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어떤 영적 충동, 즉 무한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보들레르)


 틀림없는 교훈 
 - 에리히 캐스트너 

 해보는 수밖에 
 길은 없습니다


 추석 때 5촌 조카에게 들은 얘기다. 
 
 자신의 친구를 짝사랑하던 한 유부남이 그 친구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했다고 한다.

 자녀와 아내가 있는 대기업의 간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실 사회의 문제다. 

 그 남자는 살아오면서 ‘사랑’을 제대로 해보았을까?

 ‘사랑’은 인간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의 신’이 강림하면 우리는 상대를 죽이고서라도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철학자 바타유는 사랑은 폭력, 죽음과 연관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 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은 어떤가?

 한 인간에게 사랑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가?

 ‘사랑’을 얘기하던 한 교수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우리 사회는 폐쇄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의 욕구’는 우리의 깊은 마음속으로 은폐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고상하지 않다.

 라캉의 말대로 ‘남자에게 여자는 엄마 아니면 창녀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엄마처럼 고상하게 보아 멀찍이서 우러러만 보든지 창녀로 보아 자신의 동물적 욕구만 채운다.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천박하게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충동, 무한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는 동물적 욕구를 추구하다 점점 더 나은 욕구를 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아이에게 동물적 욕구를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가?

 경험하면서 성찰하게 하는가? 
   
 ‘틀림없는 교훈’은 

 ‘해보는 수밖에/길은 없다’

 그 남자는 살아오면 얼마만큼 사랑의 교훈을 얻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가슴 속에서 불같은 사랑이 일어났을 때 실패를 해보면서 자랐다면 어른이 되어 그런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 남자 아이들은 사랑하는 여자 아이에게 집적거린다.

 괴롭히고 때리기까지 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여자 친구를 소중히 대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어야 했다.

 그러면 직장에서 만난 신입 여사원에게 가슴에서 사랑의 불길이 솟아났더라도 그 불길을 잘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불길은 마구 타올랐을 것이다.

 활활 타오르던 사랑은 집착이 되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불길 속에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어떤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충동에 이끌려 가는 존재다.

 그 충동을 인간관계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는 길 뿐이다. 

 그 남자는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훤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원했지만 육신이 약한 것(예수)’을 어찌하랴?  

 몸이 할 수 없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머리에 가득 찬 지식은 실제의 삶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는 두렵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섬뜩한 예감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파편적인 지식 위주의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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