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54회부터는 남측이 북측과의 협의하에 북측 영토내에 설립한 개성교회, 금강산교회, 신포교회, 금호성당, 평양과기대교회 등 특수목적 교회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 필자 주


소떼를 이끌고 국경을 넘은 용기와 결단
     
금강산은 태백산맥 북부에 있는 세계적 명산으로 행정구역상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2개 군에 걸쳐 뻗어있으며 계절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설봉산)이라 부르는 등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린다. 최고봉인 비로봉의 높이는 l,638m, 동서 40km, 남북 60km의 광대한 산맥으로 형성된 북측 영토에 속해 있는 산이다.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명산인 금강산이 국토의 분단을 안타까워했는지 지난 10년간 금강산 관광으로 남북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금강산 관광은 남북이 함께 손잡고 일하며, 함께 살아갈 통일 조국의 미래를 미리 경험하며 그날을 위해 개척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으며 통일된 우리 민족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금강산 관광특구는 5.24조치 이후에도 관광 목적 외에 간혹 남북장관급 회담, 남북 종교인 회담,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합과 협력, 대화 채널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9년 1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북을 첫 방문한 이후 금강산 관광 및 시베리아 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고 이후 10여년 후인 l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떼몰이 방북을 성사시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1998년 11월 18일은 역사적인 현대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며 현대아산 금강산사업본부가 문을 열었다. 또한 현대 아산측은 북 정부로부터 50년간 임대받은 온정리 인근 2천만 평 일대에 각종 관광시설을 건설하며 타운을 형성하며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비록 이윤추구도 병행하는 프로젝트였지만 정주영 회장은 특유의 애국심을 발판으로 통일지향적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갔으며 그의 의지는 결국 단절된 남과 북의 길을 트고 왕래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소 떼를 끌고 국경을 넘은 그의 뱃장과 기상천외한 발상은 분단의 현실 상황에서 볼 때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었으며 이후 금강산 호텔 개관, 금강산 골프장 착공, 신계사 대웅전 낙성, 이산가족 면회소, 옥류관 비치호텔, 온정각 동관과 서관, 외금강 호텔, 화진포 아산휴게소 개관 등으로 발전되어 왔다.
     
또한 매우 예민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 명산인 금강산에는 천상의 아름다움 속에 자리 잡은 금강산 신계사가 재건되어 남측의 조계종 소속 승려가 상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아산 직원들이 거주하는 금강산 빌리지 영내에는 작은 규모의 금강산교회당이 세워져 예배와 각종 종교행사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객들의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며 왕성하게 사업을 벌이던 도중에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2008년 7월 11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사건으로 이틀 후인 13일 오후 3시 30분부터 현대아산 직원들과 일반 관광객들에 대한 전원 철수조치가 내려졌고 결국 금강산 관광 사업 10년 만에 모든 사업은 전격 중단되어 2016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화해무드에서 본격적인 냉전 상황으로 급선회했고 이어 2010년 3월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인한 이명박 정부의 5.24대북 제재조치로 인해 모든 남북교류 사업은 전면 중단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로 인해 현대아산은 적자일로에 접어들어 현재는 비상경영체제로 지탱하고 있으며 아울러 금강산교회도 자동 폐쇄된 상태이고 각종 예배와 기도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활동들과 교회운영도 2016년 현재까지 모두 중단된 상태에 있다.
 

▲ 십자가 네온사인을 설치한 금강산교회당 야경. 현대 아산 직원들의 업무 특성상 밤 9시 30분에 주일예배를 드린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십자가 네온사인이 없었던 초창기 금강산교회당 모습. 출입문 왼쪽에 교회 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금강산교회 설립을 주도한 최인식 현대 아산 호텔사업본부장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금강산 품안에 세워진 금강산교회를 가다
       
필자는 2006년 7월 금강산을 가기 위해 아침 7시 서울 숙소에서 집합장소로 출발해 그날 밤 7시가 넘어서야 금강산 광광 특구인 온정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강산 관광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온정각까지의 여정은 특수한 외국을 방문하는 것보다 힘들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버스를 타고 거의 5시간을 넘게 달려 고성에 있는 금강산콘도에 가서 월경을 위한 수속을 밟아야 했으나 수속하는 시간에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금강산 관광객에게 발급하는 임시 여권과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카드, 관람권, 관광버스와 숙소 이용권 등의 서류를 받아 주머니에 넣거나 목걸이로 걸고 다시 버스에 탑승한 후 또 다시 버스는 쏜살같이 달려 접경지역인 통일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해 승객들은 출입국관리소에서 핸드폰과 고성능 카메라(일반 카메라는 제외), 통신장비 등을 보관시켜야 했다. 짐, 서류 등의  보안검사를 받고 출국신고를 마친 후 다시 엄격한 통제와 관리를 받으며 금강산 관광 전용버스를 타고 민통선을 지나 남방 한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 안에 말뚝으로 표시된 국경을 넘은 후 다시 북방 한계선을 거처 북 영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방 한계선을 넘는 동안 관광조장(가이드)은 “비자용지를 훼손하면 안 되며 만일 물 한 방울 적시거나 점 하나를 찍는 낙서도 해서는 안 됩니다. 버스 이동 중에는 절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으니 카메라를 모두 가방에 넣으시기 바랍니다”라는 주의사항을 입이 마르도록 반복했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온 군인들에 의해 점검을 받고 규정된 월경시간을 기다려 20대가 넘는 관광버스는 현대가 건설한 관광도로를 달려 관광 특구인 온정리로 향했다. 
      
북측 국경을 넘기 위한 출입국 절차와 금강산 관광의 총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온정각(溫情閣)으로 가는 여정은 그 어떤 머나먼 외국여행보다 힘들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으며 금강산 관광 여행과 금강산교회 방문은 지난 50년간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르게 살아왔는가를 확인한 여행이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피곤한 것도 잠시, 얼핏 보아도 금강산의 절경과 산악미가 주는 감탄사는 보는 이들을 압도해 짜증스런 생각도 모두 떨쳐버리게 하며 이내 금강 삼매경에 빠지게 했다. 외금강 산맥은 그 기세가 장엄하고 기발하며 특히 온정리에서 남쪽방향으로 보이는 풍경은 깎아지른 듯한 산등선과 절벽 등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펼쳐져 스스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체류 중에는 온정리 호텔에서 차를 타고 약 15분쯤 이동하여 장전항 근처에 있는 현대 아산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지역인 ‘금강 빌리지’에 도착하면 ‘금강산교회’가 보인다. 교회가 세워진 배경에는 현대 아산 직원들 중에 기독교 신자들로만 구성된 신우회가 주축 되어 성사됐으며 교회 조직과 운영도 회원들 중심으로 꾸려졌다. 그러나 더 깊은 이면에는 생전의 정주영 회장의 종교관과 사내의 종교 자유에 대한 배려에도 기인한다. 정 회장은 세계적인 사업가 이전에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 혹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기독교를 신봉했다. 정 회장은 임종 직전까지 기독교 신앙인이었기에 평소 그의 삶과 유지를 받들었던 최인식 호텔사업본부장을 비롯해 현대 아산 신우회원들이 교회를 세우는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생전의 정 회장은 1980년대 초부터 매년 현대그룹 사옥 지하에서 거행된 연말 행사장 의 공개석상에서 “나는 유년시절 강원도 통천 고향 마을의 교회를 다녔으며 주일학교도 빠짐없이 다녔다”며 진행을 맡은 이동진 목사(그리스도인닷컴 대표)에게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정 회장의 다섯째 동생인 정신영 동아일보 기자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독일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하자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제수 장정자 여사(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배려해 장정자 권사가 다니는 서울 정동교회에 온 가족을 이끌고 함께 출석하기도 했다. 또한 정 회장은 2001년, 임종을 앞둔 서너 달 전에 불편한 몸으로 아들 정몽준 의원 내외와 주치의 최 모 박사 등이 배석한 가운데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바 있다.

3개월 만에 건축한 예배당은 매주 100명 이상 참석
       
당시 금강산 내에는 현대 아산직원과 협력업체, 계열사, 조선족 동포들을 비롯한 약 4백 명 가량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모든 직원들은 장전항 인근의 금강빌리지라는 이름의 컨테이너로 꾸며진 제법 깨끗한 거주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퇴근 후에는 빌리지 구내에 세워진 교회당에 모여 직원들끼리 모여 기도회나 성경공부를 한다거나 친교와 화합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매일 드리는 새벽예배를 비롯해 수요예배나 주일예배도 정기적으로 드려왔던 것이다. 
     
‘금강산교회’라는 명칭으로 설립된 이 교회는 초교파로 운영되었으며 현대아산 신우회원과 일반 협력업체 직원들의 직장 예배처소로 세워졌으며 점차 관광객과 여행객들도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교회부지의 행정구역상 주소는 조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금강빌리지 내 금강산교회’이다. 예배당 규모는 대형 컨테이너와 가건물을 증축한 건물로서 100석 규모의 좌석을 구비했으며 시행처는 ‘현대아산 신우회’, 시공과 건축은 인천 남동구 만수동에 위치한 설비전문회사 ‘서해’에서 맡아 2004년 6월에 공사를 시작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고 곧바로 입당했다.
     
공식적인 담임목회자는 없으나 외부 목회자 초청, 부흥회와 각종 행사 집회, 자체 내 평신도 설교자(장로) 지정 등으로 예배에는 지장이 없이 운영되었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등의 집회 시간은  평일과 주말 구분이 없는 직원들의 업무 특성상 모든 일과를 마친 밤 9시 30분에 모여 시작했으며 설립 초창기는 매주 50-60명의 인원이 예배에 참석했으며 점차 알려진 이후로는 100여 명이 참석해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직원들은 업무 특성상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단체 방문객과 관광객들을 상대하며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본국에 있는 가족들과는 직통 전화조차 되지 않는 고립된 지역에서 일하는 애로사항 등을 안고 근무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발생한 스트레스와 격무, 고립감 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이런 모든 어려움들을 이곳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풀며 위안을 삼고 힘을 얻고 있었다.
 

▲ 북측 금강산 관광 특구 입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온정각 입구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외금강호텔 모습.[사진제공 - 최재영]


현대아산 직장 신우회의 금강산 첫 예배
      
‘금강산교회’의 설립과정을 알아보니 1998년 현대아산 금강산사업본부가 문을 연 이래 2002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금강산교회에서 현대아산 직장 신우회 첫 공식 예배가 드려졌다고 한다. 그 동안 2년간 목회자 없이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려왔던 것이다. 그 후 2004년 중순에 접어들면서 건축을 시작했으며 그해 가을에 접어들어 교회당이 완공됐다.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정적인 계기는 2001년 2월 19-22일까지 거행된 ‘금강산 땅밟기 기도회’와 세미나였다.
      
이 행사는 당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국민일보사에서 주최했고 한기총의 통일선교대학과 크리스챤대학신문이 합류했는데 진행은 전적으로 보수 기독교 측에서 사흘간 주도했다. 소위 ‘제1회 금강산 땅밟기 기도회’를 북측 지역 내 금강산에서 개최하도록 북측 당국이 허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이는 북측의 공식 협조 아래 개최된 개신교 최초의 금강산 지역 종교 행사였다. 아무튼 금강산 현지에서 기독교 기도회와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남북 종교 교류에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북측 당국의 협조아래 아무런 제재와 통제 없이 상당히 자유스런 분위기속에 드려진 ‘금강산 땅 밟기 기도회’는 박영률 목사가 단장을 맡아 금강산 해금강과 온정각, 구룡폭포에서 3차례에 걸쳐 실행됐으며 이날 참석한 150여명의 신자들은 열정적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세미나에는 김의환 박사, 한화룡 박사, 이방석 박사가 통일과 북한선교에 관한 세미나를 인도했고, 한기총 선교국장 박신호 목사가 평화통일기도회를, 조기연 교육부장이 총괄 진행했다.
     
이 행사는 목사와 평신도, 유아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분이 골고루 참여한 행사가 되었으며 그 이후 다시 한기총의 주도로 남측교회와 디아스포라 한인교회가 연합해 그 해 5월 말경에 개최하려던 ‘제2회 금강산 땅 밟기 기도회’는 북측의 불허로 추진되지 못했다. 현대 아산 신우회는 이런 행사들에 힘입어 금강산에서의 첫 예배와 교회건축, 정기예배 개설을 추진했으며 이를 통한 직원들과 관광객들의 신앙생활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금강산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모습. 십자가 네온사인을 부착해 교회당 표시를 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예배 직전에 기념 촬영한 성가대원들. 우측에 교회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교회에서 단체로 관광을 왔다가 주일예배를 마친 후 기념촬영하는 신자들과 목회자. [사진제공 - 최재영]


금강산교회에서 첫 부흥회가 개최되다
     
또한 지난 2004년 10월 7일 밤 9시에는 금강빌리지에 위치한 금강산교회에서 통일조국의 비전을 안고 부흥성회가 열렸다고 한다. 주로 현대아산 직원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 빌리지 타운에 유명한 부흥사가 와서 집회를 하게 된 것이다. 빌리지 구내에서 예배와 함께 찬송과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는 감격을 맞이했는데 첫 부흥회 강사는 다름 아닌 뉴라이트의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였다.
     
신우회는 지난 2002년부터 2년 동안 80여명의 신우회 회원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렸지만 이처럼 목회자를 초청해 예배를 드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날 이후 금강산교회는 모 장로가 설교자로 결정돼 정기적인 예배가 정착됐고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단체, 기관들의 연이은 방문행사를 활발하게 개최했다.
    
특히 2007년 2월 6일에는 금강산교회당에서 행사를 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 주최로 신경하 감독회장을 비롯해 19명의 목회자를 비롯해 모두 40여명이 참가해 북 주민 거주지역에서 평화기원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온정리 마을에 전해주기 위해 연탄난로 125대를 북 인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다.

또한 2007년 6월 4-6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전광표 목사)는 북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위원장 강영섭 목사)과 함께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제4회 남북교회 금강산 기도회 및 성가제’를 개최했는데 남측 교회대표 200여명과 북측 교회대표 10여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금강산교회와 관광특구는 남북교류의 장으로 점차 활용되기 시작했다.

▲ 하프 연주 찬양단이 특별 찬양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주일예배에서 성가대가 찬양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현대아산 신우회원들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일반 관광객들이 수요예배를 드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금강산교회의 구체적인 운영실태
      
2006년 7월 당시 금강산교회당 내부는 100여개의 좌석을 갖추고 빔 프로젝트 시설과 음향시설은 물론 피아노를 비롯한 밴드 시설까지 갖췄다. 건물 외곽 지붕에는 십자가 종탑은 없었으나 출입구 정문위에는 십자가 네온사인 표식은 설치했으며 입구 좌측엔 소형 교회 간판이 부착되어 있고 입구 우측엔 세로로 제작된 교호 목간판을 달았다.
       
금강산교회가 활성화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현지 현대아산 금강산사업소의 고위급 직책을 가진 인사들의 신심과 신우회원들의 열정과 추진력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담임목회자나 전담사역자는 없고, 설교담당은 어느 장로가 맡았으며 교회 조직은 6명의 봉사자(정·부회계, 정·부서기, 정·부총무)가 선임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등록 신자는 모두 140여 명이지만 매주 100명 내외의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보통𧅤여개의 좌석에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며 실제 예배를 드리는 인원은 관광객들이 참석할 경우 100명이 훌쩍 넘어 출입문 밖에 의자를 놓거나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교회 교구조직은 모두 9구역으로 편성되었고, 구역별로 구역장과 부구역장이 있었으며. 구역은 직장 또는 업무 부서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1구역은 ‘온천팀, 온천빌리지, 관광공사’,  2구역은 ‘판매팀’, 3구역은 ‘차량, 자재, 정비팀 T/L팀’식이었다.
     
매 주일마다 4쪽 분량의 주보를 발간하고 있었고, 주보에는 예배 순서와 간단한 교회 소식 등이 있다. 어떤 관광객이든지 교회의 위치와 예배 시간을 알고 찾아올 경우에는 예배 참여가 가능하나 현지 직원들만으로도 좌석 여유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부러 관광객에게 예배참석을 권유하거나 홍보할 입장은 아니었다.  
     
주일이나 주중 예배의 분위기는 거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경건하면서도 은혜가 넘치는 것이 느껴지며 설교와 대표기도 혹은 특송이나 찬양 등의 순서들이 매우 수준 높게 진행되었다. 교회 특성상 방문객 신자들이 예배 순서에 동참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참석해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난했다.
    

▲ 세례식에 참여한 세례 대상자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여성 신자가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교회 출석한지 1년 된 초신자들이 학습예식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교회를 방문한 신자들에게 금강산 관광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현대아산 직원. [사진제공 - 최재영]

 

▲ 단체로 방문한 신자들이 특송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금강산 관광 특구 내에서의 각 종교들의 활동 상황
     
남측에서 방문한 금강산 관광객들은 현지에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북 관계자나 마을 주민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어있으며 당연히 북측 주민들과의 종교 교류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칫 잘못하면 남북 간의 큰 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 관광객은 물론 금강산에 거주하는 현대 및 협력업체 직원들도 업무 이외에 북 주민과의 접촉 자체가 제한된다. 그러나 금강산에 거주하는 남측 직원들과 관광객의 경우는 크게 소란스럽거나 북측 인민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일상적인 종교행위는 가능했다.
    
나는 2006년 7월 당시 타종교 신자나 성직자들이 금강산 관광 중에 일요일을 금강산에서 보낼 경우 해당 종교 집회의 참석 가능성 여부와 해당 종교 시설에 대한 자료 파악을 확인했다. 우선 기독교의 경우를 살펴보면 수요일이나 일요일에 금강산을 찾게 되는 개신교 신자들은 금강산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교회당은 그리 멀지 않으나 일반 관광객의 숙소와는 좀 떨어지긴 했으며 금강산 관광객 숙소인 해금강호텔, 비치호텔, 펜션 등에서는 10분 정도만 걸으면 갈 수 있었다.
    
교회를 찾으려면 금강빌리지 패밀리마트에서 교회 위치를 물으면 알려준다. 야간에는 북 군인들이 가끔씩 순찰을 돌고 있으므로 여러 명이 교회를 가면서 밤거리를 걸으며 고성방가 식의 찬송을 부르거나 통성기도를 하는 행위는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가 있다. 뜻있는 방문객들은 미리 관광조장(가이드)에게 교회의 위치와 예배시간 등을 알아두어 순례자의 마음으로 조용히 다녀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관광객 숙소나 실내에서 일행들 끼리 예배나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은 특별한 소란만 아니면 제재가 없었다.
      
우선 천주교의 경우, 금강산에는 천주교 관련 시설이 없었다. 다만 관광조장이나 현대 관련 업체 직원 중에 천주교 신자가 소수 존재했고, 주일이면 그들 자체적으로 공소예절(신부가 집전하는 미사가 아닌 의식)을 바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지정된 미사 장소가 없으므로 매번 장소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약속장소를 정한 뒤 모임이 이루어진다. 직원들의 퇴근 이후에 종교 회합이 가능하기 때문이 공소예절 시작 시간도 개신교회와 마찬가지로 대개 밤 9시 이후에 시작됐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는 관광객이 주일에 금강산에 체류한다고 해도 여건 상 쉽게 공소예절에 참여할 수는 없다. 공소예절을 거행하는 직원숙소가 협소해 많은 사람이 모이기가 힘들고, 관광객에게 홍보할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관광객 중에 가톨릭 사제가 있거나 남측 성당에서 신자와 사제가 단체로 왔을 경우 각각의 숙소에서 미사 또는 공소예절을 바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런 경우는 여건이 허락되는 직원들 혹은 관광조장(가이드)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면 참석하기도 한다. 돈을 지불한 숙소에서의 개인적인 종교 의식과 행사에 대한 북측의 제약은 일절 없다.
   
불교의 경우는 금강산에 있던 장안사, 유점사, 신계사 등 역사적으로 유수한 사찰들은 6.25 전쟁 무렵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1998년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조계종에서는 고산 총무원장과 불자들이 참석해 신계사 터에서 복원기원 법회를 개최했다. 2001년 4월 금강산 연등 달기 행사를 시작한 이래 매년 진행되며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2004년 11월 20일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불자들이 참석해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낙성식이 봉행되었다.
     
2006년 7월 당시는 남측 해인사에서 파견된 어느 스님이 금강산에 거주하면서 신계사 복원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금강산 관광객들이 상팔담을 관광할 경우 신계사가 관광 코스에 포함되어 있으며, 남측 스님은 신계사를 거치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신계사의 유래와 현황 주위 경치 등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하고 있었다. 또한 관광객은 대웅보전의 부처에게 참배하거나 개인적인 예불을 드릴 수 있고, 기와불사 등에 헌금을 낼 수도 있었다.
     
남측의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신계사에는 24시간 상주할 수는 없으며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이 되면 다시 온정각으로 철수해야 하며 북측 불교는 남측에서 생각하는 주지와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불교의 경우는 천주교와는 달리 관광객 숙소에서 불자 관광객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나 모임은 없으며 불교의 여러 종단 중에 대한불교 조계종만이 유일하게 금강산 경내에 교역자를 파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금강산을 관광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심 활동도 지속할 수 있다면 색다른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한 가지 유의할 부분은 여러 교단과 종단에서 경쟁적으로 금강산을 포교나 선교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현지에 있는 각 교단 신자들의 종교 활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신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억류사태로 번지거나 남북 간에 미묘한 쟁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므로 규정에 벗어나 선교나 포교 활동은 관광사업의 활성화나 민족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 남북 당국자들이나 현대아산 측에서는 관광객들의 종교 활동 편의를 위해서 숙소 내부에 간이 성당이나 간이 법당을 확보해주어 관광과 함께 조용히 신심활동을 하도록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신계사에 4년간 상주하며 복원 불사 실무를 담당한 신계사 도감 제정 스님(좌측)과 주지 진각 스님(우측)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금강산교회 주일예배를 드리는 방문 신자들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단체로 관광온 신자들이 예배 후 기념촬영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해방 전 ‘금강산기독교수양관’터 인근에 세워진 ‘금강산교회’
     
해방 전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터는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부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강줄기가 양쪽으로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았으며 산세도 거의 비슷해 어느 지점인지 정확히 잘 파악이 안 됐다. 그러나 다행히 금강산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그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파악을 할 수 있었으며 남측에서 교회사를 연구한 분들의 도움을 받거나 이미 앞서 방문한 분들의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인근에 사는 북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들이 어렸을 때 온천이 있는 근처에 수양관(기도원)이 있었다며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주었고 지금도 온천이 있는 근처를 살펴보면 건물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북측 노동자숙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조선 기독교 초기 역사 사료에 의하면 “온정리 외금강 한하계 사다리골 삼각주에 위치한 8천 평 대지에 화강석으로 지은 2층 단독 건물로 총 232평이며,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고 기록돼 있다.
     
금강산 온천이 있는 이곳은 장소가 매우 넓고 평평하며, 수양관 터전 뒤로는 산과 두 강물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기록까지 거의 똑같았다. 현대 아산을 통해 집중적으로 개발된 이곳이 바로 고성군 온정리 일대이며 그 부근에 일제 때 건축된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터가 있는 것이다. 그 후 수양관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된 뒤 해방 이후, 분단과 6.25 전쟁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남북의 신자들 관심에서 멀어졌다. 세월이 흘러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이 건축된 지 70년 만에, 그리고 철거된 지 60년 만인 2004년도에 이르러서야 온정리 인근에 ‘금강산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하에 건축된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이 세워진 배경과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자.
 

▲ 해방 전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이 있던 자리. 산세와 봉우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해방 전 금강산에 세워진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의 설립 과정과 연혁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 대해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단총회 회의록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건축 계획부터 마지막 강제 철거를 당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기록됐는데 관련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총회가 수양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결의한 것은 1925년경이었다. 같은 해 9월 열린 제14회 총회에서는 “금강산에 교역자 휴양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총독부와 교섭하도록 결의”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이듬해 열린 총회 때는 대략적인 건축 규모와 용도까지 논의 되었고 교섭 또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1926년 열린 제15회 총회 회의록에 따르면 𔄠천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질 시설은 강당과 기숙사, 운동자 등의 시설을 갖추고 본관 건물을 석조 건물로 건축 허가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12월 21일 마침내 온정리에 ‘금강산 기독교수양관’건립 허가를 조선 총독부로부터 얻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를 위한 기부금 모금까지 인가받았다. 그러나 수양관 건립 모금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게 되자 한석진 목사가 직접 발 벗고 나섰다. 한 목사는 1917년 9월 1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6대 총회장에 당선되고 1921년 9월에 신의주 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던 중이었는데 수양관 건립 때문에 교회를 전격 사임하고 1927년에 수양관 건축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 동참을 호소해 마침내 1931년 9월 11일에 건물을 완공하고, 그곳에 제20회 총회를 유치했으며, 8천평 대지 위에 2백 32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진 수양관 헌당식을 갖게 되었다. 이 수양관 건물은 비록 장로교단의 주도로 추진되고 있었으나 조선감리회 역시 축하와 동참의 심정으로 도로 보수와 주춧돌을 기증했다. 당시로는 유일하게 외국의 헌금이나 원조 없이 조선인 자력으로 건립되었으며, 명칭도 ‘장로교 수양관’이라고 하지 않고 교단색채 없이 ‘기독교 수양관’으로 결정되어 초교파적으로 이용하도록 배려했다.
     
이후 총회가 열렸던 이곳 수양관은 1938년 5월에 ‘전국 제직 수양대회’를 유치하는 등 일제 측에서 볼 때 위험요소로 생각해 수양관 운영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이듬해인 1939년 11월 30일, 금강산 수양관의 국유임야 대부 기간 만료에 따른 총회의 연기 신청을 비열하게 반려하고 말았다. 원래 국유임야를 10년 기한으로 대부받아 수양관을 건축했는데, 일제가 기한연장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유력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수양관을 이용하는 것을 사실상 저지했으며, 마침내 1941년 6월 30일 완공된 지 불과 10년이 채 되지 못해 철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수양관을 총독부에 기증하든지 아니면 철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라”고 압력을 넣었는데 당시로서는 이미 교단과 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상태라 수양관을 지킬 자체 여력이 없던 상태였다. 그러나 총회는 일제에 내어주기보다는 스스로 철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 철거를 결정한 것이다. 당시 전국 교회가 모금에 동참해 수양관을 건립하고 총회를 유치했었다는 사실조차 남북 교회와 신자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옛 터전이 확인된 이후부터 수양관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남측 교회에서 잠시 있었으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5.24조치 이후 남북관계가 단절되면서 그런 논의는 중단되었다.

▲ ‘금강산 기독교수양관’건립을 주도한 한석진 목사. [사진제공 - 최재영]

 

▲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제20회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의 기념촬영. [사진제공 - 최재영]


2016년 11월 18일이 되면 현대 아산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한지 18주년이 된다. 관광이 중단된 2008년 7월 이후 2016년 까지 현대아산의 손실액은 1조원에 육박한다. 또한 금강산 관광사업을 위해 그 동안 토지 및 사업권을 확보하는 데 4억 8천 669만 달러를 투입했으며 시설 투자에 2천 268억 원을 들였다.
   
한편, 관광 중단 사태 직전에는 1,084명이던 직원숫자가 현재는 200여명으로 감원되었고 회사는 비상경영체제를 유지하는 중에 있으며 일부 임직원에게는 대기발령을 내리는 등 극단적인 구조조정을 하며 버티고 있다. 그러나 회사 지도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가 결정되면 2개월 이내에 사업 재개가 가능하도록 준비 체제를 갖춰놓고 있다고 공포했다. 하루 빨리 남북관계가 회복되어 금강산관광 사업이 재개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계속)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