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총체적 저항의 사표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병탄은 우리 민족사의 최대 수치요 비극이었다. 그들은 한반도의 무력지배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대륙진출의 전초기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영구지배를 획책하기 위해 다양한 술수를 동원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교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식민사관을 통한 한국사의 날조와 일본어 국어정책을 통한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은, 한민족성의 근간을 없애고 민족문화의 근원을 훼손시키기 위한 일제의 주요술책이었다.

▲ 홍암 나철 대종사의 마지막 모습. 1916년 음력 8월 5일, 사리원 역 앞 대기(大崎)사진관에서 이 사진을 찍은 뒤 열흘후 구월산 삼성사에서 조천(朝天)했다. [사진출처 - 대종교]

대종교는 이러한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출발이자 중심이었다. 대종교의 중광선언인 「단군교포명서」야말로 이와 같은 총체적 저항의 교본으로 문화적 위기에 당면해 있던 당시 민족사회에 희망의 지침서와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즉 「단군교포명서」는 우리 정신사에 변곡점이 되는 선언이었다. 이는 단군사상의 가치를 종교·사상·문화적 측면에서 역사적인 구명은 물론 시대를 건너 뛴 단군신앙의 승계를 선언한 중차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단군신앙의 부활을 넘어 민족 최대의 축일인 개천절의 당위적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토대로 한 정신사관 확립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전래적 인습이었던 사대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줌과 더불어 국권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일제하 대종교의 교당이 곧 학교이면서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는 등식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나철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요소들을 포괄하는 정신(道)·단군사상을 토대로 운용되었다. 나철이 강조하는 정신을 몸통으로 하여 문화·정치·외교·종교·무력투쟁 등을 쓰임으로 하는 총체적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대종교 등장은 단군신앙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명분과 함께 민족의 성지인 배달국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국권회복적 명분이 동시에 작용했다. 그러한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근거는 「단군교포명서」요, 나철의 ‘국수망이도가존’이라는 민족적 경구였다.

주시경·지석영·김두봉·이극로·최현배 등으로 대표되는 한글운동의 배경이나 김교헌·박은식·신채호·유근·정인보·안재홍·이상룡 등 민족주의사학의 바탕, 그리고 신규식·이동녕·박찬익·조성환 등의 활동으로 조성되는 정치·외교적 항쟁의 토대에도 대종교라는 정신적 배경이 뒷받침되었다.

또한 중광단·북로군정서·신민부·흥업단·광정단·한족연합회 등등 대종교 무장항일운동의 배경에도 교학일여를 통한 군교일치의 정신이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대종교의 총체적 항일운동의 배경에 있어,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 나철을 비롯한 김교헌·서일·윤세복 등의 정신적인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이들은 대종교를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수많은 교도들을 거느리고 그들 스스로가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뒤로 한 채, 살신성인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기 때문이다. 조국광복을 위한 사심없는 활동은 일제에 의하여 이지러지는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 밑바탕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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