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고양 금정굴 사건

경기도에서 일어난 부역혐의자 학살 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고양 금정굴 사건이 있다. 유족들은 9.28 수복 후 고양․파주 일대에서 경찰과 우익단체들에 의해 인민군 점령시기 인민위원회 등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1,000명 이상의 주민들을 불법 연행하여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고양 금정굴(주1)로 끌고 가 처형, 17m 수직굴에 암매장했다고 주장한다.

▲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8자형 삐삐선’
▲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 M1탄피’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사이에 고양과 파주지역에 거주하던 부역혐의자와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집단적으로 총살해 이곳에 매장했는데, 최소 153여구의 유골과 총살시 사용된 M1 탄피 149개, 칼빈 탄피 22개, 연행시 두 손목을 뒤로 돌려 묶는데 사용한 유선전화선(일명 ‘삐삐선’)과 5개의 도장, 희생자 유품 등이 발굴되었다. 탄피 1개를 1명의 희생자와 대응된다고 보고 총 외에 죽창 등도 사용되었으며 발굴당시 분실한 탄피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171명 이상이 학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주2)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했는데 행주지역은 9월 20일, 일산지역은 9월 28일쯤에 국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유엔군의 진격 소식이 들리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잔류국군과 경찰, 대한청년단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패잔인민군 소탕과 부역혐의자 연행에 나섰다. 고양지역에서는 잔류경찰과 함께 반공단체인 태극단이 부역혐의자 체포에 앞장섰다.

이른바 ‘극렬 좌익’들은 대부분 도피하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소극적인 부역가담자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하다가 잡히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남아 있는 가족들이 괴롭힘을 당할 것을 염려해 자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행위가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집에 있다가 연행되었는데, 연행자들은 군경이 아닌 우익치안대들이었다.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은 1차로 거주지와 가까운 지서나 치안대사무실, 임시 유치시설 등에 감금되었다가 지서 경찰관 또는 치안대의 임의적인 조사를 거쳐 고양경찰서 유치장으로 인계되었다. 경찰은 감금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서 가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고, 이 기간 동안 고문과 폭력 행위가 자행되었다. 심한 경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 고문과 폭력의 강도가 거셌고, 두들겨 맞아 다 죽어가는 사람도 생겼다. 치안대는 잡혀오는 사람들을 M1총의 개머리판이나 장작으로 무조건 두들겨 팼으며, 감금된 사람들 중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자기 오줌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산부 한 명과 청년단장과 아는 사이였던 전왈성이 풀려났다. 전왈성이 고문으로 걷지 못하자 대한청년단장 이 아무개는 전왈성의 친구 이신규에게 “업고 가라”고 해서 두 사람은 총살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처럼 이들에 대한 처벌기준이나 근거도 없었고 자의적으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주3)

▲ 고양 금정굴 유해발굴 현장(1995. 9. 30) ⓒ 연합뉴스

1950년 10월 9일부터 고양경찰서 유치장과 임시유치창고 등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금정굴로 끌려가 처형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끌려가는 모습과 집단총살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날 고양경찰서 임시유치창고에서 40여명의 주민들이 경찰과 태극단의 감시 아래 금정굴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오전 11시경 주민들이 끌려오자 산위의 경찰들은 산중턱에 있는 경찰과 태극단원들에게 5명씩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끌려온 주민 다섯 명을 수직굴인 금정굴 벼랑 입구 앞에 꿇어앉힌 후 등 뒤에서 조준사격으로 살해했다. 뒤로 양손이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과 함께 17m 깊이 굴 안으로 떨어졌고, 경찰과 태극단은 금정굴 속으로 흙을 뿌려 시신을 덮었다. 이날 금정굴 학살현장에 있었던 태극단원 이 아무개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래서 금정굴에 갔는데, … (중략) 그렇게 앉혀놨어. 우리는 총 메고 있고. 겨냥할 것도 없지. 가지고 다니는 거니까. 경찰이 먼저 올라갔었던 가봐. 누가 내려오더니 경찰이 다섯 명 데리고 올라오라고. 태극단원들도 몇 올라오라고. 나도 쫓아 올라갔어. 태극단원도  몇 사람 올라갔어. (올라갔더니 경찰이 희생자들에게) 하나 둘 셋 넷 다섯. 꿇어 앉어. 그러더니 경찰관들이 등 뒤에서 쐈거든. 우리는 깜짝 놀랐거든. 문산으로 보낸다더니 여기서 사람을 죽이는구나. 그때 당시 빨갱이는 당연히 죽는 걸로 알았어. 그래서 여기서 살상을 다 해버렸다고. 현장까지 갔으니까. 내 눈깔로 봤으니까. 전화선, 밧줄로 엮어. 확실히 모르겠어. 밧줄은 썩어 없겠지. 삐삐선만 남았겠지.”(주4) 
 
그 후 20여일 동안 금정굴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주민들이 계속 처형되었다. 1950년 10월 9일 사건 후 총살사실을 목격한 희생자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굴속으로 내려가서 시신을 찾았다. 당시 희생자의 아들이었던 이병순은 현장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작은아버님과 함께 반장을 보셨던 동네 어른들 7명과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과 사다리, 마차 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 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와 동네반장 어른, 두 분이 내려가셨습니다. 두 분이 내려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 그 때 이경선씨는 뺨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군요. 작은아버지가 내려갔다 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흙이 조금씩 덮여 있었고요. 비록 시간은 점심때였지만 굴 안은 캄캄했고 비좁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디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어요.”(주5)

이런 와중에서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 이런 기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형이 계속되면서 굴 속에는 시신들이 쌓여갔지만 누구도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기만적인 불법행위자 처리

‘부역자’란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인민군의 통치행위에 협력한 자를 말한다. 1950년 12월 1일에 제정된 「부역행위특별처리법」제1조에서 “본 법은 역도가 침점한 지역에서 그 침점기간 중 역도에게 협력한 자를 처벌함에 있어 특별히 처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으며, 『경찰10년사』에서는 부역자를 “북한 괴뢰의 침공으로 인한 적치 3개월 간에 긍(亘)하여 적에 아부, 혹은 강압으로 부득이 부화뇌동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부역자란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침공으로 인한 적치 3개월동안 인민군의 통치 행위 전반에 협력한 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들은 재판을 통해 행위 사실에 대한 확인과 선별 과정을 통해 그에 해당하는 정도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 고양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골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부역자 처벌법’어디에도 단지 ‘부역자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이로 인해 죽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금정굴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이 가슴에 깊은 한이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 부역 혐의로 연행된 이들 역시 자신이 처벌받을 것으로 생각한 이들은 없었다. 그들 중에는 국군에 의해 수복될 때 피난하기는커녕 국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된 이들도 있었다. 부역혐의 사실 또한 그들이 죽임을 당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그들은 인민군의 강요로 식량을 내주거나 또는 몇 시간씩 보초를 선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자들을 연행하여 총살한 뒤 암매장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 중 피난가지 않고 그대로 고향에 남은 것 역시 사실상의 부역이며 인민군을 환영한 행위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정부가 거짓 방송을 하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고통은 희생된 이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역시 참담할 뿐이었다. 차마 말로 형용하기도 힘든 고통스러운 사연들이 차고 넘친다. 유족들의 운명은 말 그대로 ‘한 많은 지난한 세월’이었다. 학살 사건 이후에도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치안대에 땅과 살림살이 등 재산을 빼앗겨야 했다. 또한 연좌제에 따라 희생자의 자식들은 취업 등에서 심각한 피해를 당했고 늘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 사례들은 희생자들의 부인이 당한 ‘성적 치욕’앞에서는 차라리 무색해질 지경이다.(주6) 

어떤 이는 남편이 금정굴에서 죽임을 당한 후, 강제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치안대원의 첩이 되어야 했다. 이런 사실을 증언한 아들은 사건 당시 불과 6살이었는데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이듬해 돌아가신 후에는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만 했다. 기막힌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치안대 대장이었던 김 아무개는 역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의 부인을 성적으로 괴롭혀 결국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처럼 참담한 고통을 당한 여성들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한 여성은 남편이 죽임을 당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4시경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경찰의 심문 내용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경찰은 자신에게 빨리 재혼을 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남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강요를 받게 되자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 끝내 답변하지 않자 경찰은 다그쳤다. “왜 말 안하냐. 니 자식들 길러 (나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냐. 2주 안으로 팔자 고쳐”라고 하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주7) 정말이지 이들의 행위는 짐승보다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고양 금정굴 사건의 경우 너무나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유족들이 각 기관에 진정을 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금정굴에서의 처형은 마침내 11월 2일 중단되었다. 민간인들이 불법적으로 처형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11월 2일 고양경찰서를 급습하여 이 아무개, 조 아무개 등 치안대원들과 경찰 몇 명을 연행해 갔다. 그러나 당시 고양경찰서장으로서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이무영 서장은 경찰서에 없어서 체포를 면했고, 그 뒤 1951년 1월 25일 징계면직을 당했으나 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 고양 금정굴 사건 현장(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한편, 이때 체포된 이 아무개는 「특별조치령」 위반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1950년 12월 22일 서울지법 강봉제 판사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고 하는데, 대구교도소 자료에서는 수감 사실과 형집행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치안대원의 처벌이유가 ‘부역행위’였던 것은 아마도 경찰주도의 불법처형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주8) 그야말로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기만술책이 아닐 수 없었다.

금정굴 외에도 고양에서는 송포면 구산리, 송포면 덕이리, 벽제변 성석리, 신도면 현천리, 신도면 화전리 등에서 수백 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한강변 등에서 집단학살되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고양경찰서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던 타공결사대, 대한청년단 등의 우익단체로 이루어진 치안대원들이었다. 이들은 고양경찰서 각 지서 부근에 치안대 사무실과 임시 감금 시설을 두고 부역혐의자들을 연행 조사하였으며, 경찰관들의 지휘․감독 또는 묵인 아래 구금자들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 관여한 자들은 경찰관 1명의 지휘 아래 치안대 5~6명이 한 조를 이루어 치안대 활동을 했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서장의 지휘, 명령을 받으면서 이 같은 활동을 벌였다.(주9)

전국에서 발생한 부역자 학살 사건

부역혐의 학살 사건은 인민군에 의해 코너로 몰렸던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 등 수도권으로 진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전 9월 13일 12시 낙동강 전선에서 총 반격명령이 내려졌지만 일시적으로 인민군의 공격은 약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권이 공격권에 들어가자 허리가 끊긴 인민군은 전후방의 지휘․연락체계가 무너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9월 22일 한국군에 ‘무제한 공격’명령이 내려졌으며, 9월 24일부터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도 본격적인 퇴각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남한 전역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부역혐의자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 고양부역혐의 학살사건 희생지 이산포나루터(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조사보고서, 809쪽)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을 보내는 동안 핵심 직위를 차지하고 활동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인민군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며 보조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설마’하면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부역혐의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한국군의 수복 후 부역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위원장, 내무서장, 민청위원장, 여맹위원장 등의 ‘장’자가 붙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식사를 해주고 짐을 날라주고 보초를 서는 등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사람들도 모두 처벌대상이었다. 명망이 높았던 우익인사들로서 인민군 치하에서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협조한 사람들도 처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인민군 점령 하에 있던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부역의심을 받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국군이 수복한 지역에서는 경찰과 반공청년단으로 구성된 치안대 등이 초기부터 부역혐의 주민과 그 가족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조사과정에서는 끊임없이 폭력과 고문이 행사되었다.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하는 주민들도 속출했다. 사적 감정에 따라 보복이 자행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부역의 정도에 따라 A, B, C 등급으로 나눴다고 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살당했다. 경찰과 치안대 등에 의한 학살 사건은 주로 경인과 충청 지역 등 경찰에 의해 치안이 확보된 곳에서 주로 발생했다.

이미 살펴본 고양 금정굴 사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 김포의 경우 김포경찰서에 구금된 600여명의 주민들이 부역혐의 등으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경기 남양주에서도 진접면과 진건면 등에서 1950년 10월 초 부역혐의로 100여명의 주민들이 국군과 치안대에 연행, 살해되었다. 경기도 양평에서도 10월에 강상면, 양서면, 양평면, 용문면 등에서 청년방위대,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경찰에 의해 수백 명의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경기도 여주의 가남면, 금사면, 능서면, 대신면, 북내면, 여주읍, 점동면, 홍천면 등에서 부역혐의로 수백 명의 주민들이 치안대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경기도 평택과 포천 등에서도 경찰과 국군, 치안대에 의해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주10)

강화지역의 부역혐의 학살 사건 장소. 검은 점(∙)은 대표적인 집단희생지인 강화경찰서, 갑곶나루터, 옥개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인화포구, 초지포구, 외포리, 사슬재, 대문고개, 어류정(개학뿌리)을 표시한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권, 615쪽)

강화도의 경우는 강화치안대가 별도로 수사대를 설치하여 부역혐의자 수백 명을 임의연행, 구금하고 심문하였으며, 10월 10일 복귀한 강화경찰은 강화치안대의 협조를 받아 11월 말까지 부역혐의자를 계속 검거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인천형무소, 마산형무소, 대구형무소 등으로 이송되었는데, 일부는 이송과정에서 행방불명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사형, 무기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강화치안대에 의해 연행되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화 나루터 등지에서 학살되었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시신을 바다에 버려 유실되어서 매장도 하지 못했다.

충남 아산에서도 1950년 10월 수복 이후 배방면, 온양면, 신창면 등에서 치안대와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 안동의 일직면, 서후면, 남선면, 와룡면, 남후면, 풍산면, 풍천면 등에서 주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수백 명의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경북 울진에서는 국군, 헌병대, CIC, 경찰 등에 의해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확인된 부역혐의 학살 사건 가운데 단일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는 충산 서산과 태안에서 일어났다. 10월 8일 지역 수복 후 서산경찰서가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합동으로 부역혐의자를 검거, 송치한 뒤 이 가운데 ‘가’급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서산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 등 수십 곳에서 집단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해도 무려 1,865명에 달했다. 보고서는 아마도 희생자가 2,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았다.(주11)

▲ <지도> 김포군 부역혐의 희생사건 발생 위치(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권, 67쪽)

호남지역의 경우, 군경토벌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과 부역혐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군경토벌 작전 가운데 하나로 부역자의 색출과 처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 군경토벌 작전과 무관하게 부역혐의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전남 해남이 있다. 해남에서는 1950년 10월 20일 해남경찰이 대한청년단, 의용소방대 등과 함께 산이면을 수복한 뒤 지서장, 면장, 대한청년단장 등으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 부역혐의자를 색출하여 초송리 지서 옆 창고에 구금했다가 집단 학살했다. 해남에서는 1차 수복 시 처형되지 않은 사람들을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재구금하여 살해했다.

한국군의 즉결처형과 2차 수복시의 학살

그런데 부역혐의 학살 사건은 치안이 확보된 지역에서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부역혐의 학살 사건은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일어났다. 통영 등 경남지역에서는 8월 20일경부터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학살된 사건이 있었다. 통영에서 일어난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부역혐의 학살 사건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8월 19일 국군에 의해 이 지역이 수복된 뒤, 국군, 경찰에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이 집단총살되거나 수장되었다.(주12)

상주, 안동, 울진 등 경북 지역에서는 9월 24일경부터, 경기도 지역은 9월 20일경부터 점령지를 회복한 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인민군 점령지를 회복한 국군들은 인민위원장 등 책임자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졌던 주민들의 경우는 확인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이들의 부역자 처리는 최소한의 조사과정도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일들이 각지에서 일반적으로 이뤄진 것을 보면 아마도 내부적인 지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주13)

▲ 2013년 2월 14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렸던 고양국제학술대회 중 금정굴사건 ppt자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지역의 경우 수복과정에서 일어난 부역혐의 학살 사건은 인천을 비롯하여 고양, 강화, 남양주, 서울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지역에서 주요 가해자들은 한국군 해병대와 17연대 등이었다.

8월 18일과 8월 20일 덕적도와 영흥도에 한국 해군 육전대가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사전정지작업을 펴기 위해서였다. 함포사격의 엄호 아래 상륙한 이들은 인기척이 나면 확인도 하지 않고 마주잡이로 총을 쏘았다. 주민들은 연행한 군인들은 덕적면사무소, 덕적초등학교, 영흥면사무소, 내리초등학교 등에 감금했다가 덕적도 인근 해안가인 먹염과 영흥도 십리포 해안 등지에서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100~150여명이 살해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 희생자 가운데는 남로당의 2인자이자 인민군 점령기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었던 이승엽의 일가족 10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9월 20일 미군이 고양에 진입한 뒤 행주나루로 상륙한 해병대는 치안대가 잡아놓은 인민위원장 황재덕을 그 자리에서 총살했으며, 9월 28일 한국군 해병대와 17연대는 서울시경찰국을 통해 연행한 국민보도연맹원이나 부역혐의자를 서울 장충단에 주둔하면서 즉결처분했다. 강화에서는 장봉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해군 510함정이 연행한 부역혐의 주민들을 직접 총살했으며, 남양주에서도 해병대가 부역혐의자를 경춘선 철로 건널목 부근에서 총살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한국군은 두 방향으로 진격을 했다. 3사단과 수도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한국군 6사단과 8사단은 태백산맥 서쪽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3사단은 북진하면서 울진, 삼척 등지에서 인민위원장 등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또한 수도사단은 영양과 양양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과 자수한 부역혐의자를 총살했다. 8사단은 의성, 안동, 양평 등지에서, 7사단은 예천에서, 6사단은 여주와 원주에서, 독립 제1유격대는 청송, 포항에서 주민들을 학살했다.

한편, 낙동강 북서부 전선에서 방어전투를 치르던 한국군 제1사단은 9월 24일경 경북 상주와 충북지역을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 당시 미1군단의 예비사단이었던 한국군 1사단의 주요 임무는 소탕작전이었다. 1사단 12연대는 상주, 11연대는 괴산과 청주, 15연대는 보은지역을 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총살되었다. 또 낙동강 전선 서남부지역을 담당했던 미2사단과 미25사단은 반격 과정에서 합천, 산청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의 수복작전 과정에서 남해안과 서해안 지역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로 피해가 확인된 곳은 경남 통영과 남해, 충당 당진 등이었다.(주14)

또한 1950년 9월 1차 수복 직후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발생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1950년 11월부터 1951년 3월경 사이에 2차로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인민군의 재점령 때 부역한 혐의로 살해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1차 부역혐의 처리 당시 무혐의로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양사면 철산리 해안. 전쟁이 나면서 개풍, 연백지역으로 북한군, 피난민, 월북자, 납북자와 수많은 UN군 소속 첩보대원들이 이곳을 넘나들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권, 641쪽)

강화도의 경우, 1950년 12월부터 1951년 2월경까지 사이에 우익단체, 치안대, 강화특공대, 경찰 등에 의해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 유제행의 경우 부역혐의로 강화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어 있다가 1951년 1월 18일 강화특공대가 삼산으로 후퇴하면서 난사한 총에 다리를 맞고 살아남았으나 1951년 2월 3일 돌아온 그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 후 유제행의 두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5명이 모두 자신의 집 마당에서 학살되었다. 강화에서는 일가족 전체가 학살되어 멸족이 된 경우도 여럿 있었다.(주15) 

경기 남양주 진접면과 진건면에서는 1950년 10월 1차로 부역혐의자들이 학살된 데 이어서 향토방위대에 의해 12월에 또 다시 229명의 주민들이 진건초등학교 뒷산에서 집단으로 총살당했다. 1950년 12월 23일 합동수사본부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하여 1951년 1월 2일 향도방위대에 대해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제3조 1호와 ‘국방경비법’제32조 위반으로 기소처분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에 대한 재판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처벌을 받지 않고 흐지부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여겨진다.(주16)

충북 음성의 경우에는 1950년 10월경 경찰이 부역자 자술서를 받은 뒤 등급을 분류했으나 이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1951년 1월 6일 이 지역에서 ‘갑’으로 분류된 60여 명을 대소초등학교 앞 개울가에서 총살함으로써 2차 수복 후 부역혐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충남 아산에서도 1950년 10월 1차 부역혐의 학살 사건에 이어 1950년 12월과 1951년 1월에 배방면 등에서 향토방위대와 경찰에 의해 2차로 수백 명의 부역혐의자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경우에도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과 같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임의로 총살하는 것은 전쟁범죄에 해당된다. 더욱이 이들은 적대행위를 하다가 잡힌 현행범이 아니라 가담 정도가 미미한 사람들로서 인민군과 핵심 인사들이 도망간 뒤 남아서 자수하거나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연행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경찰은 물론이고 한국군이 진격하면서 저지른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 사건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학살로서 명백한 전쟁 범죄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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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금정굴은 현재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208-10번지, 즉 황룡산(134.5m)에서 고봉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 74m 야산에 위치한 수직폐광굴이다.

2)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7, 310쪽, 314쪽

3)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24쪽

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27쪽

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28쪽

6) 고상만, “17m 구덩이 속 야만, 금정굴 추모공원으로 잊지 말아야”, <오마이뉴스>, 2012. 10. 1

7) 고상만, 위의 글, <오마이뉴스>, 2012. 10. 1

8)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37쪽

9) 진실화해위원회, 「고양부역혐의 희생사건」,『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49~815쪽 참고

1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33쪽

11)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34쪽;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사건」,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02, 599~818쪽

12)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34쪽

13) 신기철, 『전쟁범죄』, 인권평화연구소, 2015, 201쪽

14) 신기철, 위의 책, 203~214쪽

15) 진실화해위원회, 「강화도(강화도․석모도․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2, 2008, 616~691쪽 참고

16)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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