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그랬냐는 듯 보통의 일상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만 해도 우리는 “지금 남북은 민족공멸로 치달을 대결 양상으로 가느냐, 아니면 평화공존으로 향한 대화국면으로 가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다.(‘단호한 원칙 유지하되 평화 지켜야’ 8월 24일 중앙일보 사설) 잘나가는 재벌언론마저 민족공멸을 입에 올린 정도의 전쟁위기를 비껴 여기 이대로 살아 있는 건 다 8.25합의 덕분이다.

하여, 우리 국민은 “북한이 유감이란 표현을 쓴 것은 적절한 사과로 보기 미흡하다(66.3%) 면서도 남북합의에 만족한다(67.4%)”는 지혜롭고 세련된 반응이다.(8월 25일 리얼미터) 그럼 앞으로 8.25합의는 어떻게 될까? 답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 속에 숨어 있다. 8월 20일 ‘남북의 포격전’이후 8.25합의까지, 두 번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8월 20일부터 22일 판문점 접촉 성사까지다. 8월 20일 북은 김양건 비서 명의의 서한을 김관진 안보실장에게 보내 대화를 제의하는 동시, 22일 오후 5시까지 확성기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격파사격을 위한 작전, 있을 수 있는 반작용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할 것이며 이를 위해 21일 오후 5시부터 전선지대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한다고 발표한다. 화전양면, 대화로 문제를 풀거나 ‘전쟁’을 하자는 거다.

한미연합사령부에 가지 못한 대통령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21일 오전 정례브리핑에서...김양건 당 비서가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에게 보내 온 서한에서 군사적 행동 위협과 관계개선 의사를 밝힌 그 시각에 “포격 도발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는 ‘과연 대화의 의지가 있느냐’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 북 선제포격 부인·관계개선 제의 ‘신뢰할 수 없다’ 통일뉴스 8월 21일)

이번에도 우리 영토를 향해 포를 쏴댄 날 '관계 개선 의사가 있다'는 서신을 청와대에 보냈다. 우리 내부의 강온(强穩) 갈등을 부추기겠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이런 북의 장난질에 놀아나 적전(敵前) 분열을 일으킨다면 국가 안보에 대한 자해(自害) 행위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대통령·군·국민 모두 정위치에서 안보 위기 이겨내야.’ 조선일보 8월 22일 사설)

정부가 진정성을 의심하고, 그 뒤의 수구보수언론은 아예 장난질로 규정하는 마당이라면 대화는 물 건너 간 것이다. 한민구 국방장관의 말처럼 22일 오후 5시 이후 북은 어떤 식으로든 도발을 할 것이며, 최소한 국지전 그 이상의 참극은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운명의 오후 5시를 조금 앞둔 시각 청와대가 남북 접촉을 발표한 것이다. 급정차, 그리고 유턴. 왜 그랬을까? 청와대가 뒤늦게 신호등을 목격했기 때문 아닐까? 모르는 사람 눈에는 띄지 않는,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신호등. 21일 박근혜 대통령의 동선도 그 중 하나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경기도 용인의 제3야전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선조치 후보고하기를 바란다”고 지시했다. 또 “북한이 도발을 하게 되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서 가차 없이 단호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대응하라고...(박대통령 "장병·국민에 대한 도발 결코 용납할 수 없어. 뉴시스 8월 21일)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이상하냐고?

이명박 대통령이 2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한 뒤 곧바로 한미연합사령부 상황실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이 상황실에서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과 함께 이날 서해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미 연합훈련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미 연합훈련이 북한에는 큰 압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MB 담화 직후 한미연합사 벙커로. 중앙일보 2010년 11월 30일)

이렇게 해야 정상 아닌가? 주한미군사령관과 주한미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을 옛 이명박 자리에 앉히고 북에 ‘큰 압박’을 했다면 청와대가 22일 남북접촉에 나갔을까?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이자 친한파인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 연구원이 북한의 포격 도발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일시 중단한 것을 비판했다...미 국방부는 한.미 양국 군이 함께 진행 중이던 연례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을 지난 19일 일시 중단했다가 곧바로 재개했다...핼핀 연구원은 “위협 앞에서 예정됐던 합동 군사훈련을 잠시라도 중단한 것은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미국의 강력한 안보 확약을 원하는 한국 국민들을 안심시키지 못한다.”고도 비판했다. (美전문가 "박 대통령 전투복 입고 北도발에 단호 대처했다" 중앙일보 8월 24일)

미국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일시)중단했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그러나 그 시점은 19일 또는 20일 등 보도가 다르다. 만약 19일 중단됐다는 기사가 맞는다면 이는 “북의 포격도발 이후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중단한 것이 아니라 훈련에 대한 북의 대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중단한 것이며 2013년 봄의 이른바 ‘북 미사일 위기’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지금은 한반도의 온도를 낮출 때”라면서 미니트맨3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연기하고 남은 훈련 일정을 축소한 것을 연상시킨다.

한국과 미국 수만 명이 참가하는 연합 훈련을 하고 있는, 다시 말해 훈련이 바로 실전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싸움을 걸 바보는 없을 것이다. ([광화문에서/허문명] 전쟁에서 이기려면. 동아일보 8월 25일) 그러나 상황은 변했고 껌뻑거리는 신호등을 청와대는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방부는 “잠수함 등 매우 심각” 미국은 “전략자산 탄력적 대응”

두 번째 고비는 22일 남북 접촉부터 25일 공동보도문 합의까지다. 주요 장면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은...“이번 회담의 성격은 무엇보다 현 사태를 야기한 북한의 지뢰도발을 비롯한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필요하다...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확성기 방송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 동아일보 8월 24일)

북한의 유감 표명은 우리 측 요구에 미달하는 데다 자신들이 지뢰 도발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을 뿐이다. 이 정도의 ‘타협’으로 북이 강력히 요구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우리 측이 수용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의문이다. (북의 ‘도발 사과’ 없는 남북협상 타결 유감스럽다. 동아일보 8월 25일)

대통령의 공개지침을 단 몇 시간 만에 식은 밥처럼 말아먹었으니 그들은 이제 검찰총장처럼 “찍어내기”되거나 여당 원내대표같이 “퇴출”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레이저 광선 한 번 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24일 대통령의 ‘남북협상안’ 발표는 협상대표들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미국을 향한 외침 아니었을까? “청와대 ‘안’을 받지 않으면 협상을 깨려 한다, 그러니 뒤를 받쳐 달라” 사실 미국을 향한 SOS는 23~24일 동안 ‘군 관계자’ 등의 이름으로 끝없이 발신됐다. 북의 잠수함 50여 대가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북의 3대 침투수단이 모두 가동되고 있다는 등의 정보를 군 쪽에서 흘리는 것이 다 그거 아닌가. 그러나 미국은 모르쇠였다.

북한이 과거 7차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을 때는 항공모함과 전략 폭격기 등 미국의 전략자산이 대거 전개됐지만 이번에는 미측도 과거 사례를 따르지 않고...(한미, 대북 무력시위 '최소화' 연합뉴스 8월 23일)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4일 정례브리핑에서 “한미 양국은 현재 한반도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주시하면서 미군의 전략자산 전개 시점을 탄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전략자산 한반도 배치는 대북 군사적 압박 '결정판'. 연합뉴스 8월 24일) 우리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그 전략자산이라는 것은 즉각 출동하는 대신 "전개 시점을 탄력적으로 검토" 즉 지금은 안 온단다.

소를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있어도

조성된 정세에 이끌려 소는 물가에 왔다. 그럼 이제 8.25합의라는 물을 마시고 또 마셔 목마른 평화를 적시고 통일의 길을 낼 수 있을까? 여기서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소가 다시 보이지 않는가? 작전지휘권이 미국에 있는 한 그들이 고삐를 쥔 거다. 그들은 이번에 북을 향한 군사적 압박의 절정에서 타협을 택했다.

미 국무부가 24일(현지시간)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합의를 환영했다. '한국이 굴복했다'는 지적에는 '양측이 타협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존 커비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대부분의 합의는 타협"... (미 국무부, “남북 합의 환영” “양측이 타협한 것” 통일뉴스 8월 25일)

올 1월 1일과 2일 남과 북에서 “최고위급 회담”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덕담이 오가자 1월 3일 휴가 중인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에 대한 추가 제재’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찬물을 끼얹은 미국이 이번에는 ‘타협’을 말한다. 그러므로 8.25합의는 안정적인가? 아니다. 이번에 겪은 일을 토대로 한반도 전쟁계획(WAR PLAN)을 개정한다고 하지 않는가. 개정된 그 전쟁계획을 가지고 다시 올 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미국 인권단체가 휴전선 인근에서 대북삐라를 뿌릴 수 있고, 그 한 방에 8.25합의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 평화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자주권을 잃은 만큼 멀고, 되찾은 만큼 가깝다.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전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전 반전평화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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