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사상, 이념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이념이나 사상은 무엇일까? 이념과 사상은 인간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국어사전에서는 이념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다.(1)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란 보통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갖는 현실적인 의식이나 사고방식’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세계관, 가치관, 신념 체계를 종합한 것이라고 볼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상, 이념이 있고, 인간의 삶은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만드는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런데 우리들의 경우, 사상이나 이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좌익사상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 조건 때문이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 대결의 시대를 살아왔고, 아직도 그러한 이념의 시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이념이나 사상은 한국인의 삶을 옥죄는 하나의 굴레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이념이라고 하면 먼저 좌익사상 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사상이나 이념의 기원은 멀리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공자, 맹자 등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그리고 브라만, 베다 등 인도의 고대 사상이 인류역사에서 그러한 이념의 시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조로아스터 등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아직도 하고 있는 종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사상, 이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표현인 종교는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주된 사상과 이념이 있게 마련이다. 전근대 시대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유교(성리학)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중동지역에서는 이슬람이 지배적인 이념 또는 사상, 이념, 종교였다. 그 사회를 주도하는 지배적인 이념, 종교와 어긋나는 생각이나 주장, 철학, 사상, 이념은 배척되었다. 사문난적, 이단, 마녀 등으로 낙인찍히면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구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이념 지형도 바뀌었다. 근대 시민혁명과 함께 봉건주의, 절대왕정, 봉건왕조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가 대항 이데올로기, 진보적인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근대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서구를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보편화되고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부르주아계급의 지배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 그 가운데서도 과학적 사회주의를 자처한 마르크스 사상이 출현하면서 사상, 이념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모습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잉여가치를 근간으로 한 자본운동의 기본원리와 공황론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그에 내재한 근본 모순의 분석을 통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무산자계급, 노동자계급)의 이념적 무기를 만들어 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계급적 지배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아가 자본주의 멸망과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적 유물론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론과 역사발전단계론(원시공산사회-고대노예제사회-중세봉건제사회-자본주의사회-사회주의․공산주의사회)을 제시하였다.(2)

마르크스는 역대 그 어떤 사상가, 철학자와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하고도 완벽한 사상과 이념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는 철학과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그의 사상과 이념은 단순히 관념적인 사고체계로 끝나지 않고 ‘혁명을 위한 실천의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3)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등장

마르크스는 사상, 이념(이데올로기)을 경제적 하부구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상부구조로 보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런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채 노동력을 팔아서 살아가는 무산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부르주아계급에 근접해 있었다. 마르크스 자신이 부르주아계급 출신은 아니었지만 상층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정치적 상부구조가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혁명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노동계급의 혁명이론과 사상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체로 부르주아계급 출신이거나 그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지식인층이었다. 운동이 발전하면서 이른바 ‘기본계급출신’의 혁명가들이 늘어나고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 1920년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 광경.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의 바로 옆에 앉은 이가 바로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박진순이다. 이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한국독립운동가에게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혁명적 지식인은 기본계급 출신보다는 일정한 재산을 갖고 있는 자산계급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대학교육까지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상황이 달랐다. 마르크스가 활동했던 시절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이후에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마르크스 사상이 처음 만들어진 서유럽사회는 물론이고, 그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혁명에 눈 뜨게 되는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근대시민) 혁명운동의 초기를 열어간 혁명가들은 주로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

인간의 의식 세계는 단순히 그 인간의 계급적 바탕, 경제적 물질적 토대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은 계급적 바탕, 물질적 조건, 하부 토대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 세계는 자체의 독자적이고 독립적 영역이 존재하며, 이런 자각적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혁명적 지식인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이 점을 무시하면 자칫 경제적 결정론이나 계급적 교조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만일 인간의 의식 세계가 단순한 토대의 반영이라면 인간의 개조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토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면 인간의 의식은 그에 따라 쉽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것은 이런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소련은 사회적 하부구조인 경제체제를 변화시켰으므로 공산주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아니라는 게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생산력 발전이 자본주의보다도 못한 상태에서 경제구조만 사회주의적(그것이 사회주의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지만)으로 개조한다고 해서 공산주의에 다가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트로츠키

이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도 만연했다. 한때 적지 않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물질적 인센티브 없이 도덕적 자극만으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 창조될 수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지만 이 또한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다. 이런 사고에 빠친 국가들은 사상교육과 교양을 통해 공산주의적 인간으로의 인간개조가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러하지 못했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 급진적인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을 벌였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북한도 비슷한 경험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건설의 구체적인 시도와 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노동자의 국제적인 단결을 통해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르크스 사상의 정통적 계승자를 자처한 레닌에 의해 과학적 사회주의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레닌은 마르크스 사상에 전위당의 전략전술이론을 결합시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만들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을 성공시켰다.(4) 러시아 혁명과 함께 지구상에 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등장하였고, 이때부터 이념 대결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전세계적 수준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심각한, 이념투쟁, 사상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 영향은 한반도에도 밀어닥쳤다.

한반도에서 반공주의의 연원

한국에서는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상,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지금도 종종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라는 말을 하곤 한다. 사상 때문에 부모․자식도 버리고 심지어는 형제끼리도 서로 죽이기도 한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때 말하는 사상은 주로 ‘좌익사상’을 뜻한다. 흔히 ‘빨갱이’로 불린다. 지금은 ‘종북’이라고 말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좌익사상이 무서운 것이라는 전제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상, 이념이 무서운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좌익사상만 그랬던 게 아니다. 우익이념, 우익사상도 좌익이념, 좌익사상 못지않게 무서운 역할을 했다. 아니, 실제로는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익사상이 훨씬 더 무서웠다. 잔혹하기로 따지면 우익의 그것이 좌익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국 현대사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 정상들(왼쪽부터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그리고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인물들은 군인, 경찰, 그리고 우익청년단 등 대부분 우익인사들이었다. 학살행위를 자행하면서 그들은 종종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도, 자비심도 없는 ‘도살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우익세력이 이념 때문에 그런 행위를 저질렀는지, 정말 그들이 이념이라는 것을 갖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우익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이념도 없었고, 또한 그 내부 실상을 들여다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반공주의를 표방한 우익인사들은 넓게 보면, 자유주의자에서부터 극우 민족주의자, 파시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밀하게 말해 사상, 이념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나 체계를 갖고 있지 않은, 어떻게 보면 세태에 따라서 유리한 편에 붙는 기회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익이라고 불리는 인물들 중에는 일제시기 친일부역자이거나 그 주변에서 맴돌다가 미군정을 통해 친미파로 변신하면서 ‘반공애국자’로 신분을 세탁한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쩌면 실제 일선에서 행동한 대부분은 그런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우익의 사고는 이념이나 사상이라고 보기에는 체계도 내용도 없고, 어떤 ‘정신상태’, ‘욕망’으로 규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5)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대체로 ‘반공애국’, ‘반소반공민족’이었고, ‘빨갱이 척결’이었다, 그걸 이념과 사상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세대가 아니어도 분단국가에서 냉전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반공주의라는 ‘이념 아닌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괴물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빨갱이’라고 낙인찍히는 순간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순간, 그는 ‘비(非)국민’이 되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한국전쟁 시기 무고하게 학살당한 민간인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유족들은 ‘연좌제’로 고통당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자도 한 순간에 ‘간첩’이나 ‘빨갱이’로 조작될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한국의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에서만 연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 시작된 것도 아니다. 한국 반공주의의 기원은 실제로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에 ‘붉은 깃발’의 공포를 불러일으킨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일제강점기 우리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10월 볼셰비키혁명 직후인 1918년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는데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연해주와 만주,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고 러시아 혁명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고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 선각자들에게 공산주의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발표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그것이 조선의 민족자결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혁명러시아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가운데 하나였던 오스만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동유럽 발칸 국가와 중동지역 국가들의 민족자결주의를 의미했을 뿐,(6)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자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고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해방에 대한 연대와 지원 입장을 천명했다.

한국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혁명 후 러시아(소련)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념적 차원보다도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중국 만주와 본토를 침략하고, 미․중․소․영 등의 국제연합국과 독․일․이의 추축동맹국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독소전쟁,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각국의 민족해방전쟁 등을 포괄)이 벌어지면서 한국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소련 등과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벌어지자 일제는 백군을 지원하는 한편, 연해주 방면에 군대를 직접 출동시켜 사회주의 혁명을 좌절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일제는 만주와 중국 본토를 침략함으로써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의 토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소련에 대해서 첩자를 침투시키는 등 계속적인 압박을 가하였다.(7)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식민지 조선과 만주 등지에서 항일빨치산(동북항일연군) 토벌작전을 펴는 한편 반공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8)

▲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일명 ‘88여단’). 한국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일제시기를 통해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이미 조선인들은 일제의 강력한 반공선전에 노출되었고 상당한 정도로 반공의식을 내재화하였다. 특히 일제에 빌붙었던 친일세력은 이때 이미 철저한 반공의식으로 무장한 ‘친일반공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친일세력들이 발 빠르게 친미세력으로 변모하여 ‘친미반공애국투사’가 되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과정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들 ‘친일친미반공애국투사’들은 미국의 지원 아래 독립운동가, 진보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해방 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을 통해  남한에서 이른바 ‘반공애국주의’가 빠르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기 국내의 공산당 탄압과 만주의 항일빨치산(동북항일연군) 토벌, 그리고 일제의 군국주의․천황주의․국가주의와 반공애국(친일)주의 교육과 대중선전의 역사적 영향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사회주의 이념과 전쟁

해방 후 미군정 통치 시기와 한국 정부 수립,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6.25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한국군과 경찰, 우익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시기 우익에 의해서만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아니었다. 좌익세력과 인민군에 의해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내세우는 혁명은 ‘인민을 위한 것’이다. 인민을 억압과 착취제도로부터 해방시켜 자기역사의 주인으로 서게 만드는 것이 기본 취지이며 내용이다. 그러한 혁명의 대의에 따른다면 절대로 인민을 학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혁명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좌익세력들도 많은 인민을 학살했다. 흔히 말하는 ‘혁명의 적’인 지주나 자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민들도 적지 않게 학살하였다. 왜 그랬을까? 물론 인간 세계에서 이론과 실천이 완벽히 일치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을 위한 혁명을 추구하는 혁명가라 할지라도 그들도 인간인지라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해방 후 한국전쟁 때까지에 걸쳐 일어난 좌익에 의한 인민의 학살은 단지 그런 실수 차원의 것이었을까? 단지 이론과 실천의 괴리로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니면 우익세력들이, 반공주의자들이 그토록 목소리 높여 외쳐왔듯이 ’천인공노할 좌익의 만행’이었던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사회주의 이념과 학살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 에릭 홉스 봄의 저서. 홉스 봄은 거시적 안목으로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조망하고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극단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 20세기를 ‘극단의 세기’로 본 에릭 홉스 봄과 그의 저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영국 공산당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홉스 봄은 탈스탈린 운동을 지지했다. 그와 같은 사상적 궤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의 저서에는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세기’라고 했다. 그 만큼 전쟁과 대량학살이 난무한 시기였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20세기의 전쟁과 대량학살과 관련하여 사회주의 이념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극단의 세기인 20세기를 통해 전쟁과 학살이 난무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제주의와 평화’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주의 이념은 학살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휴머니스트이며 반전주의자이다. 프롬에 의하면, 사회주의 운동이 급진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던 짐머발트 회의(9)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반전과 평화를 애호한 사람들이었다.

▲ 사회주의의 본질이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 에리히 프롬. 그는 마르크스의 인본주의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 에리히 프롬의 저서 『마르크스․프로이트 평전』

 

 

 

 

 

 

 

또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처음으로 제창한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그의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전기 이론에는 인본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10) 그런 점에서 볼 때 본래 사회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학살, 전쟁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그 반대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식민지 시절 공산당과 트로츠키당을 이끈 인물들은 모두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테러리즘에 반대했으며 폭력 봉기도 시도하지 않았다. 독립 후에도 스리랑카는 온건한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11) 이러한 사회주의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 세계적으로 하나의 체제를 이룬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현실사회주의국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회주의를 지향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나 폭력혁명이 아니라 온건하고 비폭력인 방법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국제사회주의진영의 최고 지도자였던 레닌은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과 계급투쟁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고, 따라서 계급이 철폐되어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않는다면 전쟁도 없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은 억압계급에 대항하는 피압박계급의 전쟁, 노예소유자에 대항한 노예들의 전쟁, 지주에 대항하는 농노들의 전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전쟁은 합법적이고 진보적이며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을 편 레닌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세계혁명의 광기에 사로잡혀 트로츠키보다 현실성 없는 주장을 펼쳤다’고 비판하였다.(12)

그러나 사회주의 본래의 평화주의를 버리고 혁명을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레닌도 학살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계급의 적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혁명세력이 반혁명 세력을 잔혹하게 대하라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농민들보다는 지주계급이 훨씬 더 잔인했다. 농민들이 잔혹행위를 할 때에는 대개 특정 인물이나 계층, 그들의 재산, 저택 등이 주된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 평소 온건했던 지주에 대해서는 전혀 보복행위를 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무차별적인 보복과 학살행위가 자행된 것은 혁명 때가 아니라 백군과의 내전 때였다.(13)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현실사회주의 혁명세력들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현실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와 학살

▲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공산주의를 이끈 스탈린.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레닌주의의 궤도에서도 이탈한 공산주의라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의 경우, 비밀정보기관에 의한 정적 숙청과 암살 등으로 공포정치를 펼쳤고, 집단농장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으며, 강제수용소(굴락)를 만들어 인민의 인권을 일상적으로 유린하였다.(14) 스탈린 체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가 이념적으로는 학살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현실사회주의의 모습은 학살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공산주의 국가들(15)은 대부분 스탈린주의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공산당이 지배했다. 이들 국가들은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권력구조를 가진 일당제 정치체제, 정치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통제,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체제, 나아가 비밀정보기관에 의한 인권탄압과 감시 등 스탈린 체제의 부정적 요소들을 대부분 이어받았다.

▲ 중국식 공산주의를 창조한 마오쩌둥(모택동). 마오는 레닌과는 다른 혁명이론으로 중국 혁명을 성공시켰다. 모택동주의는 농촌을 근거지로 한 제3세계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식의 혁명이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회주의가 큰 틀에서는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1960년대 중소이념 분쟁을 벌이며 사회주의진영의 주도권을 두고 소련과 경쟁한 중국공산당도 기본적으로는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보다는 스탈린주의에 더 근접하고 있다. 혁명 과정에서 중국적 현실을 반영하여 농민과 농촌에 기반을 둔 유격전과 장기적인 지구전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킨 점, 건설과정에서 중국적 유토피아주의가 결합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급진적 계급투쟁을 벌인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체제의 기본틀은 스탈린주의에 가까웠다. 특히 대약진의 광기는 스탈린주의에서도 볼 수 없는 급진적인 내용이었다. 모택동주의는 원한다면 산을 움직이고 폭풍도 몰아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주관적, 유토피아적 급진주의에 빠져 인민을 죽음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모택동주의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감안하지 않은 채 정신이 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지극히 관념적인 급진주의에 빠져들었다.(16) 

이처럼 휴머니즘을 지향했던 초기의 사회주의 이념과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한 현실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세력)들은 혁명을 위한 전쟁을 긍정하였고, 이른바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모택동주의를 따르는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주군은 100만 명 이상의 인민을 학살하여 20세기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17) 크메르 루주의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하더라고 공산주의세력이 학살과 무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학살은 결코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전쟁과 학살을 벌인 대부분의 국가, 이념, 체제는 이들 공산주의보다는 다른 곳에서 왔다. 인종, 종교, 민족 문제가 주된 것이었다. 유대인과 집시, 장애인과 동성애 등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나치 독일의 행위(1933~1945)가 가장 대표적이다.

또한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로 평가되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1915~1916),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보스니아, 코소보 등에서 벌어진 인종청소(1991~1999), 프랑스인의 알제리인 학살(145~1960), 르완다 내전(1994), 콩고내전(1998~2003)(18), 수단의 다르푸르 분쟁(2003~2010) 등 아프리카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인종청소,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 학살(1965~1966)과 동티모르인 학살(1975~1999), 일본군의 난징대학살(1937)도 있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정복과정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과 북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영국의 테즈메이니아 원주민 학살과 강제이주도 빼놓을 수 없는 인종절멸 행위에 속한다.(19)

물론 전쟁과 혁명, 반혁명 과정에서도 학살들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 또한 이러한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사건에서 예외일 수 없다. 해방 후부터 전쟁 6.25전쟁 때까지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 반공청년단 등 준군사기구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과 노동당, 좌익단체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어떠했을까? 

미군정의 좌익탄압과 신전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해방 후 좌익이 어떤 조직화의 과정을 거쳤는지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해방 후 좌익은 남북한을 망라하여 세력의 절대적인 우위를 보였다. 국내의 경우 우익세력은 소수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제에 부역하거나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하지만 좌익은 일부가 전향서를 쓰고 친일행위에 가담했지만 다수는 해방 전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해방 직후 서대문 형무소 등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도 대부분이 좌익인사들이었다.

해방과 함께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되었고, 건준은 미군의 남한 진주와 함께 인민공화국(중앙)과 인민위원회(지역)로 개편되었다. 1948년 9월 8일 인천에 도착하여 남한에서 군정을 시작한 미군은 군정청 외에 그 어떤 민중의 자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역인민위원회의 경우 미군정과 대립하면서도 1946년 가을까지도 그 세력을 유지하며 민중자치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중도 좌파 정당들도 조직되었다.

▲ 남로당 당수 박헌영. 남로당은 신전술을 통해 미군과의 정면 대결을 선택하였다. 신전술 채택 이후 남로당의 조직 역량이 계속 파괴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을 두고 한국 내부에서 분열과 대립이 발생했다. 우익은 신탁통치를 반대를 외치며 세력 결집에 나섰고, 좌익은 모스크바 결정지지를 주장하며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46년 4월부터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좌우익 간, 미소 간의 견해차와 대립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을 기화로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전평의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좌우익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미군정과 좌익세력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좌익세력과 미군정의 대립관계는 1948년 2.7구국투쟁,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미소의 갈등과 냉전체제가 깊어지면서 1946년 6월부터 남한 내부에서 이승만․한민당을 중심으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좌우의 극단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추진 동력을 잃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켰고, 유엔총회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을 결정하였다. 1948년 5.10총선이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좌익세력은 정판사 사건 이후 1946년 7월부터 미군정의 탄압에 적극 대응하며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도 이러한 와중에 발생하였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은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무장조직인 야산대(제주도에서는 자위대)를 조직하였다. 도당 산하에 야산대 도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은 도당부위원장이 겸했다. 야산대는 도를 중심으로 2~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구 블록을 만들고 1개의 블록이 몇 개의 군을 지휘하는 형태로 조직되었다. 1948년 2.7구국투쟁을 계기로 야산대의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4.3제주사건과 여순사건을 통해 무장유격투쟁으로 나아갔다. 특히 여순사건과 함께 군인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20)

이와 함께 남한 내에 제주도, 호남, 영남 일부에서 몇 개의 유격전구가 형성되었다. 호남유격전구는 전남의 야산대와 일부 전북지역에서 야산대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지리산유격전구는 “남조선정부와 장기적이며 조직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유격전구를 창설”하고자 하였다. 지리산유격전구는 후에 남한 지구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는데 총사령관은 이현상이었다. 지리산전구는 남으로는 백운산, 북으로는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지대에 걸쳐 있었고, 그 주변의 중소도시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태백산유격전구는 북으로는 오대산과 연결된 매봉산, 계방산, 그리고 남으로는 소백산, 국망봉 등을 거점으로 주변의 강릉, 삼척, 정선, 평창, 영월, 횡성, 홍천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남유격전구는 1946년 10월 항쟁 이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입산한 야산대가 출발점이 되었고, 2.7투쟁에 참여한 좌익세력과 대구의 6연대 반란군 일부가 무기를 갖고 합류하면서 전구가 형성되었다. 그 외에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유격전구가 형성되었다.(21)

강동정치학원과 게릴라 남파

남로당은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서울에 정치학교를 설치하여 중견간부에 대한 단기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합법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1947년 중반기부터는 강동군에 정치학원(강동정치학원)을 설치하여(22) 간부 훈련을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도당 부위원장과 부장, 군당위원장․부위원장급 등을 입교시켜 3개월 정도의 강습과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남파시켰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와 8월 20일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했던 남로당과 좌익정당(근로인민당, 민족혁명당 등), 각 사회단체 간부급들이 대폭 월북하여 입교하면서 학원의 규모가 갑자기 커졌다. 그 밖에 남한에 김일성대학과 이 학원에 입교한다는 명목으로 차출, 월북한 사람들까지 수용했기 때문에 수백 명에 달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이 오대산지구로 침투하였다.

▲ 남로당이 유격대를 양성하여 조직적으로 남파하기 위해 북한 평양시 강동군에 세운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빨치산 육철식(본명 이영식)이 저술한 책.
▲ 『강동정치학원』과 『빨치산』은 동일한 내용의 책이다.

강동정치학원은 1949년부터 게릴라 요원 양성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남한 각지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자 유격투쟁에 대비한 훈련소로 체계를 바꾸었던 것이다. 남로당은 정치공작과 군사공작, 특히 유격투쟁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지하당 공작요원의 정치반과 게릴라요원의 군사반, 그리고 정치와 군사를 배합한 혼합반의 3개 반으로 구분하고 각반을 중대, 소대, 분대로 편성했다.(23)

1949년 6월 25일 조국전선 결성과 함께 선언문이 발표된 뒤에는 수백 명씩 집단적으로 남파되었다. 9월 6일에는 학생 360명이 조선인민유격대 제1병단으로 편성된다. 1949년 9월경에는 약 1,200명 정도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교육은 한 과목에 90분씩 하루 4시간을 하고 나머지는 유격훈련을 실시했다. 과목으로서는 1)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2)해방투쟁사 3)당건설 4)정치경제학 5)소련공산당사 6)조선역사 7)신민주주의 8)유격전술 9)사격술 10)공병학(工兵學) 등이었다.

학원생들은 군대와 같은 강한 규율 밑에 일상생활을 했으며, 모두가 당원이었기에 당세포 생활을 했다. 이들은 사상 강화의 한 방법으로 모택동의「자유주의배격11훈」(24)을 당생활의 기준과 지침으로 삼았다. 강동정치학원에는 남로당 거물 이승엽과 조일명 등이 주 1회 정도 검열을 나와 시사적인 남한 정세를 강연하기도 했다.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의 중앙당 학교라고 할 정도로 당파성을 띠고 있어서 박헌영을 ‘위대한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강동정치학원생들은 1949년의 이른바 '9월 공세’때 집단적으로 남파되었고, 1950년 초에 해산되었다. 북로당계는 1949년 10월 경 오진우가 교장으로 있던 ‘회령군관학교’를 유격대 양성을 목적으로 따로 설립하였다.(25)

한편, 경기도와 강원도 등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강동정치학원 외에 북한에 설치된 인민유격대 훈련소에 당원을 보내 일정기간 훈련을 실시한 후 남파시켰다. 남로당은 1949년에 들어서면서 무장부대를 확대하여 ‘유격투쟁’을 더욱 강화하였다.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 결성되고 7월부터 무장유격투쟁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유격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유격대를 통합하여 ‘인민유격대’를 편성한 것이다. 오대산지구가 1병단, 지리산지구가 2병단, 태백산지구가 3병단이었다. 1949년 6월 30일~7월 1일에 남북노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이 취임했지만, 대남정치공작은 부위원장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담당하였다.(26)

인민유격대가 편성되어 활동하면서 남한 내의 유격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모든 당 조직은 지도부의 일부를 자기 관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이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지휘하게 했다. 북에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올 것이라는 허위선전과 함께 당원들을 강제로 입산시켜 야산대와 인민유격대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무장유격대는 처음에는 낫, 호미, 곡괭이, 죽창, 장도 등으로 무장했으나 점차 카빈, M1,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까지 확보하였다. 지리산지역에서는 무기를 수리하고 폭탄을 만드는 철공장도 운영했다. 무전대와 촬영대가 제2병단 사령부에 배속되었고, 유격대 복장을 만들고 수선하는 재봉틀과 오락용 악기도 있었다.

그러나 무장유격대의 활동이 격렬해지는 만큼, 남한 군경의 토벌작전도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무장유격대는 점점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락을 습격하여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빼앗는 등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때로는 유격근거지 주변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거나 이를 빌미로 지주, 부농의 집에 불을 질러 토지문서를 태우기도 하였다. 인민유격대 제3병단과 각 지방의 야산대는 북한에서 남파된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유격대와 합류하여 ‘아성공격’(27) 전술로 넘어갔다. 1949년 7월 이후 청도군의 경찰지서와 면사무소 습격, 경주발 안동행 열차 습격으로 군경 살해와 무기 탈취, 거창경찰서와 군청, 재판소 점거 및 좌익범 탈출, 합천경찰서와 읍사무소, 금융조합, 우편국, 국군 3사단 22연대 습격 등이 대표적이다.(28)

남로당과 유격대의 궤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 시행되면서 이승만정부의 좌익탄압이 강화되었다. 검․경의 대대적인 좌익색출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감옥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등 좌익 조직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국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동료들을 팔아넘길 것을 강요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압박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지방당의 경우에는 산악지대로 지도부를 이동시킴으로써 당의 정치활동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유격전은 펼 수 있었지만 서울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1949년 2월 말경 서울시당 조직부장 이중업이 체포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대리로 있던 윤순달도 8월 25일에 검거되었다. 9월 중순에는 서울시 특수부가 일망타진되었고, 12월에는 당조직을 재건하려던 서울지도부의 조용복마저 체포되었다.

1949년 말 모든 당조직이 파괴되고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다. 하부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지도부가 안전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1950년 3월 27일 서울지도부 책임자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었다. 김삼룡․이주하의 체포는 서울지도부와 북한에 있던 이승엽과의 연락책임을 맡은 서울지도부의 안영달이 체포된 다음, 수사기관의 역공작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두 사람의 체포를 직접 지휘했던 백형복(전 치안사찰과 중앙분실장)이 월북 후 1953년 재판에서의 진술로 밝혀졌다.(29)

김삼룡과 이주하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백형복과 안영달, 조용복은 5월 7일 가족과 함께 이승엽의 도움을 받아 월북했다. 남북 양쪽에 이중첩자로 활동하고 있던 안영달과 조용복은 서울에 남아 있으면 북한에서 의심할 것이기 때문에 북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그냥 들어가는 것보다 치안국 사찰과 분실장 백형복을 ‘의거입북자’로 가장해 데리고 들어가면 상부에서도 그 공로를 인정하여 신임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인공’치하에 들어가면서 안영달이 김삼룡을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이 폭로되었다. 이승엽은 6.25때 안영복을 경기도 인민위원장에 임명했는데,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좌익들의 입에서 안이 김삼룡을 잡는데 앞잡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자 이승엽은 안영복을 남진하는 ‘임종환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보내 사망케 함으로써 입을 막을 수 있었다.(30)       

▲ 김삼룡과 이주하 체포 소식을 전하는 신문보도.

서울지도부인 김삼룡․이주하가 체포됨으로써 남로당 조직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되었다. 한편, 1949년 가을부터 1950년 봄 사이에 남한지역에서 군경의 대대적인 동계 대토벌작전이 펼쳐지면서 유격대 또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949년 10월 해남군 전투에서 사령관 최현이 사살된 다음, 호남지구 유격대 대부분이 귀순, 생포, 사살되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유격대는 호남지구를 벗어나 지리산지구로 이동하였다. 최현이 사살된 후 호남지구 유격대사령관은 당시 전남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김선우가 맡았다.

지리산지구는 사령관 이현상의 지휘 아래 3개 지대로 개편한 다음, 2개 지대는 포위망을 뚫고 전북과 전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월동과 함께 새 활동 지구를 개척하도록 했다. 1개 지대만 지리산에 남겨두어 동계 토벌을 피하도록 하였다. 1950년 5․30 선거를 앞두고 유격투쟁이 경남 산청 등 여러 지방에서 있었지만 그 영향을 미미했다.(31)

해방 후 6.25전쟁 발발 전 시기 남로당 등 좌익세력은 야산대를 조직하거나 유격대를 조직하여 남한의 군경과 폭력투쟁, 무장투쟁을 벌였다. 조직적인 무장투쟁은 북한정권이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폭력적인 수단이 동원된 대중투쟁, 폭력투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익세력은 지주나 자본가, 경찰과 군인, 관리와 지역 유지들을 납치, 살해하거나 폭력을 동원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양식을 탈취하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좌익에 의해 미군정시기 21명,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166명이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32)

그러나 이 시기 좌익세력은 군경 토벌대처럼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역량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부터 전면전이 시작되고 정복과 후퇴를 반복하는 ‘톱질전쟁’이 벌어지면서 좌익에 의해서도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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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두 번째 철학 개념으로 “② <철학>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 개념.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하고, 근세의 데카르트나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내용, 곧 관념을 뜻하며, 독일의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 또는 순수 이성의 개념을 뜻한다. [비슷한 말] 이데아ㆍ이성 개념”이라고 돼 있다.(네이버 국어사전)

2) 임영태, 「카를 마르크스」,『스토리 세계사 7』, 21세기북스, 2014, 54~58쪽

3)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연구소 저/ 김대웅․임경민 역,『마르크스』상, 두레, 1989, 15~21쪽

4) 임영태, 「러시아 혁명」,『스토리세계사 8』, 138~155쪽

5) 피터 바레크 저/ 김태수 역,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태창문화사, 1981; 이나미,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념의 역사』, 지성사, 2011 참고) 

6) 미국과 유럽의 승전국들(프랑스, 영국 등)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신, 중동지역에서는 사이코스피코 비밀협정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나누어 먹었다.

7) 1937년 소련에 의한 극동 고려인들의 대규모 강제이주는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탈린의 소련 당국은 일제의 극동지역 침략 위협과 함께 고려인 등 조선인을 통한 간첩(첩자) 파견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고려인 전체를 의심하게 되면서 그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스탈린의 반일주의가 부딪치면서 그 사이에 끼인 한민족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8) 일제는 항일유격대에 대해 공산비적(共産匪賊)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표현은 박정희정권 시기까지도 이어진다.

9) 1915년 스위스의 짐머발트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한 제2인터내셔널의 우파에 반대하여 제국주의 전쟁의 종결을 결의하고 무배상 강화를 요구하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10)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을 청년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11) 이나미, 『이념과 학살』, 선인, 2013, 21쪽

12) 이나미, 위의 책, 22쪽

13) 에릭 홉스봄/ 이원기 역, 『폭력의 시대』, 민음사, 2008, 133~134쪽; 이나미, 위의 책, 23쪽

14) 스탈린의 소련은 혁명의 이름으로 벌인 농민과 우크라이나인 학살(1930~1937), 인민의 적에 대한 숙청(1937~1938)과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이주(1941~1946) 등의 집단 학살(최호근,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참고) 외에도 카틴 숲 사건(1940)과 같은 폴란드인에 대한 집단학살도 자행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뒤,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었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사병들은 대부분 석방했지만, 폴란드군 장교 포로 수만 명을 수용소에 수감했으며, 다음해 1940년 4월과 5월에 걸쳐 폴란드군 장교와 경찰, 지식인 등 2만 2천여명을 카틴 숲 등지에서 학살하여 암매장하였다. 소련은 이 학살이 독일군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소련 붕괴 후 스탈린이 처형을 지시한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 등이 공개되어 소련군의 만행으로 확인되었다(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9』, 21세기북스, 2014, 50~51쪽 참고).

15) 중국과 북한, 베트남 등의 아시아 국가들,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쿠바가 여기에 속한다.

16) 에릭 홉스봄/ 이용우 옮김,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하), 1997, 639~645쪽

17) 최호근, 위의 책, 263~295쪽

18) 콩고 내전은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1998년부터 2003년까지의 제2차 콩고 내전 때 집단학살, 집단강간, 고문, 질병 등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19) 보다 자세한 내용은 최호근, 『제노사이드』(2005)를 참고할 수 있다.

20) 김남식,『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393~394쪽

21) 김남식, 위의 책, 395쪽

22) 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평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남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지금은 평양시 승호구역 입석리)의 일제시기 탄광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하여 만들었다(김남식, 위의 책, 396쪽).

23) 김남식, 위의 책, 396~397쪽

24) "1)동창, 친지, 부하, 동료의 잘못을 알면서 책하지 않고 화평의 수단으로 방임하는 것 2)전면에서 말하지 않고 배후에서, 회의에서는 말하지 않고 회의 후에 난의(亂議)하는 것 3)타인을 책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이 명석한 보신술이라고 침묵하는 것 4)간부라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것 5)개인공격을 주로 삼으며 보복하려는 것 6)반혁명분자의 말을 듣고도 보고하지 않는 것 7)선동․선전하지 않고 당원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 8)군중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보고도 격분하지 않는 것 9)사무에 충실하지 않고 하루를 되는대로 지내는 것 10)노선배연(老先輩然)하며 대사는 할 능력이 없고 소사는 하기 싫어하는 것 11)자기의 착과(錯過)를 알면서 개정하지 않고 또는 자기를 책하되 비관 실망에 그치고 마는 것”등이다.(김남식, 위의 책, 398쪽)

25) 김남식, 위의 책, 397쪽

26) 이나미,『이념과 학살』(2013), 30~31쪽

27)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 경찰서, 군사령부에 대한 정면공격을 말한다.

28) 이나미, 위의 책, 31쪽

29) 김남식, 위의 책, 427~428쪽. “안영달이 경남도경에 체포되었을 때 … 문초를 당하다가 ‘나는 김삼룡과 같이 일하는 중앙당 간부인데 김삼룡을 체포해 줄테니 석방시켜 달라’고 청했다. … 안은 나보고 조용복을 만나게 해주면 김삼룡을 체포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 그 뒤 조용복의 공작으로 김삼룡과 안영달이 연결되어 안은 김삼룡의 아지트를 정하여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김삼룡의 일체행동과 공작상황을 그의 옆방에서 듣고 볼 수 있었고 얼굴도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나는 반대하여 검거하지 않고 있다가 50년 3월 27일 서울시 분실에서 김삼룡 체포에 착수하고 있음을 알고 우리의 공로를 뺏길 것을 겁내어 내가 직접 안영달과 형사들을 지휘하여 김삼룡을 체포했다.”

30) 김남식, 위의 책, 429쪽

31) 이나미, 위의 책, 32쪽

32)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010, 61~68쪽, 113~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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