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함경북도 지역 수해현장. 북한은 이번 홍수를 '해방 후 대재앙'이라며 수해복구에 전념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지난 8월 말부터 9월 2일까지 강타한 태풍 '라이언록'이 북한 함경북도를 휩쓸었다. 수백 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고 6만 8천여 명의 수재민이 거리에 나앉았다. 김정은 시대 사회주의강국의 최전성기를 과시하려 진행된 '200일전투'는 함경북도 수해복구로 목표가 바뀌었다. '해방 후 대재앙'이다.

세계식량기구(WFP)는 북한 주민 14만명을 대상으로 긴급구호에 착수하고 국제적십자사는 수해복구 특별지원금 52만 달러를 투입했다. 유엔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북한 수재민 지원 모금을 호소했다. 

대북 인도지원 민간단체가 대북수해지원 모금운동에 나섰다. 반관.반민 성격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도 수해지원 범국민모금운동을 선언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 주민이 대규모 수해피해를 겪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그간 북한 주민들을 돌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해 온 북한 당국을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대북 수해지원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공이 돌아간다는 발언도 나왔다. 통일정책을 담당하는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의 입에서다. 

국제사회가 50여년 만의 심각한 홍수라며 지원을 호소하지만, 한국은 정작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닌 듯한 모양새다. 인도적 지원은 정치의 후순위인가. 분단이후 남북 정부간 수해지원 60년사를 돌아본다.

1950~60년대, 북한의 수해지원 제의에 '자존심' 세운 남한

1956년 7월 14일부터 24일까지. 남한에 폭우가 내렸다. 사상자 68명, 건물 1만 9백여동 파손 등 약 43억 7천 7백만 환으로 피해액이 집계됐다. 북한 조선적십자사는 27일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홍수이재민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송했다. 미곡 50t, 모포 9만6천 마, 의류 2만 점, 신발 오천 족을 제공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이는 국제적십자사에도 접수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거절했다.

1957년 8월 남한 전역에 홍수가 났다. 같은 달 9일 북한 조선적십자사는 2천만 원(북한돈) 상당의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승만 정부는 또 거절했다.

1959년 9월 16일. 태풍 '사라호'가 들이닥쳤다. 8백여 명 사망, 1만 2천3백여 동 주택 파손 등 약 662억 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북한은 23일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결정 60호를 발표했다. 쌀 3만 석, 직물 1백만 마, 신발 10만 켤레, 시멘트 10만 포대, 목재 150만 재 등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는 세 번째 거부했다.

"이번 태풍 사라호로 입은 풍수해에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은 일종의 선전책이며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괴뢰의 폭정하에 굶주리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63년 6월 20일 태풍 셜리가 남부지방을 강타, 50여 명이 사망하고 건물 6천여 동이 파괴됐다. 북한은 수재민 구제를 위한 백미 10만 석 무상제공을 제의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를 거절했다.

▲ 1984년 북한이 지원한 대남수해지원 쌀.[자료사진-통일뉴스]

1984년 9월 29일. 북한의 수해지원물품 분단선 넘다

1984년 8월 31일부터 4일동안 서울.경기.충청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으면서 서울은 최악의 홍수를 겪었다. 161개 지역 2만 2천5백 가구에 9만 3천8백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초.중.고에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적으로 189명 사망.실종, 35만 1천여명 이재민, 1천333억 원 피해액이 집계됐다.

9월 8일.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재지원을 제의했다. 쌀 5천 석, 천 50 마,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을 구호물자로 보낸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가 '인도주의적 조치'에 협력하고 '동포애적 결정'에 동의하면 차와 배로 직접 실어가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지난 정부와 달리 전두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례적' 단어 그 자체였다. 같은 달 14일부터 29일까지 남북 적십자사 간 논의가 이어졌고,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과 인천항, 북평항에 북한 수재물자가 도착했다.

북한 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kg에서 66kg까지 전달됐다. 묵은 쌀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지만 실향민들은 "쌀을 받고 나니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부는 왜 북한의 수해지원 제의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당시 정치적으로 남북의 골이 깊었다. 머리 위에 핵을 얹고 살 수 없다고 요즘 목소리를 높이지만,  당시는 지금과 차원이 달랐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이 사망했다. 전두환도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북한에 대한 전두환 정부의 감정은 좋지 않은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당시 정부는 "우리가 주기 위해서는 받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배경이 무엇이든, 북한의 수해지원을 수락한 이후, 1984년 남북 경제회담, 1985년 분단 이후 첫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졌고, 그해 10월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와 장세동 안기부장은 밀사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했다. 북한의 수해지원을 받은 일로 남북은 해빙의 물꼬를 텄다.

▲ 2007년 북한으로 보내는 쌀이 군산항에서 선적되고 있다. [사진제공-군산시]

1995년 6월 25일 남한의 수해지원 쌀 분단선 넘다

1995년 북한에 '100년만의 대홍수'가 닥쳤다. 150억 달러의 재산피해와 5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을 예고했다. 북한이 수해지원을 요청하기 전 김영삼 정부는 그해 3월 대북 식량지원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일본에 쌀 공급을 공식 요청하면서, 남측의 대북지원을 받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6월 중국 베이징에서 '대북 곡물제공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됐다.

한국전쟁 발발 45주년 당일인 6월 25일 오후 5시 20분 강원도 동해항 30번 부두에서 쌀 1차분 2천t을 실은 '씨아펙스호'가 북한으로 출항했다. "우리가 주기 위해서는 받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두환 정부의 입장이 이행된 것이다.

씨아펙스호 인공기 게양사건, 삼선비너스호 사진촬영 사건 등으로 대북 쌀지원이 순탄치 않았지만, 10월 7일 정부의 첫 대북 쌀지원은 마무리됐다. 

정부의 첫 대북 쌀지원이 진행되던 때, 북한의 수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북한은 유엔에 수재긴급구호를 요청했고, 유엔 조사단은 수해지역이 전 국토의 75%이며 수해복구를 위해 1천 5백만 달러의 물자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대북 쌀지원과 맞물려 대한적십자사(한적)는 11월 12만 달러 상당의 현물지원을 발표했고, 같은 달 대북 수재구호품이 남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12월 한적은 대북 수재구호용 담요 3천장을 추가로 지원했다. 그리고 민간차원의 대북지원도 함께 시작됐다.

그럼, 정부가 대북 쌀지원을 처음 했을 당시 남북관계는 호시절이었나? 아니다. 북한은 대북지원 쌀이 출항하던 날인 25일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앞서 5월 북한 군 판문점 대표부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을 폐쇄했다. 

당시 공노명 외무부 장관은 처음으로 유엔에서 북한인권을 거론했다. 10월 서부전선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절대 호시절이 아니었다. 물론 김영삼 정부 단 한 차례였지만, 정부차원의 대북 쌀 지원이 이뤄졌다. 그리고 무장공비가 출몰해도 한적은 대북 수해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홍수 피해를 입은 함경북도 회령의 한 마을 [자료사진-통일뉴스]

2000년 이후, 정부의 인도주의는 '정치'에 밀리다

2000년 9월 태풍 '프라피룬', '사오마이' 등으로 북한 함경남도 지역 13개 시.군에 이재민 4만6천여 명이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는 차관 형식으로 그해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쌀 30만t, 옥수수 20만t을 지원했다.

2006년 북한에 폭우가 내려 549명 사망, 295명 실종, 2만 8천 가구 주택이 파손됐다. 1차 북핵 실험 정국 속에 노무현 정부는 차관 형식이 아닌 수해 긴급구호지원 성격으로 쌀 10만t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2010년 북한에 수해가 발생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쌀 5천t, 컵라면 3백만 개, 시멘트 4천t을 지원했다. 남북관계 경색국면이 지속되던 시기지만, 남북 적십자회담이 1년 2개월 만에 열리고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쌀과 시멘트는 더 이상 정부의 대북 지원물품에 포함되지 못했다. 2011년 수해에 초코파이가 지원품목에 등장했다. 북한은 답하지 않았다. 2012년 수해 지원으로 밀가루 1만t, 라면 3백만 개, 의약품 등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정부차원의 대북 수해지원은 중단됐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며, 주민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5차 북핵실험 이후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수해가 대수냐"는 반응이다. 인도주의는 정치논리에 밀렸다.

북한은 '해방 후 대재앙'이라는 함경북도 수해복구에 전념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50~60년만의 심각한 수해라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북한 인권을 다루는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인도주의 지원은 유엔 안보리가 부과한 대북제재에서 제외된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북한을 비난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부메랑이 날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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