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1987년 6월 나는 대학생이었다. 6월항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18~19일 수도권 외곽에서 군부대가 충돌하고 있다는 제보가 잇달았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군 부대와의 충돌을 상수로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전경과 백골단, 최루탄과 맞서고 있지만 결국은 군대와의 격돌이 운명을 좌우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6.18~19을 전후한 운명의 며칠, 정세의 주도권이 군사적 충돌에서 정치 협상국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군은 주변화되었다. 93년 집권한 김영삼이 하나회를 숙청하면서 30년 이상 한국 정치를 주도했던 군부는 정치에서 퇴출되었다. 

2004년 또 한 번의 극적인 정치격돌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에 불만을 품은 보수 진영이 국회를 무대로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다. 그러나 보수진영의 도발은 생각보다 간단히 제압되었다. 수십만 명이 넘는 대중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들은 짱돌이나 화염병 대신 촛불을 들고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 했다. 군대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고 기세등등했던 보수진영은 총 한발 쏘지 않고 간단히 꼬리를 내렸다.

노무현 정부에 일격을 가한 것은 헌법재판소였다. 헌재는 노무현의 핵심 공약인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며 권력의 균형추를 무너뜨렸다. 나는 헌재 판결을 법리적으로 논할 마음이 없다. 중요한 것은 힘 관계이다. 행정부‧입법부가 민주진보 진영으로 넘어간 조건에서 헌재가 보수의 최후 보수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박근혜가 탄핵되고 구속되었다.

역시 군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극우파가 군대 충돌을 선동했지만 이것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국민 모두는 군대가 충돌할 것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시위에 열중했다. 그리고 시위는 역시나 축제와 같았다.  

탄핵 과정도 매우 순조로웠다. 탄핵 표결이 이뤄지는 순간 국회의사당은 시종 차분했다. 욕설과 고성은 물론 투표 진행을 방해하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도 없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회의원 모두는 투표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그에 순응할 예정이었다. 투표 결과는 투표 행위에 들어가는 순간 어느 정도 예상되어 있었다.

탄핵이 가결되고 2004년 노무현 정부에 일격을 가했던 헌재도 조용히 대통령의 탄핵을 승인했다. 탄핵을 확정한 것이 법리적으로 옳았는가는 역시나 내 관심사가 아니다. 핵심적인 것은 헌재가 탄핵을 뒤집을 이유나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구속 과정도 유사하다. 극우파가 약간의 소란을 피웠지만 대통령이 구속되고 재판이 진행되는 전 과정에서 이렇다 할 만한 충돌은 없었다. 모든 과정은 헌법적 질서와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실형이 선고될 것이고 이변이 없는 한 상당 기간감옥에 있을 것이다. 촛불 시위 과정에서 군대 출동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거가 끝나고 정권이 이양되었다. 검찰은 공직비리수사처라는 검찰권력의 분산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고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장 인선도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보루쯤 되는 재계도 이재용의 유죄 판결로 우열이 갈렸다.

자 이제 뭐가 남았을까? 언론, MB... 이것 또한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여러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인구 구성이다.

아래는 통계청 자료를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시점은 2010년이다. 2017년 현재는 그래프가 7년 정도 오른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어느 나라든 베이비 붐 세대가 있다. 한국은 1955~63년생이 1차 베이비 붐 세대로 712만명 정도 된다. 55년생은 2010년 현재 55세였다. 동그라미 친 부분의 맨 앞에 해당한다. 그 후로  20~55세까지 2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55년생을 선두로 2010년 이후 50대 중반으로 진입해 간다. 반면 50대 중반 이상의 인구는 2010년 현재 다 합쳐 700~800만명 수준이다.

세대는 집단적 신념을 공유하는 편이다. 55년생을 선두로 하는 새로운 세대는 베이비 붐-민주화-경제성장과 연관되어 있다. 분단과 전쟁, 냉전과 반공을 공유했던 이전 세대와는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촛불은 양자가 대규모로 경합했던 정치 격돌이다. 촛불이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양자를 갈랐던 것은 그냥 세월이다. 민주와 독재, 진보와 보수라고 불렸던 게임의 한 당사자가 갑자기 링에서 퇴장(고령화, 사망)해 버린 것이다. 자신을 지켜줄 병사가 없는 조건에서 보수 세력을 지탱했던 군대, 검찰, 헌재, 언론 또한 자진해서 철수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기이한 것은 촛불 승리가 아니라 2012년 대선패배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

결론을 내려 보자.

첫째, 촛불은 6월항쟁과 매우 다르다.

이른바 87체제는 양김씨가 주도하는 정치세력과 정치적 비전(직선제)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행위가 적극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정치 과정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반면 촛불은 경합하는 두 세력 중 한 진영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촛불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와 정치세력의 노선과 담론은 제대로 된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향후 한국 정치는 촛불이 만들어낸 거대한 정치적 진공상태를 배경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게 될 것이다. 

둘째,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는 다분히 과장된 것이다.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적폐는 그냥 청산되고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집회나 시위와 같이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법적 질서를 밟아 국가기관을 통해 청산되고 있는 점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여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이 만든 거대한 진공상태에서 무엇이 우리의 미래에 부합하는가이다.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1995~05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등 통일운동
* 2005~12년 진보연대 등 사회운동
* 12년~ 주) 지성의숲에서 수학 강사로 활동
* 현재는 한국 수학교육의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음
* 최근 지은 책으로는 수포자탈출실전보고서, why 인공지능과수, 암호와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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