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자칫 개인적인 넋두리가 되어 친구 래군이의 뜻을 깎아내리지는 않을지 걱정이지만 그냥 내가 느낀 소회를 적으려 한다.

지난 16일에 친구 래군이, 인권운동가 박래군씨가 구속되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고 그 진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한 세월호대책위 집행위원장으로, 불법시위의 책임자라는 게 그 이유란다.

그 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여러 집회에 참석하고, 촛불을 들기도 하고, 길거리를 행진하기도 하고, 경찰차벽에 야유를 보내기도 한 나는 그를 구속자로 등떠민 도피범인가?

▲ 1977년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찍은 사진. 가운데가 박래군, 왼쪽이 필자 노항래다. [사진제공 - 노항래]
오늘 새삼스럽게 한 시절 그와 엮인 특별한 인연을 우선 고백하겠다. 우리는 열일곱 살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만났다. 같은 반 급우였다. 시골 촌놈들이 경기도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 유학 온 처지로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돌아보면 좀 새까만 얼굴이 비슷해서 누가 보아도 도회지내기가 아닌 티가 역력했던 듯하다. 한 반에 60명 씩 한 학년이 10개 반으로 편성되는 학교에서 2학년에 다시 같은 반, 그리고는 3학년에 또 같은 반이었다. 그렇게 3년을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우리 둘 뿐이었고, 그 시절 배운 수학의 정석에 따른 확률이 아마 1/1,000이 아닐까 한다.

고등학교 시절 그냥 생각 없이 까불고 지내던 나와 달리, 그는 문학소년이었다. 수학시간에 우리말 사전을 무릎에 펴놓고 우리말 어휘를 익히던 문학반 친구들은 아무튼 좀 별종이었고, 그는 ‘촌놈에 별종’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각각 대학시험에 떨어졌고 각자 제 집에서 재수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국문과, 나는 정외과.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학생운동이라는 걸 했다.

그가 학생운동을 한 계기는 그가 속한 문학반에서 80년대 초반 참여문학에 대한 관심과 젊은 학생들 사이의 그러그러한 치기와 소명의식 같은 게 작용했을 게다. 나도 그러했으니까.

우리는 3학년 1학기 같은 시위사건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강제징집을 당한다. 우리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춘천 103보 신병훈련소로 직행했다. 같은 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부대로 헤어졌다.

입대 날이 같으니 제대 날도 같다. 우리는 제대했고, 그 사이 또 각자 정한 제 나름의 뜻을 따라 그는 주안공단으로, 나는 구로공단으로 노동운동이라는 걸 하겠다고 취업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그는 5월에, 나는 8월에 각각 구속되었다. 우리 고등학교 까까머리 시절 친구는 영등포구치소에서 다시 만났고, 그 뒤 10여 개월 동안 영등포교도소, 대전교도소를 나란히 따라가며 동행했다. 그리고 6월항쟁의 뒤 끝에 같은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꼭 11년 우리는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붙어다녔다. 그러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그는 문학에, 나는 내 삶에 제 각각 붙잡혀서 헤매었는데, 그 길이 우연히 같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11년 동안 각자가 쓰는 이력서는 이렇게 똑 같다.

그 뒤 우리는 제각각 살았다. 출소한 뒤 몇 개월 후 그는 동생 래전이의 충격적인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인권운동가로 일관했다. 나는 노동운동이랍시고 하다가, 정당에 발을 디뎠고,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사업가로 살고 있다.

내가 하는 협동조합은 그가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기 훨씬 이전 고등학생 때 꿈이었던 문학, 또는 글쓰기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서로가 하는 일에 나름 관심이 많고, 서로 응원해왔다. 그래도 서로의 삶은 또 그렇게 제각각 감당하게 된다.

▲ 17일 종로경찰서에서 담당 변호사가 면회한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표정은 여전히 밝다. [사진제공 - 김남주 변호사]

나이 들어 쉰을 넘긴 우리는 일 년에 몇 번 씩 둘이서,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끔씩 마주한다. 그리고 각자 사는 얘기를 듣고 응원의 말을 나눈다.

동년배 친구들에 비하면 좀 잔병치레가 많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하고, 가족의 근황을 건네 듣는다. 남한테 하기 어려운 형편을 속닥이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이런 상투적인 인사로 헤어지기도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둘이서 헤어질 때 자주 나누던 얘기도 있다. “왜 그렇게 험하게 살았는지 몰라.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시절의 뜻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강퍅하게 살아온 시절을 안쓰러워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이들과 몸을 섞고 뜻을 나누며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혹 세상을 견딘다며 ‘나만 옳다!’고 뻣대며 살았던 건 아닐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말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면 우리와 다르게 살아온 친구들의 지난날과 오늘의 얘기를 듣는다. 그런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마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고, 누구도 존중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 우리의 유연한 삶의 태도를 다짐하고 자랑하기도 한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살다보니 여기에 있는 거지.” 지난 연말 그런 자리에서 인권운동가 래군이가 한 얘기다.

‘삶은 스무 살 때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더라. 살아보니 엉뚱한 곳에서 힘이 들더라.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이번 여름엔 어디 놀러갔다 오자.’, 이런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그렇게 누구와도 경계심 없이, 살아온 그대로 만나 허리띠를 누그러뜨리고 먹고 마시고 나눌 준비로 충만하다. 그러기를 바랄 것이다. 정치도, 이념도, 직업도, 귀천도 우리 서로를 구별지우지 않을 만큼 성숙한 인간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을 나누고 헤어지지만, 또 우리의 삶은 그간 살아온 삶의 경로와 무연하지 않다. 날이 밝으면 그는 다시 만나던 이, 만나왔던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 때처럼 강퍅하지 않다. 더 많은 이에게 응원의 뜻을 전하고, 더 많은 이를 위로하고, 더 많은 이에게 작은 힘이라도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며 만난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이 아닐까 한다.

그가 검사인들, 재판관인들, 경찰인들 경계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는 누구와도 교감하고 싶어한다. 그는 변했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익어왔다. 그런데 왜 서른 해도 더 넘은 시절의 어느 장면과 같은 구속영장 발부 소식을 접해야 하나?

그의 구속은 삶을 익혀가는 그를 단련시키는 또 하나의 연마장이 될 것이다. 그는 더 풍성한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하고, 그의 손길이 필요한 가족이 있는 그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은 슬프다.

스무살 시절 정의를 세우려 칼날 같은 뜻을 벼리던 그는 이제 세상을 품으려 풍성하게 익어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40년 전의 논리로 그를 몰아대고 있다. 그는 손을 내미는데, 야멸차게도 손을 뿌리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수정,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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