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일관계의 과거사를 주시했던 사람들이라면 광복 70주년이자 한일협정 50주년인 2015년에는 한일간의 타결을 예감할 수 있었다. 우리 국민 중 누구라도 이미 고령이 된 강제동원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회복이 생전에 이루어지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일 년 내내 한일 양국 정부는 협상시간을 허비하다가 ‘총맞은 것처럼’ 지난 12월 28일 막판에 극적으로 타결하였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 합의는 국제인권기준이나 일반상식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법률가들은 그 합의가 국제법적 견지에서 조약으로서 유효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으며, 대통령의 정치행위로서도 헌법규정상 결격이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2016년 1월 6일 국회토론회)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를 되뇌면서 굳히기 작업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한일양국을 포함하여 지구적인 시민사회가 발전시켜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론을 일거에 날려버리고서도 20여 년간 미해결의 난제를 해결했다고 한국정부는 자화자찬하였다.

최근 정부는 재단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위안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호별로 접근하여 설득과 회유를 시도하였다. 협상을 타결하기 전에 피해자들의 동의와 의견을 구했어야 함에도 저지르고 나서 불가피론으로 압박하고 있다. 누구의 권리문제인지를 총체적으로 망각했기에 생겨나는 나쁜 권력의 행동방식이다.

강제노동과 관련하여 독일의 기억책임미래재단 설치를 위한 미국과 독일의 합의(2000)에 소송을 제기하였던 강제노동피해자들의 소송대리인이 서명했다는 사정에 비추어보면 이번 합의가 얼마나 볼품없는 것인지를 재차 확인해준다.

12.28합의를 사죄의 언어행동(speech act)의 측면에서 재검토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겠다. 언어철학자 오스틴에 따르면, 언어행동은 단순히 말행위로써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규칙 나아가 사회적 규칙들을 따를 때 언어행동으로서 유의미하고 그 목적도 달성된다. 오스틴은 특히 정치적, 법적 책임에 관한 언어행동으로서 사죄를 중요하게 거론하였다.

오늘날 언어철학자들은 사죄의 사회적 규칙으로서 사죄의 표명, 사실의 인정, 책임의 인정, 보상의 제공, 재발방지의 약속 등을 거론한다. 사죄가 언어행동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언어행동으로서 ‘불발(misfires)’이거나 ‘남용(abuses)’이라고 한다. 불발은 의미있는 언어행동으로서 성립하지 못한 것이고, 남용은 언어행동으로서 성립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모순이나 불일치가 발생하여 그 언어행동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

사죄행동을 단순한 상황에서의 사죄와 복잡한 상황에서의 사죄로 구별할 수 있다. 단순한 사죄상황은 경미한 과오로 인해 사죄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복잡한 사죄상황은 심각한 인권침해나 국가폭력에 대해 사죄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상황에서 사죄는 감정의 전달과 공감이 목표이기 때문에 언어행동의 규칙에 따라 사죄의 표명만으로도 사죄행동이 종결될 수 있는 반면, 복잡한 상황에서의 사죄는 피해자에게 사죄의 감정을 전달하고, 역사적 진실과 책임을 인정하고, 그 후속조치를 약속하고 후속조치를 실천하는 등 사회적 규칙을 충족시켜야만 사죄행위가 완성된다. 그래서 사죄의 행동은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행위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죄표명후 약속이행 및 사죄와 모순된 행동 자제, 사죄의 심정을 유지하려는 태도까지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사죄후 일본정부의 행동은 사죄로서 12.28합의와 실질적인 모순되므로 전형적으로 사죄의 남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난 12.28공동기자회견에서 표현된 일본 외상의 발언을 사죄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책임의 주체, 피해자와 피해의 내용, 불법의 내용, 구제의 방식, 재발방지대책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 포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고 한국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겠다는 것만 밝혔다. 동시에 외교적인 언사로서는 썩 어울리지 않게, 한국정부가 미래에 억제해야할 행동들을 확정적으로 규정하였다.

어찌되었든 사죄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전제로 한 쌍방향적 행위로서 관계를 발전시키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정부나 정치인들은 사죄를 일방적이고 일회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 같다.

심지어 사죄를 잘못에 대한 속죄의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사죄발언조차 수치로 여김으로써 위안부 범죄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사죄행동까지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수치(shame)라는 말이 인도유럽에서는 원래 덮어버린다(cover)는 것을 의미한다.-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해서는 사죄 이후 행동이 매우 중요한데, 사죄발언 이후 일본 정부는 사죄의 의미를 축소하고 희석하고 부인하고 있다. 10억엔으로 뜻밖에 외교적 승리를 거둔 양 자랑하고, 몇 일 전에도 일본정부는 10억엔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개별적인 보상금으로 제공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한일협상후 제공된 금전이 독립축하금이었듯이 이 돈은 이제 위안부문제의 타결 축하 인도적 지원금이라고 불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독일의 수상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림일(1월 27일)에 홀로코스트를 기억할 영원한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는 발언과 비교하면 일본정부의 행태는 사죄후 행동으로서는 완전한 결격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로 인해 어떤 법적 정치적 구속성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최종성과 불가역성은 아마도 피해자에 대한 배상문제에 국한될 것이다.(물론 수 만 명의 위안부피해자들의 물적 심적 피해를 달랑 10억엔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이 가당치도 않지만) 그 구속성은 배상청구 및 피해자지원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금전적 요구에 한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입장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현재 한국정부의 행동을 보면 10억엔의 재단을 엄청난 외교적 성과인냥 착각하여 스스로 자승자박에 빠진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이 위안부연행의 강제성이나 불법성을 부인하거나 법적 책임을 부인하거나 진실을 왜곡한다면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비판하고 합의를 철회할 수 있다. 일본이 사죄와 모순된 행동을 한다면 한국정부는 정치적 잠정안에 불과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당장에 폐기해야 한다.

바로 얼마 전에 일본정부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견해를 제출하였고, 한국정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강제동원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방안퉁수 같은 성명을 내고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다니는 국내용 정치를 외교부가 계속할 필요는 없다. 합의를 폐기함으로써만 심화된 합의가 가능하다. 이렇게 끌려 다니면서 12.28합의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라고 우기는 한국정부가 참으로 안쓰럽다.

사죄와 모순된 발언은 이미 12.28합의를 백지화하는 것이고, 12.28 밤에 박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아베가 이 합의 이전에 원래부터 법적 책임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면 그 합의는 실체를 갖지 않는 것이 된다.

이제 진정으로 법적 책임에 대한 합의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실제로 20만명에 이르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규명도 하지 않은 채, 진실규명작업과 역사적 기억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태연자약 합의에 이른 한국정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에서 말한 최종성과 불가역성은 당국자들이 이름을 붙여서 얻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인권의 기준에 부합한 해법을 실현할 때에만 접근할 수 있는 법적 상태이다. 누구의 권리가 문제였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기를 당국자에게 촉구한다. 그리고 두서없는 합의가 외교적으로 유효한 형식을 갖추고, 헌법상의 절차를 거친 품위 있는 국가행위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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