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부채의 중심에 엷은 먹으로 난초를 그리고, 오른쪽 부분에서 왼쪽으로 향해 거칠면서 진하게 지초를 그려 넣었다. 묵란(墨蘭)은 추사가 즐겨 그리던 소재이다. 난은 주로 이파리를 중심으로 그리는데 여기서는 꽃만 그렸다. 또한 마치 꽃이 바람에 날리듯 표현한 것은 향기가 바람에 널리 퍼지는 효과를 만들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지초는 세 개를 그렸다. 지초 위에 지초가 붙어있는 특이한 형상이다. 또한 지초의 머리 부분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게 그렸다.
추사가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남은 먹으로 장난하다”라고 관서(款書)했다.
권돈인은 “백년이 지난다 해도 도(道)는 끊어지지 않고, 만 가지 풀이 모두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쓰고 낙관을 했다. 그리고 훗날 흥선 대원군은 “지초와 난초를 꿰어 차다”라고 쓴다.

▲ 추사 김정희/지란병분(芝蘭並芬)/17.4×67cm/종이에 수묵/19세기/간송미술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추사 김정희가 남은 먹으로 장난하듯 그렸다고 하지만, 친구 권돈인과 이하응의 발문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으레 문인화가 그렇듯이 이 그림 속에도 정치적 사상이나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이 그림은 대략 추사가 활동하던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는 영, 정조의 탕평정치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같은 외척세력이 권력 전반을 장악하는 기형적 정치형태이다.
추사의 부채그림에다 발문을 쓴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세도정치를 척결하기 위해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외척세력이 없는 민비를 고종의 왕후로 맞이한다. 하지만 민비는 성이 같다는 이유로 1000명 이상의 여흥 민씨 일족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면서 세도정치는 극악에 달했고 결국 조선은 망해간다.

사대부(士大夫)는 경학(經學,철학)을 공부하여 내면화하고 자기수양의 통해 인격을 완성한 후에 세상에 나아가 큰 뜻을 펼치는 선비를 말한다.
인종반정 이후 선비들은 학문을 바탕으로 당(黨)을 만들고 세상에 나와 정치를 했다.
선비들의 정치적 신념은 주자성리학이라는 학문에서 나온다. 또한 정치의 목적은 민본정치를 통한 백성들의 태평성대에 있었다.
무엇보다 선비들은 정치와 권력의 부패를 경계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발적 청빈, 유유자적을 추구했고, 관직에 있는 양반들은 사념이나 탐욕을 철저하게 경계하는 청백리(淸白吏)의 가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세도정치에는 선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정치적 신념이 없고 자기수양이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이 단지 친인척이란 이유로 권력을 중심부에 들어왔다. 이들은 그저 개인이나 가문의 욕망을 쫒았고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를 비판한 추사나 권돈인 같은 사람은 역모로 몰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런 시국의 중심에 있던 선비들이 개입된 이 그림에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하겠는가.

지란병분(芝蘭並芬)은 영지(지초)와 란(난초)이 향기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깊은 우정, 변치 않는 관계를 의미하는 지란지교(芝蘭之交)도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난(蘭)은 흔히 문인화의 단골 소재인 매난국죽(梅蘭菊竹)처럼 선비의 풍모나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난(蘭)의 향기는 진하고 오래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초(芝草)에 향기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초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도대체 지초에 붙은 어떤 가치나 상징이 난의 향기와 함께 한다는 말인가.

부채그림에 그려진 형상을 보자면, 지초는 영지를 일컫는다.
상서로운 버섯을 뜻하는 지초(芝草)나 신령한 버섯을 뜻하는 영지(靈芝)는 같은 의미이다. 생김새가 구름을 닮았다하여 운지(雲芝), 신선들이 먹어 장수한다하여 불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십장생도]에는 많은 지초(芝草)가 등장한다.
보통 사람들은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의미를 가진 십장생도를 도교적으로 해석하여 수용한다. 그래서 작품 속의 사슴, 학, 거북, 지초, 바위 따위의 사물들을 장수의 상징으로 규정한다. 그림 속의 동물이나 식물을 먹으면 장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사실, [십장생도] 속의 사물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했지만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 그림 속의 지초(芝草)도 구멍장이버섯에 속하는 영지버섯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현실의 버섯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실제 영지버섯을 비싼 돈을 들여 청탁용 뇌물로, 부모님의 장수 선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 구멍장이버섯에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임상실험 결과는 없다.

아무튼 추사의 그림에서 상징하는 지초는 불로초, 장수와는 별 관련이 없다.
난은 쉽게 꽃을 피우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 번 꽃을 피우면 향이 진하고 오래 간다. 이런 난의 생태적 특성을 오랜 수신, 수양,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아가 올바른 뜻을 펼친다는 선비의 풍모에 비유한 것이다.
지란병분이란 글에서 난초와 지초는 동격이다.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고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난의 역할은 향기이고 지초의 역할은 지조와 절개, 영원성을 뜻한다.
그림의 맥락을 읽자면 추사는 정신적 지주이다. 즉 향기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친구들이나 후학들은 추사의 이상과 학문을 따르고 배반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하는 것이다.
주자성리학이라는 인문학적 관점을 가진 선비들이 지초를 지조와 절개, 영원성 따위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만약 추사 김정희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나 후학들이 지초를 단순히 장수축원으로 해석했다면, 추사의 부채그림은 그저 난세에 한몫 잡아서 떵떵거리며 끼리끼리 잘살겠다는 세도정치의 탐관오리(貪官汚吏)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오재순은 1727(영조 3)∼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왕은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란’ 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명기가 그렸는데 조선의 초상화를 대표할만한 명작이다. 이 초상화의 흉배에는 쌍학이 영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19세기 초반의 추사 김정희는 부채그림을 통해 지초의 상징을 지조와 절개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발문을 쓰거나 감상한 사람들도 이런 상징에 공감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추사 김정희의 정치, 사상적 힘은 대단하다. 추사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면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초의 상징을 증명할 또 다른 그림이 있다.
엄밀히 그림은 아니고 자수공예이다. 바로 조선시대 관복의 흉배(胸背)이다.
흉배에는 학과 사슴, 기린, 표범, 호랑이 따위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해학반도도]를 양식화 시킨 것이다.
문인 관복의 흉배에는 쌍학이 그려져 있는데, 그 학은 영지를 물고 있다.
도교적으로 해석하면, 학은 장수, 출세의 상징이고 영지는 장수의 상징이다. 하지만 고급관리가 이런 상징을 담은 옷을 입고 정치를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출세하여 천년만년 장수하면서 영화를 누리겠다’는 도적떼 같은 상징을 가진 관복을 입고 정치를 했다면 조선은 100년도 되지 않아 망했을 것이다.
오히려 학(鶴)은 태평성대, 신선세계의 상징이고, 영지는 지조와 절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둘의 상징을 합치면 ‘백성을 위한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나 유혹도 이겨내고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불로장생, 부귀영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를 한다지만 정작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일부 권력자의 욕심만 채워지고 있다.
자기희생과 절제가 없는 인문학과 정치는 모두 가짜이다.
또한 반사회적인 부귀영화의 추구와 탐욕은 반드시 자연과 사회의 응징을 받는다.
역사를 통해 얻는 처절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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