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이 참 아름답다. 삐딱한 것을 매우 선호하는 나를 유혹하기 딱 좋은 제목이 아닌가. 사실 동화가 꼭 그렇게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주 독자층이(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이) 한창 아름답고 밝고 깨끗한, 다시 그러니까 현실과는 엄청 다른 그 무엇(판타지?)만을 보고 들으며 자라야 한다는 어른들의 무모한 바람은 이해한다.

하지만(사실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사람’이 건전한 동화를 나름 집중해 읽을 것이며, 그 내용의 1%라도 가슴으로 담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면 갈수록 불가능한 미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하겠다.

“넌 착하고 바르게, 거짓말하지 말고, 이웃을 도우며 아름답게, 깨끗하게 살아가렴.”
말한다면.
“아버님, 그렇다면 저는 건물주의 자제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평생 불안정한 고용 상태로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다 생을 마감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있는 지금, 그 무슨 증기기관차와 같은 말씀이십니까. 부디 거두어 주시고, 우주의 기운을 사랑하는 권력의 비선실세가 못 되실 바에는 기본 옵션인 위장 전입이라도 하셔서 좋은 학군으로 저를 옮겨주시기라도 해주시옵소서.”
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아놔.

우리 아이들은 때론 어른보다 더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곤 한다. 축복인가, 비극인가. 이제 현실적인 부모라면 아름다운 동화를 읽어주기 보다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을 위해 투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자녀가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비정규직, 이른 바 흙수저로 평생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면 말이다.

이미 삶 자체가 동화가 아닌 블랙코미디, 살벌한 호러영화에 다름 아님을 알아버린 어른들은, 자신들의 무참히 깨져버린 순수함을 아이들의 눈에서 다시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들을 위협하는 수많은 ‘삶의 랜섬웨어’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헬조선의 오늘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동화들로 가리기엔 이미 늦었다. 아이들의 믿음과 순수는 점점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의 주범은 우리 어른들이다. 죄다 우리가 만들어놓고선, 아이들의 ‘발랑 까짐’을 비난하고, 애석해한다. 아이들이 만약 국회의원이었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부모 인준’에 실패하고 낙마할 것이 빤하다.

▲ 정한영 글 / 민소원 그림, 『아빠와 함께 읽는 나쁜 동화책 – 사회적으로 올바른, 그러나 묘사와 전개가 어설픈 이야기』 , 토담미디어, 2013. 10.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비즈니스 경제 분야 팟캐스트에서 명성을 날린 이른 바 ‘진보 실물경제 전문가’이다. 고색창연한 교수님, 전문가들보다 더 현실적인 경제 진단과 분석, 전망 이른바 ‘촉’으로 많은 호응을 얻은 것으로 안다. 맞지요?

암튼 저자는 스스로 책을 ‘사회적으로 올바른, 그러나 묘사와 전개가 어설픈 이야기’라 말하고 있다. 본인은 전문 작가가 아니기에 묘사와 전개가 어설프지만 그럼에도 현재 우리 사회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과의 괴리’를 비틀고 뒤집어보고 싶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나쁜 동화책으로 인해 무참히 깨질 동심은? 책을 통해 파악한 저자의 성정(!)으로 미루어보건대 ‘So What?’ 정도 되시지 않을까. 이왕 깨질 것, 차라리 아이들에게 익숙한 동화라는 형식을 통해 깨지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일 수도 있겠다.

자, 그렇담 과연 저자는 얼마나 비틀고 뒤집었을까? 뭐, 대충 이런 정도다. ‘해님달님’에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상습적인 협박에 못 이겨, 떡을 다 상납한 떡장수 엄마는 결국 떡 대신 자신의 한 팔을 내어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호랑이의 식인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었으니, 작게는 벌금형에서 크게는 형사처벌, 즉 사살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던 호랑이는 팔은 필요 없다며, 떡만을 요구한다.

이때 ‘사람을 잡아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호랑이에게 떡장수 엄마는 이렇게 설득한다. “아니죠.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잡아먹는 게 아니죠. 제가 팔이 두 개니까 하나를 배고픈 호랑이님께 드리는 거죠.”

그러자 못 이긴 척 제안을 받은 호랑이의 말.
“잠깐, 말은 바로 하자고. 그냥 배고픈 나에게 주는 게 아니지. 당신이 나에게 떡 하나를 줘야 하는 데 못 주니까 대신 팔을 주겠다고 부탁하는 거지.”
결국 호랑이는 떡장수 엄마의 한 팔 갈취(!)를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 기부(!)로 합법화(!) 시킨다. 그럼, 그 다음은 어찌 되었냐고? 엔딩이 그리 해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신 한다. 좀 엽기적이라….

저자가 말하는 이 동화의 교훈은 이렇다.
‘애초 떡 하나를 요구할 때부터 고함을 지르며 마을 쪽으로 도망치든지 싸우든지 하는 게 좋은 태도일 것이다. 비록 호랑이에게 먹히더라도 분명히 대항하는 것이 순응하는 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옳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호랑이도 그리 만만하지 않다. 엄마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낮은 단계부터 서서히 그녀를 잡아먹기 시작할 만큼은 영리하다.’

각자 우리 삶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과연 호랑이는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다른 동화들도 기발함과 우리 시대를 빗댄 풍자가 일품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었다.’ 명분 없는 쿠데타 이후 한양에 새로운 대규모 SOC 투자사업을 벌이고, 거대 상권을 조성해 측근들에게 배분함으로써, 자연스레 개성의 상권을 죽여 비로소 권력을 확고히 잡은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 트리오의 ‘작전’.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내건 배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곰과 호랑이. 배틀 결과는 이미 알다시피 곰의 승리. 하지만 그 후 게임의 룰이 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는 비판과 함께, 곰이 지급받은 쑥과 마늘 바구니 안에 마늘 모양의 초콜릿이 들어있었다는 환웅 정부 내부 고발자가 나오고 만다.

하지만 정부 비서관, 대회 추진위원, 심사위원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고, 검찰은 오히려 신고자에게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오지 않으면 모욕죄를 적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곰에게 증거인멸의 시간을 넉넉히 제공한다. 여기에 언론은 결선의 광고를 받아 게재해주고 결과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내부고발자는 무고죄로 검찰에 고소가 되고, 가택수색과 몇 차례 소환에 시달리다,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조직 내 왕따를 이기지 못하고 권고사직을 받아들인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불가사의. 기시감이 마구 밀려온다.

이런 식이다. 일부러 한강에 축산 오수를 방류한 뒤, 정수기를 판매해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봉이 이(!)선달. 정직하게 쇠도끼를 잃어버렸다고 했더니 금도끼 은도끼를 덤으로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저수지를 관할하는 지자체에서 저수지 주변에 대규모 쇠도끼 판매 센터를 개장하고, 금도끼를 노리는 이들에 쇠도끼를 팔아 대박을 터뜨린다. 이에 자극 받은 인천 앞바다의 인당 군수는 심청이 이야기를 가지고 제2의 투기장을 기획한다.

클럽 광한루에서 부킹으로 춘향이를 만난 금수저 이몽룡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한양으로 가고, 몽룡 아비 대신 새로 남원 부사로 부임한 돌싱 변학도는 춘향이에게 꽂혀 매일 대시한다. 몽룡이 사법고시에 패스하기만을 기다리며 클럽과 나이트를 전전하며 외로움을 달래던 춘향은 엄마 월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압박의 이유는 변학도가 수많은 대시에도 불구하고 춘향이가 자신을 무시하자, 화가 나 월매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갖가지 이유를 붙여 단속했기 때문이다. 보건소 위생점검, 돌출간판, 원산지 표기, 보건증, 소방시설, 알바생 시급에 이르기까지!) 변학도의 대시를 거부하는데. 뭐니뭐니해도 사시가 최고라는 믿음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춘향이는 과연 배팅에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대략 소개한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지금, 불평등의 헬조선을 만든 천박한 자본주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요즘 바쁘게 살고 있는 아빠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돈을 벌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 ‘내 노후의 삶과 가족들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무엇이 진정 노후의 삶과 가족을 위한 것인지 고민해 본다면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음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명 돈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돈을 얻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돈을 얻기 위해, 소중히 여기는 가족과 스스로의 삶을 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을 포기하며 자녀의 교육을 위해 ‘더 좋은 학군’을 찾아 이동하는 아빠들에게 말한다. 좋은 학군보다 가족들이 함께 할 시간이 좀 더 많아야 좋은 것이라고. 진정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고자 한다면 아빠가 집에 일찍 들어와야 하는 것이고 아빠가 아이들에게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고.

“나쁜 것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는 것이 세상 아빠들이 자녀들에게 해주어야 할 책임이며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이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가? 이제 엄마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르쳐 준다면 아빠들은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위험한 곳인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교육이다.”

이것이 저자가 ‘나쁜’ 동화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살짝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조금은 민망하게 특정 정권(!)을 풍자했지만(이라 쓰고 깠지만 이라 읽는다), 책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의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만행과 불의 앞에, ‘도대체 아이들에게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난감하고 무참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행보 앞에 이어지는 국민들의 환호는 그 이전 오랫동안 쌓여온 분노와 좌절의 반작용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반드시 자녀들과 함께 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엔 ‘19금’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당황스러운 순간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러 번. 다만 우리 스스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위선자가 되지는 말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싶다.

썩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나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야 진정 행복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나와 우리 아이들, 그리고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고 미래는 ‘좀 더 좋아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글자도 큼지막하고 내용도 재미있어 금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씁쓸한 웃음 뒤에 꽤 오랫동안 ‘다른 생각’들이 불쑥거릴 것이다. 얼마 전 도보 여행가 김남희 님의 글을 읽다, 내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내 딸이 살아가 주었으면 하는 길을 그대로 표현한 문장이 눈에 와서 박혔다. 나부터 온전히 서 있어야 할 일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문제에 대해서 의심하고,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기꺼이 주변인이 되어 스스로의 경계를 확장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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