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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기사승인 2017.09.13  06: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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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155)

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한용운)


 나룻배와 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즐거운 사라’‘가자, 장미여관으로’등 에로틱한 작품으로 세상의 비난을 받던 마광수 교수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의 도덕윤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도 교수의 품격을 잃은 ‘방탕한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삶과 죽음을 보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가!

 세상은 그를 애도하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르네 지라르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희생재물로 사람을 바치고는 그를 성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가 살아있을 땐 왜 그를 존중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 성적 담론에서는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가!

 이런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재물이 필요하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사회를 바꾸면 자신들의 음흉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사람’을 희생재물로 삼는 것이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한 사람을 잡아 죽이고는 죽인 죄의식을 씻기 위해 이번엔 그를 칭송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사랑, 에로티시즘이 난무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 에로티시즘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는가?

 우리 사회보다 개방되어있는 서구에서는 성범죄가 우리 사회보다 훨씬 적다는데.

 사랑,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고결하고 숭고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람은 만해 한용운 시인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되는가... 내가 나를 너에게 양도하고 너 속에 나를 상실할 때만 내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을 사랑하며 그녀를 통해 진정한 ‘나’로 태어나는 신비로움을 깨달았나 보다.

 그래서 그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고 하여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노래했다.

 우리는 그의 시 ‘나룻배와 行人’을 보살행을 노래한 시로 이해한다.

 보살의 무조건적인 사랑.

 맞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사랑은 어디서 싹이 트는가!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

 우리 눈에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이성간의 사랑이 숭고한 사랑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진흙투성이를 견디지 못한다.

 워낙 완고한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의 성적 욕망이 더러운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성적 욕망은 연꽃을 피우지 못하고 점점 더 썩어가는 진흙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담론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자신 속의 더러운 진흙투성이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자라면서 이성 간의 사랑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은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크나큰 사랑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런 숭고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폐한가!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연꽃을 피우는 진흙’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죽음을 단지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아닐 것이다.

 

고석근 ksk21ccc@hanmail.net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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