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발표는 민간통일운동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남북해외 민족공동행사가 6.15공동선언 발표 기념일에 남북을 오가며 열리게 된 것. 이전에도 광복절이나 개천절 처럼 남북이 함께 쇠는 기념일도 있었지만 남북해외가 한 자리에 모여 민족공동행사로 치를 수 있게 된 것은 6.15공동선언 덕이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보수정권이 등장함으로써 2008년 금강산에서 개최된 6.15민족통일대회를 마지막으로 민족공동행사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 광복 70주년과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맞아 지난 5~7일 중국 선양에서 열린 남북해외 대표자 회의는 6.15와 8.15공동행사 개최 등을 집중 협의해 7년만에 6.15공동행사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공동보도문에 6.15공동행사 장소를 명시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북측은 공동보도문을 아직까지 보도하지 않고 있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북해외가 함께 한 6.15공동행사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10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될 6.15민족공동행사가 성사될 가능성을 살펴본다.

‘6.15 감격 시대’

▲ 2001년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열린 6.15민족통일대토론회.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공동선언 발표 이듬해인 2001년 6.15~16일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6.15민족통일대토론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해외 민간대표들이 상봉의 감격을 나눴고, 헤어질 때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야말로 ‘감격시대’가 열린 것.

이 행사는 남측의 종단과 민화협, 통일연대로 구성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중심이 돼 구성된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남측의 각계각층 민간 공식대표 200명을 포함한 425명과 북측의 각계각층 민간대표 223명, 해외대표 20명 등이 참가했다. 정부는 3명의 방북을 불허했고, 이후 선별 불허 문제는 공동행사 때마다 주요 논점으로 대두됐다.

2001년 평양 8.15민족대축전이 3대헌장기념탑 앞 개막식 참가와 ‘만경대 방명록’ 파문 등으로 역풍을 맞은 뒤 10개월만에 처음으로 ‘6.15공동선언 발표 2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6.14~15일 역시 금강산에서 열렸다. 217명의 남측 대표단이 참석했고 방북 불허자는 13명이었다.

2003년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6.15공동선언 3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은 사스(급성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처음으로 남북해외에서 분산 개최됐다. 남측은 종단, 민화협, 통일연대가 공동으로 ‘2003 남북공동행사추진본부’를 구성해 15일 백범기념관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으며, 북측은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평양시민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통일대축전’이 개막됐다. 해외에서도 해외측추진위원회가 주최한 기념행사가 미국, 일본, 유럽 각지에서 열렸다.

2004년 6.15공동행사는 6월 14일부터 3박 4일 동안 인천에서 ‘6.15공동선언발표 4돌 기념 우리민족대회’라는 명칭으로 남북해외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남측 1,123명, 북측 103명, 해외 57명 등 총 1,283명이 참가한 가운데 15일 오전 본행사인 ‘우리민족대회’가 인천 문학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성대히 열렸다.

2만여 인천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SK 야구장에서 ‘6.15공동선언발표 4돌 우리민족자랑 남북예술공연’이 열린축제 형식으로 성황리에 개최되는 등 행사의 수준과 폭이 한 단계 발전했다. 그러나 남측에서 열린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2명의 행사참여를 불허했다.

‘제2의 6.15시대’

▲ 2005년 평양에서 남북 당국 대표단이 함께 한 6.15민족통일대축전. '제2의 6.15시대' 개막을 알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5년,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추진모임’(6.15남측준비위)와 6.15북측준비위, 6.15해외측준비위가 각각 결성된 것을 토대로 처음으로 합법적인 남북해외 연대기구인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 북, 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6.15공동위)가 구성됐다.

6.15공동위가 평양에서 개최한 ‘6.15공동선언 5주년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은 6.15남측위 대표단 295명이 서해직항로를 통해 방북했고, 처음으로 불허자가 사라졌다.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의 당국 대표단도 함께 참여했다.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등 대표단 8명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자문단 6명, 지원인원 17명 등도 별도의 비행기편으로 평양땅을 밟았다.

평양시민 6만여명이 연도에서 환영했고, 김일성경기장에 5만여 평양시민이 참석해 국가적 행사로 진행됐다. 정동영 당국대표단 단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단독면담하고 남북문제는 물론 북핵문제 등 현안들에 관한 일괄 해결을 약속받았다.

이어 광복6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린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에도 남북 당국대표단이 참석했으며, 김기남 북측 당국대표단 단장 등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현충원 현충탑을 방문, 참배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민간통일운동이 남북관계를 선도하는 ‘제2의 6.15시대’가 활짝 열린 것.

2006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북측 대표단 200명이 방남해 광주와 목포에서 성대하게 진행됐다. 역시 남북 당국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열린 2007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북한의 핵실험과 남측의 쌀 차관제공 불이행 등으로 당국 대표단의 참여 없이 민간행사로만 치러졌다. 더구나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을 ‘주석단(귀빈석)’에 앉히는 문제로 내홍을 겪어 파행 끝에 17일에야 본행사인 민족단합대회가 열렸다.

'6.15 수난 시대'

▲  2013년 7월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 6.15남측위 이창복 상임대표의장(가운데) 등 남측 대표단은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귀국후 벌금 처분을 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7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이 홍역을 겪은 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6.15민족통일대회는 금강산에서 간신히 열렸다. 당국 대표단 참석은커녕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등 명맥만 유지했고, 선별 배제도 되살아났다. 그 이후에는 공동행사다운 공동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6.15 수난시대가 열린 것.

더구나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이유로 남측 정부는 5.24 대북제재조치를 취해 민간교류를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남북공동행사는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같은 상황은 지속됐고, 2013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은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귀국후 벌금을 물어야 했다.

6.15민족공동행사 7년만에 성사되나

▲ 지난달 1일 '광복 70돌,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6.15공동행사의 서울 개최 추진을 천명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광복 70주년과 6.15 15주년을 맞아 6.15남측위원회는 종교계와 시민사회 등을 포괄하는 보다 폭넓은 ‘광복 70돌,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남측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6.15민족공동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키로 결정했다.

남측 준비위는 지난 4월 1일 발족식에서 올해 6.15공동행사를 6월 14~16일 서울에서 개최하겠다고 천명했으며, 14일 오후 남북 합동공연 문화제와 15일 오전 ‘민족통일대회’, 오후 ‘과거사 관련 남북공동토론회’, 부문별 상봉, 남북해외 위원장단회의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북측과 해외측도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조국해방 70돌 민족공동행사 북측 준비위원회’와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조국해방 70돌 민족공동행사 해외측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대표자회의에 임해 6.15, 8.15공동행사에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했다.

남북해외 준비위원회는 지난 5~7일 중국 선양에서 당초 일정인 이틀을 하루 연장하며 대표자회의를 개최해 6.15-8.15공동운동기간 설정 등 3개항의 공동보도문을 냈다. 그러나 정작 6.15공동행사와 8.15공동행사 개최 장소는 공동보도문에 명시하지 못 했다.

▲ 5~7일 중국 선양에서 열린 남북해외 준비위원회 대표자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8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측 준비위는 8일 기자회견에서 6.15공동행사 장소 문제에 대해 “사실상 서울에서 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8.15행사 장소 문제와 연동돼 공동보도문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남측 정부는 광복절 70주년 민족공동행사를 남측지역에서 개최하는 것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어 앞으로도 난항이 예상된다.

이창복 남측 준비위 상임대표는 8일 기자회견에서 “현재 남북관계 상황이 매우 어려워 북측 대표단은 행사 개최 가능성에 의구심을 표했다”며 “남한 상황을 설명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8.15행사 남쪽 개최를 강력하게 제기한 남측 당국에 대한 북측의 의구심이 걸림돌이었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측 내부 상황도 녹록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러시아 전승절 초대에 응하지 않은 채 연일 위성발사 시사와 미사일 시험발사 등 군사적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4월말 한미합동 군사연습이 끝나면 재개될 것으로 예견됐던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인도적지원도 북측이 사실상 거부하는 등 남북간 협력과 협상의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남측 준비위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남북해외 준비위는 6.15, 8.15공동행사를 전민족적으로 성대히 기념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했고, 특히 북측 준비위는 오는 7월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응원단 파견 등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한 점으로 미루어 남북 모두 6.15, 8.15공동행사와 민간교류에 적극적인 의지는 확인된 셈이다.

정치적 비중이 큰 광복 70주년 8.15공동행사는 남북 당국 모두 자신의 지역에서 열리길 바라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남북이 각각 대표단을 파견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개최하는 방안 등이 절충점으로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환 준비위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8.15 행사가 가진 무게중심이 워낙 크기 때문에, 다양하게 개최하는 걸로 논의를 폈다”면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행사를 크게 하는 걸로 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앞으로 논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 9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개최된 ‘평화통일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에서 민족공동행사 서울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러나 상호 신뢰가 부족하고, 당국간 물밑 협상채널이 없는 상황에서 불신의 벽을 넘어 합리적 해법에 도달하는 과정은 순탄치 만은 않을 수 있다. “진지하게 협의하고 많은 합의에 도달하였으며, 실무적인 문제들은 계속 협의해나가기로 하였다”는 공동보도문에 눈길이 가는 상황이다. 남과 북을 떠나, 광복 70주년과 6.15 15주년을 맞아 더 이상 분단의 고통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는 전민족적 여망이 공동행사 성사를 압박하는 실질적인 힘이 될 전망이다.

9일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개최된 ‘평화통일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에서 민족공동행사 서울준비위원회가 발족돼 “서울준비위와 함께 서울 지역 25개 지역별 준비모임, 노동, 여성, 청년학생, 빈민 등 부분별 준비모임을 폭넓게 구성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광복70돌 민족공동행사’를 성대히 치러내기 위해 1만 명의 서울시민 통일응원단(준비위원)을 모집하고, 동네 구석구석마다 작지만 큰 만남과 시민 참여형 통일사업을 만들어가자”고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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