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쉬운 일은 한 개도 없다. 이제야 아주 조금 살아보니 알겠다. 특히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역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다. 한 개인을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꽤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사는데, 어떻게 한 개인을 무 자르듯 딱 잘라 평가하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때로는 나태함으로, 성급히 개인을 규정하곤 한다. 극히 일부분의 모습을 가지고 섣불리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함부로 평가나 규정을 당하는(!) 이들로서는 적잖이 당혹스럽고 화가 날 만도 하다.

그 중 정말 고민스러운 것이 이른 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나누고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사회처럼 진보와 보수에 대한 애매한 정의나 편견, 오해와 왜곡이 심각한 곳에서 말이다.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규정은 무수히 많이 달라진다. 다양성 존중의 측면에서 보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지경이다.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이들에겐 새빨간 불순분자로, 다른 이들에겐 자유주의자로, 또 다른 이들에겐 친미 성향의 중도보수주의자로 비치기도 한다. 참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나 역시 외계인이나 뽀로로가 아니기에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나 스스로 봐도 그렇다. 물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이렇게 떠들긴 한다. “저는 항상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때에는 사회적 불의를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에헴!”

고백하건대, 어느 책에서 보고 ‘심히 멋있어서’ 빌려온 구절이다. 물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는 구질구질한 변명은 하고 싶다. 구질구질. 암튼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양심의 거리낌 없이(매일 찔리며 산다), 연대의 가치를 확신하며(덕후 기질의 왕따다), 주변을 돌아보며(길치다)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진보적 삶이라, 진보주의자의 길이라 말한다면, 뭐 아주 어설픈 진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느 장면, 어느 공간에서는 별안간 ‘깡보수’로 3단 변신하는 나를 목격하게 된다. 오호, 신기하면서도 영 꼴불견이다. 행동 진행 과정에서 스스로 ‘아, 이건 극히 보수적인 행동인데!’라고 느끼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도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자동반사적으로 행동 및 반응을 전개하는 것을 보면, 또한 나는 극히 보수적인 인간인 셈이다.

으아, 뭐가 그리 복잡하냐!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매 시간 매 초마다 극세사처럼 정밀하고 촘촘하게 변화한다. 물론 때로는 한 방에 훅 가기도 하지만.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사실 하고픈 말이 이거였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야말로 바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 번 아닌 것은 곧 죽어도 아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두 눈 딱 감고, 때론 무모하게 때론 눈물겹게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일단 인정하고 존경한다. 그 집념만큼은 말이다.

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구의 복지부동을 뜻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여, 혁신의 파도를 거부하는 꼰대도 아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지키는 데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지불하는 가련한 이들을 말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들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함을 희생할 줄 아는 이들이고, 타인의 고통에 극도로 민감하기에, 차마 수많은 정치인들처럼 ‘쌩깔 줄’ 모르는 이들이다. ‘너의 고통으로 내가 너무나 아픈’ 이들이다. 바로 이런 이들이 걸어가는 길이 ‘한 길’이다.

어쩜 이 엄혹하고 때론 너무 기가 막혀 가소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외면과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눈속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혼자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모두가 외눈박이인 세상에선 두 눈을 가진 자가 외면 받지 않는가.

때문에 나는 적어도 진보라 자처할 수 있는 이들에겐 다음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를 쉽사리 단정하지 않는 마음, 타인의 고통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마음, 차별을 반대하고 정의로운 평등을 추구하는 마음,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을 함께 보듬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마음이다. 난 그런 이들을 리얼 진보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른 바 철이 너무 없어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다니기 전에 만났던 선생님 한 분, 그리고 누가 전해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책 한 권, 영상 하나, 나와 마찬가지로 가난했던 이웃들과 그 이웃들의 아이들, 그들의 웃음과 눈물. 이유도 없이 슬픔에 벅차 오히려 짜증을 냈던 기억들, 차마 볼 수 없어 모른 척 돌아설 때 느꼈던 빌어먹을 상실감과 죄책감. 아마 이런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빌빌거리고, 징징거리고, 구질구질 거리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유치찬란한 해피엔딩을 믿고 싶은, 가소롭게 어처구니가 상실된 세상이지만, 다시 그럼에도, 행복하게 눈물 흘릴 수 있는 그 어떤 날을 꿈꾸며, 내일도 빌빌, 징징, 구질구질 거릴 수 있는 힘을 내는, 지금의 나는, 가소롭지만 소중하다.

▲ 강수돌, 강정구, 김민웅, 김병권, 김정인, 박경순, 서유석, 이강실, 인터뷰 임승수, 장진숙, 『처음 만나는 진보』, 시대의 창, 2010.10.

이 책이 나온 지 6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는 민주노동당이 있었고, 그 이후엔 통합진보당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진 진보신당도 없다. 다른 이름들의 도전과 시련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 만나는 진보는 설레고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 똑바로 눈뜨고 눈알이 빨개지도록 울어야 한다. 난 울음이 켜켜이 쌓여야 한다고 믿는다. 울지 않는 자는 타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을 당시를 떠올리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아쉬움과 추억과 비통과, 그럼에도 희망을 갖고 읽어 내려갔다. 2014년에 한 번 읽고 올해 다시 읽었다. 그리곤 한 숨을 내쉬었다.

인터뷰에 응한 8명 중 나름 인사를 드린 분도 있고, 자주 뵌 분도 있으며, 심지어 존경하는 분도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도 존경하는 분이다(페친!) 그들이 인터뷰를 하고 당하며(!) 느꼈던 2010년의 분노와 희망이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체념이 더 많아졌을까, 아님 그럼에도 희망을 끝내 놓지 않고 있을까.

치열해야할 정치가 ‘쇼!’로 탈바꿈해버린 지금, 만약 책 표지의 문구처럼 ‘이제 처음 왼쪽으로 들어선’ 이들이 있다면, 부디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은 반드시 가능하다는 가당치도 않은 믿음을 장착해 주기 바란다. 해피엔딩은 기필코 온다. 나쁜 놈은 죽고, 착한 편은 결국 이긴다. 잊지 말자.

진보를 처음 만나지 않는, 이미 많이 만나봤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한 번쯤 읽어보시라. 당신이 알고 있는 진보는 어디 소속인지, 아님 무소속인지. 아님 진보를 가장한 극우인지 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