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 녀석과 가볍게 술자리를 하던 중, 나의 전방위적 ‘모두까기’를 듣던 녀석이 대뜸 이런 말을 던졌다. “야,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회라지만, 어쨌든 좋은 점도 있는 게 사실 아니냐, 네가 말하는 것처럼 죄다 문제라면, 이미 망해도 진작 망했어야 하는 것 아냐?”

지당하신 말이었다. 당연하다. 대한민국은 그래도 괜찮은 나라다. 40년 가까이 살았다고, 정이 들어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본 이들이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살기 좋은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도, 괜히 폼 잡으려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좋다.

그런데 난 그런 말이 듣기 싫기도 하다. 이른 바 진보 진영, 혹은 진보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사회비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주장들을 ‘배부른 소리’ 혹은 ‘꿈같은 투정’ 따위로 치부하는 이른 바 보수들의 지적질이 심히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에 만족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음흉하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늘 끊임없이 단 1cm라도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만약 멈추었다면, 어쩜 이 지구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인류는 불만으로 폭발했을 것이다.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중요하지, 나아감 그 자체가 문제는 절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때문에 진보는 인류에게 있어 불가피한 그 무엇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나아가야 할, 더 나아져야 할 일들이, 삶들이, 가치가 우리 주위엔 여전히, 오히려 더 많이 쌓이고 있다.

 

▲ 노회찬.유시민.진중권,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생각해봤어?』, 웅진지식하우스, 2015. 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름만 들어도 만만치 않은 세 명의 ‘이빨’들이 오랫동안 팟캐스트를 진행해왔다. 이들 중 노회찬과 유시민은 아주 미약하게나마 인연이 있었고, 진중권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책과 말과 행동으로 꽤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다.

세 사람의 수다는 주로 묵직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정치 팟캐스트이니 말랑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가공할 이빨 셋이 모였다는 그 자체가, 그리고 셋의 개성과 배경 그리고 철학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 폭발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꼬박 챙겨 들었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들을 때마다 많이 배우고 또 웃었다.

각자 다른 차원의 내공과 아우라를 지니고 있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일단 셋 다 욕을 무지하게 많이 먹고 자랐다는(!) 점. 아, 지금도 보수나 수구들 그리고 일부 진보들에게 잊힐 만하면 욕을 드시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에 수긍하거나 적응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늘 진보를 꿈꾼다는 점이다. 무기력을 거부하고, 복종과 굴종보다는 거기에 맞서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초강력 이빨과 그에 못지않은 행동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장관, 국회의원, 교수. 일반 시민들은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권력(!)을 누린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허투루, 거저먹은 이는 없었다. 업적은 그렇다 치고, 성과는 그렇다 치고 일단 할 만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이들은 자신이 잘 나갈 때나, 그 반대일 때나 늘 앞으로 나갔고 나가고 있다. 이게 중요하다. 팟캐스트의 진행이 그걸 증명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만 같은 이들이 함께 모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떠들고 고민하는 모습. 여기에 가장 큰 평가를 하고 싶다.

책은 말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단 천천히 다시 음미할 수 있고, 초대된 전문가들의 내공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말로만 들었을 땐 순간 이해되지 않았던 이야기들도 쉽게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책으로 읽어 더 분통 터지기도 했다. 도대체 모두까기를 멈출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우리가, 입으로 떠든다고, 몇 안 되는, 게다가 힘도 권력도 돈도 없는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친박 대 비박, ‘박박거림’에 짜증을 내다가도 총선 때는 기억상실증이 되어 새누리당에 표를 주는 이해곤란 분들이나, 메르스 사태 와중에 황교안 후보자가 슬그머니 총리가 되고, 탄저균 파문은 파문으로 끝나버리고, 성완종 리스트가 허무맹랑하게 종결되고, 그 와중에 경제가 질식사하고, 서민들의 생계도 막막해지고, 아무튼 이따위 멍멍이 같은 짓거리들이 버젓이 벌어져도, 오로지 새정치민주연합이 무능력하고 멍청하고 썩었기 때문이라고, 멀찍이 떨어져 침 뱉는 이들과는, 그래도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왜? 창피하니까!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다른 똑똑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이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이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 어떤 ‘허무한 자위행위’나 ‘술안주로 정치인 씹기 혹은 암튼 맘에 안 드는 돈 많은 인간들 씹기’가 아니다. 세금 온전히 내고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당당한 권리이자, 때론 의무이기도 하다. 나라가 개 같으면 개 같다고 해야지, 개를 개가 아니라 하시면 곤란하다.

당연히 ‘노유진’은 나보다 똑똑하고 경험이 많다. 거기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럼 끝이다. 배우면 된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중 맘에 들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시키면 된다. 그 뿐이다.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공부는 즐겁다. 이들과의 만남은 즐거웠다.

올 한 해 동안 정부는 지겹게도 광복 70주년을 떠들었고, 이와 맞추어 통일준비를 떠들었다. 권력에 눈치를 보는 여타 기타 베이스 드럼 등등도 광복이다 통일이다 뭐다 해서 전방위적 예산 낭비와 인력 낭비와 정력 낭비를 곳곳에서 벌이고 있다. 우습다 못해 처량하다.

북과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정권이 그야말로 입으로 먹고 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이나 소속된 단체들을 그렇다 치고, 언론이나 학계나 기업들도 저마다 통일이 어쩌고 광복이 어쩌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안 마셔도 취한 듯 속이 좋지 않다. 허무하고 또 허무하기 때문이다.

책에는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과 서보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에 대한 고민을 잠시나마 할 수 있다.

글을 읽다보면 올해 광복 70주년이란 기쁨보다 왜 분단 70년이란 치욕과 슬픔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느껴진다. 진정한 광복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북과는 이미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강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일본과는 이제 그만 친해지고만 싶은 지금도 위안부 피해할머님들은 눈을 감고 있다.

필립 델브스 브러턴의 『장사의 시대』 중 어느 보험회사의 설립자가 부하 직원에게 한 조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는 비단 세일즈맨만을 위한 조언은 아닌 듯하다. 자신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강하게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아가는 이들, 동시에 이 세상 역시 나 하나로 바뀌는 것은 ‘쥐뿔’도 없다고 체념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필요한 조언일 듯싶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사고방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면 성격이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지면 자아가 달라진다. 그리고 일단 자아가 달라지면 새 인생이 펼쳐진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도, 그렇다고 당신이 바뀔 가능성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 고쳐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내 삶과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도 난 이미 본전은 뽑았다고 본다. 결국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믿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선택이 나중에 후회로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U-대회도 안 되면, 되는 게 뭐 있냐.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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