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도/추성부도(秋聲賦圖)/비단에 수묵담채/1805/214*56/보물 제1393호/호암미술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추성부(秋聲賦)’는 가을 소리를 듣고 쓴 감상 시(詩)다.
그러니까 ‘추성부도’는 이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추성부’는 중국 송나라의 문필가인 구양수의 유명한 글이라고 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둥근 달이 밝게 떠 있는 깊은 밤에 책을 읽다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며 자연의 영속성에 비해 덧없는 인간의 삶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추성부’의 핵심 문장은 이렇다.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성월교재星月皎潔
명하재천明下在天
사무인성四無人聲
성재수간聲在樹間

김홍도의 생몰 시기를 대략 1745~1806?으로 잡는다.
말년의 김홍도가 아들에게 쓴 편지의 날짜는 1805년 12월인데 그 편지에는 김홍도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1809년 순조 때 김홍도의 형 홍석주가 ‘추성부도’가 그려진 [해산첩]을 받았을 때 김홍도는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죽기 전에, 거의 마지막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이다.
작품에는 1805년 12월 25일 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김홍도/추성부도 부분. [자료사진 - 심규섭]
 
이 그림은 비록 중국의 시를 그렸지만 말년의 김홍도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아니, 자신의 삶이 그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림 속의 초가집이나 동자의 머리모양은 중국풍이다. 또한 책을 읽고 있는 주인공도 송나라 시인 구양수일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이국적이지 않다. 오히려 친근한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렸다. 진경산수화를 배운 김홍도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또한 ‘추성부’라는 시에는 언급되지 않는 김홍도만의 소재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학과 태호석과 종려나무이다.
마당 앞쪽에는 두 마리의 학이 달을 보고 소리를 내고 있다.
김홍도는 스스로 고고한 학처럼 살고자 했고 다른 그림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학은 신선의 상징이자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선비가 신선처럼 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은 불로장생하며 도술을 부리는 그런 신선이 아니다. 세상의 속된 것을 모두 버리고 참된 자유를 찾는 그런 신선이다.
또한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커다란 태호석이 앞마당과 집 안쪽에 서있다. 집 안쪽에 있는 태호석 옆에는 종려나무가 자란다.
태호석은 풍파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못난 돌이다. 이런 돌의 생태적 특징을 차용해 어려움 속에서도 군자의 성품을 버리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 혹은 조선 말기에는 학문의 쇠퇴와 도교의 영향으로 태호석은 부자와 권세의 상징으로 변질된다.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산골의 허름한 초가에 살고 있기에 태호석을 부귀와 권세의 상징으로 보기 어렵다.

가끔 김홍도의 그림에 나타나는 종려나무를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종려나무는 야자수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이런 면으로 보자면 파초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파초에 관한 상징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 있지만 종려나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특히 종려나무 이파리는 요즘 사용하는 커다란 화환의 바탕에 사용되고 있다. 화려하고 거대한 화환은 그야말로 허영과 거만의 느낌을 짙게 풍긴다.
하지만 이 그림 속의 종려나무에서 느껴지는 상징은 확고하다. 그것은 바로 대나무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확실히 대나무 잎과 종려나무 이파리는 닮았다.
대나무의 상징은 지조와 절개이다.
험난한 세상의 풍파에도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생태적 특성 때문이다. 이런 대나무의 특성은 탄성이 높은 나무 자체에 있겠지만 점차 이파리로 옮겨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으로 표현했을 때, 아무래도 나무보다는 이파리의 모습과 변화가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일수록 대나무 이파리의 표현에 집중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환쟁이들의 어설픈 민화에서의 대나무는 나무 자체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그리지 않고 종려나무를 그린 이유는 뭘까?
그것은 한마디로 천재화가 김홍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최첨단 표현방식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화가가 대나무를 그릴 때 국제적인 화가 김홍도는 종려나무를 멋있게 그려넣은 것이다. 종려나무는 중국 남경에서는 흔한 나무인데, 청나라를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던 김홍도는 이러한 특권(?)을 이용해 종려나무의 상징을 수용해 조선에 퍼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종려나무가 그려진 그림은 김홍도의 전매특허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려나무는 다른 화가들이나 후대로 확산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종려나무를 볼 수 없었고, 무엇보다 대나무가 가진 조형성을 대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선비들이 문인화를 그릴 때 대나무 대신 종려나무를 선택했다면 표현의 어려움에 난감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뾰족한 이파리를 가진 종려나무는 대나무처럼 꼿꼿한 절개를 상징한다.

김홍도는 구양수의 시를 주제로 [추성부도]를 그렸지만 그 속의 모습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양수의 시에는 슬픔과 쓸쓸함, 인생무상의 정서가 짙게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학과 태호석, 종려나무의 장치를 통해 그림의 주인공을 김홍도 자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대가의 자존심은 여전히 꼿꼿하다.
학은 밤하늘의 달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겨울이 가까워지는 늦가을임에도 종려나무의 이파리는 날카롭다. 2개의 태호석은 김홍도의 자존만큼이나 높고 크다.

아래의 글은 그림의 왼쪽에 적혀있는 구양수의 [추성부]라는 시의 전문이다. 김홍도가 직접 쓴 글이다. 글의 내용과 그림을 잘 비교하면 노년의 김홍도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단단함과 대가의 풍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김홍도/추성부도 부분. [자료사진 - 심규섭]

밤에 글을 읽다가 서남쪽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섬뜩 놀랐다.
귀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다. 무슨 소리일까? 바람소리인가, 낙엽이 구르는 소리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동자를 불러 무슨 소리인지 네가 좀 나가 보아라 하였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가을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 슬프다. 이것이 가을의 소리로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아아! 산천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는구나.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걱정거리를 마음에 담고, 그 번거로운 일들이 몸을 괴롭히니,
마음이 흔들리면 반드시 정신 또한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감당할 수 없는 일들까지 마음이 미치고,
자신의 슬기로 헤쳐갈 수 없는 것을 근심하게 되어서는,
혈색 좋은 얼굴은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그 검게 빛나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쇠붙이나 돌같이 단단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고자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해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탄한단 말인가?
동자는 곁에서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단지 여기저기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득하니,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을축년, 동지가 지난 후 3일 되는 날 단구가 그리다.’
(해석-http://blog.daum.net/gijuzzang/7417047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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