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아침 산책 중에 꽃다발 든 인파를 우연히 목격하다

지난 2013년 중순경 방북시 평양시내 윤이상음악당 부근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와 일행은 산책을 하기 위해 이날도 어김없이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고려호텔을 빠져나와 대동강변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 15여분 정도를 걷고 있었는데 눈앞에 삼삼오오 꽃다발을 든 일련의 학생들과 주민들 일행들이 어디론가 부지런히 걷고 있는 모습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다.

“야. 이거 뭐야? 꼭두새벽부터 학생과 주민들이 뭔 일 때문에 꽃다발을 들고 가는 거지?”
“그러게요? 무슨 큰 행사가 있는 것 같은데요?”
“한번 따라가 봅시다.”

우리들은 ‘웬 횡재냐?’ 하는 마음으로 기대감을 갖고 따라가면서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일행은 평양역전에서 평양호텔(오페라극장)로 이어지는 대로변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던 중이었다. 꽃다발 일행들이 ‘윤이상음악당’ 빌딩을 지나칠 무렵, 길 건너편 도로가에서 무언가 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듯한 곳으로 진입하려면 빌딩 1층 부분이 터널처럼 뚫려 있는 곳을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평양체류 중에도 자주 지나치는 곳이었다. 허겁지겁 도착해보니 거리에는 초급중학교(중학생) 남녀학생들과 고급중학교 남녀학생(고등학생)들이 형형색색의 다양한 인조 꽃다발들을 손에 들고 길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서 누군가를 환영하려는 모습들이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하며 행사의 진원지로 보이는 목적지에 당도하자 그곳은 바로 평양 ‘제1목욕탕’ 앞이었다. 지난해 방북시 일행들과 함께 길가를 지나다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목욕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이곳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목욕탕은 평양시민들과 내국인들만 이용할 수가 있고 외국인과 해외동포들은 새로 건축한 류경원에 있는 목욕탕 사우나를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이용할 수가 있다고 해서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목욕탕 앞에 도착하니, 마침 고등중학교 남녀학생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 악단이 힘 있고 경쾌한 경음악 행진곡들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대형버스 한 대가 행사장 도로 한복판에 주차돼 있었다. 버스 주변에는 차량지붕에 대형나팔들이 설치된 방송선전차량과 공무용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학생들로만 구성된 악단은 평일에도 평양시내 곳곳에서 매일 아침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경쾌한 하루를 열어주는 연주를 하는 소위 ‘거리의 악단’이었기에 이미 눈에 익숙한 학생들이었다.

“아니 이곳에서 뭘 하는 거지?”
“그러게요?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단체로 목욕을 하러 왔나?”

대충 봐서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됐다.

▲ 고려호텔 앞에서 아침산책길에 나서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새벽부터 꽃다발을 손에 들고 길가에 늘어서 있는 중학교(중고등학교) 남녀학생들. [사진제공-최재영]

▲ 고급중학교 브라스밴드 악단이 연주하는 모습과 목에 거는 꽃다발 뭉치를 들고 달려 가는 관리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자원입대자들을 환송나온 가족들과 친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자원입대하는 예비 인민군 병사들 환송식장에 당도하다

나와 일행은 길가에서 꽃다발을 들고 물끄러미 서있던 남학생 두 명에게 다가간 후에야 이 행사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학생! 오늘 여기서 무슨 행사가 있나요?”
“형님들이 미제와 싸우려고 오늘 자발적으로 인민군대에 가는 날이라서 우리가 이처럼 환영 나왔지 않습니까!”

마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막힘없이 재빠르고도 우렁차게 답변해 주었다. 나는 그 옆에 서 있는 여학생들에게도 다가가 같은 질문을 건넸다. 여학생들은 자신들의 나이를 15살과 16살이라고 밝혔다.

“자랑스런 우리 오빠들이 미국놈들과 싸우려고 조선인민군대에 가는 날이라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이렇게 환영나왔습니다.”
“그럼 학생의 친척이나 친오빠가 오늘 군대 가나요?
“친오빠는 이미 군대 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오빠가 조국을 위해 군대 가는 날이라서 새벽에 일어나 이처럼 참석했습니다.”

자원입대자들을 태우고 갈 대형버스 주변에는 이미 환송하려고 몰려든 입대자들의 친구들과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버스의 측면에는 붉은 글씨로 ‘영웅적 조선인민군 만세!’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으며 탑승시간이 임박해 보이는데도 입대자들은 아쉬운 듯 아직도 가족 친지들이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앳된 얼굴의 자원입대 청년들은 이미 빡빡머리를 한 상태였고 그들의 모습에서 벌써부터 의젓한 군인의 포스가 느껴졌다. 자원입대하는 경우라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는 여유도 있어 보였으며 동시에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하게도 보였다. 이윽고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에 탑승하는 청년과 아들의 손을 한번이라도 더 잡아보려는 애처로운 어머니의 모습도 눈앞에 보였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며 여차친구와 애정을 나누는 청년의 모습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창밖의 친구들을 향해 애교를 부리며 우정을 나누는 귀여운 모습의 청년도 있었고, 눈물을 글썽이다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해 콧날을 시큰 거리더니 이내 창가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청년의 모습도 보였다. 환송객들 중에는 떠나는 주인공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들도 보였고 작별하는 모습을 기념하려고 디지털카메라와 손전화로 사진을 찍는 장면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 아쉬운 마음에 버스창가를 향해 손을 내밀며 작별인사를 하는 환송객들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제1목욕탕건물 앞에 주차된 입영버스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머리를 삭발하거나 모자를 삐딱하게 쓴 개구쟁이 모습의 자원입대자들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귀가 약간 안 들리고, 눈이 잘 안보여도 기필코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니

내 눈앞에서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니 내가 30년 전에 징집명령을 받고 군에 입대하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를 환송하려고 따라온 친구들과 함께 전철을 타고 망월사역인지 의정부역인지에서 하차해서 의정부시 용현동 306보충대에 입소했는데 당시는 306보충대를 주로 101보충대라고도 불렀다. 나는 그곳에서 신병교육대에 배치받기 전 3박 4일간 동기들과 머무르며 인성검사와 적성검사, 예방접종, 보급품 등을 지급받았다. 결국 나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빡세다고 소문난 보병 제 26사단의 신병훈련소(일명 가래비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두 달 후 자대배치를 받았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 이곳의 청년들도 신병훈련소로 가서 힘든 군사훈련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까지 남과 북의 청년들이 같은 민족, 같은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지 안타까움을 넘어서 알 수 없는 통증까지 밀려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출발하려는 입영버스를 바라보며 못내 아쉬워하는 어느 여성에게 다가가 오늘 가족 중에 누가 입대하느냐고 물었다.

“오늘 우리 둘째 아들이 저기 타고 있습니다. 저 아이는 어릴 때 다친 귀가 약간 잘 안 들리는데도 굳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인민군대에 가야 한다면서 저렇게 자원하지 뭡니까? 우린들 어쩔 도리가 없지 뭡니까?”

그 옆의 어느 남성은 묻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의 조카가 오늘 자원입대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제 조카가 평소에 눈이 좀 안 좋아서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이번에 인민군대에 자원입대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이번에 가게 됐습니다. 우리들이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해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지 뭡니까? 그러나 내 조카의 애국심에 우리들도 모두 감동을 받고 많이 배웠습니다.”

북에서는 고위층일수록 자신들의 자식을 최전방 민경부대에 보내려 한다는 말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듣던 대로 북의 체제가 윗물부터 맑다는 생각을 했으며 고위층들이나 평범한 주민들이나 모두들 자녀들을 투명하게 교육시키려 하고 있으며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이니까 이처럼 애국심과 충성심이 확고한 듯 보였다. 내게는 이런 가족들의 발언과 모습들이 가식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역기피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남한에서는 일부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인생의 낭비처럼 생각하는 정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었다. 아직도 탑승하지 않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던 ‘김건철’이라는 이름의 청년을 붙들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방문한 동포입니다. 오늘 인민군대로 떠나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당연히 공화국 인민이라면 누구나 다녀오는 군대인데 저라고 해서 뭐 특별할 게 있습니까? 요즘 미제가 악랄하게 우리 공화국 모략책동을 일삼으며 침략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모두가 일떠서 당장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사회에 있을 때는 뭐하다가 이번에 군에 가는 겁니까?”
“저는 전문대학에 합격했는데 중단하고 이번에 인민군대를 자원했습니다.”

자원입대하는 청년들에게 다가가 몇 마디 질문을 하면 마치 준비된 원고를 읽듯이 입에서 줄줄이 막힘없이 자신들의 국가관과 애국심을 드러내 보였다. 김건철 군과 다른 몇몇 친구들의 입에서 나오는 각오와 결단을 들어보면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우월감이 넘쳐 있었고 그들의 애국심은 매우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자원입대자들을 태운 버스가 문이 닫히고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환송식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나 행사는 별도로 없었다. 책임을 맡은 담당 관리가 최종 인원점검을 마친 후에 별 이상이 없자 입영버스가 출발하였다. 관용차량 운전을 하는 관리에게 살짝 물어보니 이 자원입대자들을 태운 버스는 곧바로 신병훈련소로 떠난다고 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인파들은 주로 입대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이웃주민들과 그들의 출신학교(고급중학교) 선후배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일가친척과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하는 주인공들에게 꽃다발과 선물들을 건네주었으며 무사하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올 것을 기원하는 모습들이었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은 남한의 입영열차나 입소 모습 전경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며 자식을 군대에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과 부모를 남겨두고 군대로 떠나는 자식의 마음은 남이나 북이나 모두 동일해 보였다.

차량들이 떠나려 하자 브라스밴드 악단은 더욱더 신나는 군대 행진곡들을 연주했으며 그 소리가 평양의 새벽하늘을 가르며 힘차게 울려 퍼졌다. 입대 청년들을 태운 버스 선두에는 방송선전차량이 에스코트를 하였고 맨 뒤에는 관용승용차가 따라붙었다. 길가에 줄지어 있던 학생들과 이웃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쉬지 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 저 젊은이들 중에는 남과 북의 군대들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155마일 휴전선으로 갈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찹찹해졌다.

▲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가족들과 친구들의 환송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버스가 출발하자 아쉬워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환송객들. [사진제공-최재영]

▲ 신병훈련소를 향해 출발하는 입영버스 행렬. [사진제공-최재영]

▲ 대로변에서 바라본 환송식 진입로 입구. [사진제공-최재영]

북미대결전의 정국에서 자부심을 갖고 떠나는 청년들을 보며

자원입대자들을 태운 입영차량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였던 환송인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와 일행은 아들을 떠나보냈다는 어느 여성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에 인민군에 입대하는 우리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공화국에 살고 있는 모든 청장년들 은 자신들이 소속한 직장에서 총 쏘는 사격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의 심장 한복판에는 잔인하고 악랄한 미제놈들에 대한 분노가 지금도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애하는 원수님이 계셔서 우리는 반드시 조미대결전에서 기필코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환송행사를 목격했을 당시의 한반도 정세는 북미대립 문제가 긴장감이 감도는 수준을 넘어 전운이 감도는 첨예한 대미결전의 긴박한 상황이었다. 오늘 인민군에 자원입대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는 이런 정세와 무관하지 않게 보였다. 오늘의 자원입대자들은 아마도 시대의 부름이었던 것 같았다. 이날 저녁 식사도중 나는 관리들에게 아침에 목격한 환송행사에 대해 질문을 했다. 관리들의 말에 의하며 이 무렵 인민군대에 입대시켜 달라고 탄원한 청년들이 전국적으로 무려 100만 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들의 열화와 같은 저런 애국심의 발로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2013년 3월에는 인민군 입대나 복대를 탄원한 청년 학생의 수가 150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북한 젊은이들의 국가관과 애국심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보여진다. 특히 평양시에서만 20만 명의 청년 학생이 입대와 복대를 자원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 전문대 학생 수십만 명이 입대를 자원했다고 한다. 심지어 매년 3월은 대부분의 고등중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시즌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인민군대 입대를 자원했다고 하니 개인의 안락과 미래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북의 젊은 학생 청년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전문대학의 입학시험에 응시했던 학생들도 대부분 대학입학 보다는 국가를 위해 인민군입대를 선택해서 자원했다고 했다. 만일 남한의 젊은이들도 이처럼 나라가 위급하고 전시상태에 돌입하면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갑자기 머리에 쥐가 나는 것처럼 복잡해졌다. 아무튼 이런 북미결전의 정세들을 살펴 볼 때 나의 이번 방북기간에 자원입대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특히 이날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주민들과의 대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분명한 사실은 북한주민들의 평범한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주적(主敵)의 개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적’을 말할 때 같은 동포인 ‘남조선(남한)’을 지칭하지 않았고 어김없이 ‘미국(미군)’을 콕 찍었다. 나는 북의 주민들이 같은 민족인 남한을 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북의 주민들이 주적으로 지칭하는 ‘미국(미군)’이라는 단어 속에는 대부분의 선량한 미국시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제국주의 전쟁을 기획하고 일삼는 호전적인 미국의 네오콘그룹 집단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남조선(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대부분의 선량한 일반 남조선(남한)국민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 아직도 친일 잔재세력으로 남아 있는 친미사대주의자들과 온갖 수구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날의 자원입대 환송현장을 목격한 후 그 동안 북에서 있었던 비슷한 사례와 유래들을 알아보았다. 남한의 팀스피리트 훈련에 반발해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던 지난 1993년 3월에도 북의 280개 대학의 학생과 6천여 고등중학교 졸업반 학생 등 150만 명의 청년 학생들이 입대를 자원한 자료가 확인됐다. 그뿐 아니라 1996년 4월, 당시 고등중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민군대에 자원입대했으며 그 후 2001년 5월과 2002년 3월에도 평양시내 각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에 자원입대하는 신입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고등중학교를 졸업 후 군에 자원입대하는 신입병사 환송모임은 매년 학교별로 혹은 지역별로 자연스레 전통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존시였던 2010년 9월에는 북의 주요 중앙대학들과 일반대학들이 유사시에 ‘김정일 장군-김정은 대장의 결정에 따라 자원입대 하겠다’는 내용의 대학생 충성의 결의모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의문을 채택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김정은 위원장은 당시 9월에 개최된 당대표자회의를 통해 대장계급을 수여받고 노동당 당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도 ‘선군정치의 계승자’로 공식화하던 중이었다.

결국 이번에 우리 일행이 아침 산책 중에 목격한 자원입대자에 대한 지역환송행사는 그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환송행사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원입대자들을 태운 입영버스는 신병훈련소를 향해 떠났으며 나는 그 집결지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날 자원입대자의 수는 대형버스 한 대 가득 탑승한 인원으로서 대략 40명 남짓 됐으며 오늘 같은 환송행사는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아마도 오늘 만난 자원입대자들 중에는 DMZ(비무장지대)로 차출되어 몇 년 동안 군복무를 할 병사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넓이 10m, 높이 5m’가 된다는 거대한 휴전선 철조망 장벽을 바라보며 철조망 너머 한국사회와 군대를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할까? (계속)

(필자의 개인사정으로 연재가 4주간 순연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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