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이승만 정권의 좌익 탄압 정책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구조적 배경에는 이승만 정권의 좌익 탄압과 국가보안법 제정, 그리고 국가억압기구 정비를 통한 극우적 반공국가의 구축이 자리 잡고 있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이미 진행 중이던 군부 내의 좌익 척결 작업을 가속화하였고, 동시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반정부 세력을 탄압했다. 나아가 군대, 경찰, 우익청년단과 학생단체 등의 국가무력조직 등을 재편하거나 새로이 창설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국가억압기구들을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 통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한 사회에는 ‘과대반공국가’로 불리는 거대한 반공억압체제가 구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가능케 한 남한의 국가 권력 구조였다.(주1)

▲ 여순사건 당시의 벌교 읍내 모습. 이승만 정권은 여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과 함께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부에 많은 좌익세력이 잠복해 있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좌익색출에 착수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를 위해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공포하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자뿐만 아니라 이에 가입한 자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먼저 좌익색출은 여순사건의 근원지였던 군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9년 1월 10일 완료된 여순사건 관련 숙군(肅軍)의 결과 총 2,817명이 재판을 받았고, 이 중 410명이 사형, 563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가벼운 형을 받거나 석방되었다.(주2) 숙군 작업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1949년 2월부터 11월 사이에 352명이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숙군 과정에서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총 242명의 장교가 파면되고 4,133명의 사병이 불명예제대를 해야 했다.(주3)

군에 이어 학교에서도 진보적인 인사들의 축출 작업이 진행되었다. 1948년 12월 7일 문교부장관은 각급 학교와 각 교육기관에 근무중인 전교직원의 상세한 이력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이력서를 바탕으로 좌익혐의자 또는 반정부혐의자를 해고, 축출하였다. 또한 1948년 9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주요 신문사 7개와 통신사 1개가 폐쇄되었으며,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고 발행인과 편집인들이 추방됐다.(주4)

나아가 1949년 9~10월 사이 전국에서 132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국가보안법이 정한 대통령의 단체해산권에 의해 해산되었다.(주5) 남로당을 비롯한 이른바 좌익 정당 단체들이 법적으로 불법단체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따라서 그 이전에 이뤄진 좌익단체에 대한 탄압은 일제 강점기의 법률이나 미군정의 포고령 등을 적용한 것으로써 엄밀하게 말하면 법적 근거가 취약한 것이었다.

▲ 여순사건 진압과 숙군의 핵심인물들 좌에서 두 번째가 이후락, 네번째가 백선엽, 우에서 두 번째가 김창룡이다.(사진-http://egloos.zum.com/zhukov/v/3776328)

정부의 대대적인 좌익색출 결과, 1948년 9월 4일부터 1949년 4월 30일 사이에 89,710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28,404명이 석방되었으며, 21,606명이 기소되었다. 나머지 29,284명은 내무부 치안국으로 넘겨졌고, 6,985명이 헌병대로 송치되었으며, 1,187명이 미결상태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기소된 사람들 중 80% 이상이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전국의 수용소는 좌익혐의자(반정부혐의자)들로 가득 차 넘치게 되었다. 1948년 12월 17일 법무부 차관의 발언에 따르면 형무소 수용능력이 15,000명인데 비해 수감되어 있는 인원은 4만 명으로 나타났다.(주6)

그러나 수감자가 갑자기 급증함에 따라 대부분의 형무소가 수용능력을 2배 이상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당시 국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수감자의 약 80%는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폭주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수용하기 위해 정부는 1949년 10월 27일 추가로 부천형무소와 영등포형무소를 신설했지만, 이것으로도 늘어나는 수감자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검찰과 법원의 업무도 폭주하여 수사와 재판업무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주7)

이에 따라 정부는 좌익관련자들을 무조건 감옥에 수감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적극적으로 전향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전향자들을 관리ㆍ통제할 수 있는 별도 조직의 창설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의 창설이었다.(주8)

국가보안법 제정과 넘쳐나는 감옥

좌익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었고 70여년 간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주9) 한국 사회의 기본틀을 결정지은 국가보안법도 이때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의 모체가 된 것은 1948년 9월 20일 처음 발의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내란특별법안)이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내란행위의 처벌을 목적으로 발의된 이 법안은 여순사건 직전에는 국회의 휴회로 인해 법안의 기초작업이 중단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10월 19일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며 일으킨 군인봉기가 민중봉기와 결합하여 전면적인 반정부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사고문단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여순사건을 초기에 강경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다. 이에 깜짝 놀란 이승만 정부는 이들 반란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내란특별법안을 수정하여 전문 5개조로 된 국가보안법 초안을 11월 9일 국회 본회의에 제출했다.(주10)

▲ 언론의 국회프락치사건 보도.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 극우반공세력은 국가보안법 제정 등에 반대하고 국회에서 진보적 활동을 펴던 소장개혁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회프락치 사건’을 조작했다.

그러나 이 법안에 대해 많은 의원들이 무고한 민중들을 탄압할 소지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의원들은 정치적 악용의 우려, 일제하의 치안유지법은 이은 반민주악법이라는 이유, 사상에는 사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 법집행기관의 자의적인 남용 가능성 우려, 기존의 다른 처벌법규에 의해 대응이 가능하다는 논리 등을 내세우며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거나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헌영 의원은 국가보안법이 공산당세력뿐만 아니라 선량한 국민과 애국지사까지 탄압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그는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싸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일본놈 시대와 같이 잡아다 물먹이고 ‘이놈 자식이 그랬지’ 하면, ‘예에 그랬습니다.’ 이래서 거기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행동하는 사람은 다 걸려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위험도 있으니까 우리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조남현 의원은 “우리는 공산당을 탄압하자고 만들자고 했지 막연히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가지고 3천만 민중이 무고한 백성들이 걸리는 이 법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손만대에 죄를 우리 자신이 짓고 말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주11)

국가보안법은 국회의원 자신들의 의정활동까지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도각(倒閣: 반대파가 집권 내각을 무너뜨림)의 주장이 이적행위”라고 몰아붙이거나 특별방송을 통해 ‘국회 내에 선동분자가 있어 법률제정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며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다. 또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향한 협박시위와 살해위협이 뒤따르면서 정국은 살얼음판 같았다. 심지어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라는 모략까지 난무하면서 의원들은 한껏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국회의원들은 국회 내의 발언조차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국가보안법 제정에 찬성하는 의원들 사이에서도 법의 악용 위험성을 인정하였다. 김인식 의원은 “우리가 항상 먹고 있는 쌀 가운데에도 쌀알만 인다고 해도 하나둘 돌이 섞일 때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발동시키면 우리 애국자가 그 안에 섞이리라는 이러한 염려도 있겠습니다만”이라고 했고, 박순석 의원은 “농사짓는 농민들은 피를 잘 압니다. 피를 한 포기 뽑자면 나락을 다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를 안 뽑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주12)

그러나 김옥주 의원은 “국가보안법은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이 마당에 … 제국주의 잔재 폐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노일환 의원은 “좌익이 조직적인 투쟁세력을 가지고 호수를 이루듯이 밀어오면 이것을 막을려면 좌익에 지지 않는 민주주의적 입법을 해가지고 민족적 정기를 살려야만 우리 대한민국이 발전해나갈 줄 압니다. 이 법률이야말로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위한 법률이나 진시황의 분서사건이나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며 비판했다.

박해정 의원은 “사상에는 사상을 가지고 극복해야만 되지 완력으로서는 이것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으며, 노일환 의원은 “이 법을 만듦으로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민주주의국가로서 민주화가 되고 좌익을 강압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 정치인은 정치력에 있어서 빈곤한 정도가 아니라 영점이라고 본 의원은 생각합니다”라고 했다.(주13)

국가보안법 제정 후 경찰 등 법집행기관의 자의와 남용에 관한 우려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김옥주 의원은 “과거 40년 동안 우리는 폭압하에 신음하여 왔지만 그 뒤를 이어 군정 3년 동안에 행정의 부패와 민족양심을 이탈하는 폭압적 탈선행위를 한 경찰관의 원한이 우리 민족의 뇌 속에 침투하였던 것이 요번에 공산분자들의 모략에 빠지는 최대의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박윤원 의원은 “이 법이 말단 부문인 경찰의 악질, 친일요소가 제거되지 않는 한 오히려 과거 수십 년 동안 지조를 지킨 진정한 애국자가 영어에서 올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한 박윤원 의원은 국가보안법 제정이 남북통일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면서 국가보안법지 제정되더라도 제1조(주14)만은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국가보안법은 남북통일론의 진전과 통일운동에 결정적인 족쇄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지적은 ‘대단한 선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주15)

▲ 국회프락치사건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국회부의장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의원

이 같은 반대 의원들이 호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12월 1일 공포와 함께 발효되었다. 그런데 이후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한국 사회의 기본틀을 규정짓게 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국가보안법은 너무나 졸속으로 처리되었다. 11월 9일 국회에 법안이 제출된 이래 11월 20일에는 자구수정까지 마친 것이다. 시일이 짧았다는 점 외에도 비상시국을 빌미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국회의원들의 토론 기회가 박탈되거나 부족했으며, 심의기간 중에 법률전문가의 의견제시나 국민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법안의 폐기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향해 “공산당 좌익들에 춤을 추는 것”이라고 매도하였으며 우익단체 등의 암살위협이 뒤따랐을 지경이다. 군대의 반란이라는 국가비상 사태와 위압적인 상황이 맞물리면서 의원들의 자유로운 토론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했던 의원들 대부분이 1949년 6월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주16)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이 법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좌익 인식․처벌의 배후

여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좌익세력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반정부혐의자 전체를 처벌하고 이들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내란행위가 아니라 결사, 집단 구성 자체를 처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수괴와 간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 외에도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까지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 애매하고 포괄적인 규정은 사실상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집단과 개인, 세력을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대상에 포괄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 공안검사로 이름을 떨치며 국민보도연맹 결성에도 핵심 역할을 맡았던 오제도는 『국가보안법실무제요』에서 제1조 규정에 해당하는 단체를 “8.15해방 직후 소위 좌익단체인 남조선노동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조선교육자동맹, 조선민주학생연맹, 전국농민연맹(전농),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조선협동조합중앙연맹, 반일운동자구원회 등의 결사 기타 상기 결사에 가입한 각 부분의 산하단체 또는 동(同) 결사 급(及) 단체의 재건준비와 지원하기 위한 단체”라고 규정하였다.(주17)

이러한 단체에 가입한 후 1949년 12월 1일까지 탈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이후 어떤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가 없어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다. 이렇게 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하게 된다. 국가보안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좌익단체)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한 것이다.

 
 

 

 

 

 

 

 

 

 

 

 

 

 

인천중부경찰서 『요시찰인명부』, 1960. 이 자료는 1960년 인천중부경찰서에서 작성한 것으로 남로당, 인민위원회, 민청 등 각 단체장 및 가입자의 명단이다. 시찰정도를 갑․을로 구분하였으며, 갑에는 전 좌익 일 계층과 중간층, 가족동반 월북자, 월북도피자 중 행방불명 수배자가 포함되며, 을에는 전 좌익 및 중간층, 부역자, 귀순, 특히 시찰을 요하는 자, 납치자가 포함되어 있다. 각각의 분류에 속한 시찰인들에 대한 주소, 성명, 연령, 성별, 주소, 시찰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시찰내용 구분 란에 가입한 단체명이 기입되어 있다.

오제도가 국가보안법 위반 단체로 지목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전평의 경우, 1945년 11월 5일 결성되어 당시에 이미 15개 노조 18만명의 조직원을 거느렸으며, 결성 2개월 후에는 전국에 223개 지부와 1,757개 단위노조에 553,408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민전에 소속된 개별단체만 해도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등 3개 정당과 35개 사회단체에 이르렀다.(주18) 산하 단체 중 전농의 경우 1945년 11월 말 군단위 188개, 면단위 1,745개, 마을단위 2,588개가 조직되었는데 전체 조합원이 3,322,937명에 달했다. 좌익단체들의 주장에 아무리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조직원 숫자가 100만명은 넘어섰을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게 되면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반국가단체는 해방 이후 활동한 전형적인 우익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라고 말할 수 있었다.(주19)

이와 같은 좌익단체(국가보안법 위반) 규정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 사건이라는 초유의 반정부 군인(민중)봉기를 경험한 뒤, 전형적인 우익(극우 반공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세력을 좌익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좌익 인식은 더욱 극단적이었다. 이승만은 여순사건이 진압된 직후인 1948년 11월 5일 담화를 통해 여순항쟁 과정에서 어린아이들까지 좌익의 ‘앞잡이’가 됐으므로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분자(좌익세력)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주20)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이처럼 여순사건 직후부터 대대적인 반정부혐의자 색출과 탄압 작업을 진행한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인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전쟁의 기원 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딘 애치슨(Dean Acheson)과 조지 캐넌(George Kennan)은 내부 위협에 대한 진압을 이승만 정권의 생존능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Litmus paper)로 보았다. 만일 이것이 잘 된다면 미국이 지원하는 봉쇄 또한 잘 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승만 정권은 또 하나의 국민당처럼 취급될 것이다. 굿펠로우(Preston Goodfellow) 대령은 1948년 말,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 ‘게릴라를 조속히 일소해야만 한다. 한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 나약한 정책은 워싱턴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다. 위협을 잘 처리하라. 그러면 한국은 매우 높이 평가를 받을 것이다’라고 이승만에게 말했다.”(주21)

미국은 여순항쟁 진압과 좌익세력 척결을 이승만 정권의 생존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보았다.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한다면 미국의 지원을 계속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처럼 버림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진압과 반정부세력의 척결을 정권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폈다. 1948년 11월부터 본격화되는 제주도의 초토화 작전도 미국이 이런 인식과 압력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의 대대적인 좌익 색출과 탄압으로 1948년 9월 4일부터 1949년 4월 30일 사이에 89,710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21,606명이 기소되었다. 또한 29,284명이 치안국에 넘겨졌고, 6,985명이 헌병대로 송치되었으며, 1,187명이 미결상태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주22) 기소된 사람들 중 80% 이상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전국 형무소는 반정부혐의자들로 넘쳐났다. 1948년 12월 17일 법무부장관에 따르면, 형무소 수용능력은 15,000명인데 비해 수감되어 있는 인원은 4만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재무부는 한국의 21개 교도소 복역자 수를 5만 8천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50~8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주23)

전쟁 직전 국가보안법 제정과 함께 이승만 정부는 반정부혐의자를 좌익으로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좌익색출 작업에 나섬으로써 전형적인 우익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좌익으로 만들었다. 좌익사상과 소지 여부와 상관없는 민간인을 좌익으로 만듦으로써 좌익혐의자가 대량으로 양산되었고, 그에 따라 이승만 정권이 추진하고 있던 좌익전향작업의 대상 또한 급격히 증가하였다.(주24)

좌익사범의 폭주와 국민보도연맹 창립

▲ 울산보도연맹 추모제 모습(진실화해위원회)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폭주하면서 검찰과 법원 업무도 폭주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2월 2일 국가보안법 1차 개정안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 1차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정부참칭, 국가변란 목적의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에 대하여 사형이 가능하도록 한 점, 미수죄의 신설, 외국인이 외국에서 범한 죄라도 이 법의 적용이 가능한 보호주의의 채택, 단심제로의 전환, 교화가 가능한 자에 대한 보도구금소(保導拘禁所) 수용규정 등이었다.(주25)

국가보안법 1차 개정안에서는 최고형을 무기에서 사형으로 더욱 강화했고, 업무의 신속한 처리를 빌미로 단심제를 도입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단 한 번의 판결로 사형까지 가능하게 했다. 단심제와 함께 1차 개정안에서는 보도구금의 규정을 신설하였다. 법원이 적당하다고 판단할 경우 형의 선고유예와 함께 보도소(保導所)에 2년 동안 수용하여 그 기간 중 재범의 우려가 없다고 인정될 때 석방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 규정은 그해 6월 4일 발족된 국민보도연맹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다.(주26)

1949년 9월 16일, 정부는 ‘창설 취의서’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남로당의 멸족정책으로 이상과 같이 탈당전향자가 속출하나 차등 전향자․탈당자를 국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멸사봉공의 길을 열어 줄 포섭기관이 절대로 요청되는 바 여사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나머지 오인은 천학미력을 무릅쓰고 결사보국의 지성 일념에서 감히 전향자 국민보도연맹을 기성(期成)하고자 하는 바이다”(주27)라고 하였다.

간단히 말해 탈당전향자가 속출하지만, 이들을 ‘지도’ 혹은 ‘포섭’할만한 적절한 포섭기관이 없기 때문에 보도연맹을 창설했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표출된 국민보도연맹의 결성 목적은 “전향자를 계몽ㆍ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향자들은 가입 당시 반드시 같이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재한 양심서를 제출해야 했고, 가입 후에도 일년동안 계속해서 자백 내용을 검열받아야 했다.(주28)

▲ 암살당한 김구. 1949년 6월 극우세력의 반동적인 대공세 과정에서 임정 주석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6.25 전쟁통에 풀려나 잔형도 면제받고, 군대도 복직하고, 사업도 번창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과 최후는 비참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은 표면적으로 전향자들로 구성된 좌익전향자단체를 표방했지만, 그 관리와 운영은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 간부들이 맡았으며, 간부 중 좌익 전향자 출신은 간사장과 명예간사장뿐이었다.(주29) 전향자들은 보도연맹 가입 후에도 여전히 감시받았다. 이승만 정부는 전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의 틀에서 이들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를 실시하였다. 결국 보도연맹의 목적은 좌익전향자들을 정부가 관리하는 조직에 소속시켜 이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이들을 활용하여 남아있는 좌익세력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제정을 통해 전형적인 우익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좌익으로 낙인찍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처벌 작업을 벌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실제로는 좌익사상의 소지를 검증받지 않았던 점에서 ‘반정부혐의자’였지만 이승만 정권이 규정한 좌익개념에 따라 명백한 ‘좌익’으로 인식․처벌되었다. 결국 이승만정부의 자의적인 좌익인식에 따라 좌익이 대량으로 양산되었고, 그들이 모두 국민보도연맹 가입 대상이 되면서 보도연맹원의 구성 성분 또한 ‘실질적인 의미의 좌익’보다도 ‘포괄적인 의미의 반정부혐의자’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주30)
 
이승만정권의 국가억압기구 재편 정비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여기에는 이승만 정권의 국가억압기구들이 거의 대부분 동원되었다. 일반적으로 국가억압기구는 상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상명하복식의 조직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이 직접적으로 학살을 수행하게 되는 데에는 전쟁 전 이승만정부에 의해 진행된 국가억압기구의 재편과 창설, 그리고 그에 따른 성격 변화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군대의 경우 경비대 창설 당시 대부분의 간부들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충원되었지만 광복군 출신과 학병․지원병 출신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또 만주군 출신자 중에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숙군 때 처형되기도 하는 등 대부분 제거되었다.(주31)

▲ 반민특위 특별재판 광경

또한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모병을 할 때 신원조회가 없었기 때문에 좌익청년들도 상당수 침투할 수 있었다. 사병들의 경우 대부분 빈농출신으로 좌익투쟁에 가담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소도시와 농촌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경찰의 주목과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비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었다. 따라서 경비대는 정부 수립 전까지는 단일한 세력으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순 사건 이후 군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진행되면서 군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함께 육군정보국에 특별수사과(이후 특무대로 개칭)가 설치되고 그 예하에 15개의 파견대가 조직됨으로써 숙군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특별수사과에는 이미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자들이 결집해 있었으며 숙군작업의 전문수사요원으로 이들 중 수십 명이 발탁되었다.(주32)

이처럼 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전개된 전군 차원의 숙군으로 1950년 6월까지 4차에 걸쳐 전군의 5%에 달하는 4,749명이 좌익계 군인들이 처형․유기형․파면 등의 처벌을 받고 군내부에서 배제되었다.(주33) 하지만 숙군작업이 주로 고문에 의한 자백에 의존하거나 남로당 간부에게서 입수한 명부만을 근거로 수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좌익계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도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다.

숙군 결과 군내부의 남로당 조직이 궤멸되었다. 그러나 숙군이 여순사건과 대구 제6연대 봉기와 같은 군내부의 반란이나 봉기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이승만 세력을 제거하고 강경진압 등의 방법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동족상잔에 반대하는 군인들까지 군 내부에서 완전히 제거했다.(주34)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국가억압기구의 양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군을 친이승만세력으로 완전히 재편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극우반공주의와 억압통치에 반대하고 동족에 대한 무력진압을 거부하는 군내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반정부세력에 대한 살상명령에서 이를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군의 성격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철저한 반공사상을 바탕으로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을 진압하면서 민간인을 직접 살해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추후에도 민간인 학살 명령이 내려질 경우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즉각적으로 그 일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으로 경찰의 경우이다. 정부수립 당시 경찰조직은 군과는 달리 친일경찰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단일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1949년 7~8월 무렵 서울 시내 경찰서장 10명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경기도의 경우는 23명 중 12명이 친일경찰 출신으로 반 이상을 차지했다. 친일경찰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월남자들로 이들은 반공우익청년단체 출신자들이었다.(주35)

친일경찰은 일제시기 극도로 중앙집권화된 상태에서 상명하복 습관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었고, 요주의인물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민간인을 거칠고 야만적으로 다루는 데 정통해 있었다. 이들은 또한 체질적으로 군국주의적, 파쇼적 사고방식에 찌든 자들로서 반공적이고 반혁명적이며 반인민적인 인물들이었다.(주36) 또한 반공단체 출신의 월남자들은 북한 혁명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반공․반북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정부 수립 이후 경찰 내부에서는 군과 달리 약간의 반정부세력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이 경찰은 정부 수립 이전, 그러니까 미군정 시기부터 가장 적극적인 이승만 지지세력이었다. 미군정 시기부터 경찰은 같은 우익진영의 영수인 김구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으나 이승만에 대해서는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던 무렵부터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다. 미군정의 경기도 경찰부장이었던 장택상은 이승만과 경찰의 관계를 태양과 그 주위를 도는 위성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경찰은 선거의 향방을 결정하고 그를 권좌에 계속 있게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친일경찰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옹호하였다.(주37)

▲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 세번째). 헌병대 시절의 사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9월 22일 친일경찰의 핵심인 일제 고등계 출신의 처벌과 공직제한을 명시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경찰조직에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다. 반민법 제정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4일 친일경찰의 핵심인물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과 유철․최연 등 거물급 경찰간부들 체포하였다.

이렇게 경찰조직의 중심세력인 친일경찰들이 입지가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일부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의 활동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헌병대나 방첩대로 옮겨가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1월 27일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을 6명을 불러놓고 노덕술은 경찰의 공로자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또 2월 2일에는 반민특위 활동은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또한 2월 10일 이승만 정부는 공보처 담화를 통해 반민법에 의한 행정부 내 각 기관의 조사를 중지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말하자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고 반민특위 활동을 저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6월 6일 마침내 윤기병 중구경찰서장이 지휘하는 일련의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등의 경찰이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경찰들이 이와 같은 방해와 물리력을 동원한 쿠데타로 9월 5일 반민특위 활동이 사실상 종결됨으로써 경찰조직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개혁 시도가 무산되고 말았다.(주38)

반민법을 통한 경찰조직 내의 친일경찰 출신에 대한 처벌이 실패함으로써 경찰 내부의 극단적인 반공․반북 성향과 친이승만 성향이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나아가 일제 강점기 민중에게 고문과 테러를 일상적으로 자행했던 친일경찰과 미군정기 이래 민중에 대한 테러와 고문․학살을 일삼던 반공청년단 출신들이 경찰조직을 계속 장악함으로써 민중에 대한 테러와 학살은 더욱 일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반민특위 활동을 피해 친일경찰들이 헌병대와 방첩대에 들어감으로써 이들 조직은 군내부에서도 가장 극우적이고 반북 반공적이며 폭압적인 성향을 띤 조직이 되었다.

한청과 청방 등 준군사력의 창설

숙군작업과 반민특위 와해를 통해 양대 물리력인 군과 경찰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철저히 재편한 이승만은 군과 경찰을 보조할 수 있는 준무력기구들을 추가로 창설했다. 먼저, 이승만 정권은 군과 경찰을 보조할 수 있는 조직으로 모든 반공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전국적인 반공청년조직을 창설하고, 이 가운데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5만명의 민병(民兵)을 조직할 계획을 세웠다.(주39)

1948년 12월 19일 기존의 5개 반공청년단이 통합하여 대한청년단(한청)이 결성되었다.(주40) 한청은 선서문에서 ‘이승만 총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공산주의 주구배를 남김없이 말살하기를 맹세한다’고 하여(주41) 이승만의 절대적인 명령 체계 아래서 좌익공격의 선봉대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밝혔다. 한청의 총재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고, 단장에는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신성모가 임명되었다. 또한 외무부장관과 사회부장관까지 최고지도위원에 임명됨으로써 이 조직은 단순한 청년조직이 아니라 이승만을 떠받드는 준국가기관, 준무장력이 되었다.(주42)

또한 이승만 정권은 1949년 4월 8일에는 반공청년단에서 5만 명을 선발하여 민병대 조직으로써 호국군(護國軍)을 창설하였다. 호국군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거주지 연대에 소속되어 각종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 대한청년단 전라남도단부 결성식. 청년방위대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준군사무력 역할을 했다.

 

▲ 학도의용대.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도 학도호국단으로 조직하여 국가동원 역량으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이 이처럼 단일한 반공청년단과 호국군이라는 민병조직을 결성한 것은 여순사건을 겪은 후 민중들의 반정부 활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정권을 방어할 수 있는 추가적인 물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반공청년단체는 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공식적인 국가기구가 아니어서 군과 경찰보다 동원과 활용이 용이했고, 난립하고 있던 사병(私兵)조직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이승만의 전일적인 통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승만 정권은 경찰의 대민사찰활동을 보조하고, 마을단위까지 정권의 민중통제를 지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민보단(民保團)을 조직하였다. 민보단의 전신인 1948년 5.10선거에 대비해 조병옥 경부부장의 제의로 만든 향보단(鄕保團)이다.(주43) 향보단의 대민사찰능력과 대민통제력을 확인한 이승만 정권은 민중통제를 마을 단위까지 확대해 반정부 활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민보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민보단은 전국에 걸쳐 있는 경찰조직을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각 경찰서마다 본단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 마을과 직장마다 분단을 설치하였다. 민보단의 공식임무는 마을의 도난방지, 청소년 선도, 경찰보조역으로서 내부치안 담당이었지만, 실제로는 우익청년단을 중심으로 사찰과 정보수집, 주민 동향 감시를 주된 임무로 하였다. 1949년 민보단원은 4만 명에 이르렀다.(주44)

1949년 6월 30일, 한국에 남아 있던 주한미군 7,500명이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물리적 억제력을 확충하기 위해 9월 5일 상비군 3만명을 늘리고, 기존의 호국군과 민보단을 한청에 합류시켜 20만명의 예비병력인 청년방위대를 육성하기로 계획을 세웠다.(주45)

1950년 3월 15일 청년방위대 편성이 완료되었고 5월 5일 육군본부 직할로 전국의 주요도시에 19개의 청년방위사단을 창설되었다. 6월 10일에는 육군에 청년방위대 고문단(단장 송호성 준장)을 창설하고, 각 단에 현역 소위들을 고문관으로 배치했다. 청년방위대 조직이 완료된 다음 6월 16일 민보단이 공식해체되어 한청에 편입되었다.(주46)

1950년 6월경에 이르러 이승만 정권은 군과 경찰을 제외한 모든 물리력을 대한청년단(한청)과 청년방위대(청방)로 통합함으로써 전국의 각 마을단위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반정부세력화를 방지하며,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반정부세력을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이승만 친위 조직을 확보했다. 과거 민중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일삼던 반공청년단체가 이제 정권의 안전과 반정부혐의자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준정부기구로 합법화됨으로써 테러와 학살은 더욱 합법적으로 일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주47)

▲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 38선을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중앙 중절모 쓴 인물). 그 옆에 대한청년단 단장 겸 국방부장관이었던 신성모가 망원경을 들고 서 있다.

한국 전쟁 발발 직전까지 한청과 청방 등의 재편과 창설을 통해 다양한 정파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지배되던 준군사력을 이승만에 충성하는 단일조직을 통합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국가억압기구 내부에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독단적인 명령체계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가억압기구는 정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명령체계를 통해 하달된 어떠한 명령도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나치 친위대의 존재처럼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군정 시기 이래 민중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일상적으로 수행해왔던 친일경찰과 반공청년단 출신들이 헌병대와 방첩대를 비롯한 군조직과 경찰조직에 대거 충원됨으로써 개별단체 차원에서 발생하던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학살이 공식적인 국가억압기구를 통해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조건들이 보도연맹원에 대한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인 학살을 가능케 만든 하나의 배경이었다. (‘보도연맹 사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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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선호, 「국민보도연맹사건의 과정과 성격」(경희대 석사학위논문, 2002), 4쪽

2) 노영기, 「육군 창설기(1947~1949년)의 숙군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36쪽

3) 노영기, 앞의 논문, 44~46쪽

4) regory Henderson, 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1968; 그레고리 헨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2000, 252쪽

5) 조국,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사상통제법」, 󰡔역사비평󰡕, 1988년 여름호, 332쪽

6) 그레고리 헨더슨, 앞의 책, 252쪽

7)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1󰡕, 역사비평사, 1989, 3쪽

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335쪽

9) 한 나라의 기본을 규정한 것이 헌법이지만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그 위에 군림하면서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와 정치적․사상적 테두리를 결정지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제헌헌법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되고 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여러 차례의 개정 과정을 거치면서 이 헌법 제1조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헌법 제1조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국가보안법의 반공국가로 인식하고 있다.(임영태, 『산골대통령, 한국사회를 지배하다』, 유리창, 2013, 154~155쪽)  

10) 당초 김인식 의원 등에 의하여 제의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내란행위에 대한 것이고 이는 형법상의 내란죄에 의해 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에 여순사건 이후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좌익세력의 조직 결사에 처벌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박원순, 위의 책, 93쪽) 법안은 의원입법 형태로 제출되었지만 정부의 의사가 적극 반영된 것으로써 순수 의원입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11) 박원순 위의 책, 87쪽

12) 박원순 위의 책, 88쪽

13) 박원순 위의 책, 89쪽

14) 국가보안법 제1조는 ‘북한 정권’(또는 ‘반국가단체’)을 겨냥한 것으로써 후에 실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존립근거로 작용했다.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제1조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벌한다.
1.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3.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15) 박원순, 위의 책, 91쪽

16) 1949년 6월, 김약수 등 국회의 소장파 개혁의원 13명이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공작을 한 혐의로 원이 체포된 사건이다.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이문원 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이 외국군(미국, 소련)의 완전철수,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자,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제1공화국 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을 검거했다. 사건은 철저한 보안이 유지된 가운데 조사되었으며, 7개월 후인 11월 17일 첫 공판이 열린 이후 3개월간 심리가 계속되었다. 이들에게는 최고 10년부터 최하 3년까지의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 계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정치범 석방에 의해 모두 풀려났다. 이 사건은 반민특위가 해체당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김구 암살 사건과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개혁세력에 대한 ‘49년 6월 대공세’(혹은 ‘친위쿠데타’로도 불린다)의 계기가 되었다.

17) 김선호, 위의 논문, 5쪽

18) 1946년 2월 15일 민전결성대회에 대의원을 파견하여 민전에 소속하게 된 단체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등 3개 정당과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공산청년동맹, 청년독립동맹, 부녀총동맹, 문학가동맹, 연극동맹, 음악동맹, 미술동맹, 영화동맹, 조선문화협회, 학술원, 과학기술동맹, 조선의사회, 조선약학회, 과학자동맹, 사회과학연구소, 조선산업노동조사소, 보건협회, 산업의학회, 좌익서적출판협회, 조선약제사회, 과학자회, 조선신문기자회, 법학자동맹, 재일본조선인연맹, 협동조합전국연합회, 반일운동구원회, 인민원호, 실업자동맹, 응징사(膺懲士)동맹,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천도교청우당 등이었다.(김남식, 『남로당연구』, 197~198쪽)

19) 김선호, 위의 논문, 5~6쪽

20) 김선호, 위의 논문, 6쪽

21)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 War , Volume Ⅱ :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New Jersey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Chapter8, p285 ; 김선호, 위의 논문, 7쪽 재인용

22) 그레고리 헨더슨, 위의 책, 252쪽

23) 그레고리 헨더슨, 위의 책, 252쪽

24) 김선호, 위의 논문, 8쪽

25) 박원순, 위의 책, 105쪽

26) 박원순, 위의 책, 111쪽

27) <동아일보>, 1949. 4. 23;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336쪽

28)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umeⅡ,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 21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336쪽 재인용

29) 보도연맹 중앙본부의 구성을 보면, 고문 신익희 국회의장 외 24명, 총재 김효석 내무부장관, 부총재 장경근 내무부차관ㆍ백한성 법무부차관ㆍ옥선진 대검찰청차장, 참사관 국방부차관, 참사 국방차관 외 21명, 이사장 김태선 시경찰국장 등 보도연맹의 핵심간부들은 모두 정부 관리였다(<동아일보>, 1949. 6. 6). 보도연맹 간사장은 전 민전 중앙위원 박우천, 명예간사장은 전 근로인민당 상임위원 정백이 맡았다.

30) 김선호, 위의 논문, 9쪽

31) 안진,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 『해방전후사의 인식』3(한길사, 1987), 190쪽

32) 조갑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한길사, 1987), 60~63쪽

33) 안진, 위의 논문, 197쪽

34) 김선호, 위의 논문, 10쪽

35) 임대식, 「친일․친미 경찰의 형성과 분단 활동」, 역사문제연구소 편, 『분단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역사비평사, 1995), 36~37쪽

36)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1(일월서각, 1984), 36쪽

37) 임대식, 위의 논문, 42쪽;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역사비평사, 1996), 137쪽

38) 김선호, 위의 논문, 12쪽

39) 하유식, 「이승만 정권 초기 대한청년단의 조직과 활동」,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1996, 7~8쪽

40) 대한청년단에 통합된 5개 청년단은 국민회청년단, 대동청년다.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 청년조선총동맹 등이었다.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청년단체 통합계획에 반대하며 독자 조직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족청 단장인 이범석에게 강제 해산을 통보함에 따라 1949년 1월 20일 해산 선언과 함께 대한청년단에 통합되었다(하유식, 위의 논문, 15~17쪽).

41)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금문사, 1973), 748쪽

42) 김선호, 위의 논문, 13쪽

43) 5.10단선 반대세력의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만든 향보단은 55세 이하 청장년을 가입대상으로 하여 100만명을 조직 목표로 만들어졌으며, 5.10선거의 성공적인 마무리 후인 1948년 5월 22일 공식 해산되었다.

44) 이태섭,「6.25와 이승만의 민중통제의 실상」,『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134쪽

45)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국방사』1, 1984, 390쪽; 김선호, 위의 논문, 15쪽

46) 김선호, 위의 논문, 15쪽

47) 김선호, 위의 논문,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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