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국가 통일논의의 최고기구인 통일준비위의 실질적 대표격인 정종욱 부위원장은 “체제·흡수통일은 하기 싫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라면서 ‘비합의통일이나 체제통일’에 대한 연구팀이 통준위는 물론 정부 내 다른 조직에도 있다고 밝혔다. 심지어 정 부위원장은 “북한의 엘리트 계층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정부는 구체적으로 대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위헌적인 흡수통일 담론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정종욱 부위원장과 정부는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며 흡수통일 연구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정 부위원장은 “작년 말에 (통일 로드맵에 관한) 1차 연구가 끝났고, 이제는 그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과제 실행 단계에 들어가 있다. 거기에는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전제한 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였다. 그러나 이런 발언의 번복과정은 오히려 정부가 실제 어떤 통일정책과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지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정 부위원장이 말하는 ‘남북 합의가 아닌 다른 형태의 통일’은 말 그대로 군사력을 포함한 ‘힘에 근거한 체제통일‧흡수통일’을 의미한다. 이 ‘체제통일‧흡수통일’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이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한 평화통일의 정신을 부정하는 위헌적 발언일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체제통일‧흡수통일은 어떤 경우든 상대를 부정하고 멸절시키려는 담론이다. 따라서 정부가 공공연히 흡수통일을 주장하게 되면 남북관계는 대결과 긴장 확대, 그리고 전쟁의 위험성을 증폭시키게 될 수밖에 없다. 정전체제 하에서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치를 매년 반복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흡수통일의 담론은 결국 헌법의 평화통일 정신을 부정하고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극히 위험한 담론이 된다. 그래서 흡수통일 담론은 근본적으로 위헌적 담론이 된다.

독일식 통일에 대한 오해

만약 정 부위원장이 독일식 통일을 염두에 두고 체제통일이나 흡수통일 발언을 한 것이라면, 그 또한 무지의 소치라 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형태상으로는 ‘편입통일’이지만 추진과정으로 보면 ‘비합의통일’이 아니라 ‘합의통일’이다. 따라서 독일식 통일은 ‘합의에 의한 편입통일’이라고 성격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독일의 ‘합의에 의한 편입통일’은 두어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선 서독은 전범국으로서 철저한 나치 청산에 근거하여 평화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민주적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정권의 부침과 상관없이 동방정책을 일관되게 실시하였고, 동독에 대한 지원과 교류협력을 ‘분단을 잇는 다리’로 인식하고 과감히 추진하였다. 통일 이전 동서독의 연간 교류규모는 약 75억 달러에 달했으며, 동독은 서독과의 교류에서 공식거래(연 8억 달러)와 비공식지원(연 15억 달러)을 합쳐 연 평균 약 23억 달러의 이익을 가져갔다. 이런 요소와 함께 냉전 해체기의 힘의 공백상태라는 국제적 환경 또한 독일 통일의 배경이 되었다.

독일식 통일 추구가 한반도에서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적절한 전략이나 담론인지에 대한 검토는 논외로 하더라도, ‘합의에 의한 편입통일’을 추구하려면 한반도에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하나는 ‘사실상의(de facto) 통일’을 추구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어야 합의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분단을 잇는 다리’인 교류협력의 비약적 확대와 목적의식적으로 추진되는 ‘느슨한 혹은 진전된 연합이나 연방’의 형성노력 없이는 아무리 편입통일이라 하더라도 ‘합의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편입통일’의 또 하나의 전제는 남한 스스로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평화국가와 복지국가를 수립해나가려는 높은 국가적 성찰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 없이는 ‘북한의 자발적 편입’은 결코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흐름은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신냉전구도가 점점 강화되고 있어서, 남과 북이 공동으로 이러한 흐름을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모두 현실적으로는 패권적 진영대립 구도에 더 강력히 빨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분단을 잇는 다리’ 만들기부터

그간 우리 정부는 흡수통일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번 정종욱 부위원장의 발언으로 미루어 이마저도 신뢰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미 북한 당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나 '드레스덴 선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에 대해 ‘흡수통일론’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흡수통일 하겠다면서 상대로부터 신뢰를 요구하고, 조건 없이 대화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 속에서는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에게만 떠넘기기도 어렵다. 정부는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통일시대 개막을 위해 “북한과 함께하는 통일준비” 등을 내세우며 각종 남북공동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지만,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이미 북한은 “안팎이 다르고 속에 동족대결의 칼을 품은 괴뢰패당이 ‘대화’와 ‘신뢰’, ‘관계개선’에 대해 떠드는 것이야말로 우리와 남조선민심과 내외여론, 온 겨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우롱이며 모독”이라면서 ‘반통일 체제대결 모략기구’인 통일준비위원회를 해체하지 않으면 “현 남조선당국과 상종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흡수통일‧체제통일과 관련해 정부의 분명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한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입장 표명 없이는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은 물론, 남북관계 역시 아무런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정부는 위헌적인 ‘흡수통일론’ 연구 등에 아까운 세금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대북비난전단 살포의 실효적인 방지 등 남북관계 전환과 교류협력 활성화를 위한 조치를 통해 ‘분단을 잇는 다리’ 만들기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광복 70주년의 역사적 계기를 헛된 ‘흡수통일’ 논란으로 허송하는 것은 결코 안될 일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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