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이었나. 제대 후 복학한 뒤, 열심히 학점 따기에 매진하고 있을 무렵, 고르바초프가 학교에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연장으로 달려간 기억이 있다. 이미 강연장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당시 고르비는 세계 순회공연이 아닌 강연을 다니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역시 개혁과 개방의 선구자답군!’이라고 감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나라들이나 고르비처럼 ‘같이 사진 찍기 좋은 사람’ 모시기에 바빴을 따름이지.

아무튼 그는 30분 정도의 강연을 했다. 후에 요네하라 씨의 글을 보면 고르비가 현역에 있을 때는 어마어마한 장시간 강연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미 그때는 끈 떨어진 권력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혹은 다른 스케줄이 또 있는지 달랑 30분을 이야기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있다. 동시통역 하시는 분의 매우 불성실해 보이는 통역! 고르비는 나름 긴 호흡으로 말을 했는데, 정작 우리에게 전달되는 문장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것도 상당히 진부하고도 빤한 표현들.

음, 고르비가 달변가라고 했던 것도 다 옛날 이야기였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청중 틈에 끼어 있던 내 옆에, 우연히 러시아어에 식견이 있는 분이 있었던 것. 그리고 그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 정말 통역 뭐같이 하네~”

아하, 통역이 문제였군. 고르비는 자신의 말이 100%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까. 혹은 어차피 와서 돈을 받고 몇 십 분 떠들다 가는 것이니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처음 깨달을 수 있었다. 통역이란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 요네하라 마리, 『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마음산책, 2008. 1. [자료사진 - 통일뉴스]

『러시아 통신』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요네하라 마리 씨와의 두 번째 데이트는 그녀의 첫 작품인 바로 이 책이다. 일본의 러시아어 통역계의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요네하라 씨 역시 ‘햇병아리’시절이 있었음을, 또한 무수히 많은 실수와 좌절을 거듭하며 통역사의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주는 즐겁고도 유쾌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책은 통역과 번역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과 동료들이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통번역의 중요성, 즉 서로 다른 나라의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하지만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하고 있다. 아울러 철저한 프로정신, 장인정신으로 정말 좋은 번역, 통역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모든 갈등과 비극은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저마다 제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가 어떤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지 모르면서, 혹은 이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상대방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란 착각이 전제된 무모함이다.

요네하라 씨는 바로 그러한 소통의 현장에서 양측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때론 미녀가 되어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고 바른 통역을 해야 했고, 때론 추녀가 되어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때론 양측의 소통을 돕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살짝 보태기도 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순간순간마다 미녀와 추녀를 오갈 수밖에 없는 통역사들의 애환을 일반인들은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녀는 평등주의자였다. 모든 언어는 평등하고, 따라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 국가는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약소국의 언어가 후진적이고, 강대국의 언어만이 우수할 수 없다. 저마다의 문화, 역사를 담고 있는 언어는 모두 소중한 것이다. 때문에 세계에 현존하는 6000여개의 언어 중 90% 이상이 장차 모두 사라질 위험에 있음을 그녀는 가슴 아파 했다.

아울러 지나친 영어 몰입교육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영어 편중 풍토에 그녀는 “일본도 미국 문화권 속에 있다.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기 위해서 영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하나 더 배워야 한다”, “미국의 역사적 시점을 무시한 언어의 규제는 성공하지 못한다. 영어 편중은 다양한 시각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영어 편중 현상이야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정신분열증적인 광기에 가까운 영어 조기교육 열풍을 보고 있자면, 여기가 과연 어디인가 궁금할 정도다. 또 일본 아이돌 가수들이 했던 것 그대로 우리 가수들도 노래에 영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이름들도 죄다 정체불명의 영어들이다.

언어의 달인, 요네하라 씨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경계한 것이었다. 갓난아이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부터 배우는 희한한 상황. 그것이 그 아이의 인지구조와 삶의 미래를 어떻게 규정지을지 과연 부모들은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자신들은 자녀들을 위해 최대한의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믿지는 않을까.

언어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것,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그녀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다.

진정한 언어의 달인, 소통의 마법사 그리고 아름다운 글을 많이 남긴 요네하라 마리. 그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오길 바란다. 일본이나 바로 이 땅이나 전 세계 모두 말이다. 소통의 부재와 그로 인한 어이없는 결과 앞에서, 매주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서야 하는, 그야말로 피곤한 우리들에게 요네하라 마리 씨와 같은 소통의 여신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마리 씨와의 다음 데이트는 또 어떤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리적으로 떨어지고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온 나라의 사람들이 다른 문화와 발상법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언어로 표현하면서도 서로 통하는 일… 다른 민족에게 자국 언어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강대국에 영합하여 자국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