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11사단장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

1950년 11월 22일, 11사단에서는 예하 각 연대에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한 부대호칭을 별도로 부여하였다. 작전지역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토벌작전에 대한 사명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연대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13연대는 전북지구전투사령부, 20연대는 전남지구전투사령부로 호칭하게 되었다.(1)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사진 출처: 전쟁기념관)

11사단장 최덕신은 중국의 고전적 작전개념인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빨치산 토벌작전에 활용했다. 견벽청야 작전이란 “지켜야 할 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게 확보하고, 부득이하게 적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모두 이동시키고 건물 등은 깨끗이 없애버려 적이 활동할 수 있는 거점과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작전”이다. 한마디로 적이 활동할 수 없게 완전히 초토화하는 것이다. 사실상 일본군이 한국 의병들을 남선대토벌 작전을 펴면서, 그리고 중국에서 조선독립군과 중국항일세력을 토벌하면서 써먹은 삼광(三光)작전(2)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개념이다.

국민당 중앙군 출신의 최덕신이 중국의 전통개념인 ‘견벽청야’를 언급했지만, 실제로 연대장, 대대장 등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삼광작전이나 초토화작전이 훨씬 더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들은 이미 해방 후에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지리산에서의 반란군 토벌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을 편 바 있다. 11사단은 이러한 개념에 바탕을 둔 빨치산 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시기별로 목표를 구분하였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

-제1기(1950.10.7~10.25): 병력을 호남지역에 집결시킨 후 훈련과 각 지역 행정기관(군청, 경찰서 등)을 복구하고 적(빨치산)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제2기(1950.10.26~12.31): 월동기를 맞아 보급로와 통신로를 차단하는 등의 방법으로 빨치산의 활동과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려하였다.

-제3기(1951.11~1.31): 이 시기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하자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해져 근거지를 구축하고 약탈, 납치, 방화, 기습 등을 감행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보급로와 통신망 확보는 경찰과 청년방위대에 맡기고 군은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를 무너뜨리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폈다.

-제4기(1951.2.1~3.31): 최종적인 공비 토벌시기로 빨치산 섬멸을 위해 지리산과 불갑산 등 남부지역의 주요 근거지와 산악지역을 이 잡듯이 뒤지며 빨치산 토벌작전을 폈고 주민들의 소개 작전도 병행하였다.

그런데 11사단이 함평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인 것은 제2기와 3기였고, 산청과 함양 등지에서는 제3기, 그리고 거창에서는 제4기에 발생했다. 결국 시기의 작전 목표와 상관없이 시종일관 민간인의 생명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견벽청야 작전의 결과인 셈이다. 최덕신은 견벽청야 작전을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 곧 군청소재지 등 경제·통신·문화의 집중지를 확보하여 그 사이의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빨치산이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건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에서 인력과 물자를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작전이라고 말했다.(4)

“나는 그때 기본작전 개념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을 썼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는 이야긴데, … 작전지역은 대부분 산세가 험해서 국군이 산 속에 숨은 공비를 따라다니며 토벌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군청 소재지 등 경제․통신·문화의 집중지를 확보하고 그 사이의 군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우선 역점을 두었어요. … 다음으로 공비가 식량을 약탈하거나 인력과 건물을 이용할 수 있는 산간벽촌을 철수시켰습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벽촌을 사단병력을 소수부대로 쪼개서 일일이 보호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 이런 결과 공비들은 산 속에서 고립무원 상태에서 자진하는 형세였어요.”(5)

그런데 이런 작전이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최덕신도 인정하였다. 그는 “청야작전에 대해 주민들의 원성이 컸어요. 집을 불사르고 철수시킨 다음, 다시 주민들이 돌아갈 때 정부에서 보상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니, 원성이 클 수밖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거창군 신원 소위 양민학살사건은 각 부대의 일일작전보고를 받고서 알았어요. … 거창 양민학살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당시의 미묘한 정치적 관계로 ‘나쁜 그대로’보다 훨씬 ‘더 나쁘게’ 세상에 알려졌어요. 신성모 국방을 타도하려는 조병옥 내무와 야당 국회의원 등이 전자 타도의 구실로 이용하면서 문제는 더 시끄러워졌지요”라고 변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 거창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청야’의 포스터

그렇다면 거창 사건이 나기 전 11사단이 함평과 산청·함양 등지에서 벌인 민간인의 대량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작전보고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럴 리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휘관이다. 자기 부하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그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최덕신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우리는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보고 있지 않은가?

11사단뿐만 아니라 토벌작전에 나선 한국군 지휘관들은 토벌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민간인 학살이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필연, 또는 필요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최덕신은 부하들에게 ‘견벽청야작전’을 직접 설명하면서 “공비 100명 사살 중 상당수가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6) 11사단의 뒤를 이어 지리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던 백야전사령부의 백선엽도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을 초토화 작전이라고 하였으며, 11사단의 이 같은 초토화 토벌작전으로 빨치산들의 해방구가 축소되고 병력손실을 입었다고 평가하였다.(7)

9연대 3대대의 산청·함양 주민학살

▲ 1951년 2월 7일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산청·함양 주민 705명을 학살하는 장면을 재구성한 미니어쳐(ⓒ시사IN 정희상)

1951년 2월 2일 11사단 9연대는 경남 진주에서 함양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부대가 함양으로 이동하기 전 진주에서 연대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연대작전회의와 관련하여 3대대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51년 2월 초순 진주 연대본부에서 작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제9연대장 오익경 중령은 이 회의에 앞서 있었던 사단 작전회의에서 지시됐다는 기본 작전명령을 시달했어요. 오익경 연대장이 설명한 사단의 기본작전은 소위 ‘견벽청야’란 작전개념으로 이 기본작전에 따라 전 사단병령이 총동원되어 지리산 주변의 공비소탕전을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의 합동작전에 따른 제9연대의 작전임무는 제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 쪽으로 적을 공격하고 제2대대는 하동에서 산청 쪽으로, 그리고 우리 제3대대는 미수복지구인 거창군 신원면의 공비소탕전을 벌이면서 산청쪽으로 진격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연대본부는 또 이번 작전에 따른 연대작명 부록으로 「작전지역내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는 소각하라」는 세 가지 사항을 명령했습니다.”(8)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작전회의 지침에 따라 주어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한동석 대대장은 전대대병력과 경찰, 청년의용대 병력 1개중대를 이끌고 2월 7일 10시경 신원면에 도착하였다. 애초 정보로는 신원면에 약 400~500명의 공비가 잠복하고 있다고 했으나 3대대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단 한명의 공비도 없었다. 단지 부녀자와 아이들, 노인들밖에 없었다. 이에 3대대는 신원면에 경찰과 청년대 병력 약 200명을 주둔시킨 다음, 산청 쪽으로 진격해갔다.(9)

이때부터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거창 지역 20여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명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1951년 2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동안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을 자행했던 것이다. 거창사건이 일찍부터 알려지면서 거창군 신원면에서 학살된 719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만 같은 때, 같은 부대에 의해 산청과 함양에서 학살된 705명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10)

2월 8일 아침, 지리산 줄기에 자리 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부락의 날씨는 푸근했다. 며칠 동안 계속되던 추위가 음력설을 맞아 다소 누그러지면서 이따금씩 눈발이 날렸다. 초하룻날 제사를 모신 다음 날이어서 집집마다 남은 떡국으로 아침상을 준비할 무렵, 맨 위에 위치한 가현부락 뒷산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기기 시작했다. 이어서 아침 7시쯤 9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가현부락에 들이쳤고, 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1중대는 놀라서 뛰쳐나온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속칭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가서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11)

이 생지옥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최금점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자 나는 무서움에 질려 엄마 치맛자락만 붙들고 오들오들 떨었다. 엄마가 숨막힐 듯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그날 엄마와 언니를 포함해 마을주민 123명이 그렇게 죽었다.”(12)

학살을 마친 부대는 서둘러 가현부락의 소와 돼지들을 몰고 바로 아래 부락인 방곡마을로 향했다. 방곡에는 이미 2중대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여덟살로 어머니와 오빠, 동생 등 일가족 7명을 잃고 부상당한 채 살아난 정정자씨는 이때 “마을사람 210명이 그 자리에 죽어 있었고 살아난 사람은 10명도 채 안됐다”고 증언했다. 3대대 1중대는 2중대의 학살장면을 구경하면서 아래 점촌마을로 향했다. 당시 점촌마을에는 21가구 60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부락 앞 논에서 총살당했다.(13)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내 희생자 위패봉안각

학살은 계속되었는데 다음부터는 학살 방식을 바꾸었다. 마을을 하나씩 초토화시키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고 판단한 3대대는 아예 여러 마을주민들 한 장소에 집합시켜 학살한 것이다.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의 손곡·지곡마을,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의 상촌·하촌마을, 화계리의 화계·화산·주상마을 등 7개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의 총부리에 떠밀려 9시부터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변에 모였다.

3대대 군인들은 장정 9명을 동원해 동천강변에 교실 넓이만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파게 했다. 주민들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오후 4시쯤 300여명의 주민들을 두 개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했다. 공비토벌 전공을 올리듯 박격포까지 쏘았다. 이렇게 해서 2월 8일 10시간만에 이 일대 주민 705명이 학살되었다.(14) 이것은 거창 학살 사건의 전주곡이었다.

당시 청년방위대원으로서 3대대의 길 안내를 맡아 가현부락에서부터 서주리 집단학살 현장까지 모두 목격한 민간인 신분의 최남철씨는 정희상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당시 산청읍에서 청년방위대 훈련을 받다 설날 가현 뒷산 너머에 있던 수철리 집에 와 있었다. 초하룻날(2월 7일)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우리집에 대대본부를 차리고 주둔했다. 다음날 새벽에 3대대는 세 중대가 가각 가현·방곡·자혜 쪽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나는 1중대 중대장이 자기 짐을 지고 따라 다니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해 중대장 짐꾼으로 따라 나섰다. 가현·방곡·점촌을 차례로 훑어 내려온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부락 앞에 몰아세운 뒤 노인들에게는 아들의 소재를 물었고, 부녀자들에게는 남편의 소재를 물었다. 대부분 군대 갔다고 대답했지만 더러 산에 갔다고(빨치산이 되었다는 뜻)말한 주민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마을 주민 전원을 총살했다. 가현과 점촌 주민은 내가 짐을 져준 1중대장이 직접 총살했고 방곡 주민은 2중대가 총살했다. 대부분 어린애 노인 부녀자들이었다. 방곡에서는 시체더미 속에서 세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울며 기어다니자 중대장이 정조준해 쏘아버렸다. 그 중대장은 옆에 따라다니는 나더러 ‘기분이 안좋아?’하고 물었지만 나는 죽음이 두려워 ‘좋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점촌까지 학살을 마쳤을 때 자혜리쪽 언덕에서 대대장(한동석인 듯)이 중대장을 불러올리더니 갑자기 죽도록 팼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중대장을 따라서 서주리로 가니까 구덩이 두개가 파여 있었다. 군·경이 끌고 온 주민 수백명 중에서 군인·경찰 가족을 고르고 있었다. 구덩이 주변에는 기관총 2대, 포 2대가 놓여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구덩이에서 옷가지와 살점들이 튀어 올라 근처 나뭇가지에 무수히 걸렸다. 그때가 해질 무렵이었다. 중대장은 그날 밤 부대 숙영지인 생초국민학교로 나를 데려간 뒤 쇠고기국과 주먹밥을 주었다. 그러나 비위가 상해 음식을 넘길 수 없었다. 거기서 3대대장이 어디론지 무전으로 보고했다. ‘가현 70, 방곡 1백 50, 점촌 35, 서주리 2백 공비 소탕 오버’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밤 귀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부대를 빠져나왔다.”(15)

산청과 함양의 학살 현장을 목격한 최남철씨는 당시 중대장이 “나는 제주도 출신인데 가족이 빨갱이들한테 죽어 보복하러 왔다”고 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거창학살사건과 군의 대민인식

3대대는 2월 9일 아침 산청군 생초국민학교를 출발해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부대는 2월 9일 밤을 산속에서 숙영한 다음,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에 도착했다. 거창 사건의 출발점이 되는 청연부락 학살 현장에서 7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뒷산으로 끌려가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살해되었다. 이날 오후 3대대 병력은 인근 와룡리와 대현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탄량 골짜기로 끌고가 학살했다. 100여명이 살해된 이곳에서 유일하게 임분임씨가 살아남았다.

▲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있는 학살현장 모형도 (거창사건추모공원 홈페이지)

탄량골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는 와룡리·과정리 일대의 주민들을 면소재의 신원국민학교로 모았다. 군은 12개 교실에 꽉 들어찬 주민 1,000여명 가운데서 현지 형사인 조용호, 박세복과 박대성 지서주임, 박영보 면장 등을 시켜 군·경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머지 주민들을 근처의 박산 골짜기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이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 500여명 가운데 3명(신현덕, 문홍준, 정나달)이 살아남았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신현덕 씨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군인들은 주민을 개머리판으로 떠밀어 산사태로 움푹 팬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언덕 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주민을 향한 가운데 지휘관인 듯한 군인이 나를 포함해 6명을 손가락으로 불러냈다. 우리더러 솔가지를 쳐오라고 하고는 계곡 아래로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우리는 군인이 시키는 대로 솔가지를 시체에 덮고 불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총구가 우리 쪽을 향하더니 콩 볶듯 쏘았다. 다 죽고 문홍준씨와 나만 살았다. 군인들은 ‘지독하게 명이 질긴 놈들이구만’하면서 부대를 따라다니며 짐을 져 나르라고 명령했다.”(16)

신현덕씨는 부모형제를 몰살한 그 3대대 병력을 따라다니며 포탄을 져 나르는 등 잡역부 노릇을 하다가 도망쳐 살아남았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

▲ 거창사건추모공원 안의 위패봉안각 모습

그렇다면 9연대 3대대는 왜 이처럼 잔인하게 지역 주민들을 살해했을까? 물론 그들이 갖다 붙인 이유야 뻔했다.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3대대장 한동석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오익경 연대장은 작전회의에서 “작전지역내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한동석은 연대장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었다. 그들이 학살된 사람들이 선량한 민간인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빨치산에 가담했거나 협조했던 젊은이들은 이미 산으로 도망간 지 오래되었다. 대대장인 한동석 자신이 그렇게 증언하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은 군의 공식문서인 11사단 9연대의 연대작명에 의해 명확히 확인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보한 특무대 문서철에서 이런 사실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951년에 생산된 특무대 보고서(2건), 11사단 9연대 3대대 보고서(1건), 거창경찰서 보고서(1건), 경남도경 보고서(1건), 헌병보고서(15건) 등으로 이뤄진 총 522매의 ‘특무대문서철’을 기무사로부터 확보했었다. 이 특무대 문서철은 이른바 ‘거창사건’발생 직후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시로 경찰과 헌병대 등이 작성한 것으로 특무대가 취합·작성·보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들을 통해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산청군과 함양군, 거창군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사건은 연대작전명령에 의한 공식적인 학살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문서철에는 작명5호 부록의 원래 내용, 즉 “적의 손에 있는(‘치안미확보’즉 ‘미수복지구’)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학살작전이 처음부터 ‘민간인에까지 무차별적인 적용을 지시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이 작전이 최덕신 사령관의 구두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9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의 증언도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작전명은 재판과정에서 “작전지역에서 이적 행위자를 발견시는 즉결하라”는 내용으로 위조, 변조되었다.(17)

이 문서철에는 당시 군이 해당 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토벌작전을 수행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 거창사건 발생 이후 군의 대민인식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거창사건의 박산합동 묘역. 5.16이 나고 나서 합동묘역이 파헤쳐지고 위령비에 새겨진 글자를 정으로 하나하나 쪼개어 땅 속에 묻었다. 후대의 교육을 위해 깨어진 모습 그대로 두고 있다.

“(지리산 일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하는 고로 이적행위로 인하야 아군작전에 지장을 초래케 하며 현재 소각당한 각 부락은 주간에는 대한민국이며 야간에는 인민공화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대한민국정부에 납세 혹은 국민된 의무는 전혀 없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 간주할 수 없음으로 지리산토벌작전에 적의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기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생각함.”(18)

“(거창군) 신원면 관내는 완전한 인민공화국이며 공비에게 일시적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협조 충성을 다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신원면 5개리 주민은 공비화되어 있었음으로 이적행위자로 칭할 바 아니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바 차를 사살하였음은 작전상 당연한 조치로 인정됨. … 숙청당한 지대의 거주민은 추호도 개전의 여지 전무한 자이며 금후 공비의 완전한 소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해(당)지대의 가옥 및 거주민을 처분하지 않는 한 금후 공비세력이 강화될 것이므로 당연한 처사로 인정됨.”(19)

산청·함양·거창 학살사건에서 죽은 사람들이 무고하다는 것은 그 구성에서도 금방 확인된다. 산청과 함양에서 학살된 주민의 경우 705명 가운데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00여명에 달했다. 거창에서 학살된 719명 중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의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75%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20)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군의 조직적 은폐

함평과 산청, 함양에서 대량학살 사건이 일어났지만 거창에서 일어난 사건만 문제가 되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당연한 일이지만 학살 사건 현장은 군경의 삼엄한 통제로 외부인의 출입이 일절 통제되었다. 그러나 거창사건의 경우 유족들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이 떠돌았으며 조금씩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1년 2월 하순경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당시 거창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신중목 씨 앞으로 투서가 날아들면서 사정이 급변하였다. “당신의 지역구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에 한 번 가보십시오”라는 투서를 받은 신중목 의원은 즉시 거창으로 달려갔고, 신원면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거창사건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자 신성모 국방장관은 최경록 헌병사령관과 이성주 경남경찰국장, 김종원 경남계엄사 민사부장, 윤우경 헌병사령부 수사과장, 김현숙 육군본부 여군부장, 김철안 대한부인회 회장 등을 이끌고 현지조사를 실시하는 등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 후 각 기관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헌병대는 최경록 현병대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현장조사와 피학살자 명부를 직접 작성하고 산청·함양에서 발생한 사건까지 조사하는 등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 거창사건 은폐의 주연 김종원(연합통신)

한편, 1951년 2월 25일에 작성된 경남도경 보고서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독자적인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 군경합동조사단의 파견‘을 제안하였다. 경남도경의 건의를 받은 신성모는 통상적인 군내부의 사건조사기구인 헌병사령부를 제쳐놓고 특무대를 조사주체로 결정하였다. 나아가 여순사건에서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며 악명을 떨친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을 조사 책임자로 정하였다. 이는 결국 철저한 조작과 은폐를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1)

신성모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는 1951년 3월 10일과 15일, 두 건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보고서의 우측 상단에 ‘특명’, ‘극비’라는 표시가 있는데, 이는 대통령의 특별명령을 수행하였으며 문서가 극비로 작성, 전달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목은 각각 ‘거창사건에 대한 진상과 수습대책’, ‘거창사건에 대한 수습결과 보고의 건’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보고서는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기보다는 거창사건을 비롯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을 어떻게 은폐, 조작, 왜곡할 것인가 하는 대책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3월 10일자 보고서는 국방부, 경남계엄사령부, 거창경찰서와 경남도경 등 범정부 차원에서 이 사건의 조작과 은폐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두환의 5공정권이 박종철 고문살해사건이 일어났을 때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사건을 조작, 은폐하려 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동안 거창 사건과 관련하여 특무대의 역할을 밝혀진 게 없었지만 이 보고서를 통해 특무대가 중심이 되어 사건의 조작과 은폐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2) 특무대는 이 외에도 대통령의 손발이 되어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데 앞장섰다. 그 전통은 군부정권 시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부와 군은 특무대가 작성한 수습방안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현지를 방문하는 한편, 비밀회의를 통해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경찰서 사찰계 유봉순 등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하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는 등 문제가 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은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신성모 또한 이승만의 의중을 받아들여 사건의 책임자인 최덕신에게 ‘걱정하지 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 100만원의 격려금까지 내렸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의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과 주민 협박 등의 역할 분담을 하며 조직적으로 은폐 활동을 벌였다.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 피해에 대해서도 철저히 은폐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이 정치권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 내에서도 사건 수습방향을 놓고 조병옥 내무부장관, 김준연 법무부 장관 등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대립하였다. 그런 가운데 신중목 의원은 군의 협박과 체포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익희 국회의장의 지원 아래 3월 29일에 열린 제54회 국회 본회의장에서 거창사건의 실체를 폭로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30일 국회는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부의 합동조사단 파견을 결정하였다.(23)

국회조사단은 4월 3일 거창에 도착하여 신원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국회조사단은 ‘위장공비’의 방해로 거창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사건이 나자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나갈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병력을 매복, 배치해 총격을 가하게 했던 것이다. 이때 김종원은 국회의원들이 총을 맞으면 안 된다는 등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미 알려지기 시작한 거창사건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되는 여론의 질타에도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표수리를 거부하며 버티었지만, 외국신문에까지 크게 보도되고 미국 조야의 압박까지 이어지자 경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이런 와중에도 국방·내무·법무의 3부장관을 동시에 경질하는 꼼수를 폈다.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5월 하순부터 거창사건에 대한 헌병사령부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헌병사령부는 사건의 주역인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경 중령을 비롯하여 3대대장 한동석 소령, 대대 정보장교 이종대 소위 등을 구속하는 한편, 최덕신 준장 등 관계자들에 대해 수사하였다. 수사과정에서 최덕신 사단장은 공비를 토벌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 반면, 오익경과 한동석은 작전지역내의 주민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거창사건에 대한 수사는 꼬리자르기로 끝나고 말았다. 학살사건의 최고 책임자는 오익경 9연대장으로, 국회조사단 방해사건은 김종원 계엄사 민사부장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24)

▲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보고서와 문서들

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준장)는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김종대는 무죄였다. 이 재판은 결국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판 과정에서 거창 사건의 학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1년 후 줄줄이 특사로 풀려나 다시 군에 복귀하였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9연대장 오익경은 출소 후 군에 복귀해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0년형을 선고받은 3대대장 한동석 역시 군에 복귀하여 9사단 부관, 수도사단 군수참모, 27사단 부연대장, 육군 첩보부대 교육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5.16 후에는 강릉·원주 시장을 거쳐 보사부 행정서기관으로 영전하는 등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았다. 김종원의 승승장구는 더욱 놀랍다. 김종원은 군에 복귀했다가 경찰로 옮겨가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 총수까지 거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다.(25)

김종원은 1956년 10월 4일에 일어난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재판정에서 ‘할 테면 하라’는 식의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해 세간의 분노를 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석방된 뒤 1964년에 사망했다. 
  
거창과 산청·함양 학살사건의 처리

719명이 학살된 거창 사건은 몇 명의 지휘관이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유죄선고를 받은 소수의 범죄자들조차도 제대로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동안 억울한 죽음을 당한 주민들은 아무런 배·보상도 받지 못했다. 신원도 회복되지 못했고 위령조차 받지 못했다. 원통했던 피해유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은 4.19혁명과 함께였다. 4.19혁명으로 정치상황에 변화하자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나섰고, 학살현장에 있었던 박영보 면장을 살해하는 등 분노를 폭발시켰다. 하지만 5.16쿠데타와 함께 유족들의 진상규명 노력도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 거창사건 희생지 중 하나인 탄량골 희생장소 보존비
▲ 거창사건 추모공원 묘역

거창학살 사건이 사회적으로 다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였다. 1988년 7월 16일 통일민주당의 김동영 의원은 국회에 ‘거창양민학살사건 특별법’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어 11월 7일 ‘거창양민학살 희생자’유족 300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거창특별법 통과를 요구하였다. 1989년 8월 29일 37년만에 처음으로 박산 묘역에서 전국의 주요 인사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9월 19일 ‘거창양민학살사건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입법’이 국회의원 167명의 날인으로 13대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처리되지 못했다. 거창사건특별법이 통과될 경우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요구가 제기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93년 10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김종필 대표에 야당과 합의하여 거창사건 처리하도록 지시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거창사건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처음 거창사건 관련 유족들은 함양·산청 피해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고 거창 피해자만을 대상으로 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동일한 부대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거창사건 등’으로 표현한 법안을 제정함으로써 산청과 함양 피해자들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거창사건특별법에 따라 1996년 5월 11일부터 유족등록을 시작하여 7월 5일에 마감하였다. 1998년부터 거창특별법 심의위원회가 개최되어 거창사건의 경우, 548명의 사망자가 인정되었고, 785명의 유족이 인정되었다. 신청인 가운데 9명은 불인정되었고, 희생자 가운데 162명은 등록하지 않았다.(26) 산청·함양사건의 경우, 386명의 사망자가 인정되었고(산청 292명, 함양 94명), 732명(산청 551명, 함양 181명)의 유족이 인정되었다.(27) 이후 추모공원과 위령탑 건립 사업이 추진되어 2004년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거창군 신원면에 완공되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따로 추진되어 2008년 산청군 금서면에 건립되었다.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모습
▲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모습

한편, 유족들은 국가의 손해배상을 가능하게 할 유족보상특별법 개정을 추진하였으며, 일부 유족들은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거창사건특별법 개정문제는 여러 차례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유족들간의 다른 이해 대립(28), 정부의 거부권 행사 등으로 폐기와 상정을 반복하였다. 2012년 8월 31일 또 다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발의되었지만 해결되지 못하였다. 법안의 개정과 관련하여 정부는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국가재정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그에 따라 국회에서도 계속해서 법안 통과가 보류되었다.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배상 소송에서 2008년 6월 대법원은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 만료를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유족 박차순 등의 가족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부산고법 민사6부는 2012년 11월 25일 유족과 아들 5명에게 ‘1억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29) 이들의 손배청구소송은 2014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도 승소판결을 받았다.(30) 이로써 거창사건 등의 경우 민사재판을 통한 손해배상청구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거창사건 등의 피해자들도 다른 민간인 희생사건들처럼 개별적인 소송을 통해 배상을 청구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범죄행위를 확인하는데 반세기가 걸렸고, 또 다시 손배소송을 벌이며 10년 이상을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이 유족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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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성훈, 『한국전쟁 시기 거창학살 사건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2005, 29쪽

2)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신멸작전(燼滅作戦: 타다가 남은 잔불마저 아예 없애버리라는 뜻)을 수행했는데, 중국에서는 살광(殺光:다 죽여), 소광(燒光:다 태워), 창광(搶光:다 뺏어)의 삼광작전으로 지칭하였다.

3)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 1988, 172~176쪽;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22~523쪽;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2010), 245쪽

4) 한성훈, 위의 논문, 30쪽

5)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4, 1983, 191쪽

6)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작명5호 "전원 총살하라", <오마이뉴스>, 2011.7.14.

7) 백선엽, 『실록지리산』, 고려원, 1992, 309쪽; 한성훈, 위의 논문, 30쪽

8) 동아일보사 편, 『비화 제1공화국』2, 1975, 홍우출판사, 322쪽

9) 동아일보사 편, 위의 책, 323쪽

10) 산청·함양·거창 3개 군 유족회는 이 사건으로 총 1,42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오마이뉴스>, 2011.7.14.)

11) 정희상, “산청·함양 양민도 705명 학살”, <시사저널>, 2006. 5. 17

12)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13)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14) 학살된 사람의 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1960년 국회조사에서는 함양에서 593명, 산청에서 506명이 학살되었다고 파악했다(한성훈, 위의 논문, 33쪽). 또한 4.19 당시 언론은 학살된 수가 442명에서 814명에 이를 것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 1960.5.17; 조선일보, 1960.5.18.).

15)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16)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17)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5), 747쪽;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작명 5호 "전원 총살하라", <오마이뉴스>, 2011.7.14.

18) 특무대 문서철 헌병대 보고서,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민심동요에 대한 조사복명지건」(육군특무부대, 『거창사건 관련자료』, 1951, 396~397쪽);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747쪽 재인용

19) 특무대문서철, 거창경찰서 보고서(1951. 3. 8);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위의 글, <오마이뉴스>, 2011. 7. 14 재인용

20)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21)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위의 글, <오마이뉴스>, 2011. 7. 14

22)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위의 글, <오마이뉴스>, 2011. 7. 14

23) 한성훈, 위의 논문, 45쪽

24) 한성훈, 위의 논문, 56쪽

25) 정희상, 위의 글, <시사저널>, 2006. 5. 17

26) http://www.geochang.go.kr/case/Index.do(거창사건추모공원 홈페이지)

27) http://www.sancheong.go.kr/shchumo/index.do(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홈페이지)

28) 거창단독배상법을 제출하는 등 거창쪽에서 단독으로 처리하려함으로써 갈등이 생겼다. 

29) ‘거창양민학살사건’손해배상 길 열렸다, <경향신문> 2012. 11. 25

30) 거창사건사건추모공원 홈페이지-사건일지/ 전개과정 (http://www.geochang.go.kr/case/Index.do)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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