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

 

어째 조용하다고 했다. 종편들까지 나서서 박근혜를 비판해대는 상황에서 몇몇 보수논객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사실은 보수가 아닌 수구세력인 자들이 왜 죽은 듯이 있을까 하고 의아했었다. 그런데 역시 그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윤창중이 뻔뻔스럽게도 소위 맞불집회에 나타나서 떠들어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문열이 드디어 망언을 쏟아내었다.

이문열이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을 보니 수구세력(저들은 보수라고 부르지만 전혀 아니다)들이 다급해지기는 한 듯하다. 이문열이 어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는 이제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그 자신이 스스로 여러 가지 발언과 글 그리고 행동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건 그것은 그의 자유이고,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다소 과격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사회에서 하나도 문제될 일이 없다. 글쓴이가 그를, 그의 글을 문제 삼는 것은, 또 문제 삼아야 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진보에 대한 회의와 불신 나아가서는 두려움마저 갖고 있고, 그것은 대중에 대한 불신과 멸시로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그러한 생각이 아무런 여과 없이 교과서 등에 실리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독버섯처럼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이문열 생각의 핵심, ‘대중에 대한 멸시’ 

우리가 그의 글을, 그의 생각을 진정으로 문제 삼아야 하는 까닭을 그의 대표작이면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두 작품을 통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오기는 그 날 내 앞까지의 아이들이 석대를 고발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석대의 나쁜 짓을 까발리고 들춰내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하나는 간절히 석대의 총애를 받기를 원했으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끝내는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그 날 아침까지도 석대 곁에 붙어 그 숱한 나쁜 짓에 그의 손발 노릇을 하던 부류였다. 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느닷없는 그들의 정의감이 미덥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갑작스런 개종자(改宗者)나 극적인 전향 인사(轉向人士)는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 앞에 나서서 설쳐 대면 댈수록, 내가 굳이 석대를 고발하려 들면 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날 끝내 입을 다문 것은 아마도 그런 아이들에 대한 반발로 오기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 눈에는 그 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와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문열의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 일부분이다.  

이 소설은 너무나 유명하고 영화로 되어서 많은 사람이 보았기 때문에 굳이 내용을 설명하지 않겠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작품을 4.19 전후의 시기를 우의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알고 있고, 독재자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이 소설에 대한, 이 소설에 드러난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인용한 부분부터 시작되는 뒷 부분을 보아야 한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6학년이 되어 새로운 선생님이 온 뒤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엄석대가 응징의 대상으로 몰락한 뒤의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선생님이 엄석대의 잘못을 말해 보라고 하자 자기는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한다. 다른 애들이 앞 다투어 석대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과 대조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그 까닭을 말하면서 주인공은 위에서 인용된 말을 덧붙였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아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석대에게 맞붙어 저항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잘못을 고발하지 마라. 그것은 변절과 같은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박근혜를 비판해대고 있는 TV조선, 채널A 등이 변절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 한다면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민족의 대부분은 일제를 고발하지 말아야 한다. 또 박정희 정권에서 살았던 대다수 민중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하면 안 된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제에,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협력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었던 사람 중에서 촛불 집회에 나간다면 이는 변절과 같은 것이다. 이 얼마나 지배자를 위한, 독재자를 위한 논리인가?  

  그런데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그 무효표 2표의 내역이다. 한 표는 틀림없이 석대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한 표는 바로 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곧 여러 혁명에서 보이는 반동(反動)과 동질로 볼 수는 없는 것이, 나는 이미 무너져 내린 석대의 질서에 연연해하거나 그 힘에 향수를 품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담임선생님이 은연중에 불지핀 그 혁명의 열기가 내게도 서서히 번져와, 나도 새로 건설될 우리 반에 다른 아이들 못지않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 우리 반을 이끌 지도자를 선택해야 될 순간이 되자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공부에서건 싸움에서건 또 다른 재능에서건 남보다 나은 아이치고 석대가 받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리시험으로 석대가 그전 담임선생님의 믿음과 총애를 훔치는 걸 돕거나 석대의 보이지 않는 손발이 되어 그의 불의(不義)한 질서가 가차 없이 우리 반을 위압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내가 혼자서 그렇게 힘겹게 석대에게 저항하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도 그들이었고, 갑작스런 반전으로 내가 석대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부러워하거나 시기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렇다고 6학년이면서도 아직 구구(九九)단도 제대로 외지 못하는 돌대가리나 싸움도 하기 전에 눈물부터 보여 앞줄의 꼬맹이들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는 허풍선이를 급장으로 세울 수도 없었다. 그 아침까지도 석대가 보장해 주는 특전에 만족해 있던 나 자신을 내세울 수는 더욱 없고 그래서 정직하게 던진 표가 무효를 가장한 기권표였다.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내 불행한 허무주의는 어쩌면 그때부터 싹튼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주인공은 급장 선거에서 무효표를 던짐으로써 새로운 체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새로운 체제라는 것은 ‘돌대가리’나 ‘허풍선이’가 이끄는 그런 세상이다. 왜 하필 석대를 제외한 사람은 ‘돌대가리’ 아니면 ‘허풍선이’로만 설정될까? 

그것이 바로 이문열이 갖고 있는 생각의 핵심이다. 대중에 대한 멸시, 바로 그것이다. 대중은 멸시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결국 독재자를, 지배자를 옹호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이문열의 생각이다.

그것을 그는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허무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변혁을 ‘낙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변혁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변혁은 ‘돌대가리’나 ‘허풍선이’가 설치는 세상이니까.  

‘대중은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서 움직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대중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대중을 조종하는 그 뒤에 숨은 적에 대한 증오심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또 하나 보자.  

  순한 양처럼 당하고만 있던 제대병들 어디에 그런 광포함과 잔혹성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제대병들은 검은 각반이 일어나면 주먹으로 치고 쓰러지면 짓밟았다. 개중에 어떤 친구는 담뱃불로 지지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검은 각반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둔중한 신음과 함께 그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객차 안 곳곳에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네 명의 운명도 그 검은 각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고만 합시다. 진정들 해요.”
  누군가가 이성을 회복한 듯 동료 제대병들을 만류하러 들었다. 그러나 곧 여럿이 흥분하고 성난 목소리가 그런 호소를 삼켜 버렸다.
  “당신은 속도 없어? 당한 게 분하지도 않아?”
  “이런 악종들은 아예 씨를 말려야 해.”
  제대병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그들을 보며 그는 문득 섬뜩한 상상에 빠졌다. 만약 이 검은 각반들이 죽는다면?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大義)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앙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어떻게든 이들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무참히 묵살당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동료들이 부상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분기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불필요하게 난폭하고 잔인해진 것 또한 만류할 능력은 그에게 없었다.

‘필론의 돼지’라고 하는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소설 역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서 많은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대하는 군인들이 타고 있는 군용 열차 안이다.  

그런데 검은 각반(특수부대를 상징하는 듯하다)을 두른 현역병들이 나타나면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들이 제대병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금품을 갈취하였던 것이다.  

‘백골섬’ 출신이라고 하는 제대병 하나가 저항하는데 처음에 제대병들에게는 마치 그가 영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회유에 동조했다가 어딘가로 끌려가서 초죽음이 되도록 맞고 돌아온다. 그리고는 원칙을 주장하는 제대병 하나가 항거를 하다가 뭇매를 맞는다.  

이로써 사태는 완전히 절망적으로 되어 버린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모습은 드러내지 않은 채 당하고만 있을 것이냐고 선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드디어 제대병들이 행동에 나섰다. 특히 조폭 출신인 듯한 사람의 영웅적인 저항은 많은 제대병들에게 용기가 되고, 마침내 위에 인용된 내용처럼 각반들이 제대병들에게 둘러싸여 얻어터지는 상황이 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문열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문열다운 내용은 바로 위에서 인용한 부분부터이다. 어째서 그는 억눌렸던 대중이 비이성적으로만 행동한다고 보는 것일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본 것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고 검은 각반들과 피를 흘리면서 맞서 싸우는 사람은 조폭 출신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하는 민중을 그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대중을 움직이게 만든 사람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이 쓰였던 1980년을 전후한 시대의 이른바 ‘운동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결국 이문열은 두 작품을 통해서 대중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때는 비이성적인 조폭처럼 행동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필론의 돼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선동에 따라.

이문열이 볼 때 아마 1차 민중총궐기는 대중의 폭력적인 양상이 드러난 것이리라. 2차 이후 평화적인 집회가 되니까 이제는 일사불란하다고 탓을 한다. 그가 뭐라고 하든 결국 대중이 모여서 변화를 모색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아닌 ‘파시스트’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문열의 생각의 핵심은 ‘대중에 대한 멸시’이고, 그것의 귀결로 나타나는 ‘변혁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촛불을 일시에 끄는 장면조차에서도 으스스함을 느낄 정도가 되는 것은 다 이러한 생각의 발현인 것이다. 이전부터 그는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여성운동가들을 폄하하는 소설을 쓰거나, 한일합방이 합법적이었다는 반민족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모두 그의 이런 생각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그의 두 소설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나 조해일의 ‘심리학자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문열이 이 두 소설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하지만 황석영과 조해일의 소설들이 발표 연도가 훨씬 앞서므로 이 소설들을 패러디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 까닭은 이문열의 소설들은 묘하게 이 두 소설들의 제재나 문제의식을 닮았으면서도 뒷부분에 가면 그것을 뒤틀어버린다. 억압자에 대한 ‘선량한 대중들의 저항과 승리’를 억압자에 대한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저항과 난동 그리고 혼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두 작품의 발표 연도이다. ‘필론의 돼지’는 1980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87년이다. 두 작품이 하필 우리 사회의 변혁 열기가 끓어오를 때 발표되었다는 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보아야 할까?  

앞에서도 보았지만 이문열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든, 그리고 그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면 그 본질을 적극적으로 밝혀내서 비판하고, 대중을 향한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노력 역시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이 교과서들을 통해 그의 왜곡된 사상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이 거듭되고, 수구세력들이 그를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중을 멸시하고 변혁을 두려워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파시스트’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파시스트는 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적이다. 파시스트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은 민주사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이문열의 망언은 그 어느 때보다 변혁의 열기가 높아진 지금 자신의 마각을 드러낸 발악인 것이다. 이러할 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글들이 어떠한 해독을 지니는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작가가 파시즘으로 대중을 오염하는 것을 막느냐, 막지 못하느냐의 중차대한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이 기고는 필자의 글 ‘우리들의 일그러진 작가’(통일뉴스 2007.01.13.)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 보완한 글입니다. / 필자 주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