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를만드는여성회'가 17일 오후 경남 산청군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피해자 여성의 목소리 듣기' 행사를 열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사람들이 몰려 나가는데 정신이 없는기라. (군인들이) 순간 총을 갈겨대는 기라. 왜 죽였는지 어찌 아노."

1951년 2월 7일. 한국전쟁 발발 8개월이 채 안된 이날은 음력 설 이튿날로 추운 겨울이었다. 작전명 '견벽청야(堅壁淸野)'.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이라는 명분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함양군 점촌, 유림 서주마을에서 민간인 705명을 무차별 사살했다.

김갑순(76세) 할머니는 방곡에서 11살의 나이로 10명의 가족이 몰살당한 가운데 생존했다. 그리고 왜 자신들의 가족이 죽어야 했는지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대표 안김정애)는 17일 오후 경남 산청군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교육관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 주제 중 두 번째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피해자 여성의 목소리 듣기'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갑순 할머니는 11살 어린나이의 기억을 증언했다. "아침 10시쯤 됐는데 군인들이 몰려오고 총소리가 나고 군인들이 와서 죄없는 사람들 다 나오라 했다"며 "마을사람들 보고 논으로 나가라 하는데... 순간 총을 갈겨대는 기라."

▲ 김갑순 할머니.[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당시 김 할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언니 두 명과 젖먹이 두 명, 일곱 살과 네 살 짜리 남동생 등 10명과 함께 총에 맞았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실신, 해가 뉘엇 넘어갈 즈음에 깨어났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목숨을 잃었다.

다른 증언자로 나선 우기묘 할머니(77세)도 당시 12살로 방곡에 거주, 14명의 가족 중 10명을 잃었다. 총에 맞아 실신한 김 할머니와 달리 우 할머니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도 정신을 차려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군인들이) 산에 안간 가족들도 나오라쿠데예. 나오라 카니께 쭉 나오니께 총을 한 번 갈기더라고. 보니까 군인들이 또 올라와요. 그때 와서 총을 놓고 간기라. 엎쳐논 게로. 천지도 모르는 사람이 또 그 자리 곁에 엎쳤어요."

"사람 탄 거 보면 환장하지. 앞에 태우는데 기름이 바글바글 끓고. 시체가 타는 걸 봤다."

당시 11사단 9연대 3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견벽청야' 작전을 펼쳤지만 정작 빨치산은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산청.함양 지역에 빨치산이 활보했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빨치산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한마디로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한 것.

실제 1998년 정부가 공식 집계한 희생자 통계는 10대 45.33%, 60대 이상 6.45%, 20대에서 50대까지 여성23.0%로 이데올로기 활동을 할수 없는 연령과 성별이다. 이 통계는 산청.함양 양민학살 유족회가 집계한 709명과 달리 정부가 386명을 인정한 숫자에서 나온 것이다.

심지어 김갑순 할머니는 부친이 구장직을 맡았고 경찰가족이었음에도 몰살당했다. 이는 다른 학살지역인 함양군 유림에서 군.경 가족을 제외했던 것과 다른 행위였다.

"졸지에 혼자가 된 여성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 우기묘 할머니.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김갑순 할머니와 우기묘 할머니의 삶은 달랐을 수 있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김갑순 할머니는 함양군에 살면서 끊임없이 죽은 사람들의 귀신 꿈을 꾸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서울로 올라가 식모살이를 했다.

"유림 아천 살 때는 사람 죽고 했던 일이 생각나 밤새도록 잠도 못 잤다. 그런데 서울 가니까 귀신도 못 따라 오는지 꿈에 안 나타나더라. 고향에서는 꿈 내내 울고 다녔는데."

서울 식모살이를 전전하던 할머니는 다시 고향에 내려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죽은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떨쳐낼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난 아직도 부모님 생각한다. 친정엄마 있는 사람이 부럽다. 어떻게 친정엄마가 다 있을꼬..."라고 토로했다.

19살에 시집을 간 우기묘 할머니는 "형제가 남아있으면 못 할 말도 의논하고 머리 맞춰가 살겠지만 맨날 가슴에 묻어놓고 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친정 부모, 형제 없어서 무시받고 살았다. 사람 가치 없이 보고..."라며 고된 시집살이를 털어놨다.

그리고 "어머니는 좋은 데로 갔는가. (꿈에는) 안 보여요. 어쩌다가 한 번씩 보이지 잘 안 보여요. 꿈을 꾸면 숨고 아무리 뛰어갈라고 해도 군인들이 나타난다. 어머니는 꿈에 안 보인다"며 60여년 전 자신에게 벌어진 학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전쟁은 흉측하다. 국가는 개차반이다"

군인에 의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김갑순, 우기묘 할머니는 전쟁을 몸서리치게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가족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여전히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이가 없음이 통탄스럽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1998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에회복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결정'에 따라 2001년 12월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오봉로 530번지에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그러나 정부는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1951년 12월 대구고등군법회의는 9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에 징역 10년, 경남계엄사령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이들은 사면복권, 한동석은 강릉시장에 기용됐고, 김종원은 치안국장에 임명됐다. 여기에 11사단장이던 최덕신은 '견벽청야'를 기본 작전으로 제시한 인물임에도 해임됐을 뿐, 1963년 외무부 장관을 지내다 1986년 월북, 1989년 사망했다. 그의 부인이 북한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다.

이런 사실만 놓고도 김갑순, 우기묘 할머니는 "국가가 개차반이다. 아무 말도 없이 잡아 죽인 게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 산청.함양 사건추모공원 위령탑 '원혼소생상'.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게다가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 유족들에 대한 보.배상법은 국회에서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연관돼, 유족회 간의 의견 불일치도 한 몫하는 아쉬움이 있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부터 사흘간 719명이 통비분자로 몰려 학살됐고 이보다 앞서 산청.함양 사건이 벌어졌지만, 거창지역은 민간인 학살사건을 우선적으로 공론화하고 '거창사건 등'이라는 특별조치법 표현처럼 사건 진상규명의 우위에 있다는 것 때문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학자들은 '견벽청야' 작전은 산청.함양.거창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들어 '산청. 함양.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불려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날 증언 말무리에서 김갑순, 우기묘 할머니는 전쟁의 참화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날 목소리 듣기에 참가한 10여 명은 추모공원을 둘러보고 위패봉안각에서 분향과 조의를 표하면서 조속한 해결을 위해 연대할 뜻을 밝혔다.

▲ 이날 '목소리 듣기'에 참가한 10여 명은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 해결에 연대할 뜻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조성된 합동묘역. 현재 정부가 공식 인정한 386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
 
■ 사건개요
 
□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5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양민을 통비 분자로 간주
 
 □ 집단학살한 사건 (제 4대국회 제 35회 임시회 - 산청ㆍ함양ㆍ거창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 2인 : 1,818명 인명 피해)
 
 □ 사망자 및 유족 등록 사항(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 심의 위원회 결정), 사망자 : 386명 (산청 292명, 함양94명) * 유족회 주장 : 705명, 유족 등록 : 732명 (산청 551명, 함양181명)
 
■ 사건일지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 1951년 2월 5일 지리산공비 토벌작전 실시
 - 작전명령 : 제5호 '견벽청야'
 - 작전부대 : 육군 제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
 
□ 1951년 2월 7일 오전 8시~오후 6시, 양민학살 : 705명
 -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가현, 방곡마을 주민
 -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주민
 ※ 이후 거창군 신원면 이동 719명을 집단 학살함(1951. 2.9~2.11)
 
□ 1951년 3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폭로되어 진상조사단 구성
 
□ 1951년 4월 7일 국회합동진상조사단에서 양민학살 사건 현장조사
 
□ 1951년 5월 14일 국회에서 '양민학살 관련책임자 처벌에 관한 결의문' 채택
 
□ 1951년 12월 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에서 선고공판 9연대장 오익경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 징역 10년, 경남계엄사령관 김종원 징역 3년
 
[출처-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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