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역설이다(키에르케고르) 


 유리창(琉璃窓)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우리가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해 보자.

 지금 이 순간은 낮일까? 밤일까?

 누구나 쉽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낮에는 낮이라 하고 밤에는 밤이라고 대답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낮에는 낮만 있을까? 어딘가에 어둑한 밤이 있다. 정오에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아주 희미한 어둠 한 자락이 있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나 사랑해? 미워해?"

 우리는 이 질문에 "사랑해!" 혹은 "미워해!"라고 대답하겠지만,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 자르듯이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열열이 사랑한다고 해도 거기엔 아주 조금이라도 미움이 섞여 있고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거기엔 작디작은 사랑 몇 톨이 섞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유행가가 있지 않은가!

 ‘사랑할까? 미워할까? 내 마음은 둘이네.’

 그렇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반대되는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편의상 낮과 밤, 사랑과 미움, 미(美)와 추(醜), 위와 아래...... 를 나눠서 쓰지만, 실제는 그 둘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즉 삶의 실상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그래서 삶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삶에서 역설을 느낄 것이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사랑 안에 미움이 미움 안에 사랑이 얼마나 많이 하나로 섞여 있는 지를 선연하게 느낄 것이다.  

 반면에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편하게만 살려는 사람은 삶이 모순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에게는 이익과 손해, 불편함과 편함이 두 개로 선명하게 나눠져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님 식으로 말하면 군자는 삶을 역설로 느끼고 소인배는 삶을 모순으로 느낄 것이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산새처럼 하늘로 날아간 아들 때문에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시인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느낀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그 절절한 아픔은 모든 아버지들이 느낄 수 있는 심사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아들을 정말 사랑해온, 그래서 사랑 안에 미움이 함께 섞여 있는, 사랑과 미움이 함께 깊어진 그 긴 아픔의 세월을 견뎌온 아버지만이 이런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독사하는 하는 아버지들이 많다.

 자식들에게 연락하면 대개 '모르쇠'한다고 한다.

 그런데 통장이 있다고 하면 20분 안에 택시를 타고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잘잘못은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잘잘못은 하나로 어우러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외로움이 싫어 황홀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는 이 시대 삶들에겐

 항상 짙은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뒤에 바짝 붙어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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