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주의력이 깊지 못한 사람은 두어 번 본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처음 본 듯한 자메뷰(jamais vu, 未視感) 현상을 종종 겪는다. 심지어는 분명히 처음 본 사람인데 상대는 나와 인사를 나눴다 하고 받은 명함을 명함집에 넣다가 그의 이전 명함을 발견하고 내 스스로의 기억력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진다. 뭐 그렇다고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 바에야 그러려니 하고 말긴 하지만. 그런데 이토록 무딘 나에게도 처음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뷰(déjà-vu, 旣視感) 현상이 종종 발생하는 걸 보면 그나마 정상적 인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서울 6.15민족공동행사가 무산되고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개최된 뒤 평양 8.15민족공동행사의 행방마저 아리송한 상황이다. 이리저리 두드려봐도 별 시원한 답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서울 자체행사나 잘 준비하는 것이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민간통일운동이 제 갈길을 가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자조섞인 진단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8.15민족공동행사 추진 과정을 취재하면서 떠오른 데자뷰는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바로 2001년 평양 8.15민족통일대축전이 그것이다.

▲ 14년 전인 2001년 8월 15일, 역사상 처음으로 8.15민족공동행사가 평양 3대헌장탑 앞에서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4년이라는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역사상 첫 대규모 민간 대표단의 평양 방문이라는 ‘역사상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숱하게 붙었던 2001년 평양 8.15민족통일대축전과 광복 70주년을 맞아 추진하고 있는 평양 8.15민족공동행사는 애초에 공통점을 일부러 찾을래야 찾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비교 불가’ 사안이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축전은 대표단 337명에 6박7일 간의 일정, 북측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이하 고위간부들의 총출동, 김정일 위원장 면담 추진(무산됐지만) 등 지금으로서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축제 분위기였다.

도대체, 2001년 평양 8.15민족통일축전과 올해 광복70년준비위가 추진 중인 8.15민족공동행사에서 데자뷰를 느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어리벙벙한 내 두뇌가 또 뭔가 심각한 착각이나 오동작을 일으킨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충분히 의심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데자뷰를 느끼게 된 과정을 곰곰이 따져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14년의 세월을 거슬러 나의 두뇌 속에 희미하게 저장된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계기들이 제법 여럿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정부가 서울 6.15민족통일대회 때부터 일관되게 견지한 입장은 통일부 대변인이 밝힌 대로 “남북 공동행사가 민족동질성 회복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순수한 사회문화교류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해 6.15북측위원회 대변인은 “북과 남, 해외가 모여 진행하는 통일행사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을 추동하는 전민족적인 통일회합, 민족단합의 대축전으로 되여야 하며 순수한 예술, 체육, 문화교류의 공간으로 될수는 없다”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2001년 평양 6.15민족대축전 당시에도 우리 정부는 ‘조국통일 3대헌장탑’ 앞에서 열릴 개폐막식에 남측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는 조건으로 ‘조건부 방북 승인’을 내줬고, 평양에 도착한 남측 대표단 일부는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다. 3대헌장탑 앞에서의 개폐막식은 ‘정치 행사’라는 것이 당시 정부의 판단이었다. 올해 8.15민족공동행사에 대해서도 통일부 관계자는 “꼭 기념행사를 해야만 하느냐. 순수한 체육, 문화행사를 같이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수’하지 않은 정치행사를 승인해줄 수 없다는 것.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당국자들의 생각은 어쩜 그리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을까?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다...” <독립행진곡>의 한 대목처럼 우리 민족이 다시 빛을 찾은 광복절은 남북해외 모든 동포들이 함께 기리는 민족공동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념일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순수’를 갖다 붙여도 그야말로 순수 정치 기념일이 본령일 따름이다. 물론 이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방식이야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만.

뿐만 아니다. 6.15남측위원회는 당초 6.15민족공동행사를 평양에서 치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남북 당국간 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대규모 방북은 어렵다고 판단해 차라리 북측 대표단을 초청해 서울에서 치르자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겨우 30~40명 규모의 방북단, 그것도 정부의 눈밖에 난 인사나 단체는 배제된 대표단을 꾸려 방북하는 것이 명분이나 실익이 별로 없다는 판단이었으니라. 특히 정부가 방북 허가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방북단 ‘선별 배제’를 일삼아 온 것은 2001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형국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비전향양심수 63명이 송환되는 등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던 2001년 평양 8.15민족통일대축전 당시에도 방북신청을 낸 이종린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등 3명의 방북이 불허됐고, 특히 비전향장기수들을 소재로 한 다큐영화 <송환>의 감독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도 불허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다가오는 평양 8.15민족공동행사의 경우에도 만약 남측 대표단이 방북하게 되더라도 어느 단체 소속 인사들은 불허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접하면서 2001년 8.15행사와 데자뷰를 느끼는 것은 기자의 기우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부의 정치행사 불허나 선별 배제라는 불변의 기준보다도 데자뷰가 뇌리를 스친 것은 다른데 더 깊은 연원이 있다. 평양 8.15민족공동행사를 추진하면서 민관 모두 정작 가장 우려하는 것은 수구언론과 단체들의 방북대표단을 타겟으로 하는 이른바 ‘종북몰이’다. 종편은 하루종일 대표단의 행적 하나하나를 문제삼으며 여론을 호도할 것이고, 고소고발을 전문으로 하는 극우단체는 몇몇 방북대표를 고발할 것이라는 불보듯 뻔한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축전 당시 3대헌장탑 개막식부터 시작해서 폐막식 참석과 ‘만경대 방명록 사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보수언론의 집중공세는 결국 7명의 구속자와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사퇴를 불러왔다.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단순히 순환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Vico)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나선형(螺線形)의 진보’를 거쳐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2001년 남북 사이에 첫 길이 열린 ‘6.15 감격시대’에 뜨겁게 치러졌던 2001년 8.15민족통일대축전과 14년이 흐른 뒤 보수정권 하에서 ‘6.15 수난시대’에 치러야할 광복 70돌 8.15민족공동행사가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아니 같아서도 안 된다. 정부 차원에서도 경원선 복원공사를 시작하고 국무총리와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남북공동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의 소원’을 천만의 동포들과 함께 부를 ‘천만의 합창 - 나비 날다’가 광복절 당일 잠실운동장 공연에 북측 조선국립교향악단과 금강산가극단 등을 초청하는 등 정부가 선호한다는 민간차원의 ‘순수’ 문화행사도 여기저기서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남북 당국의 의지다.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을 이대로 넘길 수 없다는 남북 당국과 국민-인민들의 의지가 하나로 모일 수 있다면 그깟 장소나 순수성, 종북몰이 따위가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랴. 나의 데자뷰가 그저 얼핏 스쳐가는 덜떨어진 개인의 기우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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