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마지막 관문, ‘초강력 흡입여과실’를 통과하다

본관 입장을 위해 마지막 무빙워크(moving walkway)를 올라탄 후 벽면에 걸린 실록사진들을 구경하며 가니 어느새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마지막 관문에 도착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올법한 이 통과 코스는 한 사람씩 줄을 서서 천천히 입장해야 하는데 이곳을 빠져 나가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본관 2층으로 올라 갈 수가 있다.

이곳은 이를테면 ‘초강력 흡입 여과실’ 이나 ‘살균 에어커튼’ 같은 공간이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인정사정없이 강풍이 불어 닥치자 내 머리카락은 스타일이 망가지며 정신없이 휘날렸고 얼굴에 붙어있는 볼살이 일그러졌다. 대형 진공청소기나 초강력 흡진기처럼 온 몸과 옷가지에 붙어 있던 각종 세균들과 먼지들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살균 과정을 거치는 듯 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곳을 빠져나오니 마치 내 혼백도 빨려 들어간 듯 얼떨떨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곳곳에 배치된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2층 본관에 올라가기 위해 대형 엘리베이터(승강기)에 탑승했다. 유리관에 누워 있는 ‘영원한 주석’을 친견하기가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았다. 거의 대부분 자동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모든 입장절차를 마치니 마치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온몸을 목욕재개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금수산태양궁전 본관에 입장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자동 신발소독기. [사진제공-최재영]

▲ 본관에 입장하기 위해 북한주민들이 신발소독기를 통과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태양상’과 ‘입상홀’ 참관

승강기를 타고 2층에서 내리면 가장 첫 참관지는 ‘태양상’이다. 붉은 대리석으로 형상화한 공화국 깃발(북한국기)안에 환하게 웃는 두 지도자의 초상화가 둥근 모양으로 나란히 새겨 있는데 북에서는 이를 ‘태양상’이라고 부른다. ‘태양상’은 장례식 때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두 지도자의 영정사진이며, 이곳 말고도 본관 외벽 상단 중앙에 거대한 크기의 ‘태양상’이 또 걸려 있다. 궁전 영내에 들어온 방문객들 중에 불가피하게 본관 내부에 들어오지 못할 때는 광장에서 ‘태양상’을 바라보며 참배할 수도 있다고 한다. 때마침 귀에 익숙한 ‘김일성 장군’ 노래와 곡목을 알 수 없는 장송곡 풍의 멜로디가 연이어 잔잔하게 울려 퍼지자 참관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태양상’ 바로 아래는 조선인민군 의장대 명예근위병들이 집총자세로 좌우편에 각각 5명씩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은으로 도장된 칼리시니코프 AK-47 소총을 들고 ‘태양상’을 향해 멋진 포즈로 서 있었다. 저만치 앞에 있는 북측 안내 책임자들이나 단체로 참배온 평양시민들은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고 대부분의 외국인들과 해외동포 일행들도 자연스레 목례를 하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참관지는 ‘태양상’ 출구에서 좌측 계단을 오르면 ‘입상홀’로 이동하게 된다. 입구에 다다르니 대형 홀에는 거대한 동상이 나타나는데 그 위용과 풍기는 아우라에 나도 모르게 압도당했다. 파란색과 붉은색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배경을 비추고 있는 한가운데 양복을 입고 뒷짐을 진 김일성 주석의 동상과 인민복을 입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이 우리 일행들을 맞이해 주는 듯했다. 아마 최고급 대리석으로 제작된 듯한 백색의 화려한 입상(立像)은 7미터 높이는 족히 될 듯 했다.

이곳에도 ‘태양상’이 있는 홀과 마찬가지로 동상 좌우로 인민군 명예근위병 10명이 집총자세로 근무하고 있었다. 홀 전체는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과 은은한 형광조명이 복합되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며 그에 맞춰 장송곡이 은은하게 흘렀다. 참배객들은 3열 종대로 줄을 서 기다리다 자기 순서가 되면 입상 앞으로 몇 걸음 나가 공손하게 고개나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 좌우를 살펴보니 미국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와 평화자동차 박상권 명예회장 등이 도착한 순서대로 자연스레 나와 한조가 되었는데 우리들 순서가 되자 앞으로 몇 걸음 나가 잠시 고개를 숙이며 자연스레 묵례를 하였다. ‘태양상’과 ‘입상홀’ 두 곳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보낸 근조 화환이 증정돼 있었는데 이미 언론에 보도된 대로 이 두 홀은 김 1위원장 내외와 최고 수뇌부들이 ‘영생홀’에 참배하기 직전에 가장 먼저 들려 인사하는 곳으로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영생홀’ 과 ‘울음홀’을 올라가도록 이어졌다.

▲ 태양궁전 첫 참관지인 ‘태양상’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입상홀’에 서 있는 두 지도자의 동상.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은 제1위원장이 군부지도자들과 ‘입상홀’에서 참배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태양궁전 개관식날 ‘입상홀’에 도열해 있는 조선인민군 의장대 근위병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김일성 주석의 유해를 안치한 ‘영생홀’ 참관

관리들의 말에 의하면 현재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가 보존된 ‘영생홀’에는 지금까지 국내외 언론 어느 누구에게도 영상 촬영을 허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공개된 유리관에 누워 있는 두 지도자의 영상물들은 장례식 기간에 조문객들을 받기 위해 ‘울음홀’에 안치됐을 당시의 장면들이며 그것도 북에서 지정한 방송과 신문매체 외에는 허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유해보존실도 사진촬영 금지가 매우 철저한 것으로 보아 북 당국은 생전의 모습대로 잠들어 있는 ‘최고존엄의 영구’를 촬영하는 것이 매우 불경스럽다고 여겼으며 유해를 보존하는 차원에서도 사진촬영을 금하는 듯했다.

홀은 워낙 천정이 높아서 바로 윗층으로 올라가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했다. 같이 움직이는 대열 속에 있는 북한 주민들은 가끔 호기심의 눈빛으로 우리 일행들을 바라보았고 곳곳에 배치된 요원들은 마네킹처럼 굳은 표정으로 낯선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영생홀’을 참배하고 나오는 시민들의 대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렬로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여성들이 많았으며 남성들도 대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콧등을 시큰거리며 나왔다.

먼저 김일성 주석의 ‘영생홀’에 들어서자 근위병 6명이 집총자세로 유리관 머리맡 양쪽을 지키며 참배자들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껍고 투명한 유리관에 고요히 누워 있는 김 주석의 얼굴과 상반신 부위는 방안 어딘가로부터 잔잔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빛을 받은 얼굴은 마치 화장을 한 듯 매우 희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보였다. 유리관 내부를 진공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공기를 빼내서 그런지 얼굴 전체가 약간 미세하게 부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대체로 금방 잠에서 깨어날 듯한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김일성 주석의 실제 얼굴이 몹시도 궁금했던 나는 설레임과 함께 만감이 교차했다. 호불호를 막론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적인 인물답게 사후의 모습도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뿜어냈다.

원래 소련의 레닌은 상페테르스부르크에 안치된 모친의 묘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결국 모스크바 붉은 광장 서쪽 피라미드처럼 생긴 지하묘지 유리관에 영구보존으로 누워 있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베트남을 통일했던 호치민 주석은 원래 화장한 후에 산천초목에 뿌려지길 원했지만 그 역시 바딩광장에 그리이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호화 묘지 유리관에 영구보존 되어 누워 있다. 듣기로는 김일성 주석도 원래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살아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누워 있다.

홀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20미터가 될 정도로 매우 커 보였으며 전체적인 실내조명은 20룩스(lux)이하의 조도라서 약간 어두침침해 보였으나 희한하게도 어두우면서도 밝게 보였다. 바닥과 천장, 벽면 등이 모두 검은 대리석으로 꾸며진 내부는 이처럼 다소 어두웠지만 정 중앙의 유리관을 향해 비추는 한 줄기 빛은 신비감을 자아내며 유난히 김주석의 얼굴만을 돋보이게 했다. 창백해 보였지만 살아있는 듯 나름대로 피부에 탄력이 느껴지는 모습이 나에게는 마냥 신기했다. 모르긴 해도 천정쪽 어디에선가 특수조명이 비추는 듯 했다.

김 주석은 세로 2미터, 가로 1.5미터, 높이 1미터 가량의 마름모꼴 형태의 투명 유리관안에 검은 양복 차림에 둥근 베개를 베고 누웠으며 가슴까지 붉은 헝겊으로 덮여 있었고, 발치에 나타난 실루엣으로 보아 구두를 신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유리관 주변은 김일성화외에 흰 국화꽃들로 장식돼 있어 마치 꽃밭에 누워 있는 듯 했으며 전체적인 꽃밭 디자인은 심플하게 보였다.

일렬로 대기하던 참배객들은 자신의 순서가 되면 4명씩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유리관의 발치에서 머리맡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그 다음은 왼편으로 이동해서 묵념하고, 그 다음 방향인 머리맡은 규정대로 그냥 통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오른편에 서서 고개나 허리를 숙이고 묵념하는 것으로 ‘영생홀’ 참관은 마치게 된다. 참배객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유리관을 한 바퀴 돈 뒤 홀을 나오게 되는데 왼편 입구를 통해 입장한 우리 일행은 유리관 서쪽 앞에 일렬로 섰다. 담당 참사와 안내원들이 먼저 허리를 구푸려 깍듯하게 절을 하자 일행들 대부분이 따라했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며 묵념을 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눈에 보이는 일행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주시해 봤다. 어떤 이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두리번거렸고, 어떤 이는 간단하게 목례를 하거나 기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 어떤 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를 많이 굽혀 정중히 절하는 등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해외에서 방문한 외국인과 교포들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북한 주민들과는 달리 참배하는 것이 매우 어색했으며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배객들은 전체적으로 참배 분위기에 따라 정중히 목례를 하거나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 장례식 기간에 ‘울음홀’ 유리관에 안치되어 국내외 조문객의 참배를 받는 김정일 위원장의 유해와 주변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유리관에 안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를 가까이서 촬영한 모습.[사진제공-최재영]

국장(國葬)기간에 조문객들을 맞이한 ‘울음홀’

김일성 주석의 ‘영생홀’을 빠져나오면 자연스레 ‘울음홀’이라 불리는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은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기간에 김일성(1994년), 김정일(2011년) 두 지도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조문객들의 참배를 받았던 곳이다. ‘울음홀’은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기간에 조문을 왔던 각계각층의 인민들과 세계 각국의 동포들이 땅을 치며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 주석의 유리관이 놓였던 자리에 “목란을 조각한 흰 대리석으로 띠를 둘러 표시하라”고 지시를 내려 그 자리가 산뜻하게 드러나 있었다. 원래 이곳은 ‘삼지연홀’로 불리던 중앙홀이었으며 정면에 양강도 삼지연의 모습을 그린 대형 풍경화가 걸려 있어 ‘삼지연홀’이라 불렸던 방이다.

‘울음홀’ 정면과 양쪽 벽면에는 청동부조 예술작품들이 각각 세 편씩 새겨 있었는데 작품내용은 김 주석의 비보를 전해들은 북한 인민들과 군인들, 남한과 해외동포들, 흑백 인종들을 초월한 외국인들이 망연자실하여 통곡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 1999년 김 주석 서거 5주기를 맞아 ‘울음홀’의 의미에 대해 “수령님을 잃은 우리 인민이 피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꾼 역사적인 장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철저한 관리를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하나의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슬픔에 복받쳐 통곡하는 우리 인민들의 몸이 시간이 정지된 듯 그대로 굳어진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 가는 일행들에게 속삭이듯 말하는 이름 모를 여성관리의 말이 당시의 애통한 반응을 실감있게 해주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의 국상도 슬퍼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북한 인민들은 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 장군님은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멋진 넥타이 한번 제대로 매지 못하시고 불철주야 현지지도를 다니시느라 쪽잠에 줴기밥을 드시면서 고생만 하시다가 눈물겹게 떠나가셨습니다.”

홀안에는 약간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그런지 앞서가는 여성 관리는 막힘없이 자신들의 일행을 향해 설명해준다.
“고난의 행군을 선두에서 헤쳐나오신 장군님은 직책만 ‘국방위원장’이 아니시라 주체혁명을 완성하시고 우리 인민들을 핵무기보다 강한 일심단결로 하나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일행들은 ‘울음홀’ 을 빠져나와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곳 저곳에 걸린 두 지도자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사진과 그림, 기념상과 벽화등을 관람할 수 있었으며 여기저기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북한 주민들을 연이어 목격할 수 있었다.

▲ 김정일 위원장의 유리관앞에서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일 위원장의 유해가 안치된 ‘울음홀’로 구름떼 처럼 몰려드는 조문행렬.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일 위원장의 유리관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인민군 근위병들과 조문객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김일성 주석의 다양한 ‘사적보존실’

‘울음홀’을 나와 다른 홀로 이동하니 1995년 6월 12일에 조성됐다는 ‘주체사상로작관’이 나왔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미 북한 사회 전반에 녹아져 있어 사실상 주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김일성 주석의 노작 영향이 크다. 원래 ‘로작’이란 말의 의미는 힘을 들여 지은 우수한 작품이나 저작물을 의미하는데 현재는 주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연설문이나 저작물, 회의중에 언급한 교시나 지시를 모두 ‘고전적 로작’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치 간이 도서관처럼 꾸며진 ‘주체사상로작관’은 김일성 주석의 유해보존실과 동시에 조성될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참관지이지만 대부분의 참관객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노작관’을 나오면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타고 다녔던 전용 교통수단이었던 집무용 열차와 승용차가 전시된 ‘사적관’이 나온다. 이곳에 들어오면 김 주석이 생전에 누볐던 세계각국 순방경로가 대형 세계지도위에 전자식으로 표시돼 있었고 방문지마다 램프가 들어왔다. 전용열차에 대한 안내표지판 기록에 따르면 김 주석은 이 열차편으로 ‘1945-94년까지 총 776회 15만 2000킬로미터를 이동’하며 현지시찰과 시베리아 횡단 등 해외순방을 했다고 한다.

열차내부는 마지막 이용할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내부 앞쪽에는 김 주석 전용 의자와 책상이 있고 그 뒤로 열차 벽면을 따라 양쪽에 각각 8개씩 모두 16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맨 끝에 보조의자 2개가 더 놓여 있었다. 김 주석이 이용하던 의자 뒤에는 온도조절기가 있고 벽면에는 적당한 크기의 파나소닉 TV가 설치돼 있었다. 김 주석이 이용했던 벤츠 600 V12 승용차는 대체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지금이라도 시동이 걸릴 것만 같이 보였다.

‘사적관’을 빠져나오자 김일성 주석이 전 세계 각국 정부와 지도자들로부터 수여받은 훈장, 포장이 전시돼 있는 ‘훈장보존실’이 나타났다. 훈포장 뿐 아니라 명예 박사학위증서와 학위모, 가운 등도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수여국들 중에는 소련, 동독, 루마니아 등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름들도 눈에 띄었으며 대부분 아프리카나 동구권에서 받은 것들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유독 미국에서 받은 명예박사학위 증서와 가운이 이채로웠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김일성 주석이 박사학위모와 가운을 착용한 사진들을 보니 의외로 학구적인 이미지가 엿보여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곳에는 훈장과 박사학위증서 뿐 아니라 사진 문헌들도 많이 전시돼 있었다.

▲ ‘울음홀’ 청동부조 작품상 앞에서 장송곡을 연주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군악단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인민군군악단이 장송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조선중앙TV 카메라맨이 조문객들의 모습
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를 안치한 ‘영생홀’ 참관

김정일 위원장의 ‘영생홀’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자 3년전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공식 부고 발표 이틀 후인 2011년 12월 20일, 오후 3시경 <조선중앙TV>를 통해 금수산기념궁전 1층 ‘삼지연홀’에 김 위원장의 유해를 안치한 장면을 처음으로 방송에 내보냈는데 바로 그 장소가 현재의 ‘울음홀’이다. 김 위원장도 김 주석의 유리관과 동일한 규격과 모양이었는데 유리관에 누워 마치 편안히 숙면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이 났다.

김정일 위원장의 유해를 안치한 ‘영생홀’에 입장하여 유리관을 자세히 바라보니 역시 그 때의 그 모습과 다를 바 없었으며 홑이불처럼 가슴까지 덮고 있는 붉은 천은 조명을 받아서 그런지 유난히 붉게 보였으며 관 주변은 빨간색 ‘김정일화’와 흰 국화꽃들이 화려하지 않고 심플하게 장식됐다.

나머지는 김일성 주석의 ‘영생홀’과 모든 것이 동일했다. 이곳에도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메들리 장송곡들이 은은히 울려 퍼졌는데 나중에 밖으로 빠져나와 자세히 물어보니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 장중한 음악들은 경건한 분위기를 더욱 고취했고 김 위원장의 상반신을 비추는 빛으로 인해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에도 어디선가 유리관을 향해 비추는 빛이 그 근원과 정체를 파악할 수 없도록 매우 사차원적으로 설치됐다. 조명 빛 때문인지 피부는 매우 투명해 보일 정도로 환했고 그야말로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참관자들은 이곳에서도 머리나 허리를 숙여 유리관 앞 발치, 왼편, 오른편 등을 좌측으로 한 바퀴 돌며 세 번에 걸쳐 인사를 하고 빠져나가도록 돼 있었다.

▲ 김일성 주석이 평소 이용했던 전용열차 집무실의 내부(상)와 외부(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김정일 위원장의 다양한 ‘사적보존실’

우리 일행은 김일성 주석의 사적열차와 승용차를 전시한 ‘사적보존실’에 이어 김주석의 ‘훈장보존실’을 돌아본 뒤 김정일 위원장의 ‘영생홀’을 참관하고 연이어 김 위원장의 ‘훈장보존실’과 사적 열차와 승용차, 선박을 전시한 ‘사적보존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선 김 위원장의 ‘훈장보존실’에 들어서니 과거 장례식 기간에 공개한 유리관 받침대 정면에 김 위원장의 생몰연도를 뜻하는 ‘1942~2011’이란 명판과 훈장 등이 전시돼 있었는데 그때 그 훈장들이 이곳으로 옮겨 보존되고 있었다. 훈장을 전시한 쇼윈도우 전체와 사방 벽면들이 온통 붉은색 바탕으로 치장돼 있어 황금빛을 발하는 훈장들을 더욱 돋보이도록 했으며 김 위원장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여받은 명예 박사학위증서와 학위모, 가운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박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은 김정일 위원장의 수여식 사진들을 보니 나름대로 학구적인 이미지도 엿보였다.

‘훈장보존실’을 나와 교통수단을 전시한 ‘사적보존실’을 들어오니 이곳을 찾은 북한 주민들은 김 위원장이 생전에 타고 다녔던 열차와 승용차, 선박 앞에서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승용차는 김 위원장을 태우고 금방이라도 시동을 걸고 달릴 듯, 열차 집무실은 김 위원장이 잠시 자리를 뜬 것 같았는지, 또한 선박은 기적소리와 함께 파도를 일으키며 곧 떠날 것 같았는지, 모두들 추억을 더듬으며 아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충성호’라는 이름의 전용 선박은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타고 다니는 ‘1호 전용’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낡아 의아하게 생각돼 나중에 물어 보니 건조된 지 아주 오래된 배라서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새로운 배로 교체할 것을 건의했지만 김 위원장이 그때마다 사양해서 결국 30년동안 이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2010년 1월에는 엄동설한속의 바다를 현지시찰 하던 중, 워낙 풍랑이 심하게 몰아쳐 급기야 선박 전체가 얼음산처럼 꽁꽁얼어 붙는 바람에 김 위원장이 근무하는 집무실 출입문조차 열리지 않아 선원들 모두 달려들어 겨우 열어제쳤다고 한다.

나는 이 선박을 바라보며 도대체 이 큰 배를 어떻게 태양궁전 본관에 들여놨는지 몹시 궁금했다. 지금도 태양궁전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거대한 배를 통채로 옮겨 놓은 현실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승용차를 반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대형 선박이 건물 내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미스테리였다. 관리들에게 그 방법과 비결을 묻자 “우리 원수님께서만이 이런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알듯 모를듯한 답변을 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생전에 1,647회에 걸쳐 이용했다는 열차 집무실 전용칸을 다가가보니 내부는 당시 모습을 재현하듯 잘 보존되었다. 동행한 관리는 궁전을 빠져나가면서 “장군님의 고귀한 한 생애을 싣고 강행군 궤도를 39만 8000km를 쏜살같이 달려왔던 야전열차이며 우리 인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셨다는 증거물입니다”라며 설명해 주었다.

집무실 책상 뒤에는 대형 벽걸이 TV와 접견자들이 앉는 누런 소파들이 서로 마주보며 집무실을 가득 채웠고 책상 밑에는 발맛사지 기계, 책상 앞에는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노트북 컴퓨터 한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결재 서류들도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결재 서류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빨간색 펜으로 친필 서명하여 결재한 것까지도 열차 창문 밖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 김일성 주석이 받은 훈장,포장, 박사학위증서등을 전시한 ‘훈장보존실’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평소에도 해외 각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한인교포들이 많은데 그중에는 목회자와 신자들 혹은 기독교 계통 성직자들도 많다. 이들이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하려면 가끔 종교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는 소식을 여러 번 들었다. 특히 보수성향의 목회자들이 단순한 대북지원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금수산궁전을 참관하게 될 경우에 종교적 갈등과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이는 ‘영생홀’ 유리관에 안치된 두 지도자의 유해 앞에 머리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에 종교적 거리낌이 있고 자신들의 신앙에 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모두 예를 갖춰 인사를 하는데 자신들은 어영부영 하거나 고개를 뻣뻣이 들고 무성의했다는 이유로 담당 안내원이나 부서 책임자에게 한 소리 듣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북한 관리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셔야 하지 않습니까?” 라며 책망조로 말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금수산태양궁전 참관과 관련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평소 북한과 우호적 관계에 있는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원로 목회자 한분이 북측 당국에 기독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참관할 때 기독교식으로 할 수 있도록 제안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실효성과 북측 반응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한 바는 없다. 북측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가급적 허리 굽혀 정중하게 예를 올려 인사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다녀보면 인도 시크교의 ‘황금사원’이나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 등을 방문할 때 자신의 종교와 맞지 않아도 그에 걸맞는 예를 기본적으로 갖춘다. 사회주의 국가에 안치된 레닌이나 모택동, 호치민 등의 묘지를 방문하면 사진촬영이나 슬리퍼나 반바지 차림을 엄격히 금지하며 엄숙한 질서 가운데 참배를 마치고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세계 각국의 유명사찰이나 종교시설물 등을 참관하고 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종교나 사상에 심취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방문한 지역의 국민들과 국가에 의해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과 종교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예를 갖추는 것일 뿐이기에 종교적인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만경대 생가’와 ‘금수산태양궁전’을 참관한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서 오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의 이런 행위는 상대 체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거나 굴복하는 자세가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남과 북 사이의 회색분자는 더욱 아니다. 다만 통일의 과정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열린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내가 남과 북 양측의 국립묘지를 오가며 무덤을 어루만지는 행위는 아직도 적대관계에 빠져 있는 남과 북의 강경파들에게 보여준 통일지향적 용서와 포용의 의미였다. 남과 북의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용서와 사랑, 관용과 포용, 그리고 민족애 외에 그 무슨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필요할까?

▲ 김일성 주석이 평소 이용하던 벤츠 600 V12 승용차. [사진제공-최재영]

‘만경대생가’와 ‘금수산기념궁전’을 다녀왔던 한국의 위정자들

북한을 방문하려면 기본적으로 북한 사회의 사상과 인민정서, 사회법규, 문화와 풍습 등을 사전에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김일성 주석이 출생한 ‘만경대 생가(고향집)’와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은 북한에서는 특별한 기념일과 행사가 없는 평소에도 원주민들과 해외 방문자들이 꼬리를 물고 방문하는 곳이다.

특히 김일성 주석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만경대생가’는 내가 두 번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많은 듯하다. 이곳은 1947년 사적지로 지정된 뒤 평양을 방문한 국내외 인사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며, 지난 65년 동안 약 1억 1천만명 정도가 방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 ‘만경대 생가’에는 헌화나 참배하는 시설이 없고 그런 의무나 규정도 없다.

방문자들은 단지 편안하게 대문을 통해 생가 마당 안에 들어가서 전문 해설사로부터 김일성 주석의 어린 시절과 생가와 관련된 유래와 내력을 듣는 것이 전부이고 그곳을 빠져나와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한 모금 마시는 정도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는 참관자들은 생가 부근 산위에 올라가 만경대경치가 내려다보이는 누각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거나 다시 내려와 생가 부근의 ‘기념사적관’을 참관하는 정도로 코스는 모두 끝이 난다.

금수산태양궁전도 개인 참관자가 본관 내부와 외부에서 헌화하는 규정은 전혀 없다. 다만 본관 내부의 ‘태양상’과 ‘입상’앞에서는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하며, 두 지도자의 유해가 안치된 ‘영생홀’에 입장해서는 유리관 앞에서 고개나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하는 참배 규정은 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면 무조건 강제적, 의무적으로 만경대생가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해야 하는 규정은 전혀 없으며 권장사항일 뿐이다. 최종결정은 참관하려는 자의 자발적 결정으로 이뤄진다.

또한 북한 측에서는 방북자가 ‘만경대생가’를 방문한 것과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한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거나 같은 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4월 현재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황우여 교육부장관을 비롯해 정의화 국회의장 등 현직 위정자들은 과거 방북시 모두 ‘만경대 생가’를 다녀왔다. 특히 황우여, 정의화, 김형오 3인은 2006년 4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취임경축일에 맞춰 ‘만경대생가’를 한날한시에 단체로 방문해 기념촬영까지 했다. 박 대통령도 2002년 5월 11-14일 방북 기간 중 점심식사후에 ‘만경대생가’를 다녀온 사실을 당시 자신의 미니홈피에 “오찬뒤 ‘평양 8경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람길에 나섰다”고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은 금수산기념궁전도 참관한 것을 밝혀졌다. 2002년 박근혜(당시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의원과 동행한 사람은 신희석(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 지동훈(유럽-코리아재단 공동이사장), 장 자크 그로하(주한 EU 상공회의소장) 3인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장 자크는 초창기에 기록한 자신의 방북기에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했다고 언급했으며, 신희석도 2012년 10월에 남긴 방북관련 기록에서 “우리들 두 사람(박근혜, 신희석)은 그들의 안내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인민문화궁전, 금수산기념궁전, 주체탑, 모란봉 소년소녀xx?, 김일성대학, xx병원, 봉제공장 등 다양한 시설을 견학·시찰하였다”고 원문에 적었다.

그뿐 아니라 노무현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기간에 특별수행원으로 참석했던 이완구 현 국무총리는 자신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에서 분명히 목격한 것은 준비된 변화의 움직임이었다. 북한은 분명 생산적인 방향으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따라준 술에서 깨자 평양에서의 2박 3일 동안 겪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며 기록했다. 이로써 현 정권의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교육부장관 등은 자신들의 논리대로라면 북한을 고무찬양한 종북의 원조 행각들을 벌인 셈이다.

이들이 주체탑이나 만경대생가 혹은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한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시비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총선이나 대선 때 국민들에게 거짓말이나 일삼으며 진보인사들의 방북경력을 악용하거나 순수하게 통일운동에 앞장선 국내외 인사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또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통일의 대상인 북한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흡수통일정책에만 매진하고 있는 모습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또한 자신들도 북한의 온갖 참관지를 다 다녀왔으면서도 그 사실이 정치쟁점화되자 이를 은폐하고 합리화하거나 정확한 해명을 회피하고 있으며, 이에 덩달아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보수언론과 종편방송들의 편파보도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만경대 생가를 방문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오죽하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사실 종북을 내들고 문제시하려 든다면 역대 괴뢰당국자치고 지금까지 평양을 방문했던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혔겠는가? 북측은 그 이전에도 “이들이 방북해서 입으로 말한 종북, 친북 발언을 들으면 남조선 인민들은 까무라칠 것”이라고도 경고했었다.

북한을 방문해서 호텔에 처박혀 잠이나 자고 밥이나 먹고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계각층을 찾아다니며 관계자를 만나고 방문목적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하려고 가는 것이다. ‘만경대생가’는 통일부의 참관 제한 구역도 아니고 북한을 방문하는 세계 각국에서 1억 1천만명이 방문한 곳인데 굳이 안갔다고 우기는 모습도 정직하지 못하다. 못갈 곳을 간 것도 아니고, 갔다고 해서 갑자기 보수를 버리고 진보세력이 됐다고 보는 이가 없을 텐데 왜 그리 변명에 급급한지 모를 일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만경대생가’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관한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인물로 몰아가는 국정 행태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 통일의 기본은 상대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때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과 북 양측에 있는 국립묘지들을 폭파시키거나 해체시킬 수는 없다. 북측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먼저 찾아와 참배했던 일을 기억하며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고 높여주는 전통을 신속히 세워야 한다.

▲ 평소 김정일 위원장이 타고 다니던 전용열차(상)와 ‘충성호’라는 이름의 전용선박(하). [사진제공-최재영]

해외동포와 외국인의 참배요령이 명시된 ‘금수산태양궁전법’

마침 내가 태양궁전을 참관할 무렵에 나를 초청한 관리들에게 당시로부터 1년전에 새로 공포된 ‘금수산태양궁전법’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북한 자국내에서 윤리적, 의무적 관점에서만 운영되어오던 금수산태양궁전에 관한 운영과 참배규정이 북한 의회에서 법률로 구체화되어 공포됐다고 한다. 2013년 4월 1일에 최초 발의되고 몇 개월 후에 법조문을 만들어 입법예고된 후부터는 엄격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법률은 북한 자국민을 비롯해 해외동포,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해당되도록 명문화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예고된 내용을 요약해 봤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7차 전원회의가 2014년 4월 1일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보고와 발제로 진행되었으며 이날 의안 2항에서 최고인민회의 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충함에 대하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수산태양궁전법을 채택함에 대하여’가 대의원 전원찬성으로 채택되었으며 이에 따라 총 5장 40개의 관련 법조항이 만들어졌다.

‘금수산태양궁전법’은 “주체의 최고성지인 금수산태양궁전을 전체 조선민족의 태양의 성지로 영원히 보존하고 길이 빛내이는데 이바지”(제1조)함을 입법목적으로 하며 이를 인민들의 숭고한 사명으로 규정했으며 특히 상임위원회는 사회주의헌법 제95조에 따라 사회주의헌법 수정보충안 서문에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금수산태양궁전은 수령영생의 대기념비이며 전체 조선민족의 존엄의 상징이고 영원한 성지(제3조, 제5조 참조)”라는 내용을 새롭게 보충하기까지 했다. 이와는 별도로 새로 제정된 금수산태양궁전법규중에 몇 가지 중요한 조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금수산태양궁전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궁전의 영구보존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를 일절 금지토록 했다. 궁전의 보호, 관리를 위한 특별보호구역 설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궁전의 건물과 공원, 수목원, 야외불장식, 조명시설 관리와 궁전광장과 공원의 운영질서들을 규정했으며 금수산태양궁전에 필요한 전력, 설비, 자재, 물자를 최우선 대상으로 보장하고 해당 기관들이 금수산태양궁전의 보위와 영구보존, 관리운영조건보장정형을 정상적으로 엄격히 감독하고 통제하도록 의무를 규정했다.

모든 방문객의 참배에 대해서 ‘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 외국인은 누구나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위대한 대원수님들께 경의를 드릴 수 있도록 그와 관련한 질서들을 규정’하였으며 이는 자국민과 해외동포는 태양상(두 지도자의 원형 초상화), 입상홀(흰색 대리석 동상)과 영생홀(두 지도자의 유해가 각각 안치된 유해보존실)에서 경의를 표시하되 ‘허리 굽혀 정중히’ 참배하도록 했으며, 외국인의 경우에는 대외사업일군의 안내를 받아 경의를 표시하되 ‘자기 민족의(해당국가) 예법에 따라’ 할 수도 있도록 규정했다(제19조, 제20조 참조). 또한 경의 표시는 궁전광장에서도 본관 정면에 걸려 있는 태양상(두지도자의 대형 초상화)을 향해 할 수도 있다고 규정했으며(제21조), 방명록(소감표시)의 글을 남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23조).

또한 ‘영구보존위원회’를 조직하고 두 지도자의 유해(영구)가 안치된 ‘영생홀’의 온도와 습도, 조명 등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책임과 관리를 맡도록 했으며 원상 그대로 영구보존해야 할 대상은 두 지도자의 ‘유해’ 뿐만 아니라 각종 ‘사진문헌’들을 비롯해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 증서가 보관된 ‘훈장보존실’과 생전에 타고 다니던 자동차, 전동차, 열차, 선박들을 전시한 ‘사적보존실(사적물로 지정된 교통수단)’까지 포함됐다. 그리고 매년 5∼6월은 두달 동안 금수산태양궁전의 휴관 기간으로 정해서 내부와 외부를 보수정비하는 기간을 확보하도록 했으며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도 휴관일로 지정했다.

▲ 김정일 위원장의 유리관 아래 설치된 명판과 훈장들(상)과 현재의 ‘훈장보존실’ 모습(하). [사진제공-최재영]

방명록에는 윤민석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가사를 쓰다

모든 참관을 마치고 나오자 방문자의 마지막 코스로서 방명록을 쓰는 대형공간이 나왔다. 참았던 볼일을 보기 위해 잠시 화장실에 들렀더니 특급호텔보다 더 시설이 깨끗하고 화려해서 몹시 놀랐다. 감상문과 소감문을 기록하는 이 거대한 ‘방명록 홀’에는 기록자들을 위해 고풍스런 책상들 20여개가 간격에 맞춰 놓여 있었다. 참관을 모두 마치고 홀가분하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은 책상마다 앉아 열심히 소감을 적고 있었다.

나도 간단하게 한 줄 정도만 남기려고 펜을 잡으니 옆에 있던 참사가 슬쩍 쳐다보더니 “최 선생님은 웬만하면 한 장을 모두 다 써보시지요”라며 권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고개를 끄떡였다. 방명록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던 가수 윤민석씨가 부르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가사를 큼직한 글씨로 장황하게 적었으며 남는 여백은 남북통일에 관해 느낀 소회를 적어 한 장을 모두 채웠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 민족 우리네 땅 평양은 왜 못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서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택시요금 오만원이면 달려올 길을 우리는 왜 못가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방명록을 기록을 했다. 옆에 있던 북한관리 두 명이 기웃거리며 신기한 듯 읽어 주었다. 모두 마치고 홀을 빠져나오려는데 백두산 봉우리를 그린 초대형 병풍이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 홀에 있는 백두산 봉우리 그림은 무려 높이 2.2m, 길이 30m가 되며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길다란 병풍이라고 한다. 매우 화려하고 격조있게 보이는 이 작품은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216개 봉우리를 상징하여 ‘백두산 천지의 216봉우리’란 제목을 붙였으며 만수대창작사에 소속된 조선화창작단의 화가들 20여명이 고증을 받아 단체로 그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태양궁전 본관을 다시 빠져나가기 위해 입장했던 그 길 그대로 퇴장했다. 맡겨놓은 카메라와 소지품을 찾고 잠시 외랑 곁문으로 빠져나와 정문앞에 조성된 인공호수 다리위에서 광장과 정원등을 둘러봤다. 참관을 마친 주민들은 여기저기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거나 대문과 담장, 연못 등을 둘러본 후에 전차를 이용해 출발했던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본관에 입장하기 전보다 더 많은 인파들이 몰려와 정원과 광장은 몹시 북적거렸다. 2시간에 걸친 태양궁전 참관은 내 일생에서 가장 그로테스크(The Grotesque)한 방문이었다.

▲ 통로 좌측은 합장강이며 우측은 태양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해자(垓子)(상).
궁전 좌측 담장을 따라 조성된 해자 전경(하). [사진제공-최재영]

해자(垓子)를 넘어 민족의 해방(解放)으로

금수산태양궁전을 떠나기 직전 경내 여러 곳을 두루 돌아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온갖 희귀식물들이나 백화가 만발한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바로 태양궁전 경내 담장을 따라 사방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거대한 인공호수였다. 이런 호수는 옛날부터 성 외곽에 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만들어 놓은 ‘해자(垓子)’의 역할을 한다.

모란봉 기슭에 자리잡은 이 주석궁을 처음 건축할 때부터 궁전 담장을 따라 사방 둘레를 인공강물을 파 해자를 돌려 궁전의 경비를 강화했으며 경내 전체가 높은 이중 절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더구나 궁전 좌측에는 합장강이 거대한 해자의 역할을 하였고 합장강과 궁전 담장사이에는 또 다시 인공으로 만든 해자가 흐르고 있어 2중해자가 설치되었다. 이처럼 생쥐 한 마리 침투할 수 없도록 사방에 방어벽을 만든 금수산태양궁전의 인공강물은 단순히 건축예술의 산물이나 경호 건축물은 아니다.

저 인공강물은 합장강을 만나고 합장강은 다시 대동강을 만난다. 대동강은 다시 남포로 흘러들어 결국 서해 바다로 흐르며 서해로 흐른 물은 다시 남쪽으로 흘러가듯 통일시대를 앞둔 이 시점에서 해자의 의미를 넘어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7천만 겨레의 마음과 마음을 합치는 발원지의 역할을 하여 조국통일이라는 대하가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참된 해방의 강줄기이다. 북한이 강조하는대로 이곳이 ‘태양의 성지’, ‘영생의 낙원’, ‘사회주의 대가정의 가장 넓고 아름다운 뜨락이며 대화원’이 되려 한다면 이제는 모두를 품고 함께 동반자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금수산태양궁전뿐아니라 북한 땅 어디를 가도 ‘영생’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모든 종교에서 전유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에 이 사실이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연구과제로 남게 되었다. 궁전을 빠져나와 평양시내로 가는 길목마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영생탑과 구호판들이 오늘따라 새삼스레 다가왔다. 차창 밖을 통해 바라본 평양시는 오늘도 변함없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전용도시처럼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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