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북한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평양과 혜산에 각각 혁명열사릉을 개장하여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평양 대성산에 위치한 혁명열사릉은 개장이후 지금까지 외부세계에 널리 공개되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혜산의 혁명열사릉은 그 위치나 영상물자료조차 외부세계에 원활히 제공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원래 평양 혁명열사릉은 당시 김일성 수상의 발기에 의해 1954년에 평양 대성산 기슭의 미천호(美川湖)라는 인공 호숫가 부근에 조성하여 첫 개장을 했었고, 양강도 혜산의 혁명열사릉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59년 6월 3일에 역시 김일성 수상의 발기에 의해 첫 개장을 했던 곳이다. 이 두 곳은 그 이후로 서너 차례의 개건공사와 수차례의 보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오늘은 그 동안 조금이나마 공개된 혜산의 혁명열사릉에 대한 자료 공개와 더불어서 필자가 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2014년 4월에 평양 혁명열사릉을 참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평양 혁명열사릉과 혜산 혁명열사릉의 관계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된 시기에 평양시 대성산 기슭 미천호 옆에 작은 규모로 조성돼 있던 최초의 혁명열사릉을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주작봉 마루 정상으로 이전하여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는 1975년 10월 13일에 재개장을 했다. 이에 앞서 착공식을 하던 시기인 1973년 8월에는 중국에서 이장해서 양강도 혜산과 평양 모란봉 자락에 묻혀 있던 간부급 항일혁명열사들의 유해들 중 일부를 대성산 주작봉 혁명열사릉으로 전격 이장했다. 주작봉에 조성되는 혁명열사릉은 그로부터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미천호, 모란봉, 혜산 3곳에서 이장한 유해들을 모체로 하여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는 1975년 10월 13일에 공식 재개장을 한 것이다. 이후 1982년 10월부터 다시 대규모 개건공사를 시작해 3년여의 공사기간을 마치고 노동당 창건 40돌을 맞는 1985년 10월 13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했다. 그 후 지금까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혁명열사릉’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은 곳은 평양시 대성산과 양강도 혜산 두 곳 뿐이며 전국 각 지방에 산재한 나머지 10곳의 일반 국립묘지들은 지역이름 뒤에 모두 ‘열사릉’으로만 불린다.

현재 두 곳으로 나뉘어진 평양과 혜산의 혁명열사릉은 서로 크게 차별화를 두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평양의 혁명열사릉이 대표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1959년에 개장한 ‘혜산혁명열사릉’은 2010년 6월에 국가에서 공식 개장한 ‘혜산열사릉’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묘역이다. 같은 연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지만 구역이 전혀 다른 곳에 조성되어있고 묘역의 격과 의미가 서로 다르다. ‘혜산열사릉’은 김덕룡, 김진규, 김성진, 리창도, 김조규 등을 포함해 현재 84명이 안장돼 있으며 ‘평양혁명열사릉’은 95명이 안장돼 있다.

 ▲ 양강도 혜산혁명열사릉 묘역 내부에 세워진 중앙 추모비와 묘역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위성에서 본 혜산혁명열사릉이 숲속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그 위 cemetery라고 표시된 부분은 2010년에 조성된 ‘혜산열사릉’이다.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위성에서 본 혜산시 전경. 혜산혁명열사릉 좌측 흰 부분이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이고 그 옆이 혜산공설운동장이다. [사진제공-최재영]

95기가 안장된 ‘혜산혁명열사릉’

혜산 혁명열사릉은 압록강 상류의 중국 국경지대인 장백현에서 혜산시를 잇는 다리를 건너면 머지않아 바로 나온다. 백두산도 양강도에 속해 있으며 혜산시는 행정구역상으로 도청소재지이자 도내 유일한 시이다. 혜산 혁명열사릉의 주변에는 10분 거리에 위치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공원과 혜산 인민공설운동장이 자리 잡고 있다. 혜산에서 백두산 쪽으로 21km 지점에 있는 보천보군에서 김일성부대가 일본경찰서를 습격한 보천보전적지도 나온다. 혜산시내에 속해 있지만 약간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혁명열사릉은 천혜의 자연 조건을 구비한 울창한 연봉산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구글맵(google map)과 위키맵피아(wikimapia)의 인공위성 서비스를 통해 확인한 결과 혜산혁명열사릉과 혜산열사릉이 같은 연봉산 자락에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조성돼 있었다.

혜산혁명열사릉은 1959년 6월 3일에 역사적인 첫 개장을 했다. 그 후 개장한 지 6년이 지난 1963년 초에 다시 대폭적인 개건공사를 시작했으며 공사가 진행 중이던 63년 8월 8일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동반 현지시찰을 했으며 이때 김 주석의 지시에 의해 묘역의 명칭을 ‘혜산혁명렬사묘’에서 ‘혜산혁명렬사릉’으로 변경을 하였고 2년여의 공사 끝에 1965년 6월 4일에 재개장을 하며 추모탑 제막식을 가졌다. 릉의 면적은 6,760㎡이며 묘역 정 중앙에는 높이가 3.6m,너비가 1.2m,두께가 0.6m가 되는 화강석으로 된 중앙 추모기념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석의 뒷면에는 “성스러운 항일투쟁에 한생을 바친 당신들의 불같은 애국의 넋은 조선인민의 심장 속에 살아 불멸하리라”라는 추모의 글이 세로로 쓰여 있다.아담하고 아늑한 지형에 위치한 묘역은 정면에 숲이 조성돼 있고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조경을 지니고 있다.

1973년 8월에 평양 대성산 주작봉 혁명열사릉으로 이장되고 남아 있는 묘기는 현재 약 95기에 이르며 그 주인공들은 대부분 항일투쟁시기에 김일성 주석과 연대한 조선인민혁명군에 소속된 혁명투사들과 백두산 기슭과 조선과 중국의 국경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국광복회와 그 관련 하부조직에 소속되어 싸웠던 반일애국투사들 위주로 안장되어 있다.2002년 9월이 되자 혜산혁명렬사릉에는 새로운 화강석 비석이 세워졌는데 그해 4월에 시작한 이 개건공사는 비석 받침돌을 가공하거나 돌사진을 붙이는 작업, 계단을 보수하고 바닥에 판석을 까는 공사와 철대문을 설치하는 등의 확장공사를 5개월 남짓한 단기간에 모두 끝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국립묘지들에서 한참 유행하던 돌사진 기법을 이곳에서도 시행했으며 돌사진 부각 작업을 비롯한 모든 확장 공사는 양강도의 혁명전적지 보존사업소와 인민보안성에서 직접 주관했다. 해마다 추석을 맞이하면 자신들의 조상묘를 성묘하기 전후에 반드시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인민들은 주로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배하고, 지방에 거주하는 인민들은 각 시도에 소재하고 있는 일반 열사릉과 열사묘를 찾는다.

▲ 대성산 6개 봉우리 중에 하나인 소문봉 정상의 소문봉 성루에서. [사진제공-최재영]

 

▲ 대성산성 소문봉 정상에 세워진 안내 기념비. [사진제공-최재영]

 

▲ 공중에서 본 대성산 소문봉 성벽과 성루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비 내리는 주말에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다

나는 평양에 소재한 고구려 유적들을 틈틈이 확인하기 위해 방북시마다 평양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대성산 일대를 조금씩 둘러본다. 특히 혁명열사릉이 위치한 높이 270m의 대성산은 국사봉, 소문봉, 장수봉, 을지봉, 북장대, 주작봉 등 6개 산봉우리의 능선이 서로 이어져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었으며 대성산 자락은 금수산 태양궁전 건물 옆을 끼고 도는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의 발원지가 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 봉우리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북한 최대 규모인 대성산 유원지 구내를 통과하여 대성산 자락을 둘러보면 놀이공원인 유원지에는 청룡열차를 비롯한 각종 어린이 놀이시설과 유희시설들이 제법 이용할 만했으며 많은 평양시민들이 찾는 중앙동물원, 중앙식물원 등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고, 동천호와 미천호 등의 인공호수와 작은 규모의 발전소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현재의 주작봉 마루에 조성되기 전에 최초로 조성됐던 평양 혁명열사릉은 미천호 부근에 아직도 그 묘역 터 자리가 남아 있었다. 도보 산행이나 차량을 이용해 산등성으로 올라가면 고구려시대의 역사유적으로서 3세기에 축조한 길이 30리에 이르는 대성산성과 20개의 성문터, 안학궁터, 고분군 등 고구려 때의 역사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비가 제법 부슬부슬 내리는 주말 낮, 나와 일행은 북한에서는 혁명의 성산이라고 일컫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위치한 혁명열사릉을 방문하기 위해 시내를 출발했다. 그곳은 김일성 주석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며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을 하다 전사한 140여명의 간부급 열사들이 안장된 북한의 1급 중앙국립 묘역이다. 오늘의 참관 여정은 나의 담당 안내원을 배제한 채 김OO 국장과 김OO 참사가 바쁜 중에도 나를 동행해주었다. 두 명 모두 김일성종합대 출신의 뛰어난 수재들이다. 특히 베테랑 여성 해설사가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참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총동원하여 차안에서부터 참관을 마칠 때까지 세밀하게 안내해주어 고마움을 더해 주었다.

숲속을 지나던 우리 일행 차량이 열사릉 가까이 당도하니 둥근 기둥 위에 우리나라 고유의 멋과 이국적인 멋을 동시에 풍기는 높이 19m, 너비 56.4m의 웅장한 규모의 릉대문이 나타났다. 정문은 중심건물과 좌우 보조 건물로 되어있고 중심 지붕과 좌우 날개 지붕들 사이의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지붕은 청기와로 되어 마치 서울 세종로의 청와대 본관 건물의 축소판 같이 보이기도 했다. 정문안으로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고, 양쪽은 보행자가 이용할 수 있는 인도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정문에는 ‘혁명렬사릉’ 이라는 멋드러진 현판글씨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김정일국방 위원장의 직접 쓴 친필휘호라고 한다.

▲ 인공위성 맵으로 본 ‘평양혁명열사릉’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 인공위성 맵으로 본 ‘평양혁명열사릉’ 묘역의 모습, 묘지의 숫자와 배치가 선명하고 정확하게 보인다. [사진제공-최재영]

 

▲ 비가 내리는 혁명열사릉 대문(정문)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 휘호로 제작된 혁명열사릉 대문 현판.[사진제공-최재영]
▲ 400개 계단 중에 348개의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석탑으로 된 기념 문주. [사진제공-최재영]


다양한 시설물과 조형물의 예술성에 놀라다

대문을 통과하니 입구부터 보이는 거대한 조형물들과 배경들의 장엄한 모습에 압도당할 것 같았으며 만든 이들이 엄청나게 공을 들인 흔적들이 역력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총부지 면적은 35만㎡이며 그중에 가장 긴 길이는 1,400m라고 한다. 차량에서 내려 계단 아래 서서 위를 올려다보니 멀리 까마득하게 400개나 된다는 돌계단이 경사면을 따라 축조되어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운동하던 중 무릎을 크게 다친 지 얼마 안 돼 도저히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서 차량을 타고 묘역의 가장 상단 핵심 내부로 연결되는 특별코스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그 대신 미안한 마음에 참관을 모두 마치고 나갈 때는 다시 정문을 향해 천천히 도보로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정문 앞 주차장에서 묘역을 향해 348개 계단을 올라서면 높이 8.2m, 너비 3.7m의 기념문주가 나오는데 4각형의 석탑이 계단 양쪽에 서 있고 각 면에는 오각별이 새겨져 있었다. 문주를 지나 다시 52개의 계단을 더 오르면 좌우에 거대한 추모 군상이 보이며 드디어 열사릉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된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마당의 양쪽에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조각군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좌편에는 방어편, 우측에는 진군편의 제목으로 구분됐으며 모두 각각 11상이 형상화되었으며 군상의 규모는 길이 18m, 높이 5.5m의 화강석으로 제작된 예술작품이었다. 뒷면에는 항일투사들이 나무에 새겨놓은 글발과 백두산 밀림을 형상화했으며 진군편과 방어편 모두 항일투쟁 장면을 3가지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조각군상 부근에는 소위 교양마당이 조성되어 있어 단체로 참관한 일행들을 모아놓고 간이 교육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왼편에는 “항일혁명렬사들의 숭고한 혁명정신은 우리 당과 인민들의 심장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1985.10.10” 라는 김일성 주석의 친필비가 길이 18m, 높이 4.2m, 무게 470t의 흰색 화강석 통돌로 세워져 있고 반대편에도 역시 거대한 화강암 통돌로 된 헌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헌시비에는 “떠나간 나이와 고장은 저마다 달랐어도 돌아와 안긴 품은 하나인데 대성산 혁명열사릉, 항일전에서 쓰러진 열사들, 여기 고이 잠들어 있나니 사람들이여 삼가 옷깃을 여미라”라는 문구가 눈에 띄게 돋보였다. 청동으로 제작된 추모군상은 화환진정대를 향하여 교양마당의 좌우측에 각각 적절히 배치되었는데 각각 길이 9.5m, 높이 4.5m이며 5인의 군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묘역에 도착하는 개인과 단체 참배객들이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헌화하는 화환진정대가 혁명열사릉의 전체 전경 중에 가장 눈에 띄었으며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화환진정대는 네모반듯한 검은색 돌 위에 ‘공화국영웅메달’을 형상화하여 부각돼 있었는데 메달은 무려 길이가 4.3m, 높이가 2.8m나 되는 동판에 만들어졌고 아래에는 목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화환진정대 바로 앞에는 화환과 꽃다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단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진정대 위쪽에는 드디어 고인들을 안장한 실제 묘지 구역이 나온다. 각 묘지마다 청동으로 제작된 흉상들이 들어서 있으며 이는 흉상 밑에는 비석대를, 비석대 밑에는 유해를 안치한 안장법이었다. 묘기위에 우뚝 세워진 반신상들은 모두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맨 아랫단(7단)에서부터 윗단(1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희생된 연대순과 기여도, 지명도 등에 따라 적절하게 배열되어 있는 듯했으나 어떤 특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였으며 안장된 항일 혁명열사들의 동상들은 멀리 평양시 중심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특히 김정숙 여사의 동상은 묘역의 가장 최상단의 중심축을 이루는 핵심위치에 있었으며 최상단에는 핵심 15인 열사들의 묘지가 일렬로 늘어서 있어 전체를 아우르는 느낌을 주었으며 동상이 세워진 제대(비대) 앞면에는 일괄적으로 고인의 성명과 생년월일, 무장투쟁 시기와 사망 연월일, 간단한 경력 등이 새겨져 있었다.

▲ 참배를 위해서 지방 군부대에서 단체로 올라왔다는 초급 인민군 여군 장교들이 헌화
를 위해 꽃송이를 구입한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단체로 참관한 평양시내 대학생들이 화환진정대로 가기 위해 헌시비 옆으로 지나가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동판으로 공화국영웅메달을 형상화하여 제작된 화환진정대와 묘역 전경. [사진제공-최재영]


모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도하에 추진되다

나는 50대 초반의 김영옥 해설사를 향해 이곳이 조성된 유래를 자세히 물었다.

“원래 이곳 대성산 혁명열사릉이 조성되게 된 직접적인 사연은 우리 수령님께서 공화국창건 20돌을 맞으시며 젊은 시절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김책과 안길 동지를 비롯해 강건, 류경수, 조정철, 김경석, 최춘국 등 렬사들을 잊지 못하시어 그분들의 동상을 각자의 고향 마을과 뜻깊은 장소에 세우도록 조치하신 것에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이곳 혁명열사릉이 조성된 지 4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동안 인민군들과 각 계층 근로자들, 청소년학생들이 무려 450만명이나 이곳을 참관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해외동포들과 외국인들도 25만명이 포함됐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북한에 정부가 수립된 후 이북에는 온통 김일성 주석의 동상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북한 땅에 김 주석 동료들의 동상들도 설치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아무튼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1973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도하에 대성산 미천호 옆에 있던 혁명열사릉을 주작봉으로 이전하는 개건공사가 착수됐다고 한다.

“그 후 수령님께서는 어느 깊은 겨울 밤, 김정일 동지께 전화를 거시면서 ‘함박눈이 쏟아지니 험산준령에서 싸우던 때에 공작 나갔던 전사들이 돌아오지 않아 밀영 밖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오래동안 서성거리며 그들을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고 추억의 말씀을 하셨는데 수령님의 심중을 헤아리신 김정일 동지께서 일꾼들을 부르시어 렬사릉을 다시금 잘 건설하여 수령님께서 못잊어 하시는 투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하자고 하시며 혁명렬사릉을 개건 확장할데 대하여 관계부문 일꾼들에게 지시하신 것이 시초가 된 것입니다.”

해설사에 의하면 당 창건 30돌(1975년 10월)을 맞아 주작봉 마루에 개장한 혁명열사릉에는 당시 고인들의 흉상은 설치되지 않았으며 묘지형태도 일반적인 평묘 형태였다고 한다. 동료들에 대한 김 주석의 애틋함과 그리움이 있은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1982년 10월에 개건공사 설계 도안이 나왔으며 이때부터 김 국방위원장이 모든 공사를 직접 관장하며 진두지휘하였다고 한다. 모두 6차례나 개건 공사현장에 현지 지도를 나왔으며 완공되기까지 무려 100여 차례나 직접 관여하며 지도를 했으며 당 창건 40돌을 앞두고 공사장을 직접 찾은 김 국방위원장은 묘역의 정면 핵심 뒷부분 배경 처리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중에 잔디와 작은 수목을 심어 공원녹지를 조성하려는 원안을 수정해서 붉은 깃발이 세차게 휘날리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열사들이 붉은 기폭에 고이 감싸 안겨 있는 모습으로 구상하도록 하여 현재 남아있는 길이 22.2m, 높이 11m의 붉은 화강석 깃발 형상이 바로 김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 한다.

또한 반신상(흉상)의 재질도 설계상에는 인조대리석으로 제작하기로 하였으나 김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한 몸 바친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을 인조 대리석으로 만든다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며 영구적으로 남아있는 청동재료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고인들의 반신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인물들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나서 화가들과 조각가들 앞에서 고인의 얼굴 인상착의와 표정을 구술하여 그 기억을 바탕으로 동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김 국방위원장은 1985년 7월 5일에도 공사장을 찾아 묘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인 화환진정대의 디자인도 직접 지도를 했다고 한다. 흉상이 제작되는 모습을 돌아보던 중, 몇몇 고인들의 반신상 가슴에만 영웅메달이 달린 것을 보고 작업을 하고 있던 만수대 창작사 일꾼들에게 “오중흡 동지의 반신상에는 영웅메달이 없는데 그분을 어떻게 영웅에 비길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항일혁명 투쟁시기에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제도가 있었더라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영웅칭호를 수여 받았을 것이다”라며 가장 핵심 중앙에 설치되는 화환진정대는 오각별 대신에 공화국영웅메달을 형상화해 부각하라는 지시도 내렸다고 한다. 김 국방위원장은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1985년 10월 4일에 정문부터 시작해서 묘역 내부의 모든 건축물들과 형상물들을 일일이 모두 돌아보고 “이곳은 묘지이지만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다”고 하면서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 1985년 10월 3일, 혁명열사릉 개건확장 공사를 현지 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 연형묵 총리가 메모하는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최재영]
▲ 1985년 10월 4일, 김일성 주석과 함께 동반 현지 지도를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종옥 부주석이 수행한 모습이 보인다.[사진제공-최재영]
▲ 묘역의 가장 최상단에 위치한 ‘핵심 15열사 묘지’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가장 정중앙(좌에서 8번째, 우에서 8번째)이 김정숙 여사의 묘지다. [사진제공-최재영]
▲ 안장자들을 돌아보다 박영순 열사 묘지 앞에선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으로 전투중 경성현 청풍령에서 전사한 허형식 열사 묘지 앞에선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필자와 동행한 해외동포 원호위원회의 김OO국장. [사진제공-최재영]


‘핵심 15열사 묘지’와 전체 묘지의 배치에 대하여

묘역의 가장 앞부분 정중앙에는 제단이나 제대가 전혀 없다. 다만 중앙 무대 배경처럼 보이는 붉은 기폭과 햇살을 형상화한 핵심부를 중심축으로 ‘핵심 15열사 묘지’가 자로 잰 듯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물론 15열사 묘지는 다른 일반 묘지들과 크기와 모양이 차별화되지 않고 동일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묘지를 배치한 기준을 보면 묘역을 한가운데로 나눈 중앙 계단 통로를 기점으로 좌우로 구분되었으며 맨 위 1단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모두 7단까지 조성되어 있다.

‘핵심 15열사 묘지’는 마치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듯 정밀한 간격으로 줄을 맞춰 일렬로 늘어서 배치되었으며 바닥 판석은 붉은 대리석이 깔려 있는데 유리바닥처럼 깨끗하고 윤택이 나서 마치 유리위에 있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안장자들을 살펴보면 가장 맨 왼쪽부터 림춘추, 최현(부인 김철호 합장), 최용건, 김경석, 류경수, 안길, 김책, 김정숙(김정일 위원장의 생모),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 오진우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항일 열사들이 안장돼 있었고 이 15기의 묘지 중에서 참배객들이나 참관자들의 꽃다발과 화환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은 가장 핵심 중앙에 위치한 김정숙의 묘지였다.

나머지 다른 묘지들은 모두 7단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제1단은 14기(우측에 8기, 좌측에 6기)가 안치되어 있고, 제2단-6단은 각 열마다 18기(우측에 9기, 좌측에 9기)가 안치되어 모두 90기의 유해가 안장돼 있고, 마지막 7단은 16기(우측에 8기, 좌측에 8기)가 안장되어, 1-7단까지 모두 120기가 안장됐다. 여기에 핵심 15인 열사묘기를 포함하면 현재 135기의 항일혁명열사 유해가 안장된 것이며 이 135기 중에는 최현(부인 김철호 합장), 리봉수(부인 김명숙 합장), 전창철(부인 안정숙 합장) 등 6쌍의 부부가 합장을 했는데 부인들까지 합치면 모두 141명이 현재 안장돼 있는 상태이다. 김일성 주석 사후에 안장된 이들을 살펴보면 95년 2월에 타계한 오진우 원수(인민무력부장), 95년 타계한 김봉률 차수(인민무력부 부부장), 97년 2월에 타계한 최광 원수(인민무력부장) 등이 있으며 아직 생존해 있는 안장 가능 대상자들 중에는 100세가 다된 김일성 주석의 친동생인 김영주 최고인민회의 명예 상임위부위원장과 이을설 원수 등이 있으며, 혁명 1세대 생존자는 모두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묘역의 가장 하단에서 정면을 바라 볼 때 묘역 전체가 부채를 펼친 듯한 형상에 묘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안장 대상자가 점점 더 늘어날 경우에는 각 단의 좌우 열에 하나씩 추가되는 방식으로 안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현재는 좌우측 각 열마다 9기를 안치했지만 안장자가 늘어날 경우 10기, 11기로 확대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 안장을 기다리는 혁명 1세대 인물들은 극소수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확대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동안의 특이했던 안장 전례를 보면 유해들이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왔다 갔다 했던 경우가 있었고 아예 다른 곳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리두익, 리항만, 허형식, 리동광, 리홍광, 지병학, 림춘추, 전문섭 열사 등 8명의 유해는 원래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던 중에 안장자 심사 과정에서 다시 대성산 혁명열사릉으로 이장된 케이스에 속한다. 반대로 이현상 열사는 열사증 1번을 부여받고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상태에서 신미리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된 사례에 속하는데 이 같은 사례들은 앞으로도 가끔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84년에 운명한 김만금 열사는 이곳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사후 1997년에 발생한 불미스런 사건에서 그가 생존시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입고 그의 유해가 다시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겨져 권력의 무상함과 혁명가의 투명한 삶에 대해 일깨워주었다. 또한 묘지 배열에 안장된 인물들을 확인해 본 결과 기존 남한 사회의 언론이나 학계에서 알려진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오류가 많았으며 최근 5년 무렵에 묘지 배열이 대폭 수정된 듯 했다.

▲ 묘역 상단 중앙에 위치한 김정숙 묘지에서 바라본 금수산 태양궁전의 모습(멀리 커다란 흰색 건물이 태양궁전). [사진제공-최재영]
▲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시기에 찍은 군복 입은 부부 사진.
[사진제공-최재영]

김정숙 열사의 묘지 앞에서 주석궁을 바라보니

대성산 주작봉에 혁명열사릉이 위치하게 된 데에는 이곳의 역사적 배경도 한몫 했으리라 추측된다. 사진에서 보듯이 주작봉 마루는 평양 시가지가 한 눈에 모두 들어오는 곳으로서 가장 중앙 위치에 있는 김정숙의 묘지 위치와 주석궁 집무실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풍수지리설을 떠나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 듯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주작봉 마루에 청동 반신상이 생긴 이후 1985년 12월 31일 부터 주석궁 집무실에 있는 포대경으로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자주 바라보며 회상에 잠기기 시작해서 틈나는 대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김 주석은 때로는 슬픔에 잠긴 어조로 “혁명 전우들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열사릉을 바라본다. 오늘도 열사릉을 바라보니 그들이 살아있을 때 더 위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서 김정숙은 김일성이 자신의 남편이지만 수령의 혁명 전사로서 죽기까지 충성했다고 한다. 담당 해설사는 “우리 수령님께서는 너무도 애석하게 일찍 떠나간 전사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면 집무실 창가에서 주작봉 마루에 계시는 김정숙 동지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깊은 추억에 잠기셨습니다”라며 김 주석이 부부의 사별을 매우 애틋하게 생각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듯 결국 북한 정부는 김일성 주석이 운명한 직후 침실에서 발견한 유품 두 개를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는 금고 안에 들어있던 항일혁명의 동지 김책의 사진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향해 창문가에 설치되었던 포대경(망원경)이었는데 북한은 이 사실을 두고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동지애’라며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즉 금고 안에는 돈다발 대신에 천만금보다 귀한 동지애가 들어 있었고, 포대경으로는 동지들을 마지막까지 보살폈다는 감동적인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새해가 돌아오면 측근들에게 포대경으로 혁명열사릉의 흉상들을 자주 바라보며 “내 소원은 죽은 다음 혁명열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는 것이다. 김정일 당 조직비서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내게 약속했다”며 주변을 향해 나지막이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개 전임자가 사용하던 집무실은 후임자가 들어서면 모두 치워지고 새롭게 자신의 집무실을 꾸미는 것이 동서고금의 전례인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대 수령이 사용하던 그 곳을 원형대로 보존하여 기념하는 장소로 남겨두고자 했으며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된 주석궁을 수령의 유해를 안장하는 묘역으로 개건했다.

▲ 김정숙 묘지에서 평양 시내를 내려다 보는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묘지 배치와 안장자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는 필자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평양 혁명열사릉에 대한 왜곡된 자료들을 확인하다

나는 평양혁명열사릉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의 공신력 있는 매체들과 연구 자료를 미리 확인하고 방북했다. 남한의 자료들 대부분은 “평양 혁명열사릉에 가면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정숙과 삼촌 김형권, 동생 김철주 등 김 주석의 일가족은 왕릉처럼 특별묘역으로 꾸며져 있고 특히 김정숙 묘지는 최고의 명당자리에 거대한 왕릉처럼 축조돼 있다”고 언급돼있었다. 이런 자료들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나는 대성산 열사릉에 도착하여 그 사실을 직접 확인했으나 모두가 사실무근이었다.

김정숙의 묘지는 일렬로 늘어선 다른 일반 14인의 묘지와 함께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묘지와 반신상의 크기와 형태도 다른 모든 140명의 안장자들과 공평하게 동일했다. 삼촌 김형권의 묘지는 오히려 다른 일반묘지들과 함께 하단에 배치되어 있었고 동생 김철주의 묘지도 다른 일반 묘지들 틈에 끼워 안치됐을 뿐이다. 남한에 알려진 대로 가족군을 이뤄 화려하게 특별묘역으로 조성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의 자료, 인터넷 정보 등에는 악의적이고 배타적인 의도로 묘지정보를 왜곡했던 것이다.

미국의 35대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크기의 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얼마 전에 타계한 남한의 채명신 장군은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는 특권을 스스로 마다하고 일반 사병묘역에 자원하여 묻혔다. 이와 같은 묘지의 평등은 병사들의 전투의지와 성과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성산 혁명열사릉에는 김일성 주석의 부인이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친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숙의 묘지는 다른 모든 일반 묘지들과 전혀 차별화 되지 않았다. 다만 일렬로 늘어선 핵심 15인 열사들의 정 중앙(좌에서 8번째, 우에서 8번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뿐이며 오히려 이름 없는 어느 항일빨치산 여성 대원인 최희숙 열사와 나란히 같은 라인에 안장되어 있을 뿐이다. 최희숙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자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일제가 끝내 두 눈을 빼내고 가슴까지 도려냈어도 끝가지 굴복하지 않고 “나는 지금 두 눈은 없으나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삼천만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기뻐하는 그날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숨을 거둔 인물이다.

동상들의 군상을 보며 청계천 전태일의 동상이 오버랩되다

이곳에 잠든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 최악의 시기에 우리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묘역에 당도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띈 고인들의 구릿빛 동상을 보는 순간, 서울 청계천 다리에 세워진 전태일 열사의 반신상이 떠올랐다. 내가 반신상의 전태일을 추억하고 그가 그렸던 꿈과 희망을 한시도 놓지 않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현실 세상에 펼쳐보려는 생각의 끈을 놓치 않았던 것처럼 내가 이곳의 열사들을 기리는 것도 마찬가지 염원에서 나온 현상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여기 안장된 항일투사들의 죽음은 그 형식과 의미는 다르지만 그들 모두의 헌신과 투쟁사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고난 받는 민중을 위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던지거나 불사르며 죽음의 길을 자원했다는 것 때문이리라.

북녘 땅에는 이곳에 안장된 고인들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인민정권이 세워졌고 그것에 기초해 가난하고 천대받던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주인 되는 주권적 원천을 제공하고자 혁명적 권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이 묘역을 만들어 열사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애국심과 의리를 되새기고 민족의 미래에 모범을 삼기 위해 피땀 흘려 조성된 묘역이다. 민중의 권력은 무엇을 이용한다고 세워지는 게 아니며 국민이나 인민의 마음을 얻을 때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왜곡된 역사 때문에 신음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곳에서는 환영받고 인정받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이 북한 땅에 소재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평가절하하거나 적대심을 품고 비판하는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우리 근대사의 진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며 어이없는 모순적 행동들이다.

북한의 집권자들이 정권유지를 위해 열사릉들을 이용한다고 말하지만 이곳 북한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그냥 높여주는 사회가 아니다. 이곳 혁명열사릉 한 곳만 보더라도 이곳은 북한이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너무도 명확히 알려주는 증명서와 같다. 항일 무장투쟁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이들도 자세히 알고 보면 우리와 같은 노동자, 농민 출신의 민중들이었다. 그들을 기린다는데 시비를 걸거나 참배금지 장소로 지정하여 압제하는 것이야말로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지는 항일투사들

이곳을 참관하며 못내 아쉬운 것은 우리 민족, 남과 북 모두가 반드시 기억하고 챙겨야 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항일투사들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며 남북한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것 때문에 중국 공산당 산하에서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을 했던 무장투사나 빨치산들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계열에서 싸운 빨치산 투사들 위주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가득 메운 망자들은 대부분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까지 만주지역에서 김일성 주석과 활동했던 투사들, 1930년대 중반 이후 1945년 해방되기 직전까지 연해주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소련군 제88여단으로 불림) 소속에서 전투 중에 사망한 항일 투사들이 대부분이며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인들이 다시 자체적으로 ‘조선공작단’을 결성하여 전투 중에 전사한 이들의 유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수백만 명이 희생된 내전을 겪다보니 조선인 빨치산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어 수천 명이 넘는 조선인 항일 빨치산들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연변열사릉, 장춘열사릉, 길림열사릉은 물론 중국 각지에 흩어져 모셔져 있는 조선족 항일 열사들과 무명 열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남과 북은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무원을 통해 자국의 항일애국자들과 투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보상하기 위해 2011년에 ‘렬사표창조례’를 통과시키고 국가의 해당 규정에 따라 열사들에 대한 보상과 함께 열사릉과 기념시설들까지 법적보호를 받도록 했다. 중국에는 혁명전쟁 과정과 그 이후 무려 2,000만명의 열사들이 희생됐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자기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으며 현재까지 조사를 통하여 각급 정부가 작성한 열사 명단에 등록된 사람은 아직도 180만명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남과 북도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국가에 흩어져 있는 항일열사들과 투사들이 확인된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발굴하고 찾아내어 국립묘지로 모셔 와서 안장하도록 하고 그에 걸맞는 보상과 추모사업을 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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