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왕릉 부근 명당에 위치한 해외동포애국자 묘

나와 일행은 평양시 중심부에서 약 22km(60여 리) 정도 떨어진 해외동포애국자묘역을 가기 위해 자동차로 약 1시간 남짓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 직전 부근 교차로를 지나던 중 차창 밖을 자세히 살펴보니 마침 동명왕릉 입구 진입로와 왕릉 능사인 정릉사가 보였고 차량을 좌회전하여 2-3분 달린 후 애국자묘역에 당도했다. 왕릉에서 해외동포애국자 묘역까지는 도보로 불과 10분 거리에 인접해 있었고 왕릉과 애국자 묘역의 중간 지점에는 진주호라고 불리는 연못이 멀리 보였으며 도로 주변은 온통 옥수수밭과 평범한 전답들이 펼쳐 있었다.

논밭 속에 파묻힌 듯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진주호를 사이에 두고 동명왕릉 산자락과 해외동포애국자묘역 능선이 서로 맞닿아 있는 듯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외동포애국자묘역과 동명왕릉에 안치된 모든 무덤 속에 망자들은 산야와 전답을 바라보며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애국자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진파리 고분군이 산재해 있고 동남쪽 1㎞거리에는 설매리 고분군이 퍼져 있다고 했으나 그중에도 동명왕릉의 규모가 단연 가장 큰 규모였다.

묘역에 당도하니 이곳은 다른 국립묘지들과는 다르게 평지가 아닌 계단식 무덤군으로 가파르게 조성됐다. 묘역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계단식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방식으로 조성됐고 정상으로 올라가 전경을 내려다보니 남서쪽에는 마장산 지맥이 쭉 뻗어 있고 동쪽 방향은 재령산 지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평양으로 통하는 북쪽 골짜기만 시원하게 트여있는 매우 아늑한 지형이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동(옛날지명은 평남 중화군 진파리)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묘역 뒤로는 푸른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숲 등이 뒤섞여 우거져 있어 주변 경관이 풍치수려했으며 묘지 조경과 한데 어우러져 천혜의 명당자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더구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세계적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동명왕릉 바로 옆에 무덤 터가 자리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묘역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는 듯 했다. 고구려 벽화는 2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이처럼 색감이 화려한데 무덤이 완성됐을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생각하며 이곳 해외동포애국자 묘역에 안장된 이들의 남다른 삶의 궤적들도 고구려 벽화처럼 퇴색되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남아주기를 기원했다.

▲ 인공위성 맵으로 내려다 본 ‘해외동포 애국자묘역’이 좌측 상단에 보인다. 맨 우측 하단에 정릉사와 동명왕릉이 보이며 중간지점에 진주호(연못)가 보인다.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위성 맵으로 해외동포 애국자묘역 부분을 확대한 모습. 묘역 맨 좌측에서 시작된 통행로가 묘역을 가로질러 주차장과 관리동까지 이르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임금의 극락왕생을 비는 정릉사가 보인다.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동명왕릉 입구가 보인다. [사진제공-최재영]

죽어서도 고구려의 역사를 지키려는 듯

여기 안장된 이들 모두가 평생 외로운 길을 걸으며 조용히 통일운동 사업에 힘쓰던 인물들이라서 그런지 이들은 죽어서도 우리나라의 고고한 역사를 지켜내려는 듯 했다. 그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듯 인근 왕릉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받아서인지 알 수 없는 맑은 정기가 무덤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듯 했다. 그러나 무덤가는 영적 기상이 넘치는 듯했지만 막상 묘역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 속에 매우 한산했으며 가을걷이로 분주한 들녘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관리 소장직을 맡고 있다는 최금락 동무가 우리 일행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는 관리동 건물에서 뛰쳐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붉은 색 기와집으로 건축된 현대식 관리동은 묘역 정문에 들어서 좌측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근무하며 묘역을 관리하며 모든 실무 책임을 맡고 있다고 했다.

“세계에는 나라도 많고 나라마다 수많은 해외교포들이 살고 있지만 해외에 사는 동포들을 이처럼 배려하고 위해 주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 말고는 지구상에 없을 겝니다. 우리 조국의 부강번영과 민족의 자주통일을 위해 애국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오며 강성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해외교포라면 누구든지 애국자로 내세워주고 죽어서도 조국의 품에서 영생하는 값 높은 삶을 안겨주는 그런 나라는 우리 공화국밖에 없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이토록 신경 써서 장례식을 치러주고 묘지를 제공해주는 나라가 그리 흔치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이지만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처럼 북한이라고 하는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은 아닌 매우 특별한 국립묘지인 셈이다. 최 소장에게 묘역이 조성된 시기를 물으니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를 받은 관계부문 일꾼들이 묘지 터를 알아보던 중에 최종 낙점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두 지도자의 배려와 최종 결정에 의해 1988년 7월, 가장 명당자리인 이곳에 최초로 개장했으며 그 후 9년이 흐른 2007년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6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재건공사와 단장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묘역에 도착하기 직전 시골길 좌우에 펼쳐진 옥수수밭과 전답을 바라보니 유난히 흙의 빛깔이 황토 같은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이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뜻밖의 믿지 못할 답변을 해줬다. 왕릉이 조성될 당시 고구려 시조 주몽을 백성들이 몹시 존경해서 그가 죽자 왕릉과 그 주변 일대를 불에 구운 흙으로 덮어버려 무덤가에는 아예 벌레가 없도록 했으며 그 영향으로 붉은 흙들이 주변에 여기 저기 눈에 많이 띄는 것이라고 한다.

▲ 해외동포 애국자묘역의 정문(릉대문)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 내부에서 정문 밖 산야를 바라본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 하단 정 중앙에서 묘역 전체를 바라본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이역만리를 떠나 이들은 왜 여기 묻혔는가?

황금색 양각 명판으로 ‘해외동포애국자묘’라고 새겨진 릉대문(묘역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우측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묘역이 건립된 배경과 사연들이 황금색글씨로 세로 7줄 분량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 비석은 2010년 6월 23일에 일본 총련중앙 상임위원회가 주도해서 건립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본 총련계와 이 묘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6정보(약 5만 9천㎡)의 넓은 면적에 조성된 이 묘역은 독특하게도 개인용(1인용), 부부용(2인용), 가족용(합장묘) 등 세 가지 형태로 구분돼 있었으며 이곳도 다른 국립묘지들과 마찬가지로 비석마다 돌사진이 새겨 있었다. 사진이 확보되지 않은 인물들은 비석에 공란으로 남아 있었고 다양한 크기의 비석들은 저마다 붉은색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와 검은 돌사진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400여기의 묘지들 대부분은 1인용 개인비석이 차지하고 있었고 비석에는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각 네 면 모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선 비석 전면 상단에는 돌사진, 그 밑에는 생몰 연월일이 새겨있고, 비석 좌측면에는 태어난 출생지나 본적지 주소, 비석 뒷면에는 묘주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부부용 비석은 전면 상단에 부부의 사진을 나란히 새겨 놓았고 하단에는 남편의 이름과 생몰 연월일, 맨 하단에는 부인의 이름과 생몰 연월일이 새겨 있었고 비석 좌 우면에는 부부의 본적지 주소를 각각 새겨놓았다. 가족묘지는 왕릉의 규모와 형태로 보이도록 했고 네모꼴 봉분 형태로 조성됐으며 커다란 비석 뒷면에는 안치된 가족들의 명단과 생몰 연월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1990년부터 재일총련, 재중동포, 재미동포 등 4백여 명이 안치된 이 묘역은 해마다 추석이 되면 유가족들은 물론 고인과 생전에 관계가 있는 지인들이 찾아와 묘제(성묘)를 드리느라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평소에는 재일교포 방문단이 가장 많이 찾고 있으며 그 다음이 중국 동포들이라고 한다. 만경봉호를 타고 북에 귀국하여 정착한 후 활동하다가 숨진 인물들도 다수 있으며 일본 본토에서 활약했던 유력한 인물들도 많이 잠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들은 50년 넘게 일본 총련중앙에서 정치국장, 상공련 부회장을 지낸 리필련 선생, 30여년간 총련의 문학예술부문에서 활동한 창작예술가 리찬강 선생, 재중 조선경제인련합회 회장을 지낸 사업가 리철재 선생 등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북한 서적과 출판물들을 공급했던 김병주 선생이 재미동포로는 유일하게 잠들어 있었다.

또한 이밖에도 이미 알려진 대로 해외동포의 신분으로서 북측에서 인정하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들과 김일성훈장이나 김일성상을 수여받은 인물들, 조국통일상과 사회주의애국상 등을 수상한 인물들이 안장 대상자라고 한다. 또한 북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 박사는 물론 인민예술가나 공훈배우, 인민배우, 인민체육인칭호를 받은 해외동포들이 다수 안장돼 있었다. 해외동포 애국자묘에 안장되는 분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사망해서 국경을 경유해 운구 되기 때문에 대부분 유골함을 통해 안장식을 한다고 했다. 이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역만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잠이 들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나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묘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묘역 우측 지역을 둘러보는 최재영 목사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 중간 지역을 둘러보는 최재영 목사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 좌측 지역을 둘러보는 최재영 목사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386번째로 안장된 유일한 미국동포 김병주 선생을 만나다

특별히 이날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은 미국교포 김병주 선생의 묘지였다. 그는 재미 한인사회 극우반공세력들의 끊임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미국 남가주지역에서 북한자료 전문유통업체를 24년간 왕성하게 경영했던 인물이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2006년 간암선고를 받은 후 3년여에 걸친 암투병 끝에 2009년 1월 20일, 74세를 일기로 운명했고 결국 북 당국의 배려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인 북녘에 안장된 것이다.

2009년 4월 28일 오전 11시, 이곳에서 그의 장의식(안장식)이 거행됐는데 그의 유해는 386번째 순서로 안장됐다고 한다. 안장식은 북의 해외동포사업국 주관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김무성 부처장의 사회로 진행되어 최길호 처장이 조사를 낭독했고 유가족으로는 부인 이금년 여사와 딸 김진영이 참석했으며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박철 참사(지금은 UN북한대사관에 근무)를 포함하여 해외동포사업국 성원들, 평양도서출판사 관계자들, 묘역관계자들, 이산가족담당 관계자, 해방산호텔 봉사원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마쳤으며 그의 유택은 묘역 우측 중간자리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도록 했다. 그가 미주통일 운동사에 끼친 영향을 볼 때 그의 생애를 잠간 이야기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1934년 3월 2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함흥고급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6.25전쟁이 발발해 부모와 누이들을 남겨둔 채 3개월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단신 피난했다. 1962년 9월에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교사생활을 하다 교육계가 너무 부패하여 다른 직장을 갖게 되었고 그 후 박정희 군사독재가 싫어서 1975년 10월, 미국이민을 와서 공장과 창고에서 힘든 노동을 하거나 병원사무직을 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미주지역 통일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러던 중 1985년 5월부터 ‘북한 바로 알리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6년 10월에는 혈육들과 생이별한 지 36년 만에 고향 방문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부모는 세상을 이미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북한서적 유통사업을 구상하여 방북한 그는 북 당국에 “미국에서 북한 전문서적을 운영하려고 하니 관련 자료들을 공급해 달라”며 설득했고 이에 북측도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나 주류사회에 조선(북한)의 정책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북의 승인을 받은 그는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게 북한서적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총련단체도 찾아가 북한 도서와 영상물 등을 구입하여 이를 대량 복사하여 우편이나 직접 배달 등을 통해 공급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고객들의 요청에 의해 북한 민예품과 한약재 등도 판매했다. 그 후 1989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중심부인 올림픽 블루버드 길에 이름만 얼핏 들으면 무역회사 같은 ‘고려종합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미국 유일의 북한전문서점답게 5,000여종의 3만여 권이나 되는 북한 원서와 각종 정기 간행물, 비디오테이프와 DVD로 된 영화와 드라마 350점, 기록영화 300점 등을 갖추고 보급을 한 것이다. 주요 고객은 연방 의회도서관, 하버드대학, USC 한국학도서관 등 한국과 북한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과 도서관 등이었고 개인 고객들도 무수히 많았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이 미국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베이스 역할을 하며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이때부터 미주 한인교포사회에 거주하는 반공 우익세력들의 공갈과 협박도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추석 명절을 맞아 유족들과 지인들이 찾아와 성묘하는 모습. [사진출처-조선신보]

‘반북을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해야지?’ 외치던 목소리 쟁쟁

해외공관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그의 사업을 방해했고, 방해꾼들의 의도적 신고를 받은 미국 수사관들은 위협을 서슴지 않았고, FBI를 수없이 들락거리며 조사를 받는 일이 잦았다. 일부러 꼬투리를 잡기 위해 서점을 찾아온 손님과 북한 관련 시사문제를 대화하다 고성이 오가는 일이나 극우성향의 교포들이 상점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일은 예삿일이 되었다. 결국 온갖 욕설과 협박과 함께 가게 문을 닫으라고 공갈치는 자들로 인해 영업이 더 이상 잘 안되자 임대비 충당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1992년 8월, 한인타운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떨어진 가디나 지역으로 가게를 옮겨 그곳에서 숨질 때까지 운영했다.

▲ 고려종합상사에서 북한전문서적을 판매하고 있는 김병주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그러나 그곳으로 옮긴 후에도 방해꾼들은 여전했다. 고객들이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르면 사진에 찍힌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화는 물론 직접 찾아와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며 가게 문을 닫으라는 자들도 여전했다. 2000년 가을에는 생명에 위협을 가하려고 가게에 두발의 총격을 가하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 같은 극우 세력들이 자신을 탄압하는 것은 이해하고 견딜 수 있지만 미주 통일운동권 내부 인물 중에서 그를 괴롭힌 일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말년에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 내부에도 그를 중상모략하고 괴롭힌 일들이 있다는 사실은 내부의 적이 언제나 가장 무섭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김병주 선생은 핍박 속에서도 그토록 서점을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반북을 하더라도 북한을 객관적으로 제대로 알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미국과 북한이 서로 이해하고 좋은 관계가 회복되어 국교가 정상화되면 궁극적으로 남북관계도 좋아지고 통일의 서막이 열리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 그 일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강조하며 “일반 동포들이 반공 반북에 무조건 마음이 굳어져서 이북을 너무 모르고 있어 이북을 바로 알리기 위해 힘들어도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항상 담대히 말했던 그였다.

이처럼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과 주류사회에 북한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알리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이북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전혀 사대주의를 하지 않았고 오직 자력으로 나라를 건설했던 자주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북한은 풍요롭지는 않지만 교육제도, 의료제도, 사회보장제도 등을 인민들에게 무상혜택을 주는 사회이며 정치부분은 자주성, 경제부분은 자립성, 군사부분은 자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체 외국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사회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취지이고 목적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그런 사업을 하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아무도 없다. 다만 미국 명문사립대인 USC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한국학 도서관(Korean Heritage Library) 측에서 그가 남긴 서적들을 확보해 도서관에 비치하고 있으며 도서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필자의 지인이 지금도 북한서적과 자료들을 끊임없이 구입하여 미국 주류사회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북한을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다.

▲ 김병주 선생의 묘지에서 묵념하는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김병주 선생의 묘지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긴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북한의 장례문화를 자세히 알아보다

김병주 선생의 묘지를 참배한 후 나는 해외동포들의 안장식을 비롯해 북의 일반 주민들은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지 사뭇 궁금해 최 소장을 붙들고 이것저것 소상히 물었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북한 국립묘지에는 여러 종류의 장례식을 거친 후 안장되며 특히 국가의 최고지도자나 군부 고위층들, 혹은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운명하면 국장과 사회장을 치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오히려 평범한 일반 인민들의 장례식 문화는 내가 잘 모르고 있던 것 같아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최 소장은 묘역 잔디밭에 덜썩 주저앉아 궁금한 이야기들에 대해 비교적 이것저것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60년 동안 단절돼 이질화된 남과 북이지만 아직까지 전통주의적 요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장례 문화인 듯 했으며 유구한 역사를 함께 공유한 민족 구성원이기에 장례절차나 정서가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선 북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가장 먼저 상주가 속한 직장에 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통보해야 하고 상주와 망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인민반을 통해서 이웃 주민들에게도 부고를 알린다고 한다. 이때 부모의 상을 당했을 경우 직장에서 사흘 정도의 휴가가 주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면 사망신고는 사회안전부에 하며 시신의 매장과 화장 선택여부는 상주나 유가족들에게 있으나 해당지역 행정경제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묘자리도 위원회에서 정해준다.

화장할 경우에는 각 직장이나 마을에 비치해 놓은 ‘공용 목관’에 시신을 담아 운구한 후 화장장에 도착하면 시신만 꺼내서 화장을 하고 목관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가져가서 다음 화장 대기자를 위해 계속 재사용된다고 한다. 그리고 각 거주지 사무소를 통해 사망신고를 하면 국가로부터 장례 보조금이 나오며 필요한 식량과 술 등도 지급받을 수 있고 접대용 음식이 더 필요할 경우에는 주로 식료품점에서 별도로 구입할 수 있다. 주민들의 결혼과 장례는 반드시 국가에서 음식을 제공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에는 남한처럼 장의사가 없기 때문에 초상이 발생하면 가장이 속한 직장에서 동료들이 나와 본격적으로 도와주는데 염을 비롯해 입관과 운구절차는 물론 매장의 전 과정까지 책임을 지고 장례를 치러준다. 관은 가정에서 직접 만들거나 직장에서 만들어주며 입관할 때는 얼굴에 화장을 해주기도 하며 입관 도중에 종이나 헌옷가지 등으로 관의 빈 공간을 메워준다고 한다. 수의는 형편에 따라 삼베나 광목을 쓰며 빈소는 집안에서 조촐하게 차리는데 집안 벽에 흰 천으로 빈소를 꾸민 후 영정사진을 걸고 상을 차려 향불을 피울 수도 있다.

특히 빈소를 차릴 때 유의할 점은 최고지도자의 사진이 걸리지 않은 다른 벽면에 빈소를 설치해야 하며 장례식 이후에도 고인의 사진을 계속 벽에 걸어 둘 때에는 두 지도자의 초상화 위치보다 아래에 걸어야 한다. 북에서는 베로 만든 굴건을 쓰거나 상복을 입는 문화가 사라진 지 오래라서 상주는 그냥 검은 옷이나 평상복에 검은 완장을 두르고 여자는 머리에 흰 리본을 다는 것으로 준비가 끝나며 빈소가 준비되면 그 때부터 조문객을 받는다. 문상객은 빈소에 절을 한 뒤 술을 한잔 올린 후 상주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조문을 마치며 조의금은 각자가 내기도 하고 직장에서 단체로 내는 등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한다.

문상객들 중에 상주들과 친근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함께 밤을 지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기도 하며 남한의 상가에서 화투(고스톱)를 즐기듯 북의 상가도 주패(트럼프 카드놀이)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장례 일정은 형편에 맞게 3일장과 1일장으로 치르기도 하며 장례식은 특별한 의식과 절차 없이 진행되며 발인은 대개 오전 10시경이며 운구차는 별도로 준비되어있지 않다. 운구차가 없는 대신에 대도시 시민들은 버스를 이용하고 지방에서는 화물차를 이용하며 이때 필요한 차량은 대부분 직장 조직을 통해서 제공해 준다고 한다.

매장할 무덤은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안장식 하루 전에 미리 묫자리 구덩이를 파놓으며 묘지에는 상석과 비석도 세울 수 있으나 일반 주민들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진 비석을 사용하고 고위층들은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을 사용한다. 남한처럼 3년 탈상에 대한 의례는 없고 대부분 사망 이후 망자의 생일이나 사망 1주기에 맞춰 제사를 지내며 평소 성묘(묘제)는 한식이나 추석에만 제사가 있고 매년 돌아오는 기일에 드리는 제사도 거의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 부부묘지(2인용 묘지)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부부묘지만 밀집되어 있는 묘역. [사진제공-최재영]

▲ 가족묘지(합장묘)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자전거에 실린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쌀자루를 보며

묘역 참관을 마친 후 일행을 태운 차량은 다시 평양으로 가기 위해 큰 도로에 진입해 쏜살같이 달렸다. 창밖에는 가을걷이 때문에 논밭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함께 도로 양 옆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평소에도 자전거는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주민들의 교통수단이나 짐을 운반하는 화물수단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었고 그런 광경들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시골 들녘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민모를 쓴 남성 한명이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가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자전거 뒤 짐칸에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누런 쌀 포대 짐보따리가 보였다.

무거운 듯 기우뚱거리며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 자전거 뒷모습을 바라보니 기분이 묘했다. “남한에서 아주 오래전에 보낸 쌀자루일 텐데 그걸 아직까지 재활용해 아껴 쓰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찡해왔다. 내가 방북 중에 만난 대다수의 북한 인민들의 대남의식은 크게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것 외에 같은 핏줄인 남한 동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이처럼 북한에도 ‘대한민국’이 달리고 남한에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달린다는 불순한 생각을 해봤다. (계속)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