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휴전선 철조망을 자르는 펜치가 되겠습니다

정전협정 60주년을 사흘 남겨둔 2013년 7월 24일 해질 무렵, 나와 일행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숙소인 양각도호텔 고층 룸에서 첫날밤을 맞았다.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차량에서 안내원과 영접위원들과 이런저런 나눈 대화가 밤새 귓가에 맴돌았다.

“알고 계신대로 내일 아침은 이번 방북 일정의 첫 행사로서 아침 일찍 ‘조국해방전쟁 참전렬사묘’ 개관식에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그곳에 모신 분들은 주로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 때 미제와 괴뢰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신 영광스런 우리 공화국 인민군들이십니다. 그리고 전쟁통에 미군 폭격기가 평양과 북조선 천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바람에 아주 구석기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 새 조국을 건설하는데 큰 공로를 세우신 인민군 영웅들도 그곳에 함께 모셨습니다.”

오랜만에 매스컴에서나 듣던 ‘괴뢰’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며 내가 어릴 적부터 입버릇처럼 들려주신 부친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막내야, 네가 군대 갈 나이가 되면 벌써 통일이 돼 있을 것이니 너는 군대 가지 않아도 될 거야. 아니면 통일이 조금 늦어지면 아마 네가 직접 ‘절단펜치’ 들고 3.8선 철조망을 자르는 작업하다가 제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괴뢰군’이 ‘동료 전우’가 되는 거지 뭐, 이런 몹쓸 짐승 같은 짓들을 하루 빨리 그만들 둬야지...”

부친은 일본에 징용군을 다녀오고 한국전쟁 때는 민병대원으로 참전해서 그런지 전쟁이라면 몸서리치셨던 분이었기에 아마 당신의 염원과 소망을 담아낸 빗나간 예언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같은 부모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마치 짐승 같은 짓이라 여기셨고 통일이 되면 남북의 군대가 손을 잡고 하나 되어 우리 땅은 우리 스스로 지켜내는 날을 꿈꾸시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미국에서 첫 부음을 듣자마자 나는 제일 먼저 ‘아버지! 제가 휴전선 철조망을 자르는 펜치가 되겠습니다’라며 속으로 다짐하며 목 놓아 통곡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 나이 50이 훌쩍 넘었는데도 휴전선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D.M.Z 때문에 철조망들은 겹겹이 늘어나서 철옹벽이 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어느 누군가가 걷어 낼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더 견고한 성벽처럼 요지부동하게 만들 궁리들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 인공위성 맵으로 본 평양시 연못동에 위치한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위성 맵으로 묘역 부분을 확대한 모습. 노란선 표시 도로가 평양시내에서 순안공
항 가는 도로이다. [사진제공-최재영]

▲ 행사 시작 전에 진행 관계자들이 준비를 최종 점검하며 리허설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남과 북이 흥겹게 뛰어놀 ‘광장’은 어디인가?

호텔에서 내려다본 평양거리 한 가운데는 주체사상탑 꼭대기의 봉화가 밤하늘을 은은히 밝혔다. 평양의 밤하늘, 그리고 평양에서의 첫날은 설렘이나 피곤함이 아닌 차라리 가슴 깊이 저려오는 비애 같은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대립관계가 지속되는 남북문제와 불투명한 통일비전을 생각하니 편하게 잠이 올 리 없어 엎치락뒤치락 거렸다. 그러다가 분단이후 남북의 이념대립을 서정적으로 파헤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니, 내가 지금 주인공 이명준이 된 듯한 심정이었다. 남한에 살았던 철학도 이명준은 ‘밀실’같은 사회인 남한을 비판하다가 공허함을 느낀 후 월북했으나 막상 북한에서조차 그가 기대하고 찾았던 ‘광장’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북에서 조선(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포로 신세가 되어 송환을 앞두고 갈등을 하게 되는데, ‘남한의 부패한 타락상’과 더불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타락할 수도 없는 북한의 부자유함’을 모두 경험했던 그는 결국 제3국인 중립국을 택했고 인도로 후송되는 도중, 선박위에서 바다로 투신했다. 소설 속에서 그가 중립국을 선택한 이유는 남과 북 그 어디에도 그가 진정 원하던 ‘광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후송되는 배에서 바다 위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어미와 자식으로 보이는 두 마리 갈매기를 보았다. 한 마리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낙동강 전선에서 간호병으로 근무하다 전사한 연인의 모습, 또 한 마리는 연인의 뱃속에서 함께 죽어 간 아이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망망대해 드넓고 푸르른 바다야말로 그가 진정 원하고 그리던 ‘광장’임을 발견하고 즉시 바다로 몸을 던졌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밀실과 광장의 이데올로기를 다룬 그 소설이 발표된 지 50년이 넘었건만 남북 관계의 진전이나 통일의 기운은 아직도 변화와 징후가 없을 뿐 아니라 헤어진 혈육이 서로 만나기는커녕 상대를 긍정적으로 말해도 죄인과 역적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야만의 세월을 살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픽션일 뿐이다. 어쩌면 내일 아침 참관할 묘역에 안장된 북한의 전몰장병들은 이명준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광장’을 실제로 건설하기 위해 힘쓴 이들이 아닌가 생각하며 간신히 잠자리에 들었다.

▲ 입추의 여지없이 개장식 행사에 참석한 국내외에서 방문한 군중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세계 각국에서 모인 200여명의 내외신 기자단과 취재진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취재진들 앞에 선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국가행사 연주를 위해 도열해 있는 조선인민군 군악단(군악대) 앞에선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1호 행사’인 참전열사묘 개장식에 참석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나를 담당한 안내원이 찾아와 싱글벙글하며 “오늘 참석할 개관행사는 카메라를 지참해도 되며, 가급적이면 점잖은 색상의 정장을 입으시고, 검은 넥타이를 매시면 좋겠습니다”라며 당부하듯 일러주었다. 북측 전몰장병들의 묘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민군 참전열사묘’ 개장식에 참석하는 것은 알겠는데 복장에 대해 유난히 신경 쓰는 것을 보니 ‘1호 행사’인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어서 그는 “최 목사님은 신청하신대로 해외동포 취재 기자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함께 입장할 때 카메라 반입이 가능한 것이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소지품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며 반갑게도 특별 배려를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은 평양시 외곽을 빠져 나갔다. 전승절 60주년을 이틀 앞둔 날씨는 매우 화창하고 맑았으며 평양시내 곳곳의 국기 게양대마다 온통 북한의 국기(인공기)가 휘날렸으며 특히 꽃잎 형태의 독특한 원형 국기 게양대에는 10개의 국기가 꽃잎처럼 동시에 펄럭였다. 또한 중요한 건물마다 우주기술과 핵무기 성공을 홍보하는 포스터와 대형 선전화들이 여기저기 장식돼 있어 전승절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듯했다. 가는 도중에 주변 경관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매우 익숙한 도로와 지형이어서 알아보니 순안공항 가는 길목이었다. 차창으로 바라본 평양외곽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대로 조금도 낯설지 않은 내 조국 들녘이었으며 평양이 아니라 경기도 양평 내 고향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비록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내 조국 강산은 그대로 남아 있음에 얼마나 반가우랴-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읊었던 두보의 시가 생각나면서 오늘따라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묘역에 가까이 갈수록 정장을 입은 남성들과 한복(조선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 정복을 입은 군관들의 행렬들이 도보로 몰려드는 것으로 보아 오늘 행사에 참가하려는 군중들인 듯했다. 안내원은 이곳도 평양 시내에 속하며 행정상으로는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이고 묘역은 풍치 좋은 석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전쟁에 참가한 장병들의 묘지가 그 동안 이북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이곳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묘역 입구에 도착해 전경을 바라보니 역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위용을 내뿜고 있었다. 수십 정보가 되는 넓은 부지에 건설된 인공 조형물들은 주변 자연풍경과 조화를 이뤘으며 전체적인 미관은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매우 훌륭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시설들을 완성하려면 족히 6년의 공사기간도 모자랄 판에 단 6개월 만에 완공했다는 사실이다. 자랑스런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안내원에 따르면, 이 묘역은 지난 2013년 2월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에서 인민군 열사묘의 재건설사업을 결의한 직후에 올해 전승절 60주년에 맞춰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밀어 붙였다고 한다. 검색대에 도착하니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행사는 북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1호 행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 개장식 행사장에 입장하는 김정은 제1위원장과 수뇌부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사열을 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조선 인민군 육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노동적위군 명예 위병대들의 분열행진을
받고 있는 김정은 제1위원장. [사진제공-최재영]

▲ 행사를 마치고 수뇌부들과 군부 고위급들이 묘역을 둘러보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검색대에서 삼엄한 검문을 받다

검색대로 접근하니 전승절 행사를 취재하러 입국한 AP통신, CNN, BBC등 전 세계 내외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내가 통과할 입구는 기자단들만 통과할 특별 검색대였다. 내 차례가 되자 초청장을 보여주고 신분 확인 절차를 밟은 후 무사히 1차 코스를 통과하자 2차 검색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몸 수색과 함께 촬영 장비와 소지품을 꺼내서 일일이 분해하듯 검사를 받아야 했고 최신 전자감지봉 등으로 몸을 스캔 받고서야 마침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앞선 군중들의 행렬을 따라 등이 떠밀리듯 입장하여 행사장 중앙 근처까지 진입을 하니 초청받은 외국 인사들과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했던 북한의 인민군 참전노병들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에서 방문한 참전 노병들로 발 디딜 틈조차도 없었다.

군중들 사이사이에는 붉은색 간판에 흰색글씨로 ‘위대한 김정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한 영웅전사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1950년대의 투쟁정신으로 살며 일하자!’를 비롯한 각종 구호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국영방송인 조선중앙TV의 현장중계용 카메라들과 방송용 대형 크레인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나는 맨 앞쪽에 있는 내외신 기자단 위치를 찾아가 두리번거리며 그 곳에서도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제일 먼저 나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멋진 제복을 입고 정렬하고 있는 조선인민군 군악대였다. 긴장하며 도열해 있는 군악대 대열을 배경으로 나는 사진을 찍기도 하며 나름대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참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서로 앞 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는 200여명의 내외신 취재기자들 틈에 끼어서 중앙 무대를 바라보니 이미 최고 수뇌부들이 도열해 있었고 분위기상 최고지도자의 등장을 곧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 599기가 안장된 묘역은 저마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고 새롭게 선보인 비석들
은 산뜻하고 격조 있어 보였다. [사진제공-최재영]

▲ 모든 비석은 흑요석 돌사진과 황금빛 훈장을 장식한 특수한 비석들이었다. [사진제공-최재영]

▲ 중앙 추모탑을 지키는 인민군 근위병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하다

호기심 많은 소년같이 종횡무진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이 행사를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인 듯한 고위관리가 기자석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다른 진행자들을 향하여 “기자단 위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배치해서는 행사를 시작할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질책했다. 취재열기가 너무 도를 지나쳐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통제 불능의 외신기자들 때문에 도저히 국가행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결국 진행팀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취재단의 위치를 적절하게 배치하며 질서를 잡아준 후에야 장내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해외 취재단들이 이처럼 중앙무대와 가까운 근접거리에서 취재를 허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윽고 김정은 제1위원장이 군중들의 박수갈채와 환호 속에 입장했다. 내가 서있는 지근거리에서 오른손 주먹을 입가에 대며 천천히 입장하자 그 뒤를 박봉주 내각총리와 김기남 비서를 비롯한 최고 수뇌부들이 뒤따랐고 김 제1위원장이 지정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서자 장내 박수소리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곧바로 북한의 애국가가 연주되며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김기남 비서가 준공식을 알린 후 인민군열사들을 추모하며 묵상하는 순서를 선포하자 김 제1위원장과 최고수뇌부들을 비롯한 전체 참석 군중들은 진지하고 엄숙하게 묵념을 올렸다. 이어 군악대의 꽃바구니 진정곡이 울리는 가운데 김정은 제1위원장 명의로 된 붉은 띠가 장식된 꽃바구니가 묘역 한복판에 우뚝 세워진 ‘인민군열사추모탑’ 앞에 있는 화환진정대에 바쳐졌다.

이윽고 김 제1위원장은 준공 테이프 커팅을 하기 위해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앞으로 걸어 나와 몇 개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서고 조금 더 몇 걸음을 이동한 후에 붉은 색 테이프 앞에 멈춰 섰다. 좌우에 거대하게 서 있는 석조 기념조형물 군상들 사이에 걸쳐있던 테이프를 가위로 절단하자 모든 참석자들은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일제히 함성과 박수를 치며 준공을 축하했다. 커팅을 마치자마자 김 제1위원장은 근위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더 깊이 이동하여 미리 도열하고 있던 또 다른 군악단(군악대)의 연주 속에 인민군 육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노농적위군 명예 위병대들의 분열 행진 사열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개관 예식은 엄숙하고 절제된 순서로 속전속결로 진행된 후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 무더운 날씨에도 묘역을 둘러보는 인민군 장병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을 둘러보는 유가족들과 인민군 장병들의 모습. 맨 앞은 필자와 안내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묘역을 둘러보는 유가족과 평양시민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쓰러진 병사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뇌부들. 맨 앞부터 김기남 비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경희 비서, 바로 뒤는 강석주 부총리이다. [사진제공-최재영]

흑요석 돌사진과 금빛훈장이 새겨진 559기의 특수비석들

묘역은 마치 암탉이 날개로 병아리를 품는 듯한 형세여서 매우 편안하고 아늑했으며 중앙에는 마치 중심을 잡아주듯 수십 미터 높이의 웅장한 추모탑이 세워져 있었다.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소총 끝에 장착하는 전투용 총검을 조형적인 예술로 형상화하여 제작했는데 그야말로 석조 조형 예술의 극치로 보였다. 하늘높이 솟구쳐 오른 총창과 총대에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가 휘감겨 나부끼는 형상이었다. 탑 뒤에 조성된 무덤군(묘역)은 마치 경기장 스타디움 관중석처럼 부채꼴로 조성되어 7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 구역은 모두 일률적으로 9열로 되어 있으며 각 열은 9기의 묘지가 안장됐다. 추모탑 양 옆에는 인민군 육, 해, 항공 및 반항공군, 노농적위군 군기들이 세워져 있었고 명예위병들이 절도 있게 서 있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의 친필 어록인 “조국해방전쟁에서 인민군장병들이 발휘한 영웅적 위훈과 그들이 이룩한 불멸의 업적은 우리 인민의 혁명역사에 찬란한 금문자로 영원히 기록되어있을 것이며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여질 것이다. -김일성-”라고 쓰여진 명제비가 거대한 화강암에 새겨 있었고 추모탑 앞에는󰡐영웅들의 넋󰡑이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화환진정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영웅 전사들을 추모하는 헌시비와 거대한 군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불멸의 위훈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는 제목의 헌시비는 첫 구절이 “위대한 년대를 력사에 아로새긴 인민군렬사들의 고귀한 넋이 여기에 살아 빛나고 있다. 누구든 영웅들의 값 높은 생의 대문을 삼가 열고 들어서시라...”이라고 기록한 장문의 글이 작자 미상으로 새겨져 있었다. 또한 거대한 화강석 덩어리로 만든 문주 2개가 좌우로 세워졌는데 한국(조선)전쟁 기간을 의미하여 좌측은 ‘1950’. 우측은 ‘1953’의 숫자가 거대한 크기로 부각되어 휘날리는 노동당 깃발과 인공기(공화국) 깃발과 함께 형상화됐다. 또한 추모탑을 중심으로 양 편에는 각각 두 개씩 화강암 대리석으로 거대한 군상조각들이 전사한 영령들을 상징하며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묘역 내부의 조형물들을 둘러보는 사이에 멀찌감치 바라보니 공식행사는 끝나고 김 제1위원장과 수뇌부들은 벌써 559명이 안치된 열사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며 퇴장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차분히 묘역을 돌아보는 중에 유심히 비석의 돌사진을 바라보니 신미리 애국열사릉이나 재북인사묘와는 좀더 선명해 보였고 매우 격조 있어 보였다. 해설사에게 물으니 북에서는 이 사진기법을 ‘흑요석(黑曜石, Obsidian) 사진’이라고 호칭한다고 했다. 흑요석은 원래 화산암의 일종인데 원석 특유의 검은 빛과 광택을 활용해서 돌사진으로 개발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곳은 다른 릉과 묘역들에 있는 돌사진과는 사뭇 다른 멋을 자아냈으며 이런 일을 주도하는 북측 창작 예술인들의 독창적인 창의성은 알아줘야 할 것 같았다. 비석 전면 하단 좌측에는 실제 훈장과 동일한 황금 훈장 메달을 새겨 넣어 마치 땅속에 고인이 가슴에 훈장을 단듯 보였으며 그에 따라 비석은 매우 품위 있어 보였다. 돌사진 밑에는 공화국영웅 칭호와 전사자 이름이 새겨졌고 그 밑에는 계급, 마지막 두 줄에는 생몰 연월일이 새겨져 있었으며 깃발을 형상화한 좌측 하단부에는 황금 훈장메달이 부각되어 있었다. 비석의 글씨체나 전체적인 디자인도 훌륭했지만 석공과 장인들이 쏟아 부은 정성들이 엿보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인파에 둘러싸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여성 해설사에게 다가가 그의 설명을 청취하며 질문을 주고받았다.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는 전사한 날짜 순서에 따라 렬사들이 안치되었으며 정성 다해 세운 묘비들은 추모감이 나면서도 무게가 있고 특색 있게 형상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묘 배치와 묘비의 형상 그리고 묘비의 글씨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고 단 하나의 미흡한 점도 없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사랑과 은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현재 모두 몇 분의 묘지가 모셔진 것입니까?”

“정확하게는 영웅적 위훈을 세운 559분의 조선인민군 렬사들을 모셨으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동안 건설 전 과정을 세심히 보살펴주시고 현지지도 해 주신 우리 원수님의 뜨거운 심혈과 고귀한 정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선군시대의 기념비적 창조물로 빛나는 모든 상징물 한점 한점에서 우러나오는 웅건장중한 건축미, 묘비 하나하나, 한평 한평의 잔디밭에 이르기까지 친히 도안을 그려주시고 록지 면적도 더 늘여주시면서 렬사들이 영면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셨습니다.”

한편, 최고 수뇌부들은 퇴장하는 김 제1위원장의 뒤를 따라 묘역의 가장 외곽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줄줄이 내려가고 있었는데 퇴장하는 지도부들의 환송을 위해 길목의 광장에 도열해있던 의장대 병사 중 한 명이 직사광선 때문인지 혹은 빈혈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자리에서 바닥으로 쓰러지자 몇몇 동료들이 달려 나와 나무 밑에서 간호해주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눈에 띄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김경희 비서와 수뇌부들이 잠시 멈칫하며 병사가 간호 받는 광경을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다. 최근 서방 언론에서 위독설이 나돌았던 김경희 비서는 당시 70여 일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다른 사람의 부축을 전혀 받지 않고 꼿꼿이 걷는 모습에서 병색은 전혀 없어 보였고 오히려 힘차게 걷고 있는 모습에서 여유로움까지 엿보였다.

▲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의 유해를 찾기 위해 묘역을 방문한 미국의 허드너 대령 이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인터뷰를 마치고 허드너 대령과 손을 잡고 이동하는 담당 안내원. [사진제공-최재영]

▲ 행사장에서 발생할 응급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묘역 입구에 세워진 앰브란스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적국의 수도에 다시 나타난 허드너 대령

여기저기 묘역을 둘러보다가 내 발길이 멈춘 곳은 미국에서 찾아 온 미군 노병 두 명이 기자들에게 둘러 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소였다.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60년 만에 이곳을 방문한 토마스 허드너와 80대 중반의 딕 보넬리였다. 두 사람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또 다시 노병의 모습으로 ‘적국’의 수도에 나타난 것이다. 허드너 옹은 뜨거운 태양 아래 양복 정장을 입은 상황인데도 기자들의 반복적인 질문과 인터뷰에도 짜증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으며 정장을 입은 그의 목에는 청색 줄에 누런 황금별이 달린 훈장을 걸고 있었다. 치열하게 싸웠던 적군의 무덤가에 그가 훈장을 걸고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방북한 목적은 바로 제시 브라운이라는 동료 조종사의 유해를 찾으려는 것이다.

공군 소위였던 제시는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추락했는데 이 때 허드너는 사고현장에 접근하여 비상 착륙 작전까지 감행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구조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는 전투기 조종간에 하반신이 끼어 이미 손발은 동상이 걸려 있었고 온 몸은 얼음 토막처럼 굳어 있었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싸우며 여러 시간 동안 도끼질을 하며 깔려있는 동료를 위해 구조작전을 펼쳤지만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한계에 부딪힌 그는 좋은 장비들을 준비해서 다시 구조하러 오겠다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현장을 떠났는데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직후에 구조현장을 찾아가려 했으나 전시 전황이 허락지 않아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잔잔한 미소를 짓던 제시의 표정을 영원히 뇌리에 새기며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온 몸의 뼈가 부러진 동료가 자신이 떠난 뒤 구조하러 돌아오기를 얼마나 밤새워 간절히 기다렸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이 자신에게는 평생 돌덩이 같은 부담감과 깊은 상처가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의 유해를 찾아 한을 풀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 주에 한국을 방문한 후에 다시 또 초가을에 평양을 방문하여 제시의 시신 찾는 일에 매달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와 함께 같이 방북한 동료 보넬리는 허드너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느라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번 방문을 통해 당시 인민군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 자신들이 얼마나 동료를 보고 싶어 했고 찾고 싶어 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마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태고의 슬픔처럼 진하게 아파왔다.

▲ 1983년 군복무 중 석양이 질 무렵 기관총을 들고 초소에서 경계 근무 중인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이름 모를 병사의 묘지 앞에서 주저앉은 채 통곡 후 몸을 추스리고 다시 일어난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묘지 앞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다

최고 지도부가 모두 퇴장하는 것으로 공식행사가 무사히 끝나자 행사 때문에 자세히 돌아보지 못했던 묘역을 다시 한 번 두루 둘러보기 시작했다.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은 모두가 근대사와 분단사, 전쟁사를 배경으로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조성된 거라서 무덤들을 어루만질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파왔다. 무덤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를 향해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외치는 것만 같아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깊은 감회에 젖은 나는 어느 이름 모를 병사의 묘지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 땅에서 또 다시 전쟁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리라는 굳은 맹세를 했다. 나는 비록 남녘에서 태어나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였고 군복무를 현역으로 제대했지만 진심으로 여기 잠들어있는 인민군 전물장병들의 명복을 빌었으며 그러는 도중에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남한의 육군으로 복무했던 나는 이 묘역에 잠든 이들을 ‘북한 괴뢰군’으로 불렀으며 반대로 북에서도 ‘남조선 괴뢰군’이라고 불렀던 지난 현실이 기가 막혔으며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남과 북은 상대편을 향해 서슴없이 ‘괴뢰군’이라고 비난하는 힘든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남한은 미국제 무기, 북한은 소련제 무기를 가지고 서로 같은 동족을 향해 살육전을 벌였고 서로 총질을 하며 죽고 죽였다. 이 같은 처지는 마치 혹독하고 고약한 학교 선생이 두 학생에게 서로 뺨을 때리는 벌을 주도록 해 어쩔 수 없이 두 학생은 상대를 향해 코피 터지게 주먹질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60년이 넘었는데도 당대 부모 형제의 대를 이어 3-4세 자손까지 내려오며 아직도 총부리를 겨누며 으르렁거리는 백치 같은 짓들을 도대체 언제까지 하려는지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진다. 인파들이 오가는 무덤가에서 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가슴 통증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통곡이 쏟아져 나왔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다.

북한의 전몰장병 묘역을 참관한 후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 남한은 북한을 위로하고 칭찬해야 하고, 북한도 역시 남한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상대를 서로 사랑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북한은 남한이 자주성을 회복하는 일을 도와주고 남한은 북한이 경제력을 회복하는 일을 도와준다면 높아진 분단의 장벽이 낮아지고 민족의 새로운 통일백년이 시작될 것이다. 오래 전에 남북 문인들의 방북 모임에서 북측의 여성시인이 앞에 나와 “그동안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왔지만 이제부터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껏 합시다”라며 나라 안팎의 동포들에게 피맺힌 절규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야만 나의 아버지 바람처럼 펜치로 휴전선 철조망을 자르는 날이 앞당겨질 수 있을 것 같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더 좋은 점은 받아들여 통일을 이뤄야 한다. 그것은 남북 당사자와 동포들 모두가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이행할 수 있는 일이며 큰돈이나 어마어마한 예산이 드는 일이 전혀 아니다. 바로 그런 길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남과 북의 현 지도자들이며 그런 리더십이어야 통일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학문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들이 버젓이 살아 있다. 통일이 되려면 남북 모두가 학문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방해하는 여러 법규나 올가미를 풀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유럽의 정치가 발전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해야 하며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국이 칼 마르크스의 런던 망명을 과감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가 대영박물관에서 유명한 명저 ‘자본론’을 집필하도록 배려했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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