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윤복/미인도/비단에 채색/114.2*45.7/조선후기/간송미술관. [자료사진 - 심규섭]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는 조선시대 회화에서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미인도]는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없고 동시에 우리 전통그림을 대표하는 그림 중에 하나이다.
확실히 [미인도]는 명작이다. 어떤 사람은 서양미술의 [모나리자]와 견주기도 한다.
하지만 [모나리자]에 관련한 연구 서적이나 감상 글은 넘쳐나지만 [미인도]에 관한 글은 천편일률적이고 성적매력의 대상으로만 보는 게 씁쓸하다.
기녀를 그려서일까? 조선시대 기녀는 천민이었다. 지금도 술과 몸을 파는 직업은 3D업종에 속하고 멸시를 당한다.
신윤복이 야릇한 그림을 많이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많다. 그럴 만 하다는 것이다.
[미인도]는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사람들은 신윤복의 풍속화나 춘화(春畵)와 연결한다. 춘화나 풍속화 속의 기녀와 [미인도]의 기녀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쩌면 작은 크기의 화첩의 기녀가 사실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본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기녀로 추정하는데 이에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림 속의 여성의 나이는 대략 15~18세 정도로 보이고 키는 150cm 전후, 몸무게는 약 45kg 정도로 추정한다. 이런 추측은 우리나라 성인 남성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옷맵시는 그야말로 당대 최신 유행을 반영하여 매혹적이다.
흔히 머리에는 가채를 얻어 풍성한 모발을 자랑한다. 짧은 저고리는 젖가슴이 살짝 보일듯하고, 좁은 소매는 가녀린 팔을 드러내며 회청색의 풍성한 치마는 커다란 엉덩이를 연상시킨다.
살짝 내리 깔은 눈매, 노리개와 고름을 매만지는 손길, 말려 올라간 치마 끝에 드러난 버선발 따위의 연출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훔치고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런 정도의 매혹이라면 고목에도 꽃이 필 정도이다.
대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당시 의복을 연구하는데 알찬 자료로 활용될 정도이다.

그림의 왼쪽 상단부분에는 신윤복이 직접 쓴 글이 있다.
대략적인 해석은 이렇다.

“그린 사람의 가슴에 춘정이 서려 있어 붓끝으로 실물을 따라 참모습을 옮겨낼 수 있었다.”
“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

여기서 화가는 신윤복 자신이다. 춘정(春情)은 성적 욕망을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화원가문 출신의 최고 화가가 “내가 발정이 나서 성적 대상으로 색기가 넘치는 기녀를 그렸다. 꼴리지 않는가”라고 했겠는가. 가문에 먹칠을 하고 왕의 어진을 그렸던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춘정을 성적 욕망이라기보다 ‘삶의 의욕, 생기’라고 유추하면 “생명의 활기를 통해 표현한 여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중의적인 표현은 화가에게 흔하다.

이런 해석을 하는 것은 기녀를 그린 신윤복을 단순히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정체가 불분명한 이상한 그림이다.
신윤복이 왜 여성을 단독으로 그렸는지, 하필이면 기녀를 그렸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실존 인물을 단독으로 그린 것은 왕이나 공신뿐이었다. 신선은 가상의 인물을 그린 것이고 풍속화의 인물은 구체성이 없다.
서양과 달리 조선의 인물화는 중심이 아니다. 중심은 산수화이다.
이것은 유학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이상세계를 그린 [몽유도원도]나 [십장생도]의 어디에도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신(神)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학에서 인물이 그림 속에 등장하면 곧 신격화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흔한 귀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서 기녀를 단독으로 그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기녀라고 하지만 어엿한 여성이고 사람이다.

현재 발견된 [미인도] 중에 신윤복의 그림이 가장 먼저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 전에는 [미인도]가 없었다는 말과 같다. 또한 모든 화가가 미인도를 그리지도 않았다. 안견, 김홍도, 강세황, 심사정, 윤두서 심지어는 자유분방했던 최북이나 장승업의 그림에도 [미인도]는 없다.

중국의 그림 중에 [사녀도仕女圖], [여사잠도] 따위가 있지만 왕실의 여성들이고 여럿을 그린다. 대개는 화장을 하고 있거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일본화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나 게이샤를 단독으로 그린 미인도가 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이런 일본화는 오히려 신윤복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최근 신윤복의 [미인도]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소설이나 영화는 허구인데 그만큼 신윤복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반증이다.
신윤복은 1758년에 태어났으나 사망 시기를 모르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기록에 없다. 신윤복의 아버지는 신한평은 도화서, 자비대령화원을 지냈으며 왕을 어진을 그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유명한 화원집안이다. 이런 연유로 신윤복도 도화서 화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신윤복의 활동은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추측할 뿐이다.
신윤복은 퐁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작품도 많이 그렸을 것이다. 실제 독창적인 산수화도 있고 풍속화의 배경으로 표현된 산수의 실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신윤복이 [미인도]를 그린 연유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당대 화풍이나 시대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화가가 전례에 없던 그림을 갑자기 그려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화가는 시대를 앞서간다고 하는데, 이런 생각은 20세기 서양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조선시대의 화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충실히 반영하는 존재였다.
조선시대의 미술은 혁신이나 파격이 아니라 변주를 통해 발전했다. 변주는 그야말로 선대의 전통을 배우고 익힌 다음 시대의 흐름이나 개인적 정서를 가미하여 발전시키는 방법이다. 서양미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은 이런 방법으로 발전한다. 변주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일반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미인도]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선대의 전통이나 흐름을 바탕으로 그려졌다는 말이다.
신윤복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 신한평에게 그림을 배웠다. 또한 당시 중심 화풍이었던 진경산수화도 체계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알다시피 김홍도는 미술의 모든 갈래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신선도]가 중심이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신선도만으로도 후대에 전설로 남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통해 중국의 어디쯤 있다는 이상세계를 조선의 풍경으로 바꾸었다. 풍경을 직접 사생하면서 그린다는 의미의 ‘실경산수’와 이를 바탕으로 조선유학의 가치를 담은 ‘진경산수’를 창안했다. 이로써 조선이 곧 이상세계가 된 것이다. 최소한 선비들은 그렇게 여겼다.
김홍도는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겸재 정선과 마찬가지로 금강산을 직접 유람하면서 수많은 금강산그림을 남겼고 조선의 여러 명승지를 보고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무엇보다 중국의 전설에 따른 요지연도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신선도]를 그렸다. 요지연도 속에 작게 그려진 신선을 끄집어내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배경은 과감히 없애고 신선들로 화면을 채워 넣었다. 신선은 독립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여럿을 묶어 군선도를 창작하기도 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배경이 아예 없거나 극도로 축소되어 있다. 김홍도의 신선도와 풍속화는 동일한 화법이 적용되어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그랬듯이 김홍도의 [신선도]는 후대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두 명의 천재적 화가에 의해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신윤복은 진경산수화를 배웠고 김홍도의 풍속화와 [신선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신윤복은 산수화와 인물화 중에서 인물화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아마도 왕의 어진을 그린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경산수, 즉 이상세계에 살고 있는 신선은 여전히 중국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홍도의 [신선도]는 신선을 독립시키는 것까지는 조형적으로 완성했다. 또한 김홍도는 자신을 신선과 동일하게 여겼다. ‘선비는 곧 신선이다’는 명제를 그림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미인도]의 출현은 예견되고 있었다. 유학문화권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의 [미인도]는 신윤복의 붓끝에서 창조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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