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도冊架圖]는 인문학으로 만드는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여기서 인문학이란 공동체를 향한 인류의 지성을 뜻한다. 조선시대라는 한정된 시공간에 견주어 말한다면, 주자성리학의 학문적 이상이 완성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책가도]는 그림의 연원이 확실하다.
18세기 중국에서는 희귀한 책과 각종 보물을 넣은 장식장이 발전했고, 이것을 그린 [다보격경도]가 유행했다. 이런 그림을 수용하여 책과 책장, 각종 기물을 결합한 조선의 그림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주자성리학이란 학문은 중국과 일본, 조선 모두에게 수용되어 발전했지만 학문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책가도]와 [책거리그림]이 기안되고 발전한 경우는 조선 밖에 없다.

여기에는 학문으로 이상세계, 태평성대를 구현하고자 했던 조선의 건국이념과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정치적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또한 모든 화사(畵事-국가적 미술사업)를 도맡아 담당했던 단원 김홍도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작품이다.

[책가도]는 서양화법인 선원근법과 명암법을 수용한 그림이다.
그래서 책장 속의 사물은 입체감이 생겨 실감나게 느껴진다. 물론 그림 속의 책이나 사물을 진짜라고 여기지는 알았다. 하지만 커다란 화폭에 실감 나게 표현된 책과 각종 기물은 작품의 내용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나타내 선비들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보통 국가나 민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는 첨단 군사무기나 용맹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 금은보화와 같은 보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조선의 핵심 가치를 담은 상징은 대부분 미술작품이었다. 왕을 상징하는 [오봉도]는 생명의 존엄과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한 이상세계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학문의 상징인 책이나 문방구를 표현한 그림을 주요한 국가적 상징으로 삼았다. 문치국가였던 조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문학을 건국과 정치의 전면에 내세운 세계 최초의 그림이라는 탁월함이 있다.

우리그림은 복잡하고 비밀스런 조형원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화면구성이나 조형기법을 사용한다.
[책가도]에는 책장의 특성에 따라 많게는 수 십 개의 단일 공간이 만들어진다. 책장 한 칸만으로도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또한 책장 속이 책이라는 요소가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변화를 주는 것은 책이 아니라 다양한 상징을 가진 사물이다.

[책가도]는 마치 비빔밥 같은 그림이다.
책을 중심으로 상징을 품은 숱한 사물들이 무작위로 결합하고 있다. 사물의 크기, 종류, 개수, 위치나 결합방법에 따른 특별한 원리나 상징은 없다.  
선원근법도 1인칭 원근투시법이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을 따라 시점이 움직이는 확대원근법, 공동체 원근법을 사용한다. 원근법이 적용된 책장에 들어있는 사물은 원근에 따른 왜곡을 최소화했고, 명암법도 특정 시간에 규정되지 않도록 그림자를 배제했다.
사물의 형태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사물에 붙은 상징이 확고하다는 의미이다.

[책가도]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책이다.
책은 [책가도]의 핵심 소재이다. 책장과 다른 사물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존재 할 수 있다. 책은 [책가도] 속의 다른 사물이나 사물에 붙은 상징을 지배하고 떠받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책은 학문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가치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의 책은 유학, 주자성리학, 학문이면서 동시에 인격의 척도, 출세의 수단이기도 했다.

책과 함께 학문을 드러내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벼루, 먹, 붓, 종이, 연적, 낙관, 필통과 같은 문방구이다. 이러한 문방구는 책을 보조하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빼곡히 쌓여있는 책이 검증되어 전래한 학문을 뜻한다면, 문방구는 학문을 하는 수단과 방법, 현실적인 공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책가도]에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사물이 표현되어 있다.
수석, 진달래, 수선화, 생황 따위가 그것이다.
지조와 절개를 뜻하는 사물은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지식인의 실천적 상징이다. 물론 이러한 신념은 학문적 논리와 지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조와 절개는 인간존엄과 학문적 가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그러니까 혹독한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엄을 지키고 대동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의지와 신념인 것이다.
이는 사회적 질서와 규범인 ‘엄격한 예법’과 개인적 수양의 결정체인 ‘자발적 청빈’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셋째, [책가도]에는 도자기, 골동품, 술병과 술잔, 불수감, 수박, 석류 따위의 사물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사물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관련된 상징이 붙어있다.
이것은 수복(壽福)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복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사회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정신적, 물질적 가치’를 뜻한다. 또한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먹고 살기에 넉넉한 물질적 재부, 건강하고 긴 생명을 뜻하는 장수, 다음 세대를 이어줄 많은 젊은이들을 뜻하는 다산,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내는 출세, 자연재해나 불가항력의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벽사, 삶의 활력을 주는 행운 따위는 이상세계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책가도]는 내용과 형식에서 쉽고 명쾌한 그림이다.
모호하게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나 양반, 중인 정도라면 직관적으로 [책가도]의 내용을 알았을 것이다.
책장이라는 현실적이면서 좁은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몰입도가 강하다. 여기에 선원근법과 명암법까지 덧붙여 집중력과 현실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감상자의 시선을 책장 안으로 모은 후에 차근차근하게 설명을 한다.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비나 정치인은 공부를 통해 수양하고 실천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혹시라도 권력을 남용하거나 재물을 탐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태평성대의 꿈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시선은 책장의 여기저기를 훑는다. 
화려하면서 선명한 색상, 세밀하게 그려진 사물, 고급스럽고 이상적인 특성을 가진 다양한 물건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면서 동시에 장식성, 세련미를 높인다. 

[책가도]에는 주자성리학의 핵심가치가 구현되어 있다.
흔히 사단칠정론과 이기(理氣)라고 하는 성리학의 핵심 내용이 사물의 옷을 입고 표현된 것이다. 

▲ 심규섭/유혹/디지털회화/2016.
책과 각종 기물이 들어가 있는 책장에 기댄 아름다운 여선들을 그렸다. 책장의 윗부분에는 태평성대를 뜻하는 복숭아를 넣었다. 그림의 내용은 어렵지 않다. 또한 척 보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태평성대를 추구하고 만드는 일은 비장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즐겁고 기분 좋게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책가도]는 우리그림 중에 가장 빠르게 대중화 된다.
[책가도]는 특정 화가의 그림을 지칭하지 않는다. 책과 각종 사물을 그린 것의 통칭이다. 그러니까 책과 각종 사물을 그리면 [책가도]의 내용과 형식을 충족시킨다는 말이다. 서양화가 개인에 종속되는 것에 반해, 우리그림은 철저히 내용과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개인의 생각이나 정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와 미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차이가 존재한다. 창작가에 따라 작품의 느낌이나 수준도 달라진다. 하지만 기술이나 표현형식이 뛰어나다고 해서 내용이나 형식이 더욱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가도]는 정조나 김홍도를 비롯한 자비대령화원에 의해 의도적으로 창안되고 확장된 지극히 정치적인 그림이다. 그래서 당대에 요구되었던 철학이나 미학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책가도]를 그리지 않았거나 잘못 그렸다는 이유로 궁중화원을 유배 보냈던 사례처럼 정조는 [책가도]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왕이 미술창작에 개입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중적 성공을 이끌어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세월이 훌쩍 흘렀다.
산천이 변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졌다. 세상은 더 넓어지거나 좁아졌다. 고층빌딩 사이로 자동차가 질주하고 대형 상점에는 고급스런 물건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하고 고통을 받는다. 전쟁과 테러가 난무하고 미움과 질투, 음모와 암투가 판을 친다. 생명들은 돈에 의해 계급이 매겨지고 청렴하고 강직한 자는 소외되거나 탄압받는다.
[책가도]에서 꿈꾸던 태평성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만들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책가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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