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추석 연휴인 10월 1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남편의 사진과 앨범 등을 준비해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우리 딸이 그러잖아요. ‘맨날 아버지는 엄마 것 밖에 (선물을) 못 사온다’고. 그러면 ‘너는 사가지고 올 사람이 따로 있다’ 이러죠. 하하.”

아직도 기억 하나하나가 또렷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이길 수 없는 탓일까.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차옥정 ‘KAL858기 사건 가족회’ 회장의 직책에도 ‘전(前)’자가 붙었고, 방금 전 일도 깜빡깜빡 잊는 증세가 시작된 지도 벌써 몇 년째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10월 1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차옥정(80) 여사는 기자를 기다리며 30년간 부재 중인 남편의 사진과 앨범 등을 미리 꺼내놓았다.

젊은 시절 남편의 사진을 보며 “그렇게 봐서 그런지,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하여튼 변하는 것 같다”고 애써 기자의 동의를 구하더니 다른 작은 흑백사진을 안방에서 가져와 “다 같은 사진인데, 이것은 잘 안 변해요. 얼굴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라며 애틋해 한다.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운동의 첫 자리에는 늘 차옥장 회장이 있었다. 2003년 추모식에서  "이제 큰 침묵의 바다를 건넜다"고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4년 6월 3일,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에 세워진  '대한항공기 미얀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을 거부하고 이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여경들에 사지가 붙들린 채 연행되고 있는 차옥정 회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1년 KAL858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재점화 되면서부터 그 중심에는 항상 차옥정 회장이 우뚝 서 있었다. 평범한 교사 출신 가정주부인 그의 가냘픈 몸매 어디에서 저런 힘이 솟아날까 늘 경탄하면서, 결국 남편에 대한 깊은 마음 때문이리라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워낙이 서울 사람이다 보니까. 사람한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이런 게 있어 가지고. 친구지간에도 경상도가 많잖아요. 다 지그 아버지 좋아하죠.”
“별로 서로 다툰 게 없었으니까. 서울 양반이 돼가지고요, 제가 음성이 좀 높으지, 지그 아버지는 음성도 안 높아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6년간 공군에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해 대한항공 기장이 된 남편 박명규 기장은 DC10기 운항을 마치고 KAL858기에 탑승해 귀국하다 30년 전 ‘실종’됐다.

“그러니까 이게 말도 안 되죠. 이제는 항상 가방 들고 나가서 안 들어온 것, 그것만 머리에 박혀 있는 거죠.”
“아휴, 꿈에도 안 보여요. 어쩌다가 한번씩. 뭐 생각하고 이러면 꿈에 보인다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근데 그냥 그냥 인생무상이지요 뭐.”

▲ 차옥정 여사의 거실에는 출근한 뒤 30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남편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 - 송정미]

중동 근로자와 승무원, 외국인 등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아부다비공항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는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88년 1월 15일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설치해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처음부터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왜냐하면은 지그 아버지가 이 비행기만큼 안전한 게 없다 했었거든요. 철두철미하데요. 비행기 뜰 때까지 정비를 한데요. 내가 신경쓸까 싶어서 그 소리를 자꾸 했는 것 같예요. 지나놓고 보니까. 아, 나 이제 신경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구나.”

차옥정 여사의 ‘의혹’은 확고했다. 누군가 폭발물을 기내 선반에 두고 내렸고, 이 폭발물이 비행기를 산산조각 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는 것을 애시당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행기 잔해나 실종자 유품, 시신 한 점도 제대로 확인된 것이 없다.

“대개 사고 나면 잔해가 있어야지 끝을 내든지 하지. 조작이니까 블랙박스가 어디 있냐. 없지. 아무것도 없이 그래 가지고 마무리하는...” 의혹이 ‘조작’이라는 확신으로 굳어져온 30년의 세월이었다.

차옥정 여사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가족회 회장을 맡아 줄기차게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했고, 국정원 앞 시위는 물론 경찰에 사지가 들려 연행될 정도로 완강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 과정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와 힘을 합쳤고, 숱한 사회운동과도 연대했다.

“그래도 아휴,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아닌 것 같애요. 30년이.”
“하이고, 세월은 진짜. 그런 속에서도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으니까요. 참 희한한 일이죠. 그렇게 몇 십년을 앓았으면 생명 부지도 못했을 텐데 또 말짱하게 살아있고. 그러고 너 아버지 그러고 나서는 내 병원에도 안 갔지? 아프다고.”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맏아들 종호 씨에게 ‘지그 아버지’, ‘너 아버지’가 사라진 뒤 병원에도 간 적 없음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요즘 들어 부쩍 깜빡깜빡하는 기억력을 스스로도 좀체 믿지 못하기 때문.

한결같이 진상규명에 매달려오던 그도 결국 11월 29일 추모식조차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가족회 회장은 부회장으로 호흡을 맞춰왔던 김호순 씨에게 물려주게 됐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하다. “그래도 지그 아버지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이리 있을 때도 아닐 상 싶고, 내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래서 요즘은 주로 기록을 남기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 30주기 인터뷰를 계기로 차옥정 여사의 '기록 남기기'가 시작됐다. 왼쪽은 맏아들 박정호 씨. [사진 - 송정미]
▲ 차옥정 여사의 인터뷰와 '기록 남기기'에는 다큐창작 '소' 소속 정원석 PD(왼쪽)가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내가 정리도 하고 쓰고 할라고 몇 번 시도를 했어요. 혼자 안 되더라고요. 그거를 틀림없이 하기는 해야 되거든요.”

30주기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 나가기는 나가야죠. 하여튼 나갔다 와야 편하지”라면서도 “정권이나 바뀌면 어떻게 될란지 모르지만”이라고 바뀐 시절조차 잊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차옥정 ‘회장’은 2005년 추모식에 자필로 깔끔하게 쓴 ‘추모사’에서 “우리 가족회 입장에서는 김현희가 양심선언 하는 것이 사건이 끝나는 시점으로 봅니다. ‘나는 가짜다’ 이 다섯 자 말입니다”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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