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 흑수의 강풍을 마시며 향수에 젖은 몸으로 부모, 처자와 이산하고 만리 고토에서 광복운동에 몸 바친 수많은 영재와 용사를 육성 배출한 온상은 대종교의 원로인 성제 이시영 도형이 창립한 신흥무관학교와 단애 윤세복 종사가 설립한 동창학교라 할 수 있고 이밖에 백포 서일 종사가 왕청현에 설립한 명동학교도 있으나 본 명동학교는 군정부 이동으로 인하여 오래지 않아 폐교되었다

1) 신흥학교

신흥학교는 개천4367년 경술(서기1910)에 남만주 유하현 추가가에 신흥강습소로 창설되어 애국청년을 교육하다가 그 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고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으며 군사학과 중등과정을 교수해왔다.

그러나 학교운영에는 허다한 난관이 중첩하였으니 운영자금의 궁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토착인과의 반목이 극심했다. 사실 지방의 중국인들은 우리 교포를 일본의 앞잡이로 오해하고 일절의 물질유통이 두절되어 있었으니 그 곤경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 성재 이시영 (李始榮, 1869 ~1953). 신흥학교 설립자이자 초대학장을 맡았다. [사진 출처 - 대종교]
그러던 중 신해년의 중국혁명 당시 유하현 혁명운동에 합작한 후로부터 이 오해는 풀리고 중국인들은 이시영 선생 및 학교의 교수진을 한국 독립운동계의 중심인물로 알고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토착 중국인과의 반목은 해소되었으나 이때 농작물의 대흉작으로 식량을 보급할 길이 없어 청년학도들은 할 수 없이 노령과 본국 등지로 사방으로 흩어지고 끝까지 잔류 고수한 학생들은 당시의 학감 윤기변, 훈련감 김창환 등과 함께 각 촌락으로 순행(巡行) 구걸하면서 간신히 유지했다.

그 후 개천 4376년 기미(서기1919) 여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 보병중위 이청천과 기병 중위 김경천, 신팔균 등이 삼일운동의 뜨거운 물결을 타고 망명래교(亡命來敎)하여 훈련을 맡게 됨에 청년학도들의 사기는 드높아져 이로부터 입학지원자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명을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고 동년 5월 3일 정식으로 무관학교의 개교식을 거행하고 학장 이하 각부서가 임명되었으니 당시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초대학장설립자: 이시영
교장: 이천민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변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
교관: 이범석
교관: 신팔균
교관: 김경천

신흥무관학교는 개교 이후 꾸준히 광복운동의 역군을 육성 배출하였으니 졸업증명서 발행수가 경신년 팔월까지 2000 수백 명에 달하였고 졸업생과 재적학생으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은 강력한 혁명청년의 결사로서 동삼성 광복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이 학우단 본부는 삼원포 대화사에 두고 학우보도 발행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사업목적으로 그 활약이 컸었다.

一. 혁명 운동에 가입 할 것
二. 군사학교 교재를 간행하고 각종 학술을 연구하여 실력을 실히 할 것
三.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론을 선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四.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교육을 담당할 것
五. 노동강습소를 경영하여 농민청년에게 군사훈련과 계몽교육을 실행할 것
六. 민중의 자위대를 조직하여 적구(敵拘) 침입을 방지할 것

2) 동창학교

경술국치 후 적의 침학이 날로 극심하여짐에 국운을 통탄하고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광복 대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단애 종사는 친형인 윤세용 선생과 함께 도만(渡滿)하여 봉천성 환인현에 본거를 잡았다.

▲ 대종교 제3세 도사교(都司敎, 교주) 단애종사(檀崖宗師) 윤세복 (尹世復, 1881~1960). 단애 종사는 사재를 털어 동창학교를 설립했다. [사진 출처 - 대종교]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애국사상과 민족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사업이 초미의 급선무라 단정하신 종사는 사재(私財)의 전액을 기우려 환인현 성내(城內)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우리 교포의 생활이 너무도 곤궁하여 도저히 자제를 교육시킬 경제적 여유와 정신적 용기가 없었다. 이에 학교 당국은 부득이 학생들의 기숙비와 피복비를 공급하며 심지어는 그 가족의 생계비까지 보조해 주어가면서 교육을 장려해 왔다.

결국 이 운동이 감시에 혈안이 된 일정에게 탐지되어 일영사관은 유혹 또는 위협을 거듭하여 오고 중국 관헌에게까지 교섭하여 동창학교의 폐지령과 아울러 단애 종사 형제분과 교사들의 축출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세(事勢) 이에 이름에 부득이 폐교하게 되고 교사 이동하(백농), 김영숙(백주), 이시열(운허스님) 등은 모두 각기 활동무대를 찾아서 옮겨가고 윤세용 선생은 참의부 참의장으로 전직하고 단애 종사는 무송현 등지에서 흥업단, 광정단 등을 조직하고 지방의 안돈(安頓)과 독립운동의 진두에서 진력하다가 갑자 정월에 이르러 무원 종사의 유명(遺命)으로 대종교 제3세 도사교에 취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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