
“미리 전화받고 생명을 건진 외교관 찾고 있다”

□ 꾸준히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해왔는데, 정권이 교체됐고 30주기가 다가왔다. 어떤 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는지 진상규명의 방향을 소개해 달라.

■ 우선 제일 큰 밑그림은 촛불시민들의 혁명,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진상규명에 물꼬가 텄다는 감이 든다. 여건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이 됐다. 그런 면에서는 희망적이다.

이명박, 박근혜 때의 국정원의 적폐, 여러 가지 정권 차원에서 공작한 것들이 지금 막 국민들에게 분노, 불신을 주고 있다.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가, 또 그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이제 국민들이 국정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국정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우리 사건도 오버랩돼 우리 사건도 같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상규명 운동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하나의 요소로 보고 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상규명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2013년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KAL858기 사건의 주범이라는 김현희를 반드시 재조사해주시기를 바란다”며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참여정부 시기인 2005년 11월 9일 가족회와 시민대책위가 국회에서 언론 보도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고, 임종인, 정청래 당시 의원이 참석했다. 신성국 신부는 “작은 언론사라도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다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국민의 의식변화, 국정원에 대한 인식 변화, 이런 것들이 사회 저변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사회적 기류 속에서 KAL858기 사건도 재조명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텐데, 30주기를 맞아 기획하고 있는 것은?

■ 우선 우리가 당장 11월 29일이 30주기니까 그때 우리들이 진상규명 대회를 국회에서 가지려고 한다. 진상규명이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된 자료들을 우리가 제공하고 또 토론하고, 국민적인 관심사를 30주기를 계기로 해서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동안 30년의 결과를 국민들에게 내놓을 거다.

□ 국회 30주기 추모행사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11월 29일 오전 10시 반부터 토론회와 추모제가 같이 열리게 된다. 그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 30주기인데.

□ 행사 말고도 여론화를 위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있나?

■ 우리들이 그동안에 재판기록과 수사기록을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받아냈는데, 그런 기록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해서 정부 각 부처마다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미처 아직까지 받아내지 못한 것들을 받아내기 위해, 자료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고 당시 미리 전화를 받고 KAL858기에 탑승하지 않아 생명을 건진 외교관 한 명을 찾고 있다. 이미 신원은 알고 있다. 사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필요하면 명예훼손 소송을 각오하고라도 실명을 공개하고 공개증언을 요구할 예정이다.

▲ 2009년 22주기 추모식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신성국 신부가 정보공개를 청구해 미국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국 추방 중에도 KAL858 진상규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4년 6월 3일 서울 양재 시민의숲에 세워져 있는 '대한항공기 미얀마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을 거부하며 이를 부수는 상징의식을 벌이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화형식을 벌이다 경찰에 압수당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아무래도 30주기면 언론의 관심도 높아지지 않겠나?

■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방송이라든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듣는 팟캐스트라든지 잡지, 신문, 하여튼 언론을 최대한 활용해서 우리의 이러한 운동, 또 우리들이 지금까지 진상규명한 결과들을 다 알려주려 한다.

거대 공중파라든지 이런 데는 자꾸 이 사건을 이념적으로 바라보며 다루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통일뉴스>를 비롯해 우리들의 기사를 실어주고 동참해주는 경우는 작은 언론사라도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다 가동해야 한다.

우선은 내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또 주변에 내 페이스북 친구들이 많이 퍼날라 주고 동참하고 있다.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
“무지개 공작 전문을 공개받아야 한다”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가 주축이 돼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금 시민대책위 간부는 누가 맡고 있나?

■ 대표는 윤원일 안중근평화연구원 부원장이고 나는 집행위원장이다. 고문은 김병삼 몬시뇰이고, 조사팀장은 서현우 작가다.

□ 어쨌든 시간이 많이 흘렀고, 진상규명 과정도 축적이 돼 왔으리라 본다. 이 사건의 대체적 윤곽을 어떻게 그리고 있나?

■ 우리들에게 3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고, 꾸준히 한발짝 한발짝 더디지만 뭔가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많이 접근해와 있다.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 사건의 실체가 뭐냐? 나는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대선공작 사건’이라고 본다.

□ 최근에 강진욱 <연합뉴스> 기자가 1983년 발생한 미얀마 폭파사건의 의혹을 상당히 깊게 조명한 책을 냈다. 그때도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그 책을 보면서 KAL858과 상당히 유사한 맥락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생각해보라. 1987년이 전두환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그 해였다. 그런데 전두환이가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선거가 치러지기를 바랐겠나? 자기가 살 구멍을 찾아야 되는데, 살 구멍이 뭐였겠나? 선거에서 이기는 거였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뭐해야 되나? KAL기 사건이었다.

▲ 신성국 신부와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서현우 작가가 공동 저자인 『KAL858 전두환, 김현희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판기념회가 2012년 10월 17일 서울 혜화동 '벙커1' 카페에서 주진우 기자의 사회로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실제로 국정원 발전위에서 ‘무지개 공작’이 존재했다고 발표했고, 그 문서 일부도 공개한 상황이다.

■ 무지개 공작 내용을 보라. 나중에 김현희 진술이 그대로 다 복사되지 않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거 아닌가? 무지개 공작 전모를 밝히기 위해 우선 무지개 공작 전문을 공개받아야 한다.

□ 여러 의혹들이 숱하게 제기됐는데, 그 중에서도 최근 의혹 중심으로 간추려서 몇 가지만 정리해 달라.

■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 국정원이 김현희에 대해 아주 강조하는 게 있다. 뭐냐면 항상 “북한 사람이다”고 이야기한다. 이걸 유독 강조한다.

그걸 왜 강조하느냐?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탈북자다”고 이야기한다. 김현희가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과 이 사건과 관련있다는 것은 다른 거다. 김현희는 어린 시절 북한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 나의 조사 결과 이건 거의 99% 확실하다.

□ 그 같은 추론의 근거를 소개해 달라.

■ 우선 김현희의 수사기록이나 진술서 내용들을 보면 북한 관련 진술들이 다 허위로 드러났다. 숱하게. 그렇다면 북한을 모른다는 거다.

특히 가장 핵심적인 게 김현희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원 문제가 아무 것도 제시된 것이 없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공민증과 노동당증이 없고, 없다면 번호라도 알아야 되는데 번호도 모른다.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원으로서 차출되어서 7년 8개월을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왜 노동당증 번호가 없나? 그러니까 김현희가 방송이나 언론에 나와서 “나를 왜 믿지 못하느냐? 나를 왜 의심하느냐?” 이렇게 강조하는데 그것은 김현희 스스로가 쉽게 밝힐 수 있는 자신의 신원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아니냐.

□ 김현희 씨의 신원 문제 외에도 주요한 의혹이 있다면?

■ 중요한 것은 김현희 여권이다. 여권상에 드러난 ‘일본 출발’ 이런 것들은 사실이다. 안기부는 그것이 위조여권이라는데, 위조할 수 있다. 80년대에는 일본에서 위조여권이 공작원을 떠나서 일반사람들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풍조가 실제로 있었다.

김현희도 그 여권을 갖고 해외여행을 다녔다. 김현희 여권에 찍혀 있는 모든 직인, 스탬프는 실제다. 그러면 김현희가 일본 나리따를 출국한 기록을 안기부가 평양으로 바꾼 거다. 여권을 보면 김현희는 북한과 관계없이 일본에 근거지를, 거점을 갖고 활동했던 그런 사람으로 증명되고 있다.

□ 김현희 씨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의 양이 상당히 방대한 것으로 안다. 분석이 어느 정도 이뤄졌나?

■ 그건 분석할 것도 없다. 허허(웃음). 우리 서현우 팀장이 일단 그걸 잘 분석해서 책자로 냈다. 나도 심심할 때는 들여다본다. 보면은 진짜 그건 쓰레기통에 버려야 된다.

정말 상식적으로, 일반시민 누구나 그 기록을 보면 ‘이건 수사기록이 아니다’ 금방 알 수 있다. 베껴 쓴 거고 국정원이 자기들끼리 그냥 꾸며낸 것, 그렇게 보면 딱 맞다.

거기에 온갖 엄청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뭐 북한에서 자기가 어떤 활동을 했고, 엄청 방대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사실 증명도 안 되고 그냥 꾸며낸 이야기라는 게 그냥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렇게 본다.

“가족들의 고통, 이제는 해결돼야 한다”
“김현희,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

▲ 신성국 신부는 국정원이 김현희 씨를 불러내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0주기를 맞아 정부에 바라는 것은?

■ 이 사건은 복잡하지 않다. 무지무지하게 단순하고 쉬운 사건이다. 왜? 김현희라는 사람은 사면 단행할 때 사면 이유가 있었다. 뭐라 그랬냐?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위해 사면시키겠다.” 정부가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면 역사의 증인이 되도록 김현희를 가족들이 원한다면, 가족들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도록 주선해주고 공개해야 한다.

그런데 왜 김현희를 저렇게 꽁꽁 숨기나? 피해자 가족들이 매년 추모제를 하는데 김현희는 왜 오지를 않나? 왜 피하나?

정부는 김현희와 가족들의 만남을 반드시 주선해줘야 되고, 공개해야 된다. 가족들이 궁금한 게 많다. 또 국민들도 그렇고. 그러면 가족들에게, 국민들에게 증언할 수 있도록 그런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

지금까지 김현희를 둘러싼, 김현희를 비호했던 집단은 다 안기부였다. 그리고 일반시민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검증받아야 하는데 안기부가 감싸고돌았는데 어떻게 검증이 되나?

□ 만약에 직접 김현희 씨를 만난다면 묻거나 따지고 싶은 것이 있나?

■ 나하고 만나면 한 시간만에 정말 김현희는 두손 두발 들고 양심선언 할 것 같다. 이건 뭐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이 사건이 30년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이 분단이라는 구조가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구조였다는 거다. 저런 수 백 명을 죽인 사람이 영웅시되고,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가는 이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사회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사회를 정말 정상적인 사회로 만들려면 이 사건이 풀려져야 한다. 정말.

그리고 김현희는 자기도 이제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정말 자유스럽게 행복하게 살려면 지금이라도 이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 저렇게 숨겨서 본인도 살 수가 없다. 불안해서. 그리고 언제까지 국정원이 돌봐줄 건가? 김현희는 판단 잘해야 한다.

□ 그렇잖아도 민주정부에서 자기가 탄압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나?

■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걸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김현희와 함께, 보호하면서 탄압받았다고 공세적인 자세를 보인 거다. 그것은 안 된다. 무슨 탄압을 했나? 내가 김현희를 괴롭힌 적이 없다.

▲ 줄곧 가족회 곁을 지킨 신성국 신부는 <통일뉴스>와의 이번 인터뷰에서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눈물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11년 24주기 추모제 헌화 장면.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차옥정 전 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어 왔는데요, 그분들에게 30주기를 맞아 하고 싶은 말은?

■ 내가 15년을 지켜봤지만 진짜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아픔, 슬픔이다. 그리고 특히 “이게 나라냐?” 정말 억울한 사람들이 호소할 데가 없는 우리 사회의 매정함, 이것을 보면서 참 맘이 아팠다.

가족들의 고통이 이제는 해결이 돼야 한다. 연세도 많이 드셨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어려움을 이겨낸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진상규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손떼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나는 시민들이 계속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는 그분들과 함께 곁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끝까지 힘낼 수 있도록.

정말 그분들이 지금까지 왔으니까 조금 더 용기 내고, 힘 내고, 또 더 많은 시민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 갖고, 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벌써 지쳐서 포기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 보면 참 대단한 분들이다.

□ 정권이 바뀌었는데 실제로 현 정부나 현 국정원이 이 문제를 협력적으로 풀 의지가 있다고 보나?

■ 정부는 풀지 못 한다. 지금 북핵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한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그러면 뭐냐? 결국 우리들이 풀어야 된다. 우리들이 최대한 성과를 올려놓고,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를 제시해주고 그 다음에 정부에서는 그것을 말하자면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고.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뭐냐? 적어도 자료협조만 잘 해줘도, 우리에게는 큰 성과가 올 수 있다. 감추지 말고. 우리가 진상규명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 그 정도만 해줘도 우리는 정부에 감사할 것이다.

□ 김현희 씨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 김현희 움직이는 방법은 쉽다. 아주 간단하다. 국정원이다. 국정원이 불러오면 되는 거다. 김현희는 지금 국정원이 관리한다.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

지금 국정원은 자기네가 손털었다는데, 그것은 국정원 직무유기다. 자기들이 말한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그냥 자유롭게 놔줄 수 있나? 자기들이 관리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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