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54회부터는 남측이 북측과의 협의하에 북측 영토내에 설립한 개성교회, 금강산교회, 신포교회, 금호성당, 평양과기대교회 등 특수목적 교회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 필자 주

 

평양과학기술대학을 가다
      
필자는 2014년 봄,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승리동’에 있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잠시 들른 적이 있다. 광활한 대학 부지는 무려 100만㎡가 되는데 이는 서울 신촌 연세대 캠퍼스(약 85만㎡)보다 더 큰 규모라서 압도당할 정도이다. 학교 측 관계자들은 마침 다음달(2014년 5월)에 열릴 첫 졸업식 행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번 졸업식은 북핵 문제 때문에 남측 인사는 한 명도 방북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으로 세워졌던 KEDO 경수로 공사와 개성공단마저 무력화되는 반(反)통일 반(反)평화적 시대 속에서도, 변함없이 굳건하게 운영되고 있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은 마치 우리나라 통일 아이콘의 최후 보루처럼 느껴졌다. 북측의 교육성(교육부)과 남측의 기독교재단인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 공동 투자해 합작한 평양과학기술대학(이하 평양과기대)은 모든 교수와 재학생들이 캠퍼스 내에서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 때문인지 정문과 본관에는 영어로 ‘Pyongy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PUST)’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2001년 북 당국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진 직후 작성된 계획안에는 2003년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난관으로 인해 2002년 6월 12일 착공식을 해 2009년 9월 16일에 역사적인 준공식을 했고 이듬해인 2010년에서야 첫 입학생을 받았다고 한다. 17동의 독립 건물들이 들어선 캠퍼스는 ‘상상을 뛰어넘는 국제대학(Global University Beyond Imagination)’이라는 모토아래 𔃱. 우리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 북측 사회의 국제화를 위해’, 𔃳. 북측 경제의 자립화를 위해’, ‘4. 학술교류를 통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도모를 위한다’라는 네 가지 설립목적을 두고 있었다.
    
자매학교인 중국 연변과기대와는 별도로 이제 머지않아 나선시(市) 경제특구에도 브랜치(분교)를 열 계획이 있다고 한다. 명실공히 하바드대,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와 같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였으며 이런 당찬 추진력은 미국의 실리콘 밸리와 같은 지식산업 복합단지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방북기간에 북 관료들의 여론을 여기저기 들어보니 북 당국의 전체적인 평가도 평양과기대를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이공계와 동일한 수준의 최상위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비단 내 생각뿐이 아니라 이처럼 북 최고의 인재들이 모였으니 인력과 기술, 정보가 한 장소에 집약되는 지식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 되어 북의 산업화, 상업화에 큰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이처럼 북 경제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은 물론 남북통일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였다.

▲ 평양과기대 교수들과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게스트하우스 건물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과기대 캠퍼스 전경도(청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 2002년 6월 12일 평양과기대 착공식 기념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 2009년 9월 16일(화) 오전 9시 30분, 평양과기대 1단계 건물 준공식과 개교행사. [사진제공 - 최재영]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된 연변과 평양의 과기대
     
남북 합작으로 설립돼 운영 중인 평양과기대는 설립총장이던 김진경 박사(Dr. James Chin-Kyung Kim)가 공동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중국 연변의 과기대 총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이북에서 국제사립대학을 성공시킨 최초의 외국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김 총장은 어떻게 이처럼 국경과 이념의 벽을 넘어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에 기독교 정신의 이념으로 학교를 세울 수 있었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총장에 의해 연변과 평양에 과기대가 세워진 배경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김진경 총장(이하 김 총장)은 서울 보성여고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다 사임하고 돌연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부산 고신대학교 대학부를 설립하고 초대 학부장을 역임하던 중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계획에도 없던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사업에 성공하며 재기한 그는 미국 시민권을 받고 기도하던 중, 중국과 북한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마침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중국에 진출한 그는 학원사업을 벌려 1992년에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속 산업기술훈련학교를 개교했고 이듬해인 1993년에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본과(4년제) 및 전과(2년제)를 정식 개교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1996년 9월, 길림성 정부의 비준을 거쳐 연변대학과 통합해 최초의 중외(中外)합작대학인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연변 과기대)으로 탄생했으며 설립초기 200명의 학생밖에 없던 단과대학이 2015년 말 현재 1700여명 재학생에 300여명의 교직원, 14개 학과를 갖춘 대학으로 성장했다. 이는 중국 전역에 있는 2,600개 대학 가운데 100개 중점 대학 안에 포함되는 것이며,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이자 최초의 해외투자 유치대학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연변과기대의 성공사례를 목격한 북측 당국은 2001년 1월, 연변과기대에 대표단을 보내 견학을 마친 후 평양에도 연변과 똑같은 과학기술대학을 세워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해 결국 평양에도 과기대가 설립하게 된 것이다.

▲ 미국 디트로이트의 어느 한인교회에서 강연하는 김진경 총장. [사진제공 - 최재영]

 

▲ 연변과기대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과기대 건설 현장에서 브리핑하는 김진경 총장.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과기대 전경. 캠퍼스 조성 초창기에 완공된 학교 건물. [사진제공 - 최재영]


여섯 명의 총장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평양과기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 땅에 기독교에서 설립한 대학이 세워졌다는 것은 마치 극과 극이 만나는 양상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강경 사회주의 국가’와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 학자’라는 서로 다른 종자가 결합해서 맺은 열매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총장이 이런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의 원동력은 오직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사랑주의’였다. 그는 평소에도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닌 사랑주의자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기 때문이다.
    
북 당국은 평양과기대 부지를 물색하던 중 최종 결정되자 현장에 있던 개성공단처럼 군사기지까지 철수해 이전할 정도로 평양과기대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2001년 북 당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은 김진경 박사는 북측 교육성과 남측의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당시 이사장 곽선희 목사)을 오가며 양측이 건립 계약을 체결하도록 역할을 했다. 그 후 북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은 지 8년 만인 2009년 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기대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거행되었고 이날 김진경 설립총장을 공동운영 총장으로 임명하는 취임식도 함께 진행했다. 이듬해인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기대 학부와 대학원이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대동강 남쪽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부지 100만㎡ 위에 건축된 17개 동의 신축비용은 김대중 정부 시절 통일협력기금 10억 원과 기독교계의 모금 440억 원 등 총 450여억 원이 투자됐다. 또한 초창기는 미국과 영국, 독일, 중국, 네덜란드 국적의 교수진 47명이 농생명식품공학부, 정통통신공학부, 산업경영학부 등 3개 학과를 가르쳤으며 보건의료학부와 건설공학부가 신설될 예정이었는데 의과대학은 예정대로 2015년 5월에 신설돼 60명의 신입생을 받았다.
    
학사 운영에 대해선 김 총장과 북 교육성이 임명한 북측 총장들이 공동으로 50년간 운영하기로 했으며 개교 전에는 정진호 교수가 설립부총장 역할을 했다. 개교 직후에는 최룡호 관리부총장, 박상익 북측 부총장(과학부), 박찬모 명예총장(챈슬러), 김진경 총장, 허광일 북측총장, 김혁환 학사부총장 등 여섯 명의 총장체제로 출범했다.
   
김 총장과 허광일 총장은 공동총장이며 두 총장이 쌍두마차로 학교를 이끄는 시스템이지만 대외적인 역할과 교내 핵심적인 메인 역할은 김 총장이 역할을 했다. 2016년 현재는 남측(대외 측)의 김 총장과 북측(자국 측)의 박상익 총장이 공동총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전유택 총괄 부총장이 운영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평양과기대는 여섯 명의 총장 팀 체제로 꾸려지고 있었다.
   
또한 초창기에는 평양과기대 설립을 위한 이사회가 조직되었으며 4명의 설립위원회 이사진을 살펴보면 당시 연변과기대 총장인 김진경 박사와 라이스 대학 총장 출신인 미국인 맬컴 길리스(Malcolm Gillis), 포스텍(포항공대) 총장이었던 박찬모, 고려대 총장이었던 김정배 박사(현 국사편찬위원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측 교육 당국은 남측 교수를 비롯한 해외 교수 임명권과 연구개발센터 등 산학협동단지의 조성 운영권을 모두 김 총장에게 부여했으며 전반적인 과학기술 관련 분야 학사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 현지의 다른 대학들처럼 평양과기대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세로로 적힌 ‘영생탑’이 세워져 있고 김일성, 김정일 사상 연구실이 별도로 구비되어 있다. 재학생들은 사상 연구실을 단체로 찾아와 주기적으로 혁명사상 교육을 받고 있으며, 2014년 5월에 개최된 첫 졸업식에는 졸업증서와 함께 나눠 준 성적증명서에 44개 과목을 수료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는데, 전체 이수과목 중 3개 과목은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혁명사 과목이었다. 
 

▲ 북측 교육성 전극만 부상(장관)으로부터 총장 임명장을 받는 김진경 박사(2009.9.16.). [사진제공 - 최재영]

 

▲ 좌측부터 최룡호 관리부총장, 박상익 북측부총장(과학부), 박찬모 명예총장(챈슬러), 김진경 총장, 허광일 북측총장, 김혁환 학사부총장 등 개교 직후의 6인 총장체제의 회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재학생들의 하루 일정과 기숙사 생활
     
평양과기대 입학생 선발과정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원산경제대학, 원산농업대학, 희천공업대학, 함흥공업대학과 같은 중앙과 지방의 좋은 대학에서 1년 혹은 2년간 공부한 학생 중에서 전공과목 성적이 우수하고 영어 실력이 출중한 학생을 낙점하며 필기와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한다.
     
대학생은 매년 100명을, 대학원생은 30명 내외를 뽑으며 입학하자마자 학부 대학생은 1년간, 대학원생은 6개월간 영어공부만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대학생들은 영어공부 결과에 따라 영어 성적에 의해 반 편성을 달리 하며 모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영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놓고 학우들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있어 대부분 밤잠을 줄여가며 하루 3-4시간밖에 안 자면서 공부에 열중한다.
    
재학생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을 하며 하루 4교시 강의 수업이 있다. 1교시는 1시간 반이며 휴식시간은 15분이다. 이런 식으로 오전에 2교시, 오후에 2교시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기숙사 생활을 통해 매일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고 건물 안에 대중목욕탕도 있어 매일 샤워를 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한다. 기숙사 배치는 대학생은 네 명씩, 대학원생은 두 명씩 룸메이트가 되어 한 방을 쓴다.
   
그 동안 여학생 전용 기숙사가 없어 여학생은 선발하지 못했는데 2015년 3월부터 10명의 여학생이 입학했다고 한다. 150명의 신입생 중 10명을 여학생으로 받았는데 여학생 10명 모두 북의 최고 영재학교인 ‘평양 제1고등중학교’졸업생이다. 앞으로 여학생 수를 계속 늘리려고 기숙사 2개 층을 여학생 전용으로 바꿨으며 장기적으로 여학생 기숙사 건물 한 동을 따로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더 많은 여성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인력 규모를 늘린다는 취지에 북 당국도 공감하고 있다.
     
식사시간표는 아침은 6시 반부터 학교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점심은 12시, 저녁은 오후 6시 반이다. 전반적으로 식량이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하루 세 끼 식사가 잘 나오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식사는 뷔페식이며 식판에 각자 자기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자가 배식을 하며 메뉴는 따뜻한 쌀밥과 세 가지 반찬과 국이 기본적으로 나온다.  
     
매 끼니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 등 900여명의 대식구가 식당으로 몰려드는데 이런 대식구를 감당하려면 하루 식비로 지출되는 재정이 미화 4천 달러가 지출 된다고 한다. 한 달 일정의 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안락하고 편리한 복지시설 때문에 집에 안가고 학교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도 간혹 있으며 학교 측은 학생들을 배려해 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가는 학생들에게 쌀 25㎏씩 보내준다.

▲ 학부생 기숙사 룸 시설. 대학생은 네 명씩, 대학원생은 두 명씩 룸메이트가 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대열에 맞춰 식당으로 이동하는 학생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학생들과 교수들이 식판에 먹을 만큼 자가배식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교수들과 대화하며 식사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 좌측은 박찬모 명예총장. [사진제공 - 최재영]

 

▲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개교 직후의 컴퓨터실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인터넷 사용도 가능한 캠퍼스생활
    
중앙과 지방의 대학 학부과정 1-2년을 마친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선발되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는 평양과기대는 캠퍼스에서 영어로만 대화하고 영어로 강의를 듣기 때문에 영어는 필수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영어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학부생들은 1년 동안 문법 위주에서 탈피해 기술영어(Technical English) 위주로 배워 그 전공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배운다.
    
반면 대학원 학생들은 6개월 동안 영어만 배운 후에 전공과목을 배우기 시작한다. 개교 당시 대학원 학생들은 토플시험을 치렀으며 학부생들은 배치시험(Placement exam)을 치렀다. 배치시험은 영어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반을 편성하기 위해 학교 측에서 만든 시험제도이다. 그 결과 컴퓨터 공학부 대학원생 두 명과 전자과 학생 한 명 등 모두 세 명이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네 명은 중국 연변 과기대로 연수를 떠났다. 영국은 1년 동안의 유학기간에 석사학위를 받고 오는 것이고 연변과기대는 6개월 동안 연수만 받고 오는 것이다.
     
평양과기대의 전자컴퓨터공학대학은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 산업자동화 학과가 있는데 교육과정은 미국 MIT나 UC버클리와 유사하며 이론과 실제를 중요시해 응용 위주 교육을 하고 있다. 평양과기대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은 중국에서 만든 기기들이 대부분이며 제품들 중에서 학교 측과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품은 미국의 델컴퓨터이다. 그리고 주로 교수들이 외국에서 사용하다 가지고 온 제품을 활용하기도 하며 데스크탑은 펜티엄보다 속도가 약간 빠른 ‘아이3’을 사용했다.
    
북은 국내망(인트라넷)과 국제망(인터넷)으로 구분하는데 일반 인민들은 국내망만 사용할 수 있고 평양과기대 재학생들은 일반 국제 인터넷망을 사용할 수 있다. 도서관에 가면 학생전용 컴퓨터 30대가 설치돼 있는데 이곳에서만 국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아무 때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학부 대학생들은 졸업논문을 쓰는 2개월 동안만 구글과 유튜브, 위키피디아 등과 접속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또한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에게 서구 사회의 신용카드를 경험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매달 1인당 미화 10달러 상당의 교내 사용 현금카드(직불카드)를 지급하고 있었다. 일반 북 주민들이 평균적으로 받는 월급을 감안하면 평양과기대 학생들이 학교 측으로부터 지급받는 10달러짜리 현금카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재학생들 중에서 모범 학생들로 분류되는 모범 그룹은 기숙사에서 자정이 넘도록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며 이들은 한 달 정도 되는 봄 방학과 겨울 방학 때만 집으로 귀가해 가족들과 지낸다.

북측 재학생들 대상의 채플(예배)은 없다
      
평양 과기대는 설립 이래 지금까지 재학생이나 북측 교수들을 대상으로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혹은 주일예배에 참여하도록 시도한 적이 없다. 원래 채플이란 미션스쿨에서 지역교회의 예배당이 아닌 학교 캠퍼스나 별도의 예배장소에서 실시하는 예배를 의미하는데 채플은 지역교회가 매주 드리는 주일예배와는 달리 주중이나 평일에만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아울러 채플은 경우에 따라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 모여 성경의 교훈을 통해 기독교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배움으로 각자의 사명을 자각하고 인격적 변화를 이루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과목이다. 그러나 원래 평양과기대 설립 모금운동을 할 때의 취지는 학생들이 기독교적 정신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적 삶을 배울 수 있는 기독교 대학의 기능을 지닌 학부, 대학원을 설립한다고 홍보했다. 미션대학은 학생과 교수, 교직원을 하나의 복음적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본래의 설립 취지이다.
     
그러나 막상 개교한 이후에는 북의 특수한 정치 체제와 강력한 이데올로기 정서에 의해 학생들의 강의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에 종교적인 채플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평양과기대는 북의 정치 환경이나 체제에 변화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한 북 사회의 경제 발전과 미래 세대의 풍요를 위함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채플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신 외국 국적을 포함한 모든 교수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로 선발됐는데 이중에는 기독교 목회자는 물론 장로, 집사 등의 직분자들이 많았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 신자들인 이들은 그리스도적 삶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애쓰는 모습들이었다. 평소 교수들은 명쾌한 강의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적 삶을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하는 것으로 채플을 대신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북측 교수들과 재학생을 상대로 행해지는 기독교식 예배는 드릴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의 표정은 매우 밝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다. 반면 사상적으로는 철저하게 무장돼 있으며 이미 다른 유명 대학의 학부에서 2년을 마치고 입학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이미 주체사상에 대한 이론과 논리가 생활 속에 체화된 상태에 있다.

외부교수들과 학생들은 종교적인 대화보다는 주로 학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학생들이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기본적으로 두 명의 학생이 동시에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사적인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인 일대일 접촉 상황은 가급적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개교 초창기에 비해 최근에 입학한 학생들은 훨씬 발랄하고 질문도 많이 해 북 전체의 변화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 평양봉수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해 특송을 부르는 김 총장과 외국인 교수 일행.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양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한 필자(맨 좌측)와 김진경 총장(맨 우측). [사진제공 - 최재영]


종교적 발언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뿜는 교수들
     
외국 국적의 교수들은 월급이나 연봉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재능기부식의 자원 봉사로 헌신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교수들은 무보수로 일을 하며 단지 학교 측에서는 교수들의 체류기간에 숙식만을 제공한다. 교수들 전원이 외국 국적의 기독교 신자들인데 이중에는 한국계 외국인도 꽤 있다. 기독교의 희생정신과 사랑이 없으면 이런 사역을 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북 당국에서는 남측의 교수들을 원하지만 아직도 5䞔대북제재 조치가 풀리지 않아 현재 남측 교수는 한 명도 없다.
     
2010년 10월 개교 당시 교직원은 20명이었으나 지금은 135명으로 늘었으며 이중 외국 국적 교수는 총장과 명예총장을 포함해 80명이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30여개 국가에서 왔다. 교수는 크게 전공과목 교수와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 교수로 나눈다. 전공과목 교수는 다수가 박사학위 소지자이나 외국어 교수는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도 있다.
      
평양과기대는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로 남측과 해외교회들은 물론 기업과 대학 등에서 헌금과 후원을 보내줘 운영된다. 특히 초창기에는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본 한인교회 (Vaughan Community Church) 에서 많은 투자를 했으며 이 때문에 본 교회는 매년 초청교수 형식으로 교인들 중 전현직 대학교수들이 평양과기대를 방문해 강의하고 돌아간다.
     
캠퍼스에는 교수 아파트가 있는데 박찬모 명예총장의 숙소는 아파트 5층이고 김진경 총장 숙소는 3층이며 교수들의 식사는 공평하게 학생들과 같이 먹는다. 교수들의 숙소에는 미국의 CNN 방송을 시청할 수 있으며 퇴근 후에도 강의안을 준비하는 등 연구에 몰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한인교수들은 주중에는 일찍 일어나 교수 숙소를 빠져나와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해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주일에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고 있다.
     
김 총장과 박찬모 명예총장은 남측과 해외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후원자와 자매결연을 모집하는데 이미 포항공대, 고려대, 카이스트대, 건국대, 강원대 등과 학술교류를 맺었다. 모르긴 해도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에서는 어렵겠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된다면 교환학생도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교수들은 캠퍼스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북측 재학생이나 교직원들에게 전도를 한다거나 성경을 가르칠 수는 없지만 명강의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과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독교 정신으로 수업에 임하고 있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교회’터전에 세워진 캠퍼스
     
2002년 6월부터 시작된 평양과기대 캠퍼스 부지조성 터파기 공사장에는 인부들에 의해 종탑을 비롯한 교회 유물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대동강변에서 살해당한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혹은 순교)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토마스 목사 기념교회당’이 있던 터전이었다. 1927년 5월 7일, 토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창립된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전도회’라는 단체에서 기존의 평양 대동강변의 ‘조왕리 교회’를 ‘토마스 기념교회’로 변경했고, 1933년에는 그의 묘소 가까운 곳에 토마스의 이름 영문 첫 자를 따서 ‘T자형’교회당을 신축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평양과기대 자리였다.
     
원래 ‘조왕리 교회’는 1901년 3월 1일 ‘평안남도 대동군 남곶면 조왕리’에 세워졌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평양시 낙랑구역 두단동’이며 그 부근 ‘승리동’에 세워진 평양과기대 신축 공사 현장에서 이 ‘토마스 기념교회당’터가 발견된 것이다. 그 후 캠퍼스가 완공되어 100만㎡의 대지 위에 1단계로 본부동, 학사동, 종합생활관, 기숙사, R&D센터 등 총 17개 동의 건물들을 완공했다.
     
그 건물들 중 게스트하우스 1층에 있는 예배당(채플룸)에는 매주일 기독교 예배를 드린다. 물론 북측 재학생들과 북측 교수들은 참석하지 않는다. 모두 외국 국적의 교수들과 교직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특별히 대학교회당이 별도로 건축된 것은 아니지만 게스트하우스 예배당에는 매주일 80-100여명이 자연스럽게 모여 예배를 드린다.
    
또한 게스트하우스의 넓은 예배공간에는 주일예배뿐 아니라 매일 새벽마다 30-40여 명 정도가 모여 새벽예배도 드린다. 새벽예배는 주로 한국교회의 예배문화이기 때문에 외국교수들은 참석률이 저조하고 주로 외국국적의 한인 교수들과 가족들 위주로 참석을 하며 설교와 찬송 등 한국말로 드려진다.

매주 아침 9시 30분, 게스트하우스 주일예배
     
학교 방침상 재학생 대상의 채플은 드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수들과 그의 가족들마저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들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문제는 개교 당시부터 북측 당국과 공식적으로 상호 협의해 승인된 부분이라서 아무런 부담과 문제는 없다.
     
교수들은 매주일 아침이면 삼삼오오 게스트하우스에 모여들며 예배를 준비한다. 9시부터 준비찬양과 기도를 시작하며 9시 30분에 정식으로 예배가 시작된다. 교수들 중에는 목사와 장로, 집사 등이 있고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다. 교수들의 부인들이나 가족들도 함께 체류하기 때문에 이들도 예배에 참석한다. 이처럼 교수들끼리 자유롭게 예배 모임을 갖는 것에 대해 북측 당국은 어떠한 제재나 통제를 하지 않는다.
     
그 동안 개교 초창기 주일예배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인도하며 설교했는데 주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어 파트 교수인 센 폴터(Sen Porter)가 고정적으로 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매주 교수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를 담당한다. 센 폴터 교수의 부친은 전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목회자이며 폴터 교수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영어와 한국어가 유창하다.
    
주일예배는 예배시간 전부터 찬양과 기도로 뜨겁고 열정적인 분위기에서 영어로 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말로 진행되기도 한다.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이나 특수한 행사에는 성만찬식도 거행된다. 현재 주일예배 참석 인원은 매주 평균 80-100명이 예배를 드리며 게스트하우스에서 드리는 자체 예배 외에도 한 달에 두 차례나 혹은 격주 간격으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외부예배를 나가기도 한다. 외부 예배란 봉수교회나 칠골교회로 주일예배를 참석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특히 김 총장은 여러 외국인 교수들을 이끌고 오전 10시 정각에 드리는 평양봉수교회나 칠골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예배시간에는 교수들과 함께 강단 앞으로 나와 특별찬송을 부르거나 강단 위에 올라 간증이나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어왔다.

▲ 평양과기대 캠퍼스 공사현장에서 해방 전 세워진 토마스목사순교기념교회 종탑 유물들이 발굴됐다. 사진은 해방 전의 ‘토마스목사순교기념교회당’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재학생들의 해외 유학과 취업을 통한 국제교류
     
현재 연간 약 70억 원에 이르는 운영 재원은 정부 및 민간 차원의 지원으로 이뤄지며 특히 교회와 신자들의 지원이 대부분이다. 설립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10억 원을 지원받았으나 5䞔조치 후 남측 정부의 지원은 중단된 상태다. 현재는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단체가 지원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비용이 바로 900여 명이 하루 세끼를 먹는 식대와 17개 건물 동의 난방비다. 그러나 이런 재정확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양과기대는 그 동안 2011년과 2013년, 그리고 2015년 총 세 차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1차 학술대회 때는 노벨상을 수상(2003년)한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인 피터 아그레 박사가 참석해 이른바 ‘노벨상 강의(Nobel Prize Lecture)’를 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학문적인 것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2차 대회 때는 전직 미국 우주인 데이비드 힐머스 박사와 영국 저명한 신경학자 닉 스콜딩 교수가 기조강연을 했다.
     
또한 학생들은 외국 견학도 자주 가는데 주로 가까운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의 대련공대나 IBM, GE, DELL 등에 방문한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문화 충격을 받기도 한다. 유학의 길도 자유롭게 열려 있는데 어떤 학생은 스웨덴으로 유학을 갈 때 유명한 국제 메신저인 ‘스카이프’로 면접을 보기도 했다.
   
평양과기대에 입학할 때는 전국에 있는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하는데 당과 군 간부 아들도 있지만 지방의 일반 수재들도 들어온다. 이때 대학 측은 학생들에게 공장이나 농장에서 수습 과정을 경험할 기회도 제공하는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 진출하는 기회가 많아지도록 한다. 특히 약 60명의 대학원 학생들은 전원이 일정 기간 해외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
     
2015년 6월에는 학생 3명이 브라질대학 경영대학원(MBA) 코스를 밟기 위해 유학을 떠났는데 영국 캠브리지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 MBA에 유학한 전례가 있지만 브라질대학 MBA 과정 입학은 드문 경우였다. 세계 유명 대학들은 평양과기대 출신 대학원생들의 학구열과 근면을 높이 사고 있으며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초월해 경제문제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다고 한다. 과거 영국 웨스터민스터대학에 유학 간 어느 학생은 서구의 금융을 배우기 위해서 은행에 취직했으며 돈 버는 것에 대해 굉장한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대학원생들은 1년 안팎으로 유럽과 중국, 남미 등의 대학에서 유학을 경험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당초 입학 목적대로 그들이 북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돌아온다. 최근 석사 과정을 마친 어느 학생은 스위스에서 클라우드 컴퓨팅을 공부하고 있으며 박사과정을 거친 어떤 학생은 벌써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필자가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빠져나올 때 바로 옆 좌석에는 7명의 남녀 고등중학생들이 빨간 마후라를 착용한 교복을 입은 채 인솔교사와 함께 여행 중에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해보니 학생들은 국비로 한 달간 프랑스로 수학여행을 가는 길이라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첫 회 졸업식과 의과대학 설립
    
2010년 10월 개교하며 신입생을 받은 평양과기대는 2014년 5월 21일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사원(석사과정) 졸업식에선 정보통신과 산업경영, 농업식품공학 등 3개 분야에서 44 명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2014년 가을 졸업식에는 4년 과정을 마친 학사 학위자 100명을 졸업시키려고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졸업식 해당학생은 99명으로 확정됐으며 이중 22명이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수상자 22명은 내각 교육위원회가 발급한 상장을 박상익 부총장으로부터 수여받았다.
     
이처럼 학부생 100명, 대학원생 50명으로 출발한 평양과기대는 2013년 초 학부생이 300명, 대학원생 76명으로 증가했다. 첫 졸업생을 배출한 졸업식 행사와 동시에 평양과기대 의과대학동 건축을 위한 기공식 첫 삽도 떴다. 그 후 필자가 확인한 결과 2015년 9월 1일 가을학기에는 치과와 보건과 신입생을 각 30명씩을 받아 60명의 의사 후보생들이 강의를 듣기 시작했는데 선발된 신입생 60명은 이미 다른 대학교 의대에서 4년간 전공을 마친 학생들이었다.

의과와 약학과, 간호과 등 나머지 3개도 2016년 가을학기(9월)에 모집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간호과만 4년제 학부 과정이며, 나머지는 모두 3년제 대학원 과정이다. 2015년 12월 현재 전체 학부생은 500명, 대학원생은 90명가량으로 늘었다. 이로써 학부 중심의 북 의료교육 체계를 대학원 중심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됐으며 의대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고 한다.
    
북 당국은 평양과기대가 의과대학을 개설하자 유명한 김만유병원과 평양구강종합병원을 평양과기대 측에 제공했다. 김만유병원이 위치한 거리는 평양산원, 평양고려의학과학원, 조용기심장병원 등 유명한 병원들이 밀집한 거리로 알려진 곳에 있다. 이미 김만유병원은 ‘평양과학기술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이라는 새 간판을 걸고 평양과기대 의대생들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 제1회 졸업식을 맞이한 평양과기대 학부 학생들이 단상에서 졸업장을 받는 모습(2014.5.21.). [사진제공 - 최재영]

 

▲ 제1회 평양과기대 졸업식 장면(2014.5.21.). [사진제공 - 최재영]

 

▲ 졸업식을 마치고 의과대학 부지에서 의대 기공식을 하는 장면(2014.5.21.). [사진제공 - 최재영]

 

▲ 의과대학 기공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현장에 참석한 학생들의 모습이 진지하다(2014.5.21.).  [사진제공 - 최재영]


모든 장벽을 허물고 남북 협력의 메카가 되기를
    
박찬모 박사나 김진경 박사는 평양과기대에서 해킹을 가르친다는 보수세력들의 주장들이 모두 근거 없는 낭설들이라고 일축한다. 그 근거로는 현재 평양과기대 학부는 전자컴퓨터공학부, 농업생명과학부, 국제금융경영학부로 구성돼 있는데 오래 전부터 대북제재 조치가 발효된 상황에서 해킹 교육은 불가능하다. 특히 미국 정부(상무성)의 대북제재 목록은 무려 3000여 종이나 되는데 이 가운데 전자, 컴퓨터, 통신, 정보보안 등은 평양과기대에도 해당되는 것이며 이 분야의 장비는 도입될 수도 없고 직접 가르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대체로 이북의 일반 학교의 연구 시설이나 장비 상황은 충분하지 않지만 SW 기술은 선진국 수준이다. 북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측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두 배가 될 정도로 수학교육에 치중한다. 소학교 3학년부터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며 영재학교나 인재 양성 프로그램들도 매우 우수하다. 컴퓨터는 돈만 있으면 북 주민들과 학생들은 누구나 다 살 수 있다. 레노버나 에이서, HP 등 다양한 브랜드의 PC를 고를 수 있으며 인텔의 최신 칩셋인 ‘i7’CPU를 탑재한 PC도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며 북 자체 기술로 제작한 내국인용 태블릿 PC에는 교과서가 전자책으로 탑재돼 있을 정도다.
    
특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취임 이후 과학기술자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으며 당 정에서는 IT인재 양성, 전민과학기술 인재화, 과학화, 정보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필자가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를 방문했을 때 함경도 청진에서도 김책공대와 김일성공대의 수업을 원격으로 듣는 것을 직접 확인한 적이 있다. 최근 조성된 미래과학자거리와 과학기술전당도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자는 북 최고지도자의 변화의 의지를 담고 있으며 지금까지 내각에서 주도하는 석박사 학위는 관리제도에서 탈피해 모든 대학에서는 첨단과학기술인재들을 키워낼 수 있도록 석사, 박사 학위제도를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뽀로로’와 ‘게으른 고양이 딩가’를 남북합작으로 다시 만드는 날까지
    
필자의 판단에는 남과 북이 IT 분야와 SW 분야에서 사로 협력하면 경쟁력 있는 우수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01년 1월 23일 남측의 (주)하나로통신과 북측의 삼천리총회사가 3D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게으른 고양이 딩가’를 공동제작하기로 계약을 맺은 후 지금까지 이 만화영화는 국내외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당시 평양에 세워진 1천여 평 규모의 삼천리하나로센터에는 남측의 실무 제작진이 체류하며 힘을 합쳐 공동으로 제작하지 않았는가?
    
또한 전 세계 어린이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뽀로로’는 남측의 아이코닉스가 기획하고 북측의 삼천리총회사가 2002년에 공동개발 한 남북합작품이다. 당시 남북합작 ‘뽀롱뽀롱 뽀로로’제작됐고 뽀로로 1기 5분짜리 52편 중 22편이 북에서 제작됐다. 1기 때 캐릭터를 함께 개발했으나 남북관계 영향으로 2기부터는 북측이 합류하지 못했다. 
    
이처럼 평양과기대는 남북이 합작해 탄생한 대학으로서 이제는 남북 IT협력의 주춧돌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남북 IT 분야의 차이점을 보면 남측은 HW와 반도체 메모리에 역점을 뒀으나 북측은 HW보다 SW 분야에 주력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과 기계번역, 의학 관련 SW에 치중해왔다. 이처럼 응용 SW와 운용체계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북은 남과 손을 잡고 IT기반 융복합과 여러 가지 기술통합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또한 남측의 기업들은 중국 연변지역에 다양한 IT기업들을 설립해 평양의 과기대 졸업생을 취업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며 평양과기대를 통한 남북 교류 협력을 통해 적대적인 남북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를 기원해 본다. (계속)

▲ 2001년 남북 최초의 합작 애니메이션 ‘게으른 고양이 딩가’캐릭터. [사진제공 - 최재영]

 

▲ 2002년 남북 합작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애니메이션 ‘뽀로로’캐릭터. [사진제공 - 최재영]


(수정2, 3일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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